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정이 있는지 소리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기가 알고 있는 가나안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 여자의 사연은 어린 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려 문제가 생긴 건 딸인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불쌍합니다. 딸의 문제가 어머니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가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를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의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고통이 제자들에게는 단지 시끄럽고 귀찮은 일 밖에는 안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 15:23)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공감 능력이 없을까요? 공감능력이 없으니 누군가의 죽을 듯 한 고통을 보고도 긍휼한 마음이 안 생깁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개처럼 무시하고 있는 가나안 여자가 소리를 지르니 시끄럽다고 합니다.
“빨리 보내버리세요!”
이 장면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위해서 하늘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게다가 이런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계속 침묵하십니다.(23절)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그 침묵을 깨고 하시는 첫마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 맞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6)”
예수님이 오신 목적으로 보면 표현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대언해서 역설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너희들의 마음의 생각이 그렇지 않느냐...”
이제 그 말에 반응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과 제자들의 저급한 행동이 비교될 것입니다. 예상대로 가나안 여인이 그 말을 믿음으로 뒤집어 버렸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아!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먹먹해 집니다. 이 구절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감동이 훼손될까봐 설명하기도 아까운 구절입니다. 그냥 느껴야 합니다.
“내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주님”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는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아야 합니다. 내 딸 귀신들린 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내가 자녀가 아니고 개면 어떻습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가나안 여자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야 내가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가 나를 살릴 것을 믿습니다.
우리 집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내게도 그 은혜를 주소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자기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변호할 필요도 없고 부당함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관계없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들 괜찮습니다. 다만 살기위해 그분이 주시는 은혜만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이방인이라고 무시했던 제자들 앞에서 이것이 큰 믿음이라고 선포 하십니다.(마 15:28)
예수님이 주시는 기적을 받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믿음대로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대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믿었던 하나님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