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뉴스를 틀면 서울사랑교회가 온통 화면을 채운다. 그리고 각 교회의 오프라인 예배 ‘강행’이라는 자막들이 군데군데 보이며, 교회는 온통 코로나19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로 도배되고 있다는 분위기, 아니 이런 분위기로 몰고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대형사건 앞에서 책임을 벗어야 할 세력들이 희생양을 찾고 있는 분위기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고대 로마가 불타자 그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뒤집어 씌웠던 황제 네로, 그의 간교한 술수와 비참한 말로를 오버랩 시키면서, 네로의 어리석고도 간교한 술수와 무식한 배짱이 만들어낸 대량 기독교인 학살로 인해 어쩌면 네로가 그 화재의 책임을 벗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곳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는 없었다. 그가 백성을 만나 댓가를 치렀더라면 그래도 소망이 있었을 것이나, 그가 대신 선택한 예수는 적어도 그에게는 절망적이었다.하여간 필자는 코로나19바이러스 퇴치와 극복, 사회적 상처의 치유와 회복에 관한 한국교회의 눈물겨운 노력에 고마움을 표한다. 이렇게 심히 언론과 일부 세력이 기독교를 폄훼하고 난도질 해도 여전히 예배를 지키며, 지역 사회를 설득하고 협조하는 성숙한 모습이 자랑스럽다. 필자의 교회는 새벽기도부터 금요기도회까지 모든 예배와 집회를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하고 있다. 다만 교회내 모든 공동식사와 행사와 셀모임과 각종 프로그램을 모두 중지키셨다. 비접촉 발열 검사기를 들고 서 있는 우리 교회를 방문한 시청 공무원이 잘 하고 계시다고 격려하고 돌아갔다.
네로의 간교함과 어리석은 판단으로 저지르는 소행은 하나님께 맡기자. 누가보아도 의도를 가진 편집과 멘트로 교회와 예배를 공격하고 있는 언론을 탓할 것 없다. 때는 이때다 하고 교회로 덤벼드는 악질 안티 크리스천들의 시비도 그냥 받아 주자. 여전히 예배하는 교회를 백안으로 쳐다보는 지역 주민들에게 미안함으로 웃어주자. 우리는 예배를 멈추어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낮추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절대로 이 일을 싸울 일이 아니다.
또한 예배를 모두 폐한 교회와 모든 예배를 다 하고 있는 교회, 주일 예배만 드리고 모든 예배를 폐한 교회 등등, 그러나 이런 것으로 서로 정죄하고 싸우면 안된다. 주장은 분명히 하자. 그러나 그것은 주장이고 자신의 신앙이다. 그 주장과 신앙고백을 터잡아 싸우면 안된다. 이것은 사단이 지극히 기다리는 묘수다. 필자는 예배를 포기함의 여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시금석이라고 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필자의 주장이다. 그것으로 누구를 정죄할 생각은 없다.
우리 모두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 이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고백하는 본질적 일치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서로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고 논쟁할 일이지 정죄할 일은 아니다. 그럼과 동시에 모든 교회는 힘을 다해 상처받은 이 민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방역의 최일선에서 점염병과 싸우고 있는 의료인들을 격려하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대구 경북을 위해 기도하고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들을 도와야 한다. 특별히 이 일고 고통받고 있는 개척교회들과 미자립 교회를 돕기 위한 중대형 교회들의 노력은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어제 일산의 하늘은 눈부시도록 맑았다. 모든 나무들이 겨우내 버티고있던 회색 껍질을 벗어내려는 통에 온통 화려한 잿빛이 수목을 덮고 있었다. 생명의 약동이 피부와 숨결로 느껴질 정도로 강인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맑은 봄날이 시리도록 서러웠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봄을 채 느끼지도 못한 어느 새 내 곁에 와 있는 봄빛과 색깔을 보면서 환하게 웃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내야 한다. 우리가 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더 힘차게 모여 기도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예배를 폐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시는 분이시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외양간에서 뛰어나온 송아지처럼 뛸 것이다. 우리가 그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그는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라, 우리 곁에 계신 그 분의 긍휼에 찬 위로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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