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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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계속 되고 삶에 대한 염려와 어려움도 지속된다. 인간 각 개인 실존의 삶도 있고 나라와 사회, 민족과 국가적인 문제들도 여전하다. 긴 세월 동안에 있었던 사건들이 한 시간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잘못일 수 있다. 트롯 열풍이 조중동을 포함해서 공중파 모두에게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BTS가 어떻고 또 나훈아의 콘서트에서 발언이 어떻고 떠든다. 가수와 대중가요와 역사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또 그러한 연예인들의 노래와 삶이 대중적 문화와 대중들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처한 역사와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냥 내버려둬라. 가수와 그들의 말과 그들의 사생활이 한반도와 코로나의 상황과 한반도의 분단과 무슨 상관성이 있는가? 그것이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문제와 어떻다는 것인가?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 살고 그들의 인기를 위한 대중의 정서를 잘 파악해야하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강 장관의 부군이 보트를 타던 미국을 가든 인간의 개인과 실존적 선택권과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단지 그러한 자유와 선택이 타자와 함께 사는 사회와 역사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선택의 문제는 자유이다. 자유를 누리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국민과 역사적 정서를 읽는 것은 사회적 감각의 문제이다. 미국의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의 코로나 확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처럼 생각이 든다. 방역을 우습게 생각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타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것이 상식일진데 자신의 위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도자로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상식의 소통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온전해서 타자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비판들은 타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성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든 것이 거리가 커졌다. 아무리 마음이 중요하다고 보더라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것보다 비 대면으로 하는 관계는 한계가 있다. 코로나는 인간의 모든 것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야 하고 거리를 둬야한다. 이제는 한 그릇을 쓰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모두가 따로따로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삶의 양극화이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이다. 코로나가 지속 되는 과정에서 중소 상공인뿐 아니라 자영업자들의 삶, 임대료를 지불하고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임대교회 역시)의 현실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티비를 켜면 아프리카의 참상들과, 난민들의 참상과 코로나의 참상들이 우리의 시야와 가슴을 친다. 우리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가? 하여 전통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리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기도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기도의 간절함을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자도 되게 하고 각종 질병들을 고쳐주고 치유하신다. 우리가 겪는 상처와 배신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까지도 치유해 주신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아들의 요구를 끊임없이 들어 주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간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신다고 믿는다. 만일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거나 살려 달라는 자가 죽으면 믿음이 없다고 믿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면 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자신들의 계약을 깬 결과로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살거나 탐욕과 배신을 하신다는 믿음이다. 삼국 시대 이후 융성한 불교가 인간의 마음을 자리하고 다스렸는데, 불교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주장하며 앞세운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유교가 등장하였고, 유교 5백년에 유교를 강조한 인간이 타락하여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되었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한반도 상륙이다. 기독교(카톨릭의 구교는 200년이 지났고, 개신교는 135년을 지나고 있다)가 들어 온지 백년과 이백년을 지나가고 있다. 기독교와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타락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타락한 것일까? 기독교가 주장하는 교리와 불교와 유교가 말하는 진리가 다르다. 아니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질적인 차이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아니던가? 신이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지만, 언제인가부터 인간이 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황금송아지라는 신, 자본주의라는 신, 권력이라는 신, 욕망과 탐욕이라는 신, 거짓말과 바벨탑이라는 신, 자신을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이라고 사기와 사이비들, 이단들의 신, 권력과 자본을 결탁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신, 인간을 순간적으로 살상하여 지배하려는 무기의 신, 자연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욕망의 깨진 독을 채우려는 신, 타인을 이용하여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신, 타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자리에서 이제는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것도 깨닫지 못하는 모르는 채 하는 망각의 신들을 만들어 낸다.

 

태초에는 창조주가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신을 만든다. 불교나 유교가 타락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가 타락한 것이 아니다. 마귀의 후예요 살인자의 후예이며, 거짓말쟁이의 후예인 인간이 타락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할 일은 단 한 가지이다. 회개하고 진실로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인간이 한 일이라곤 거짓과 살인과 죄를 진 것뿐이다. 주여!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용서는 당신의 뜻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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