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나 영화로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를 접해본 사람들 중에는 실망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는 것 같다. 헨리 8세를 “악한”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푸념들이다. 다시 말해본다면 “헨리 8세는 악한”이어야만 한다는 선입견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것. 최근 AI를 이용해서 살펴본 결과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는 존 플레처와의 공동 집필이었다는 통설이 옳다는 결론을 얻어냈다”면서, 만약 셰익스피어 혼자서 작품을 완성했었다면 그따위 <헨리 8세>를 내놓지는 않았으리라고 기염을 토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헨리 8세에게 악당의 이미지를 씌워 준 것은, 1933년에 개봉된 <헨리 8세의 사생활>을 감독한 알렉산더 골다와 우람한 몸짓에 안하무인격인 연기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얻어낸 찰즈 로턴 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실재했던 헨리 8세는 폭군이기는 했어도 의외로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왕이었던 것 같다. 사교적이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우람한 몸짓이 사람들의 호감을 산 것일까. 지나치게 인색했던 선왕 헨리 7세는 용모조차 빈상이었다지만, 듬직한 헨리 8세에게서는 후덕하다는 이미지가 풍겼다.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의기양양하게 부왕과 가장 가까웠던 중신 에드먼드 다도리와 리처드 엠프슨의 목을 날려버리는 위인이기도 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던 헨리 왕은 마상투창 경기나 격투기를 붙여서 민중을 즐기게 했다. 지칠 줄 몰라 하는 젊은 왕 헨리는 늘 비슷한 또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치세 전반 1509년에서 1530년 사이의 헨리는 그랬다. 만약 야심찬 추기경 우르지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더라면 악한이라는 이미지를 남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시선을 토머스 모아에게로 돌려보자. 모아보다 10세 연상친구 에라스무스는 청년 모아를 만났을 때의 인상을 문필로 남겼다. “작은 키였지만 작게 보이지 않았다...완벽하리만큼 균형이 잡힌 체격에다가 흰 살결은 창백하지 않을 정도로 투명했다...결코 붉다고는 할 수 없을 얼굴이 은근한 색을 띤 빛을 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언제나 눈빛이 자신의 따뜻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어서 영국인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장난기를 엿보이면서 때로는 웃음을 참는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모아에게서는 엄숙이나 위엄보다는 기쁨이 흘러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
주군 헨리와는 대조적으로 모아는 아예 겉치레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인품이었다는 것이 모아의 평가. “오른 쪽 어깨가 약간 치올라있어도 매무새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먹는 것이라곤 과일, 계란, 유제품뿐으로, 드물게 약간의 쇠고기나 소금에 절인 생선과 빵을 입에 대는 아주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호방한 왕이 이끌어가는 시대적 분위기, 그래서 대식을 뽐내며 들떠있는 그 시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사나이였다. 술도 즐기지 않았다. 물만 마시거나 물로 희석한 맥주나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는 정도. 그것은 분위기를 망치거나 남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하는 심정이 배어나는 몸짓 같이 보였다.
“나에 대한 폐하의 우정을 지나치게 내세우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만약에 내 목이 프랑스의 성채 하나 값이 나간다면, 내 목은 언제까지나 내 어깨 위에 얹혀있지는 않을 것을.” 모어가 헨리 8세와 왕비 사이에 벌어진 문제에 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왕의 결혼은 자기의 영역이 아니고, 권력의 한계를 이탈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이기에...
주종관계로 시작되고 끝을 맺은 두 사람의 우정은 완전히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그렇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짝은 달리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숭배라 할 순 없을지언정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고는 있었다.
매사에 근신하는 모아는 인간을 숭배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대방이 왕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그러나 모아는 죽을 때까지 헨리 왕에게 충성으로 일관했다. 은혜를 모르는 왕이 최고의 지성과 총명을 갖춘 가장 훌륭한 신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고 풍파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유감스럽다는 눈치를 보이지도 않았다. 왕의 면전에서 대드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모아는 스스로의 신념으로 일관했고, 독재하는 국왕의 권력에 대해서만 통렬하기 그지없는 비판을 가했을 뿐이었다.
enoin34@naver.com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