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본고는 지난 1월 11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1월 월례회에서 이덕주 교수가 발제한 ‘“허물어라, 세우리라”-한국교회 개혁의 과제와 전망’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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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성장이 멈추고, 젊은이들이 떠나가는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잇단 실수와 추문으로 목회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은 있는가?”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나의 고민과 관심은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과연 한국교회는 오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이런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요즘 나의 학문적 관심과 주제가 되었다.

종교개혁 전야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다보니 주변으로부터, 특히 외국 신학자들로부터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부흥의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결과로서 부작용과 문제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나는 “압축 고도성장의 결과요 그 후유증이다.”라고 대답한다. 근현대 한국사회가 ‘압축 고도성장’(compressive rapid growth)의 경제부흥을 이룩하였듯, 한국교회도 한 세기 조금 넘는 짧은 역사에 서구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압축 경험하였다. 사도시대 기독교회가 수난과 박해의 역사로 시작되었듯이 한국교회는 복음 선교가 시작되면서부터 극심한 수난과 박해를 체험하였고 일제강점기와 전쟁 시기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박해를 견뎌낸 서방교회가 부흥과 성장, 선교의 역사를 일궈냈듯이 한국교회도 ‘선교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오늘날 인구대비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선교국가가 되었다. 그 외에 종교 재판과 교회 분열, 정통과 이단의 역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 건축, 수도원과 사회구제, 십자군 같은 공세적 전도활동과 해외선교,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과 타협 등등..... 서구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건들을 한국교회는 120년만에 체험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종교개혁’(reformation)이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뿌리 채 뒤집혀’ 체질적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 물론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에 대한 설교나 강연, 책이나 논문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았다. 문제는 말과 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주장이 아닌 실천으로, 형식적 집회가 아니라 영적 체험으로 전개되는 종교개혁 체험이 아직 없었다.

번영의 신학에서 십자가 신학으로
그렇다고 무너지는 교회의 혼돈 상황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실망만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무너지는 교회에 대하여 분노하고 질책하면서 동시에 세워질 교회에 대한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러했고 신약의 사도와 제자들이 그러했으며 기독교와 인류 역사에서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나 나타난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십자가 은총’이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우면서 내걸었던 ‘하나님의 도성’ 신학이 어거스틴의 ‘십자가 은총’에서 출발하였음은 물론이고 중세 클루니수도원 개혁운동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버나드와 안셀무스, 프란체스코의 신학과 수도생활도 십자가의 은총과 겸비, 그 실천이었다. 그리고 중세를 끝장 낸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신학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재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다 ‘십자가’가 재등장하였다. 교회의 근거이자 존재 이유인 ‘십자가’를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는 다시 세워지는 역사를 반복하였다. 부자와 권력자를 위해 물질적 풍요와 성공을 빌어주는 ‘번영의 신학’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라면 자발적 청빈과 순결, 고난과 희생을 실천하는 ‘십자가 신학’은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느 신학에 집중하고 있는가? 가진 자에게 편안한 교회인가? 가난한 자에게 희망을, 갇히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는 그런 교회인가? 한 세기 전, 처음 기독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말 그대로 ‘복음’(glad tiding)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바뀌었다. 강단의 메시지도 바뀌었다. 십자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이 차지했다. 
 결국 오늘 붕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것은 십자가 신앙에서 출발해야 한다. 쳐다보는 십자가, 걸고 다니는 십자가 말고 지고 가는 십자가를 체험하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은총에 근거하여 무너지는 교회에 대해 경고하고 세워지는 교회를 기대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시작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개혁 징조
독일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요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비텐베르크와 보름스를 다녀온 후 한국교회 현실을 다시 살펴보았다. 누가 뭐라 해도 내 눈에는 ‘종교개혁 전야’의 무너지는 교회 모습이자 현상이었다. 특히 내가 속한 감리교단이 5년 넘게 감독회장 선거 문제로 내홍을 빚으며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부끄럽고 암담할 뿐이다. 그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무너지는 교회 저 편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국교회 1백년 역사 속에 적지 않은 ‘개혁의 촛불’들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교리와 제도를 앞세우며 진리와 진실을 외면하였던 한국교회에 대하여 “아니오.” 외치다가 기득권, 교권주의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고 제도권교회 밖으로 쫓겨났다. 바로 한국교회의 후스였고 사보나롤라였으며 위클리프였고 발도였다.

한국교회 희망의 근거
그러했다. 한국교회 종교개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 후스도 있었고 위클리프도 있었다. 사보나롤라도 있었고 발도도 있었다. 이제 루터만 나오면 된다. 작은 촛불들이 모여 거대한 횃불을 만들 때다. 골방에서 드리던 은밀한 기도가 교회의 비리와 부정을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성전 문에 붙이는 망치소리로 바뀔 때다. 무너지는 교회의 굉음 대신 세워지는 교회의 망치소리가 들릴 때다. 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습관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아니오.” 할 수 있는 ‘작은 루터’들이 나올 때다.
나는 이 글을 “오늘 한국교회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질문과 고민을 안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읽고 한국교회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희망은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5백년 주기로 반복되는 ‘무너지는 교회’와 ‘세워지는 교회’의 교차 패턴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함께 무너지면서 세워지는 교회의 과도기를 맞고 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무너지는 교회를 보고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세워지는 교회에 희망을 품고 기대할 것이다. 언뜻 보면 눈앞에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과 물질적 세속화로 무너지는 교회의 실망스런 모습이 판을 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노인들만 남은 시골 작은 교회에서, 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에서, 견디기 힘든 열악한 목회와 선교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예수 진리’만 붙잡고 매일매일 공급되는 하늘의 만나로 얻은 감동과 감격으로 사역하고 있는 ‘작은 예수’ 목회자들이 있기에 그들로 인해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처음 세워질 때부터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교회였다. 가끔 사람(목회자와 교인)이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는 영원하다. 그러하기에 설혹 사람의 실수와 잘못으로 교회가 훼손되고 오염될지라도 아주 멸망시키기보다 심판하신(무너뜨린) 후 구원하시는(세우시는) 은총의 하나님인 것을 믿는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믿기에 무너지는 교회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 몫이라면 세우는 것은 주님 몫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혼돈과 공허, 무질서와 절망에 사로잡힌 오늘 한국교회의 허상을 철저하게 허물고 신령과 진정의 새로운 교회로 다시 세우시는 창조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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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한국교회 처음 사랑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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