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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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

 

가끔씩 신앙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도록 그대로 두셨을까?’ 하는 의문을 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대형 식당 운영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과일을 어느 때 주는 것이 좋은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식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고, 식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식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은 과일과 밥은 소화속도가 달라서 과일을 나중에 주면 위 속에서 밥 위에 있는 과일이 부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반면 식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은 끓인 음식물은 소화효소가 파괴되기 때문에 식후에 생과일을 먹으면 과일에서 나오는 소화효소들이 소화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과일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밥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툴 때 한 종업원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식후에도 식전에도 주지 말고 식사 때 과일도 함께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식전에 먹는 것이 편한 사람은 과일부터 먹을 것이고 식후에 먹는 것이 편하다면 식후에 먹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 그 의견에 찬성하였고 다시는 그런 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이 단칸방에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추위에 약하지만 아내는 추위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남편은 더위에 강하지만 아내는 더위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금슬이 좋은 이 부부도 겨울이 되면 항상 온도가지고 티격태격하였습니다. 아내는 21, 남편은 23도가 적당하다고 하며 서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방이라도 따로 있다면 난로나 선풍기로 서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이 날도 부부는 온도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는 23도로 하면 당신이 아무리 옷을 얇게 입는다고 해도 벗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21도는 체감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21도로 하고, 내가 옷을 두껍게 껴입는다면 나는 23도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양보하지요.” 그리하여 부부 사이에 온도 문제는 해결 되었습니다.

 

동서 냉전이 한참 진행되던 때에 K라는 나라(가상의 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공산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국회에서 격렬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한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 만든다면 공산주의 속에 자유가 말살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면 자유 안에 공산주의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택하는 순간 우리는 물질 취급을 받게 되고, 이념을 위하여 개인의 인격은 말살 될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모두가 수긍하였고 그 나라는 지금까지 국가적으로 채택 된 자유민주주의 속에서 개개인이 모여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 예문에서 보시다시피 문제 해결의 가장 합리적인 길은 자유 의지를 누릴 수 있는 길에 있습니다. 식전이든 식후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조절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온도상태, 개인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이념,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은 자유 의지입니다.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살지언정 한 국가의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려고 할 때 그의 손을 마비시키지 않는 이유입니다. 지금도 신앙인들의 자유 의지는 법과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혈로 우리를 사시고 죄와 마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내 마음대로 살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자유 의지까지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 뜻대로 살면 마귀에게 사로잡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의 보호가 따를 뿐 아니라 심령에 평강과 진리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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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인들의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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