•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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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삼국유사』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선덕여왕 때 일이다.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구리는 겨울에 동면한다. 그런데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우는 거예요. 겨울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무슨 민란이 일어날 징조다’, ‘염병이 돌지도 모른다’, ‘다음 해에 태풍이 올 징조다’ 등으로 소문이 퍼져, 선덕여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여왕은 이것이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를 보고하라 하였다. 그랬더니 바로 ‘여근곡(女根谷)’에서 들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여왕은 대신 회의를 열고 결정을 내렸다. “이는 백제 군사가 그곳에 숨어 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러고는 두 각간으로 하여금 각각 오백 명과 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는 여근곡을 포위해서 백제 군사를 물리치라는 어명을 내렸다. 각간들이 여왕의 말대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 보니, 과연 여왕의 말대로 백제 군사들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포위해서 백제군을 섬멸하고 돌아와서 어떻게 여왕이 그곳에 백제군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를 두 각간이 물었다. 그러자 여왕이 하는 말, “여근곡(女根谷)은 그 지명을 풀이하면 여자 인체의 뿌리가 되는 계곡이라는 얘긴데, 그런 곳에 남자놈들이 들어왔으니 별 수 있겠냐?”는 거였다. 대신들이 여왕의 진한 농담에 웃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에만 속하는 야사(野史)것일까. 분단 현실도 이러한 지혜로 풀어 봤으면 좋겠다.
조선조에 광해군이 명·청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고나서 바로 청나라에 투항하게 하여 멋진 외교 전략을 펼친 적이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때가 바로 이때이다.
인간 심리에 카인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이 야훼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동생을 죽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형제 등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질투심이 있다. 이를 선의의 경쟁으로 유도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다. 북한이 더 이상 핵무기를 통해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필자는 <탈경계의 시학>(시문학사, 2015)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탈경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제 시대는 융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탈장르로 장르간에 경계도 없어졌다. 사물 인터넷 시대에는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 존재와 존재 간에 탈경계가 요구된다. 경계를 넘어서려면 경계의 안팎에 있는 여러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여러 가지 경계가 횡행하고 있다.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간에 갈등이 있고, 신자본주의가 부자와 빈자간에 새로운 경계를 그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경계를 푸는 해법은 사물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포월적 시선으로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기독 계통의 신문들에서 독자들이 식상해 하는 것도 집단들간에 너무 경계를 지으려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인 말씀에서 해법을 찾기보다는 말씀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으로 갈등을 빚는다든가, 하나님의 의나 사랑보다는 율법에 치우쳐 서로 갈라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해결하셨을까를 하나님의 편에서 해석하면 화해나 조화로 나아갈 수도 있다.
교회에서도 여러 기관이나 사람 사이에 경계가 없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달란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하면서 말씀 보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신앙 생활의 멋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 13: 14,15) 그렇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주님이 함께 하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교회를 다니지 아니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선배 교사의 권유로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한동안 교회 다니는 생활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서먹서먹한 데다가, 주님의 동행하심이 실감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나에게 즐거움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할 것을 권하셨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나누는 일을 주 안에서 자유롭게 즐기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찬양도 감정을 넣어 멋있게 하고, 기도도 작가로서의 달란트를 살려 멋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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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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