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 강원도 양구 출신 박경민 작가… 수필가로도 활동

강원도 양구, 척박하고 가난했던 시절 박경민 집사(창동제일교회)이 촌 구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꿈을 어릴 때부터 가졌다. 잘 살았던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진학을 하여 갔는데 자신은 양구에서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게 꿈이었습니다.” 박 집사는 서울만 가면 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의 현실은 꿈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당찬 열정과 노력으로 춘천교육대학에 진학하여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양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 현실에 안주할수도 있었겠지만, 양구를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고 살았다.

양구(楊口)는 강원도의 보석이라고 할 만큼 빛나는 한반도 섬과 꽃 섬이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6.25전쟁 당시 양구지구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이 참전하여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그러나 전쟁을 이겨내고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양구는 한반도의 정중앙(正中央)에 위치하여 있고, 볼거리 먹거리가 많기도 하다. 근대화가 박수근 미술관, 금강산 가는 길 안내소, 국토중앙천문대, 인문학 박물관, 국립 DMZ 자생식물원, 4땅굴, 을지전망대 등 많은 유적지와 생태계가 있다.양구의 인물은 박수근 화가, 이해인 시인,배삼룡 코미디언, 박영률 시인 등등의 인물들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박경민 집사는 28세에 그의 꿈에 그린 뜻대로 서울에 산다는 산악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고 주말 부부로 살았다. 어린 두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살았지만 서울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는 결심으로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다.서울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기 전에 그의 남편은 유명산악인으로서 히말라야 7800 고지에서 눈보라 속에 청천벽력같은 사고사(事故死)를 당하게 되었다.

저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보다 두 딸을 데리고 다시 양구에 가서 살 수는 없었습니다. 내 새끼들만큼은 서울에서 학교 다니게 하는게 저의 꿈이 되었지요.” 박 집사는 먹고살기 위해 궁리를 하던 중에 대형운전기사 면허를 따고, 서울 시내버스 기사로 취업하였다. 42세 젊은 나이에2004년 버스기사가 된 그에게는 수많은 도전이 밀려 왔다. 당시 여성 버스기사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자기사들 틈에서 모욕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 남자들 틈에서 너무 견디기 힘들어 좌절할 수 밖에 없었지만 두 딸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참아냈다.

그렇다. 나는 엄마다. 엄마는 약하지 않다. 아이들이 엄마 걱정을 해 주는 것도 큰 힘이 되었지요.” 아이들은 눈이 오면, 비가 많이 오면 버스 운전하는 엄마를 걱정하면서 기다렸다고 한다. 박 집사도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눈물겹게 온갖 수모와 힘이 드는 일이지만 죽을 힘을 다해 감당해 냈다.

어느날 집 앞에 모란꽃이 보여서 그 꽃이 자신의 모습 같아 떨어진 꽃잎을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이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잊기 위해서 모란꽃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그는 남자들 틈에서 버스기사로 힘이 드는 일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는데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노력의 결실은 마침내 2010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매우 놀라운 발전, 아니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은 놀라운 감동으로 바라보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개인전에 관람 온 K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가 보고?‘대단한 소질과 예술성이 보인다고 칭찬하며 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해 본격적인 미술을 접하고 공부하여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몇몇 언론에는 그가 남자들 틈에서 어려운 작업을 한 그의 그림 대부분이 모란꽃이었기 때문에모란의 여왕이란 제목으로버스기사 박경민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박 집사는 두 딸을 키우는데 엄마로서 온갖 정열을 쏟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1, 좋은 친구를 주소서 2, 좋은 선생님을 보내주소서 3, 좋은 학교를 보내주소서 4, 좋은 직장을 주소서 5, 좋은 배필을 주소서 라는 기도 제목을 붙여 놓고?30년을 넘게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어려운 환경과 가난에서 초월의 역사를 통해 박 집사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판검사, 의사는 안되었지만, 좋은 선생님과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되어 큰딸은 여의도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고, 작은딸은 유명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저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박 집사는 감사의 눈물을 보이면서 감격하고 또 감격해 했다.

박경민 집사를 만난 삼촌 박영률 시인은너의 살아온 여정과 성공의 걸음을 글로 표현하면 훌륭하고 충분한 수필 문학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글쓰기를 권유하여사상과 문학에 고향 양구의 추억과 그의 살아온 과거를 담담하게 정리한 글이 수필가로 등단을 하게 했다. 그는양구 가는 길’ ‘나의 꿈 이야기등 수필 문학의 흥미를 더해 주는 글들을 게재하고 있다.

박 집사가 남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서울의 시내버스 기사로 20여년을 일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수필가로, 화가로 기적 같은 삶을 이어가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렇게 고학력을 가진 버스기사도 드물 것이며, 더구나 버스기사로서 수필 문학과 화가로서 인정받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욕심과 욕망으로도 이룰 수 없고, 한번 해 보겠다는 결심만으로도 올라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버스기사 박경민 작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과 특별한 재능,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만들어 낸 성공이다. 곧 출간되는 그의 수필집 엄마 달력도 기대를 해 본다.

박경민 작가는 지난 29일부터 12일까지 강남 코액스(COEXXHall)에서 열린국제예술전시회(WORLD ART EXPO in SEOUL)’에 쉽게 선정될 수 없는 대가들의 반열에 초청작가로서 작품을 전시했다.그의 부스(Booth)에는나를 유혹하다라는 주제로 모란과 목련 꽃들을 화사하고 밝고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몇몇 언론에서도 취재를 한 것은 아마도 박경민 작가의 그림이 수준 높게 평가되었고, 작품 속에는 그의 심벌(symbol)일 수도 한 버스를 그려 넣어 표현하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그동안 4회에 걸친 개인전과 중앙회화미술대전 대상, 4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38회 한국수채화 미술대전 특선, 국제 한얼 미술대전 금상 등 12회에 걸친 수상과 출품을 인정받아 이번 국제전시회에 초청을 받은 것이다.

고향 양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박경민 작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서 그의 남은 꿈은 고향 양구에서 문학관을 겸한 미술관을 세우고, 재능기부를 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김형원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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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서 버스기사로 변신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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