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임성택 교수.jpg

 

판단의 기준이 흐려지고 공리적 정당성이 위협을 받으면서 상식과 보편적 윤리가 도전받으면 옳고 그름은 차선이 되고 결국 편당(偏黨)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 편당의 가치와 기준을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지닌 무분별한 횡포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가치 기준의 상실에서 오는 철저한 편당의 투쟁만이 보인다.

 

숙맥(菽麥)이란 콩과 보리도 구분못하는 부족한 인사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특정인을 숙맥이라 부르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핀잔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심각한 숙맥은 집단적이고 편당적인 형태로 나타나 선악의 개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편당에게서 악()이란 내부적으로 걸러야 하는 불편한 것에 불과하다. 이 내부적 악이 외부로 도출되었을 때 편당은 감추고, 축소하고, 부정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당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거부하면 그는 반동이 되고, 축출 내지는 징계의 대상자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심각한 숙맥들의 활극이 도를 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구분할 줄 알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오히려 부풀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이는 모두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어떤 일을 대처함에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다. 그 선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넘어버리는 것은 분명 숙맥의 짓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숙맥의 행태가 병리적 환호를 받고 있다.

 

성직자가 죽음의 저주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그것을 당연한 종교인의 책무로 몰아부친다. 그리고 이를 두둔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판단의 정당성을 담보할 물증을 제공하기에 골몰하는 인사들이 있다. 숙맥들이다. 어이없이 젊은 생명들이 일시에 유명을 달리하였음에도 자발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과한다는 말이 아니다.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이 그만하면 됐습니다할 때까지 사후의 모든 일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책임지고 감당하겠다는 인사가 없다. 숙맥들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런 숙맥들의 전성시대가 되었는가? 콩과 보리도 구분못하는 인사들이 주름잡고 있고, 여론의 중심에 서 있다. 이에 열광하는 또 숙맥의 추종자들은 거의 카타르시스적인 행태를 보이고 집단 숙맥들이다. 이것은 여와 야, 진보와 보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같은 현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법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들이 어찌 이렇게 태연한가? 그런데 이를 향하여 불같이 맹렬하게 나서야 할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들은 모두 이 숙맥들이 주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양심적이고 지성적인 인사들은 입을 닫고 있다. 왜냐하면 숙맥들의 힘의 근원이 되는 또다른 숙맥들의 횡포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단말마적 사회병리현상이다. 이런 것이 무서워 양심과 지성에 의해서 표방되고 지켜져야 할 가치들이 몰수당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더이상 숙맥이 주름잡는 사회는 안된다. 나아가 숙맥의 말장난이 통하는 사회도 안된다. 우리가 물려줄 다음 세대의 가치는 일류로서의 선진 이성이며, 윤리이고, 이를 선도하는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은 오직 제대로 된 민주와 진취적인 자유를 신념으로 하는 정직한 시대정신이다. 즉 권위주의를 버린 권위의 회복, 위선을 벗은 다움의 명예, 이것이 오늘의 숙맥을 잠재우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숙맥에 휘둘릴 정도의 모자란 국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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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숙맥(菽麥) 예찬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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