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j-1.jpg
 필자는 1월 13일부터 18일까지 베트남을 여행하였다. 여행의 목적은 제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선교지를 돌아봄과 아울러 효과적인 선교전략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함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현대 이후의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은 프랑스에 의해 통치 되었다.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화민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비엣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5]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6]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계획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8]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26] 1986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시장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등이다. 베트남은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그 외에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신흥 종교도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혼합된 유일신 사상이며,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법이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대승 불교권인데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4월 15일이다.
베트남 주민들의 생활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인 별 소득 차가 크지 않다. 남녀 평등 사상이 확산되고, 보통 자녀 수가 많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급속한 이농 현상).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활발하고 여성 노동자의 고용을 장려하고 있다(소득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가사 노동을 부부가 분담하며 유교 전통이 드러난다(장손을 중시하고 아들에게 유산 등을 상속하는 행위). 연애 결혼이 증가 추세에 있다. 이러한 다양한 상황을 지닌 베트남 속에서 선교사역을 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한류와 박항서 축구 감독으로 인하여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한류와 한국어 교육을 통해서 접촉점을 갖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실제적으로 필자를 인도한 분도 대도시에서 한국어 어학당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또 다른 제자는 중소 도시의 어느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두 개의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젊은 베트남 속에서 한국인들에 의한 선교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질 것을 믿는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젊은 선교지 베트남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