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영 천 목사 /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왜 그 장면이 지금도 나의 머리에서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나는 거기에서 이른바 아녀자(兒女子)들의 서글픔 같은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린이와 여자들’의 서글픈 삶의 역사,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던 것 같다. 왕 헨리8세는 후계자가 될 왕자를 낳지 못한 죄(?)에다가 엉뚱하게도 딸의 왕위계승권까지 주창한 앤을 간통죄로 누명을 씌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다. 그 결과가 어린 딸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이후(일생 동안) 어머니 없는 아이가 되어 홀로 외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주로 방콕 신세가 되어, 막강한 리모콘 운영권을 지닌 나의 내자가 즐겨 시청하는 중국 역사드라마를 나도 모르게 그냥 따라보는 시간이 많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도 흥미를 크게 느끼게 된 중국 사극이 ‘사마의2-최후의 승자’란 TV극이었다. 이 극이 끝나고 났음에도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 장면이 위나라의 세 번째 황제 치하에서 ‘대장군’직을 지녔던 조상 장군과 그의 어린 아들이 모반죄로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때의 모습과, 특히 처형장에서 어린 아들이 죽어가던 때의 그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당시 모반죄는 3족을 멸한다는 법에 의해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린 아들까지 함께 처형장으로 압송해 갔던 것이었는데, 자기가 무슨 일로 손이 묶이어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세 살의 어린 아들이, 길가에서 민요를 부르며 따라오는 동네 어린이들의 그 흥겨운 노랫가락 때문이었는지 자기도 흥이 나서 개구쟁이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따라가고 있는 장면이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더욱 시청자들을 울렸던 결정적인 장면은 어린 아들이 참형을 당할 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의 어미가 옆에 놓인 약사발을 들어 아들에게 먹여주려 애를 쓰고, 아들은 그 물이 역해서인지 그걸 거듭 뱉어내고 하면서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처절한 장면이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야만 했던가? 한마디로 ‘욕망’ 때문이었다. 대장군 조상이 나이 어린 황제를 퇴위시키고 그 자리를 자기네가 빼앗고 싶어 했던 그 권력욕이 부른 참극이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모반죄로 참형을 당하는 일이야 자기 책임 때문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더라도,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의 목숨까지 희생시켜야만 했는가 물었을 때 그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그 욕망 때문에 죄 없는 그의 ‘아들과 아내’가 함께 극단의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니, 나는 여기서 예의 그 ‘아녀자(兒女子)들의 서글픔’ 같은 것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녀자(兒女子)란 말은 한마디로 약자라는 말과도 같다. 약자라고 표현하기가 무엇한 아녀자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녀자란 말 속에는 약자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지 않나 여겨진다. 이는 미국사회에서 흑인이란 말 속에 약자라는 뜻이 깃들어 있는 경우와도 유사하다. 흑인들 가운데서도 약자 아닌 강자, 이를테면 위대한 스포츠맨이나 이름난 연예인처럼 몇몇의 흑인들은 확실히 강자임에 틀림없지만, 일반적으로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들로 인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우리 사회에서 아녀자들은 일반적으로 약자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강자인 성인(成人) 남성 중심의 지배 사회가 오래 지속되어온 결과라고 보겠다.
그런데 요즘 들어 미투(me-too)운동의 여파 때문에서인지, 어떻든 여성들의 파워가 점차 강해져가고 있는 현 추세라고 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일반적으로 아녀자들 모두가 강자로 인식될 정도로의 환경 변화가 그렇게 빨리 다가올 것 같지는 않다. ‘박사방’이니, ‘n번방’이니 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타산지석으로 가르쳐 주었듯이, 우리는 강자인 성인 남성 중심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약자인 아녀자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그런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이 ‘가정의 달’을 맞아 새로이 다짐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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