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어릴 적 우리 동네 주변에는 유난히 산이 많았습니다. 동네를 중심으로 동편 남편 북편 모두 산이 있었습니다. 예외도 있었지만 집집마다 염소 한두 마리는 기르고 있었습니다. 염소 목에 쇠말뚝 달린 줄을 걸어서 끌고 들이나 저수지 언덕에다가 박아놓고 반나절씩 서너 번 옮겨 놓으면 저녁때는 염소의 배가 불룩한 상태가 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소나 염소 줄을 고정시켜서는 안 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큰 나무가 있는 산이었습니다. 만일 그 주변에 박아 놓으면 줄이 나무를 칭칭 감아 최후에는 자신의 목을 조일만큼 감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돌면 풀릴 텐데 그럴만한 이성이 없기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질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참 된 이성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도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다가(유:10), 염소처럼 점점 더 조여드는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사람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36:8은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그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라고 말합니다. 누설은 족쇄를 말하고 있습니다.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은 보이지 않는 줄입니다. 환경의 줄입니다. 마음을 옭아매거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말씀처럼 위와 같은 환경일지라도 성령께서 족쇄와 올무가 무엇인지 보여주시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의 참 이성은 이론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는(잠3:6) 바탕 위에 계시하는 생명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성령이 깨닫게 해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 위에 문제, 올무 위에 올무, 점점 조이는 환경을 만나는 이유는 성령의 해석을 받으려 하지 않고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판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보이는 일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히11:3), 더 깊은 영적인 곳에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라는 큰 성과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싸워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이라는 작은 성과는 싸워 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수도 필요 없고 3,000명이면 된다고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싸우러 갔지만 결과는 36명의 목숨을 잃은 패전이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참모들을 불러 잘 못 된 작전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수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탓했다면 본능으로 아는 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싸워본들 틀림없이 패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성령의 감동 된 사람이었습니다(민27:18). 패전의 원인을 나타나는 현상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온종일 기도한 결과 그들 가운데 더러운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비뽑은 결과 아간이 범인이었습니다(수7:18). 아간의 문제를 처리한 다음에야 비로소 대적을 당할 수가 있었습니다(수8:28~29). 이처럼 매인 것을 풀어야 하는 것들은 드러나는 현상보다 드러나지 않은 영적인 영역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우리가 매야 할 것들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찬송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에는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믿어 나갈 수도 없습니다. 미혹은 ‘주님의 은혜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면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이기게 해주시고, 마귀를 이기게 해주시고,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세상 풍속 습관을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줄로 이끌었습니다(호11:4). 죄악의 사슬에서 끊으시고 대신 사랑의 줄로 주님과 결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5:14) 라고 말하였습니다. ‘강권하다.’는 뜻은 ‘강하게 끈다.’는 말씀입니다. 대신 죽어주시고, 온 우주보다 더 좋은 선물 곧 성령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끄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림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유혹하는 것들이 우리 자신에게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처리해야 주님의 사랑에 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18:5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라고 나옵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말씀에 잡히면 말씀이 말하고, 말씀이 인도하고, 말씀이 보호하고, 말씀이 깨워줍니다(잠6:22). 그래서 다윗 같은 분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라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에 붙잡히니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살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합니다(수1:7~8). 말씀이 다윗으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였습니다(시119:98).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죄악과 그들이 장차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을 알고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누구보다 그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왕으로 하여금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하지 않을 수는 없고 전하자니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도 괴로워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중심에 불붙는 것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마음입니다.
성도들은 은혜의 사슬에 매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매이며, 말씀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