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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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유신 정권 때 명동성당 측에서 영국 시인(겸 극작가)인 T. S. 엘리엇의 극시(劇詩) 한 편을 공연하려고 계획했다가 당국의 간섭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그만둔 일이 있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대성당의 살인’(1935)이었고, 그 내용은 12세기의 영국 왕 헨리 2세와 그가 임명한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 사이에 벌어진 긴장과 갈등의 한 비화(悲話)였다. 이 극시가 공연 예정 작품으로 선택되었던 것은 당시(유신 시절)의 우리나라의 사정이 아무래도 ‘대성당에서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영국의 당시 사정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의 영국 왕 헨리 2세는 왕권의 대표적 존재였고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는 교권의 상징이었다고 하겠는데, 당시의 왕권과 교권이 서로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의 양상을 보여주었던 것이 우리나라의 유신 시대에 드러난 국권과 교권의 대결 양상과 상호 흡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독재자로 몰리고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민주화 투쟁의 본산지와도 같았던 명동성당 간의 대결의 처지가 마치 헨리 2세와 토머스 베케트의 상호 대결의 처지와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영국 왕 헨리 2세는 교권을 자기의 왕권 아래에 두려고 노력하였다. 캔터베리의 전임(前任) 대주교가 죽자 왕은 제 측근이라고 여겨왔던 토머스 베케트를 후임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베케트 대주교가 왕의 손아귀에 장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왕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져 있었다. 결국 둘 사이의 파국이 다가오고 만 것이다. 베케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164년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거기에서의 망명생활이 무려 6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이 대주교를 핍박해 성직자가 외국으로 도피하게 되었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은 왕에게 결코 유리할 리 없었다. 결국 다른 이유까지 겹쳐 있었던 왕은 베케트와 타협하는 길을 터서, 베케트는 오랜만(1170년)에 캔터베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왕과 대주교의 관계가 금방 개선되지는 못했다. 자기가 영국에 없는 동안에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헨리 2세가 고위 성직자들을 자기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음을 알게 된 베케트 대주교는 왕에게 포섭되어 있었던 요크의 주교와 런던의 주교 등을 파문해버렸다. 이 일로 결국 헨리 2세의 분노가 극에 다다랐다. “누가 저 인간 좀 어째버릴 수 없을까?” 정도의 이미지가 풍기는 혼잣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충성스런 기사들 네 명이 캔터베리로 급행하였고, 그들은 성당 안에서 기도 준비 중인 베케트 대주교를 밖으로 끌어내어 포획하려고 하였다. 베케트가 밖으로 끌려 나가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짜고짜 달려들어 대주교를 처참하게 난도질해버렸다. 대륙에서 영국으로 되돌아온 지 1개월이 채 못 된 때였다. 이날이 1170년 12월 29일이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베케트 살해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에드워드 그림이란 사람은 얼마 후(1172년)에 ‘토머스 베케트의 삶’이란 책을 내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세 번째 기사가 그에게 끔찍한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그의 머리 일부분이 나머지 부분에서 떨어져 나갔고, 머리에서는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또 영문학 초기의 걸작 중의 하나인 제프리 초서의 서사 운문 작품 ‘캔터베리 이야기’는 성스러운 순교 유적지를 찾아 런던에서 캔터베리로 향하는 14세기 후반의 순례자들 한 무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토머스 베케트 성인의 유해가 묻힌 캔터베리의 베케트 묘지였다. 그는 그만큼 모든 신자들의 숭배와 추모의 대상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다소 변칙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우리가 잘 아는 헨리 8세는 1540년에 토머스 베케트 성인의 묘소를 파헤치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베케트의 유골은 땅위에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숭배되어야 할 성인이 또다시 권력에 의해 수난당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작가 이우혁의 판타지 소설 ‘퇴마록(세계편2)’에까지 나타나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베케트의 십자가”가 지니고 있는 위력이 세상의 사악한 것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몇 년 전(2015)에는 지난날 권력의 간섭으로 공연하지 못했던 엘리엇의 극시 ‘대성당의 살인’이 초동교회에서 공연된 일이 있었다. 토머스 베케트의 위대한 정신은 그가 죽어 오래돼서도 이렇게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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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반복될 수 있을 역사 이야기-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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