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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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6:1~2).

 

작년 봄 옥상에 고추와 가지, 맨드라미, 백일홍 등 채소와 화초를 심었습니다. 대부분은 한해살이 식물이기 때문에 지난가을 이미 시들어버린 몸을 거둬들여야 했지만 게으른 탓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은 흙마저 꽁꽁 얼어 그들의 주검을 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바래버린 면류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시들고 말라버린 꽃들이 아무리 자신의 모습을 과시한들 볼품없는 형체입니다.

 

본문의 죽은 행실에서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죽음, 곧 거듭나지 못했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했어도 육신이 있으므로 행동을 합니다. 그 행동을 신앙 차원에서 죽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신앙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행동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듭났어도 여전히 육신을 따라 죽은 행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믿는 사람들의 육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육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듭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말도 하고, 죽은 자가 사랑도 하고, 죽은 자가 왕래하기도 하며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행실입니다. 좋은 열매가 없는 행동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 사라지는 행동입니다. 시체를 오래 두면 썩어 악취가 납니다. 그 악취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역겨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 냄새를 모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죽은 행실에 대한 냄새를 압니다.

 

죽은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딤전5:5 이하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죽은 행실을 하는 사람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재림 때까지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긴 과부들입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이 바울 당시 과부들에 대한 말씀일지라도,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일락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15: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관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은 행실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생활이 허랑방탕한 생활이며 세상과 벗하는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2:1이하에는 죽은 행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죽은 행실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풍속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마귀의 영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셋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행위입니다.

 

세상 풍속은 세시 풍속과 유행 등을 말합니다. 또한 시대마다 흐르는 사상 풍조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따라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신자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행동하는 것 역시 세상풍속을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은 유행을 따르거나 세상 풍속을 따를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14:6). 신앙인들이 은사가 있다면, 하나님께 전심전력하기 위하여 홀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19:12, 고전7:34,38).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면 남녀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사이 신혼부부들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는 살아보고 하겠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재산상에 있어서 부부가 갖는 불이익을 갖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지 않는 것 역시 요사이 흐르는 세상 풍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이해되지만,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길러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기독교인들이 자녀를 갖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죽은 행실의 또 하나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행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합니다. 거역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들어갑니다. 부모님께 거역하면 마귀가 들어가고, 웃어른께 거역하면 마귀가 들어갑니다. 물론 주 안에서 순종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6:1). 순종은 십자가입니다(2:8). 십자가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9:23), 자기 의견을 접는 것은 혼적인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행실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감입니다. 육체의 특징은 정과 욕심입니다. 자신의 기분대로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거기에서 일락이 나오고 허랑방탕함이 나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하지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8:13). 영적인 삶은 거듭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행위를 말하며 선한 양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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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죽은 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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