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한국성결교회 및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 연구 조명

'초기성결교회사' 등 성결교회 역사와 신학 확립에 큰 공헌

 

박정규 박사.jpg

 

전북 완주 출신.. 성결교신학교 서울신학대학원서 공부

박명수(朴明洙) 박사는 1953109(음력),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그 시기는 동족상잔의 이념 투쟁의 결과로 발발한 6.25 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때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라 할까. 그 산골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이것이 그에겐 축복의 근원이었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다. 이후 그의 전도로 부모님들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는 인도의 영성가로 알려진 썬다싱(1893-1929)의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위대한 결단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선교사나 목사가 되기 위해서 1972년 봄에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에 진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왕이면 학업을 폭넓게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학년 때부터 종교학을 비롯한 불교학 개론 및 유교학에 관한 저서 등 타종교 서적도 탐독하였다. 4학년 때는 하인리히 오토의 <신학 해제>를 읽고 감동해 각 주제를 암송할 정도로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성결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63월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신학을 새롭게 배웠다고 한다. 이른바 신학적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성결교신학교 시절에 배웠던 보수신앙과 진보신학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서울신대에서 건전한 복음주의를 배우며 깨달았다. 그때 웨슬리 신학을 가르치던 조종남 학장의 학문적 영향이 컸다고 후일 말했다.

 

미국 보스톤대학교에서 19세기 성결운동 연구

그는 이곳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였는데, 당시 박사학위 과정 학제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장로회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한신대학교와 서울신대가 연합해 운영하는 5개 대학 '공동박사학위 과정'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는 받지 않은 채로 미국 보스톤대학교로 가서 교회사로 전공을 바꾸어 새로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성결교회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웨슬리의 후예인가? 아니면 자생교단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그러한 논쟁이 19세기 성결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1992년에 <19세기 미국성결운동의 성결 개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명수 박사는 1992년 여름에 귀국하여 그 해 가을 학기부터 서울신학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교수가 된 것은 1994년 봄 학기부터였다.

박명수의 학자로서의 학문여정을 그의 제자 허명섭 박사는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 한 바 있다.(퇴임기념논문집 2020, p.56 이하).

1기는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정립을 위해 땀을 쏟았던 시기이다. 당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박명수 교수는 한국성결교회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해 연구 발표하였고, 이를 묶어 <근대 복음주의의 중요 흐름>(1998)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후에 출판된 <초기성결교회사>(2001),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2004), <한국성결교회100년사>(2007),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2008) 등이 츨판되었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2기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신앙을 위해 활동했던 시기이다. 이때부터 박명수 교수는 성결교회를 뛰어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시발점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소의 초청으로 참여하게 된 오순절신학에 대한 연구였으며,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는 그 지평을 한국교회의 주류 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넓혀 주었다. 전자의 결과는 <급하고 강한 바람>(2012)이란 책으로 출판되었고, 후자는 <한국교회 부흥운동>(2003)으로 나타났다. <근대사회와 복음주의>(2008)도 한국교회에 복음주의를 전하고자 애썼던 땀의 결실이었다. 이 외에도 2007년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여러 기관들과 함께 일하며 한국교회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한국기독교 역사와 한국사는 '불가불리'

