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680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까지

교리의 확립: 초기 그리스도교 보편공의회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도 불리우는 이 그리스도교 보편공의회는 325년 니케아(Nicaea)에서 시작하여 이후 787년까지 7차에 걸쳐 개최되어 기독론과 성령론 등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확정했다. 이 시기를 니케아 시대라 한다.

제1차 325년 니케아 공의회: 삼위일체 논쟁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하여 318명의 감독들과 장로들이 두달 동안 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장로(목회자) 아리우스 간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신 아들이니 아들도 본질상 아버지와 동일하여 창조함을 받은 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는 “예수는 만물과 같이 창조함을 받은 장자임으로 영원치 못하며 그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니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한 사람이 당시 27세의 아다나시우스이다. 아다나시우스는 로고스의 성육신(Incarnation)을 논하며 “신과 인간을 결합할 수 있는 자는 피조자가 아니고 신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똑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로써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는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이 되고,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설이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동안 정통파를 괴롭혔다. 한때는 아리우스주의가 정통파보다 우세한 때도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그러면 성령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보혜사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승천 후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한 후(요 14:16) 오순절 날 온 것이 성령인데(행 1:4, 2:1-4), 이 다른 보혜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논쟁의 주제였다.

제2차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삼위일체 위격 논쟁
니케아 공의회가 있은 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소아시아 보르포부스 해협의 그리스 도시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겼다. 330년에 수도를 낙성하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ul)이라 명명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에따라 그리스도교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 교구이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그리고 동유럽이 포함되었다.
381년 5월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한 황제는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1)이다.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두달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위격이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했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사회의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

제3차 431년 에베소 공의회: 기독론의 단성론과 양성론 논쟁
니케아 회의의 결정대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예수의 인성(人性)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기독론의 단성론(단性論)과 양성론(兩性論) 논쟁이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Cyrilus)를 중심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으로 그가 인간으로 오셨으나 “신성이 우세하다”고 주장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중신한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가 신일 때는 신성이, 인간 예수일 때는 인성이 우세하다는 양동설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431년 6월 22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2)가 에베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6월 22일, 키릴파의 감독 160여명이 네스토리우스파 감독들이 회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공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파 감독 50여명이 26일, 대립공의회를 열고 키릴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교회사에서 최초로 분열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 theotokos)라고 결정됐다.
이로인해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사막으로 추방되고,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던 안디옥 학파는 에뎃사에 선교본부를 두고 동방선교에 나섰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분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와 서역을 거쳐 중국 당나라에까지 퍼진 네스토리우스 교회이다. 중국에서는 이 교회를 ‘경교’(景敎)라고 부르고, 몽골에서는 ‘에루케온’(也里可溫, 야리가온)이라 불렀다.

제4차 451년 칼케톤 공의회: 단성론 정죄
에베소 회의가 파행으로 끝나자 449년 8월 8일부터 22일까지 에베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장로이자 300명의 수사를 감독하는 동방교회의 대수도원장 유디게(Eutyches)를 따르는 150여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일성론(一性論)을 채택하고, 그리스도에게 “이성(二性)이 있다는 자는 둘로 쪼개라”라며 양성론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에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는 451년 9월에 다시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니케아에 회집한 감독들이 격앙되고 난폭한 행위를 드러내자 장소를 바꾸어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칼케톤으로 옮겨 공의회를 개최했다.
35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다. 다만 죄만 없으시다”며 “신성과 인성은 혼합됨이 없이 존립한다”고 결정하고, 단성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로인해 교회는 양성론파와 단성론파 사이에 오래동안 분열이 지속되었다.
476년에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에 남은 것은 이제 교회뿐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로마교회의 ‘교황’ 제도이다. 590년 로마교구의 대감독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1)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제5차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단성론자와의 화해 시도
칼케톤 회의 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553년 5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anus)가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공의회를 소집했다. 166명의 감독들이 참가해 한달간 진행된 이 회의는 황제가 단성론자였기 때문에 칼케톤에서 이단이 된 칼케톤 신조 반대파들과 화해를 위해 모인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양성의 본체이신 로고스”라는 애매한 말로 화해를 시도했으나, 그러나 끝내 양측은 화해하지 못하고, 칼케톤 신조를 반대하던 단성론파인 에집트의 콥틱교회(Copts), 아르메니아교회(Armenians), 시리아의 야곱교회(Jacobitrs), 레바론의 마론교회(Maronites)가 분리해 나갔다. ‘두 번째 분파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정통(正統)이라며, 교파 이름을 ‘정교회’(正敎會)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다. 안디옥 감독 세베루스(Seberus)가 단의설(單意說)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양성이 있다면, 그 의지(意志)는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논쟁이 제기된 것이다.

제6차 68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단의설 논쟁
단의설 논쟁으로 교회는 1세기가 넘겨 여론이 갈라져 있었다. 이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680년 11월 7일,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174명의 감독들이 모여 10개월 간 가진 이 회의는 “그리스도는 두 의지(意志)가 있으나 서로 반대됨이 없고, 인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복종한다”고 결론 짓고, 단의설파를 배격하고, 단의설을 지지한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1)와 교황 비길리우스(Bigilius)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정립과 교리 논쟁이 끝났다. 이를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라고 한다.

제7차 787년 니케아 공의회: 이콘 논쟁
그런데 교리 논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6세기 이후 교회 안에 들어온 성화(聖畵, 이콘) 숭배를 이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한 의식으로 볼 것인가를 놓고 여론이 갈라졌다. 사실 이콘은 당시 신도들 가운데 문맹자가 많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으로 복음서를 설명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us 6)는 787년 9월 24일,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365명의 감독들이 모여 10월 23일까지 개최된 이 회의는 성화 숭배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 열띤 논쟁 끝에 “인간이 이콘(성화)을 보며 공경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의 근원인 신성(神性)에 있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콘이 교회안에 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를 ‘이콘 논쟁’이라 한다.
그러나 이콘 반대파들은 814년부터 829년 사이 ‘성상 파괴운동’을 일으켜 교회 안에서 이콘을 몰아내는 과격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에서 중세 종교개혁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콘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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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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