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1(수)
 

임영천 목사.jpg

 

요즘 우연한 기회에 네덜란드(화란)의 역사를 좀 들춰보는 일이 있게 되었다. 아니,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상호 침략과 방어의 역사에 더 관심이 갔기 때문에 지난 16세기 전후의 네덜란드 역사를 그 관점에서 주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의 군주는 펠리페 2세였는데, 그는 특히 가톨릭 옹호자로 이름을 날렸고, 그 때문에 반()종교개혁 운동가로서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칼뱅주의 개혁의 바람이 크게 불어 닥침으로써 결국 개신교(개혁 교회)가 강화돼버린 네덜란드를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고 판단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어떤 강경책을 써서라도 네덜란드를 스페인처럼 획일적인 가톨릭 국가로 만들 방책으로 스페인 식 종교재판소를 네덜란드에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자국 스페인과 이웃 포르투갈에 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가톨릭 강화(획일화)에 크게 득을 보았던 스페인의 군주는 네덜란드에도 그 종교재판소를 두어 가톨릭 일원화를 획책하려고 하였다. 이 스페인 식 종교재판소가 어떤 기관이었는지 이미 정평이 나 있어서 그 악명을 귀로 듣기만 해도 사람들이 소름 끼칠 정도였는데, 종교 면에서 자유와 관용을 사랑하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이 소식은 마치 푸른 하늘에 날벼락(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9세기 후반에 창작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속의 대심문관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야기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내려오신 때는 종교재판소의 엄한 화형(火刑)의 뜰에서 100여 명에 가까운 이단자들이 대심문관인 주교의 지휘 아래 대거 분형(화형)에 처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 이야기는 15세기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성취되기 직전 시기에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는 속칭 이단자들에 맞서 교황이 시작한 이를테면 고전적인 종교재판의 성격이 강했지만, 그 재판이 스페인이란 나라에서 그들의 특성에 맞게 발전해(?) 나간, 15세기 후반(1478)부터 스페인에서 시작된 스페인 식 종교재판이란 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 스페인 식 종교재판이란 것은 유대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을 했다곤 하지만 진심으로 개종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을 심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악명 높은 이 재판에서는 정치경찰과 정보원들의 활약에 힘입어, 사실을 그대로 자백하라고 유대인들을 고문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또한 무슨 법적 테두리에 구애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 뒤 소위 알함브라 칙령(1492)이 발표되고 난 후 유대인들에게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갔다. 스페인 정부는 유대인들이 가톨릭교로 개종하는 걸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아예 스페인에서 모두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4개월 안으로 떠나라는 칙령에 의해, 지금껏 개종을 거부하고 이제야 추방령을 수용한 17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갑자기 그 나라를 떠나면서 질병과 아사(餓死) 등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무자비한 스페인 정부가 이제는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획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겠다고 나오자 지금껏 지배국 스페인에 대하여 순종적이기만 했던 네덜란드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성상파괴운동(1566)을 시발로 해서 터진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 양상의 무장투쟁으로 확대되었고, 북부 의 도시 레이덴에서 맞붙은 양군(兩軍)의 전투(1574)는 그들의 생명줄인 제방을 허물어 물바다를 만들며 결사 항전한 네덜란드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란 원칙에 따라 그들의 종교(개혁교회)를 그대로 지켜나갈 수 있었고, 특히 유대인들과 같은 수난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17세기의 황금시대를 열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 나치 군의 침략을 받아 자기네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영입한 유대인들마저 극도의 박해를 받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일은 그들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난의 유대인들을 도운 코리 텐 붐 일가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신앙수기 <피난처>가 이 나라에서 나오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고, 또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와 그 가족의 고통스런 삶이 기록된 <안네의 일기>마저 이 나라에서 탄생하게 된 일은 더 큰 축복이었다. 유대인들이 최후의 피난처로 삼았던 이 관용의 나라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결과는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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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피난처’와 ‘안네의 일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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