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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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긍휼, 자비, 부정죄, 용서를 들고 변호하며 호소함.
세습제도 반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의 말씀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님은 “내가 긍휼을 원하고(자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는 무한이 베풀어야 된다는 요지인 줄 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장사는 없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왜 일어났던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루이 14세 왕이 “짐은 곧 국가다”라고 자만하는 권력의 화신이 되어 왕정과 가톨릭 교권이 함세하여 신교도 대학살에 이어 국민을 탄압 학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의지의 법을 우위에 놓고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총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문제의 사건을 푸는데 있어서 총회의 법을 주님의 말씀의 법 위에다 올려놓고 그것이 성경의 법보다 더 중한 줄 알고 그것으로 다스리며 복종을 요구할 때 주님은 절대로 반대 거부하신다. 주님의 법인 긍휼과 자비, 정죄하지 않음과 용서로 문제를 풀면 더할나위 없이 잘 풀리고 그 후에 끝은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의 법은 무시하고, 인간이 제정한 법을 쓰면 억지로 풀 수 있을지 몰라도, 푼다 하더라도 끝은 원수가 된다. 이걸 알고 총회잣대 거두고 주님의 잣대로 풀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랑의 법과 율법을 들고 변호하며 호소함.
사랑의 법과 율법을 보시라. 편의상 율법을 먼저 거론하는 바이다. 율법은 곧 법이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 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룰 뿐이며 온전케도 못하고 범죄자로 정죄하고 저주아래 가두어 죽이는 것, 그것이 율법 곧 법이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옷을 벗기고 쫓아내고 사형을 시키는  것이다. 법대로 한다고 재판도 하지만 재판하면 누군가는 승소하여 축배를 들고 끼리끼리 기뻐하겠지만 패소자는 백년천년지간 원수가 된다.
과거 부산영락교회 문제가 총회에 올라왔을 때에 필자는 발언했다. 총회법의 잣대를 거두시고 주님의 사랑의 법을 써야 한다고, 그럼에도 힘센 사공들이 많았는지 그 배는 산으로 올라가더니 결국은 교회도 사람도 다 잃어버렸다. 우리는 이걸 보고 있지 않는가? 더우기 당시 부산영락교회 재판에 관여했던 어느 노목사님은 왜 내가 그 재판에 관여했던고 지금까지 밤잠을 못이루시고 후회 또 후회를 하시며 게신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려는가?
사랑의 법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고 용서하고 법으로 못한 것을 완성 완전케하여 죽어 나갈 사람을 살려내는 것, 이것이 사랑이 하는 법이다. 법대로 한다고. 그래서 죽여 송장으로 관속에 담아 내버린다! 그러나 사랑의 법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어 복된 길을 걷게 한다. 어느 법을 쓰는 것이 더 좋은 걸가?
여러분! 죽이는 법 말고 살리는 법을! 과거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가 레위인을 윤간 치사함으로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멸족시키려 했다. 그러나 한 지파가 없어져 버리면 되느냐고 깊이 숙고 후회하면서 죽이는 법의 잣대를 거두어 죄를 덮어주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살려줬더니 거기서 당대의 영웅 사울이 나고, 사사시대 때 어지러운 나라를 건진 에스더가 나고, 후에는 세계적인 복음의 대사도 바울이 나왔던 것이다. 만일 죄를 물어 멸족을 시켰더라면 이들은 어디서 났겠는가?
여러분! 어느 소득이 더 큰가? 죽이는 소득인가? 살리는 소득인가? 사랑의 법은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의 희생, 주님 자신은 가시관을 쓰시고 양 손 양 발은 못박혀 찢어져 피 흐르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핏물을 흘리시면서 만물의 찌거기 만도 못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셔서 살려 주셨는데,
고전 13:1-3에 “이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헬라어 원문은 “아우데이스, 아우데이스오펠레오스”로서 주님의 그 사랑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요, 사물도 아니요, 아무것도 쓸데 없는 것이란 뜻이다. 주님의 그 사랑이 없으면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어떤 교인도 아니란 것이다.
자, 우리는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으로 명성교와 김삼환 부자목사를 살려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 주께서 잘했다고 우리 총회에 넘치는 축복을 더 풍성하게 주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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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교회를 변호하며 호소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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