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2(토)
 
10-1.jpg
 1511년 6월, 이슬람권 메카에서, 최초의 커피재판이 열렸다. 커피가 든 그릇을 피의자로 세워놓고 진행된 재판은 ‘커피가 사람을 취하게 하는 작용이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판결은 ‘유죄’였고, ‘커피 판매와 소비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내린다. 그러나 몇 달 후 카이로의 상급 당국이 이 판결을 뒤집어버렸다.    
로마교황 클레멘스 8세는 가톨릭교회가 커피를 용납할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커피가 아직 보편적인 음료가 되어 있지 않은 터여서, 커피에 대해서는 식물학자나 의학자, 중에서도 당시의 중심적인 의학연구기관이던 파도바대학의 의사들 말고는 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커피를 반대하는 것은 거의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커피는 이슬람교도의 음료이기 때문에 악마의 음료이니 금해달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이슬람교도는 그리스도교도의 성스러운 음료인 와인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악마가 그들에게 커피를 주어서 벌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베네치아의 한 장사꾼이 수입해두었던 소량의 커피를 가지고 교황 앞에 선다. 교황이 먼저 커피의 맛을 보았다는데, 전설이 되어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처음 맛본 커피의 맛에 반해버린 교황 클레멘스8세가 말했다나 ‘악마의 음료가 이렇게 맛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으냐, 그렇다면 커피에게 세례를 주어 크리스천의 음료가 되게 하면 될 것을..’ 교황이 판결을 내린 것은 그가 서거하기 직전인 1605년. 하마터면 유럽에서 커피가 공인된 음료가 되는 것은 훨씬 더 늦어질 뻔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사이, 이국정서가 넘쳐 나는 새 음료는 서유럽각지에 번져 나갔다. 1650년대에는 영국에, 1660년대에는 네덜란드 암스텔담과 하그에도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서방에 커피가 보급되면서 커피하우스가 술집을 대신하여 고급스럽고 지적인 사교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국 런던에 최초로 커피하우스가 나타난 것은 찰스1세가 왕위쟁탈전에 밀려 처형되어 내전이 종결하고 나서였다. 청교도 크롬웰이 정권을 잡았을 무렵,  청교도 시대와 더불어, 더러웠던 술집을 대신해서 품위와 절도를 갖춘 사교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1658년 크롬웰 사후, 세론이 군주제 부활로 기울어진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정복구의 길을 열면서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토론과 음모의 중심공간으로 변모한다. 같은 시기, 상업중심 도시로 발전되고 있던 런던에서, 커피하우스는 상인들이 드나들기에 편안하면서도 품위 있는 공간이 된다.    
당연히 커피의 등장을 반대하는 축도 나타나게 마련. 밀려난 술집 주인과 와인 상인 말고도 커피의 유독성을 믿는 의사들이 반대파로 나서는가하면, 아라비아커피에 대한 비판여론을 이용해서, 커피하우스는 시민이 시간을 낭비하고 중요한 일을 등한시 하게 한다고 논하는 비평가도 등장한다. 커피 찬성파와 반대파가 내놓는 판 프렛이나 광고지가 꽤나 거리를 어지럽게도 했다. 여성들 중에는 남편들의 커피과용이 성생활을 등한하게 한다는 호소를 내놓기도 했다.
마침내 찰스 2세가 나선다. 1675년 12월 29일, 찰스는 ‘커피하우스 금지선언’을 공포한다. 그러나 많은 시민이 금지선언을 무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500파운드를 내고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면 6개월간 장사를 해도 좋다’는 공고를 내게 된다. 실은 왕도 커피를 끊을 수 없었다나.
커피소동은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수출된다. 1671년 말세이유에서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자 의사들이 건강을 빌미로 커피를 공격하고 나섰다. 알고 보니 커피의 인기를 두려워하는 와인상인들의 농간이었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독일에서도 커피는 인가를 얻는다. 요한 세바스천 바흐는 <커피 칸타타>를 써서 의학적으로 커피를 비판했던 사람들을 풍자하기도 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커피 소동이 일어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혁명정부가 미군 PT를 통해서 밀수입되는 커피를 막기 위해서 다방에서 수입커피를 팔지 못하게 하는 대신 콩으로 만든 ‘콩피’를 팔게 했지만, 실패했다.
최근 이란에서 카페가 탄압을 받고 있다는 외신보도를 접한다. 경찰이 열흘 동안 547개 업소의 문을 닫게 하고 11명을 체포했다는 데, 문을 닫은 카페의 죄목인즉 ‘비습관적인 인터넷 광고 행위’ ‘법적으로 금지된 노래 재생’ ‘방탕행위’들이라고 하니, 17세기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 재탕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enoin34@naver.com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커피 소동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