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절 창녀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창녀의 삶은 정의나 진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인생입니다. 오히려 살기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법이나 도덕과는 거리가 먼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들에게도 정의가 필요한, 법이 필요한 일이 생깁니다. 정의 앞에 서야 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자기가 출산해서 삼일 간 젖을 물리던 어미가 그 아기를 잃어버립니다. 빼앗긴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기 친구의 품안에 안겨있습니다. 한 집에서 출산을 같이 한 친구입니다. 같은 일을 같은 집에서 하며,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고 삼일 차이로 출산을 한 친구 창녀는 아기를 낳고 부주의하여 밤에 자기 아기 위에 누우므로 그 아기가 죽었습니다. 모두가 잠이 든 그 밤에 살아있는 자기친구의 아기와 죽은 자기아기를 바꾸어 놓고 자기 아기라고 주장합니다. 친 엄마 창녀가 곁에 죽은 체 누워있는 아기를 아침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삼일 전에 자기가 낳은 아기가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압니다. 자기 자식을 압니다. 어찌 태에 열 달을 품었다 낳고, 젖까지 물린 자식을 몰라본다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내 아기가 어느 새 내 친구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그 엄마에게 그 아기가 자기 자식임은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쪼개져도 거짓이 아닌 참입니다. 정의입니다.
그러나 잠든 사이에 감쪽같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 집에는 그들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 아기가 내 아기라는 사실을 증명 해야만 합니다. 그 아기가 내 아기입니다. 사실을, 사실만을 말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바로 전에 자기 자식을 품에 안아보았던, 그 따뜻한 생명을 느껴보았던, 세상에 내 것이, 내 아기가 생겼습니다, 나를 알아보는 내 아기를, 그리고 곧 잃어버린 아기의 엄마도 필사적입니다. 서로 자기 아기임을 주장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 친구가 이런 친구 였나... 어찌 바로 며칠 전까지도 신세 한탄도 같이 하고, 또 이제는 엄마까지 같이 된다고 속을 터놓고 이야기 하던 친구가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아기는 잘 낳아 기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말 할 수 없었던 남모를 이야기들을 서로에게는 주고받으며, 그래서 더욱 의지되고 서로의 사정을 이해해주며 위로받던 동료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엔 잘 이야기하면 돌려줄 줄 알았습니다. 자기 아기가 죽은 충격에 잠시 내 아기를 안아보고 돌려 줄 거라 기다려 주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날이 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자기아기라 우겨댑니다. 할 수 없습니다. 뺏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싸움이 쉬지 않습니다. 이제 집 밖을 나섭니다. 이사람 저 사람들에게 하소연 합니다. 저 아기가 내 아기라는 사실을 내 친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도록 증거를 대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가 낳은 내 아기인 것이 사실인데 무슨 증명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아기엄마에게 아기를 돌려주라 말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품에 아기를 꼭 안고 젖을 물리며 절대 내주지 않고 있는 친구 말을 오히려 사람들은 옳다합니다. 아기를 당당하게 안고서 아기를 위해 조용히 하라고 타이르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딱 아기 엄마입니다. 네, 그도 아기엄마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품에서 아기를 놓친 어미의 말은 믿을 수 없다합니다. 이 엄마는 급기야 불안에 떨며 거품을 물고 그저 내 아기가 맞다고 악을 쓰며 울며불며, 앞뒤도 안 맞는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에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나를 미친 여자라 합니다. 실제로 미친 여자가 되어갑니다. 그래도 결코 엄마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내 아기 곁을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죽어 증명할 수 있다면··· 미친 여자 하나가 아기엄마 곁을 따라다니며 소리소리 합니다. 아무도 사실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아무 일 없는 듯, 자신 만만히 내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는 내 친구도 알고 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불의는 없습니다. 동네 동네를 판결을 구하며 돌아다니다 최고한 법정, 왕의 재판정에까지 서게 됩니다.
이제 왕 앞에 왔으니 왕은 가려내 줄 것입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왕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지혜로운 마음을 받은 솔로몬 왕입니다. 왕은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아기의 엄마인지,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해 줄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무엇이든 왕의 판단을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주장합니다. 자식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이 아기가 내 아기임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주장하고 또 주장합니다. 다 보고 들은 왕이, 드디어 판결합니다. 왕의 명령입니다. 24절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합니다. 칼이 왔습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으니 살아있는 아기를 둘로 나눠 가지라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26절 그 살아있는 아들의 어미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둘로 나누면 아기는 죽습니다. 칼이 앞에 있습니다. 이제 내 아기가 죽을 것입니다. 칼 앞에서 아기의 죽음 앞에서 갑자기 아기의 어미의 마음이 불에 탑니다. 이제 여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아기는 죽습니다. 이제 아기를 살려야 합니다.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아들이 아닙니다. 저 여자에게 주세요.’ 네! 아기가 살 수만 있다면 내 품이 아니어도 됩니다. 내가 엄마라는 것 평생 몰라도 됩니다. 내가 저를 버림으로 자기를 살려냈다는 것 평생 몰라도 됩니다. 살릴 수 만 있다면 엄마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기의 죽음 앞에 비로소 침묵합니다. 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기를 앉고 있던 여인은 어차피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내 친구도 가질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나누자 합니다.
27절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살아있는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왕이 아기를 어미의 품으로 돌려줍니다. 어미가 안을 수 있도록 합니다. 왕 앞에 서고서야, 지혜 앞에 서고서야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지혜로 오신 주 예수님 앞이어야 합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3:18)’. 생명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 예수는 생명의 주입니다. 살림입니다. 왕에게 죽음을 드림으로 살림 받습니다. 왕 앞에서 창녀가 엄마가 됩니다. 왕이 준 새 이름입니다. 새 삶을 삽니다. 창녀가 엄마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