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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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13)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이 인구 조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하였고 세금을 위하여 인구조사가 꼭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군대 모집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 크게 자책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21:8).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도 이렇게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정도였습니다.

 

인구 조사한 것이 무슨 잘 못이기에 이렇게 큰 죄가 될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구를 조사할 때마다 내야 할 생명의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30:11-12). 생명의 속전이란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연보입니다. 다윗은 그 헌금을 망각하고 백성들에게 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헌금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르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내면적인 이유는 인구조사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싸우는 곳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영역이 넓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에서 이방인들이 귀화하여 인구 또한 많아졌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직접 수치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커졌는지, 이전 사울 때보다 얼마나 좋아졌는지, 부국강병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구조사 동기가 명예영광심 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린 죄였습니다. 영적인 죄 곧 교만 죄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7만 명이 죽는 참혹한 결과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늘,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은 하나님의 손에 빠진 징계입니다(13). 하나님의 손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만 치료해주실 수 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병은 회개 외에 고칠 길이 없습니다. 백신을 개발하면 된다고요? 일순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채 개발 된다면 둑이 무너져 가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윗돌을 빼서 아랫돌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런 전염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으며 무엇을 회개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16-17).

 

다윗은 첫째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둘째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셋째 온역의 원인을 자신의 악으로 돌리고, 그 죄 값을 백성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 자신과 자신의 아비집이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온역이 그쳤습니다. 굵은 베옷은 겸비함을 뜻합니다(왕상21:27).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온전한 순종과 복종을 뜻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집이 당하게 해달라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의 교만을 회개하고 겸비와 복종과 희생을 보인 다윗을 보고 주님께서 온역을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회개한 다윗에게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18). 하나님을 위한 제단은 신약에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코로나 19를 직면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드리는 것입니다(12:1-2). 그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천사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오기 전에 여러 곳을 거쳤을 것입니다. 오르난은 어떤 태도를 취하였기에 하필 천사의 칼이 그곳에서 멈췄습니까?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대상21:20). 오르난과 네 아들들은 숨었습니다. 천사 앞에서 숨는다고 숨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칠 때 양의 피로 이스라엘 장자를 숨겨준 것처럼 하나님이 숨겨 주셔야 합니다.

 

27: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여호와의 은밀한 곳은 초막속입니다. 초막이란 자기를 낮추는 곳입니다. 만일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예루살렘 궁전에 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본을 받아 낮추고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성경은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10:12)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도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더욱더 겸비와, 온전한 복종, 선한 희생,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의 단을 쌓고, 검소한 생활 등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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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손에 빠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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