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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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 손에 겨우 감길만한 16개월 된 아기가 온 몸의 뼈는 골절되고, 장이 터져 나갔다. 뱃속 가득히 피가 고여 울음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폭력은 계속됐을 것이다.

 

정말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의 잔인함이다. 뉴스를 보며 악마를 보았다는 말이 무색한 것은 악마를 넘어선 잔인함은 물론이고, 일말의 죄책조차 없는 뻔뻔함 때문이다. 제발 이 뉴스가 현실 아닌 영화이길 바랄 정도로, 눈을 감고 싶었고, 귀를 닫고 싶었다.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상하려만 해도 발끝부터 저려오는 몸서림은 정인이가 겪었을 고통의 1/100도 체감치 못할 비겁한 어른의 무관심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 모든 학대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양모의 부친이 바로 목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준다. 더구나 목사의 사모이자 양모의 모친은 바로 어린이집의 원장, 윤리와 도덕, 사랑과 포용의 상징적 인물인 그들은 악마를 키워낸 장본인들이었다. 정인의 양모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온 악마는 아니었을 테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싹틔웠을 악의 씨앗이 목회자 부모가 일군 결과물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다. 양모가 보여준 악마의 끔직한 본성은 그 부모의 얼굴을 투영한다. ‘목사와 악마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두 존재의 공존을 목도함은 우리 의 역사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긋남의 시작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어느 순간 한국교회의 윤리 기준은 그 중심점이 심히 낮아졌다. 종교인으로서의 완벽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해가 자연스러워졌다. 목회자의 양심도 법이 판단하는 시대가 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일 뿐인 법을 지키며, 그것을 심히 당당해 하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윤리 의식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절대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의 현실을 대변할 수는 없다. 냉정히 지극히 예외인 경우로, 이를 교회, 목회자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죄해야 한다. 정인이의 죽음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무관심의 학대였다. 모두가 가해자였고, 죄인이다. 이러한 사건이 우리사회에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회는 책임이 있다. 윤리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책임은 정인이에 대한 사죄와 별개로 우리가 마땅한 짊어져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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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정인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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