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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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나는 이렇게 되었을까요?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할 수는 도대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잠깐 동안만, 잠시만 하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다가 보면 좋은 수도 생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 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대로 살다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누구 이야기 입니까?

우리처럼 주 예수 앞으로 나와 선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38절 예수의 뒤로 입니다. ! 뒤에서, 앞에 나설 수조차 없는 여인입니다. 여기에, 교회에 와서도, 주 예수 앞에 와서도 감히 나설 수 없는 여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조차 입을 열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할 것입니다. 또 누가 와서 알게 되기라도 할 것 같아 움찔움찔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2131~32)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죄 많은 세리와 창기들과도 식사를 같이 한답니다. 그들의 친구라고 까지 한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우리들과 같이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소식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입니다. 오실 분이 오신 것입니다.

내가 나가야합니다. 여기까지 오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수소문해 찾아 나서서 달려 나갑니다. 나로구나, 나에게 까지, 나를 찾아 오셨구나, 한 달음에 달립니다.

경건하기로 소문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둘러싸여 있는 그의 친구들 무리 사이로 감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계시다면, 그의 곁이라면 괜찮겠습니다.

그 귀하신 분의 발만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쉬지 못한 발입니다. 많이 걷고 걸은 발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날 찾아오려고 걷고 걸으셔서 흙먼지에 피곤한 발입니다. 곧 못에 박혀 피 흘릴 발입니다.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눈물로 말을 대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눈물이 떨어진 그 주님 발 닦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머리털 푸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주변 사람의 수군거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창기를 부르신 주님께만 집중 합니다. 내 죄 때문에 이 분이 어린 양으로 오셨구나. 주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흘리는 나의 눈물이 누군가의 발 씻어주는 물이 되는 축복 있기를!!

 

무엇 때문에 나온 것일까요?

오직 단 하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옵니다. 주님께 향유를 붓기 위함입니다.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어린 양입니다.

여인이 지니고 있는 단 하나 소유물입니다. 평생을 모은 것입니다. 몸을 팔아 조금 조금씩 준비하던 것입니다. 고된 인생에서 여인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던 것입니다. 창기로 이 세상을 살면서 다만 저 세상에서 편안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적어도 죽음의 순간만큼은 남들처럼 평범하고 싶습니다. 죽어 장사지낼 내 몸 만큼은 깨끗이 닦여 향기 있고 싶습니다. 그 날만을 위해 소중히 목에 걸어, 품고 다니던 것입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가진 것이라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것 뿐입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 립니다. 주님께 부어 드립니다. 나를 드립니다. 나의 죽음을 드립니다.

 

어떻게 됩니까?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47)

벗어날 길 없이 그대로 살아야하는 인생입니다. 한번 창기는 영원한 창기입니다. 한번 박사는 영원한 박사입니다. 그래서 근사한 명함으로 명패로 한번 바꿔 보려고 밤이나 낮이나 수고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창기의 굴레를 죽는 날 까지 벗을 수는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주 예수 앞에 섭니다. 나는 내 죄를 내가 압니다.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내가 누구라는 겉모습보다도 내가 남몰래 지은 죄 때문에 괴롭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를 피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본 그대로 메시야입니다. 모두가 오시길 기다리고 있는 그분이 맞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혼자서 주고받고 주고받으며 되뇌던 말을 다 듣고 계신 메시야라면 모든 것을 다보고 알고 있는 분이라면. . . 그분이 맞습니다. 마음에 알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더구나 메시야를 믿고, 연구하며, 선포하며,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해 하며 본이 됨으로 가르치고 있는 그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도 몰라보는 그 입니다. 그를 초대까지 한 우리들의 선생님 시몬입니다. 여전히 시몬은 그 인가 아닌 가 시험 중입니다. 주가 하신 말씀 그대로 살고 있다는, 경건한 시몬과 그의 초대로 모인 경건한 무리들 앞에서 그 여인의 죄의 굴레를 끊어 주십니다. 그 여인의 많은 죄는 용서 받았음이 선포 됩니다. 오직 죄인 된 나를 부르러 찾아 오셨다는 그 믿음이 창기였던 이 여인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건짐 받습니다. 이제 평안합니다.

나의 죽음을 드리고 삶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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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임현주 목사 '내가 그 죄인입니다'(눅7: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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