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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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먼저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회사에서의 진급이나 군대에서의 진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할 때 구성원들 사이에는 불평불만이 쏟아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원칙을 깨뜨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은 사람보다 신앙에 있어서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이유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공회의원이면서 부자였던 한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왔지만 많은 재산을 팔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19:21-22). 반면에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9:9, 5:11). 바울 사도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3:13-14). 이처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의 조건은 주님을 믿는데 지장이 되는 것을 버리는 데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7).

 

예수님의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의 비유는 포도원의 품꾼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20:1-16).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당 15만 원을 주기로 약속하고, 새벽 여섯 시에 일군을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 장터에 가보니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 역시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정오에도, 오후 세 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보니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아직 일을 찾지 못하고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 포도원 주인은 일과를 마치게 하고 일군들에게 삯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뜻밖에 십오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오후 세 시에 시작한 사람과 정오에 시작한 사람, 오전 아홉 시에 시작한 사람, 새벽 여섯 시에 시작한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들에게 줄 몫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15만 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따지듯 말하였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20:12).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4-15).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온 사람의 차이가 본문 가운데 드러나지 않지만 먼저 온 사람들의 말에 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20:12).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의 말 속에는 기쁨으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시간만 일을 한 사람들의 태도는 다를 것입니다. 그동안 수십 곳에 서류를 집어넣었지만 통과되지 않다가 뒤늦게 그를 고용해준 주인이 너무나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이 천국에 합당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마음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과 보답하는 자세, 기쁨으로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먼저 온 자가 먼저 될 기회는 늦게 온 자가 먼저 되는 기회보다 훨씬 많습니다. 바로 많은 시간 때문입니다. 그 시간들을 허투로 쓰지 않는다면 영적인 성장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인한 교만과, 타성에 젖은 태도가 뒤처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온 자로서 계속 먼저 되기 위해서는 나중 온 사람처럼 보답하는 자세와 겸손한 태도와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셋째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경우로는 회개 여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21:28).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대답하였지만, 곧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첫째 아들보다 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하고 순종한 세리와 창기들이, 말뿐이며 행함이 없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21:3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 맺은 사람들을 먼저 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 얻는 사람이 적은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결론적으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13:30)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버렸는지, 겸손과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썼는지 여부가 먼저 된 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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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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