또 한 가지 그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한국교회 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이라 하겠다. 이 운동은 그가 우연한 기회에 한국사(韓國史) 교과서에 서술된 기독교 관련 내용이 왜곡 축소 폄하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한국사 교과서에 "한국기독교가 지나치게 복음주의적이어서 제국주의와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명수 교수는 이 서술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한국사회에 끼친 한국교회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와중에 그는 종교편향문제, 즉 정부 당국이 불교와 유교는 물론 무속종교에까지 전통종교니, 전통문화니, 또는 민속문화라는 이름으로 각종 혜택과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것은 종교편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 공공정책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를 만들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기독교의 현안을 제시하여 답변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에 공감하는 여러 동료 학자들과 함께 <역사교과서와 기독교, 공정하게 서술되었는가?>(2010), ,한국근대화와 기독교의 역활>(2011), <한국정치와 기독교 공공정책>(2012) 등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3기는 2010년도 전후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의 연구 영역 및 활동을 넘어 한국기독교와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영역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 교과서가 기독교 역사만을 축소 왜곡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자체를 공정하게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는 남북 분단 역사의 관점이 대한민국의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일제하 민족운동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운동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 후의 한국사가 공정하게 평가를 받을 수 없다면 한국기독교 또한 왜곡 폄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학자로서 박명수 교수의 역사인식은 무엇보다 소중한 역사적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되었다. 한국기독교 안의 냉소적 비판주의와 한국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에 대한 반동적인 자각이 그의 역사인식 저변에 흐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그 저변에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계속 제기하는 문제이고, 그의 역사연구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성결교회의 정체성 확립 및 전파에 애정을 기울인 것도 복음신학과 신앙에 대하여 자긍심을 갖도록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도, 한국기독교의 역할에 대하여 긍정적인 비젼을 제시하는 것도,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 과소 평가"

박명수 교수의 역사인식과 연구는 정당한 주체성의 자각과 그것을 고무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에 비해 우리 역사 속에서 지니치게 과소 평가받고 있다는 인식이다. 한국기독교는 불교나 유교가 미친 영향만큼 근.현대사에서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 교과서에서 이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인색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상당부분은 왜곡되거나 많은 경우 과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명수 박사는 역사연구 및 해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한다. (1) 사실(Fact)에 근거한 역사 서술이어야 한다. 완전한 객관을 견지하긴 어렵지만 역사는 사료가 알려 주는 대로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역사가의 일차적인 임무는 과거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관 중심의 역사연구를 경계한다. 종종 사관(史觀)을 강조한 나머지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선입된 사관에 입각해서 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곧 사관 중심의 역사연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푸로크루테스'의 침대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푸로크루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침대에 눕게 한 후,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서, 짧으면 늘려서 죽였다. 사관이 중요하지만 사관에 맞추어 역사를 연구하게 되면 역사를 왜곡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명수는 자신의 역사연구 방법을 설명하면서 종종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사자성어를 사용한다. "서술하는 것이 창작보다 중요한 것"이란 의미로 일찍이 공자가 사용한 말이다.

(2) 역사연구와 해석은 국제적인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딴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거나 독립된 역사는 없다고 본다. 거의 모든 역사는 교류를 통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연구 및 해석은 국제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한국성결교회는 세계기독교의 흐름 속에 있고, 특별히 동양선교회(O.M.S)로 대표되는 19세기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는 한국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하다. 한국교회는 19세기 미국복음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교회가 크게 신학적 자유주의와 교리적 정통주의로 나뉘어 있지만 한국교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체험적인 복음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세계기독교의 흐름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독교에 대한 제대로 된 서술이 없는 것도 한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결교단과 한국교회의 역사적 혜안의 소유자

(3) 박명수 교수는 교회사 연구 및 해석에 있어서도 일반역사의 흐름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와 종교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교분리와 종교적 사사화(私事化) 현상 등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영향이 무시되어도 좋은 정도는 아니다. 구한말의 일제 강점기 그리고 무엇보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한국역사 속에 묵직한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일반사회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복음주의를 근대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연구를 통해서 그는 근대의 중요한 사상가들이 근대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전통신학에 익숙한 신학자들은 변화하는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면, 근대 사상가들 중에는 변화하는 사회를 인식하고 있었다면서, 예를 들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토그빌(Alexis de tocgueville, 1805-1859) 등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성결교회의 교회사가로써만 아니라 이미 한국과 아시아 및 세계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혜안(慧眼)을 가진 학자이다. 그가 성결교단과 한국기독교를 위한 넓은 역사적인 혜안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유학에서 돌아오지마자 서울신학대학교 안에 성결교회역사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성결교회 및 오순절계 신힉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를 연구 조명하고 정리한 과정은 한국교회를 향한 큰 공헌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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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박명수 박사(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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