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2(목)
 

한국기독교회사’(1.2.3) 방대한 자료로 정리 출간

교계와 학계에 한국교회사에 대한 역사 인식 지평 넓혀

 

박정규 박사.jpg

 

경기 여주군 가남면 출신... 어머니의 신앙 영향

 

두암 박용규(頭巖 朴容奎)1956119,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삼군리에서 부친 박부석과 모친 유내석 사이에 5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삼군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할머니와 외할머니도 삼군교회를 섬겼지만, 부친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교회에 출석했다.

두암은 유년 시절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교사들이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에 심취하여, 그 때의 이야기들이 지금도 선하게 기억된다고 술회하고 있다(신학지남 2020 여름호 p.9).

1962년 동리에서 2Km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는 가남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5학년 때 신증후군에 걸려 1년 간 휴학한 후 어렵게 졸업하고, 이천읍에 있는 이천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증후군이 다시 재발하여 1년을 쉰 뒤 겨우?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신증후군은 성균관대학교에 진학 후에도 그를 괴롭혀 학창 시절을 질병과 함께 지냈으나, 이후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해 주셨고,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의 지도로 1982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는 총신대 신대원을 이수 한 후, 미국?웨스턴에반제리칼신학교(Western Evangelical Seminary)의 장학금으로 해외?유학의 길에 올라 M.A 과정을 마치고, 다시 신학석사(Th.M) 과정을 밟기 위해 일리노이 주에 있는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으로 옮겨 그곳에서 저명한 마크놀 박사, 데이빗 웰스 박사, 우드브릿지 박사, 스위니 박사 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운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30여년 간 교회사 가르쳐 두암은 10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12월에 귀국해 그 해 3월 학기부터 자신의 출신학교인 총신대 신대원에서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로서 총신대 신대원 교수로 있는 이영식 박사는 두암의 저술활동을 평가하는 글에서 다음의 7가지 특징을 분석하였다.

첫째, 그는 자신의 연구 활동을 통하여 평소 지론이었던 "교회를 위한 신학"을 구현했다고 규정한다. 목회자 양성소인 신학대학원은 매우 중요하다. 목사후보생 한 사람이 미래의 한국교회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저술과 연구에 있어서 원자료 및 의미있는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적실한 해석을 통하여 총체적인 역사방법을 모색하며 제시했다. 그는 역사의식의 중요성과 역사방법론을 신학(神學)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셋째, 그의 방대한 <한국기독교회사(1,2,3)>는 수많은 참고자료에 대한 철저한 사료분석과 성실한 전개를 통해서 출판됨으로 한국 교계와 학계에 획기적인 역사서로 부상했다. 일연의 한국기독교의 통사를 구성하면서 한국교회사 학계에 기념비적인 저술로 자리 잡았다.

넷째, 그의 저술 작품에는 교회사와 일반사가 종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대하(大河)와 같은 역사의 중심에는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다는 것을 자주 드러낸다.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도 성령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면서 성도들의 열망을 촉구하고 있다.

다섯째, 그의 작품에는 한국교회의 복음전파의 사명과 복음의 순수성 회복, 그리고 교회가 처한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놓치지 않고 계승해야 할 본질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초기 한국교회의 선진들은 말씀에 생명을 걸었고,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신사참배와 모진 박해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이단들과 자유주의 신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계승하고, 조국을 향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여 3.1독립운동에 앞장 섰고, 사회를 계몽하고 개혁시켜 나갔으며,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섯째, 역사 속에 묻혀있을 뻔한 생생한 사료들을 발굴하여 평양대부흥운동과 후속 저술들을 출판하고 언론에 연재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열망을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곱째, 그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진리수호에 대한 열정으로 이단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단에 대해 논문 게재와 발표 및 세미나를 개최했고, 한기총의 이단해제를 반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다.(같은 책 pp.266-267).

 

한국장로교 연구에 중요한 공헌

 

또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은선 박사는 박용규 박사 은퇴를 기념하는 논문 "박용규 교수와 한국장로교회 연구"에서, 박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의 형성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전해준 정확무오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 프린스턴학파의 성경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였다. 프린스턴의 성경관은 스코틀랜드의 상식 실재론의 보편적 인식원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져 성경의 무오(無誤, inerancy)를 보장하는 유기적 완전 축자영감론이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혁주의는 청교도개혁파 복음주의, 장로교 개혁주의 그리고 화란 개혁주의이며, 청교도 개혁주의에서 교리, 문화, 경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을 제시한다고 보고 있다. 그 증거로 첫째, 복음전파에서는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 선교사 토마스(Thomas), 권서로 와서 구약 번역에 기여한 유대인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Peters), 복음전파 및 교육과 사회적 책임을 다해 개혁주의 이상을 실현한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를 논하였다. 그리고 마팻(Samuel Moffett)을 중심으로 한 매코믹신학교 출신들은 조선 서북지방의 복음화와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장로교의 뿌리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공부 중심의 네비우스(J. Nevius) 선교방식을 채택하여 주일학교의 건실한 성장과 사경회 중심의 한국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둘째, 교육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과 독노회 설립, 12신조 채택, 1912년의 총회 설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대해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그 연속 선상의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총회 100년사를 기획히여 대표집필하였다. 12신조에 대하여는 엄격한 칼빈주의에 미치지 못하고 복음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측면과 장로교회를 연합시키는 측면을 고찰하였다.

셋째, 대사회적 책임에 대해 장로교가 105인 사건과 3.1운동에서 담당한 중요한 역할을 규명하였고, 개별교회로서는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산정현교회와 강규찬 목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운동의 보루로서의 산정현교회를 탐구하였다. 그리고 193912월 평양임시노회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면직시킨 것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사면시킨 것이란 것을 밝혔고,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최봉석과 손양원 목사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해방 후에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WCC에 대한 견해 차이라는 것을 밝혔고,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의 주역들인 박형룡, 한경직, 김재준에 대해 박형룡은 정통주의 신학자, 한경직은 온건한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목회자, 김재준은 칼 바르트 신학에 입각한 진보주의자로 평가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아래서 복음주의 이해

 

두암이 한국장로교회를 연구하면서 했던 중요한 공헌은 한국교회가 그 시대에 찾아야 할 시대적 과제와 의미를 남보다 먼저 발굴하고 연구했다는 선견의 소유자였다고 하겠다. 두암은 2000년에 이미 <평양대부흥운동>을 저술했고, 연이어 <총신대학교 100년사><총회 100년사>, 그리고<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운 평양장대현교회>, <제주교회사>를 저술하여 복음주의 역사관을 나타냈다. (신학지남 2020 여름호, pp.187-189).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도 박용규 박사 은퇴기념논문집에 기고한 '박용규 교수와 개혁파 복음주의'란 글에서 두암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에 대하여 세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첫째, 박용규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예장합동측의 근본주의적인 모습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를 전후해서 ICCC와 연결됨으로서 근본주의와 정통주의를 혼동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전천년설은 교회를 사회로부터 도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복음주의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셋째, 박 교수는 오순절운동에 대해서 그 부흥운동적인 열정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신앙이 정통신학의 범주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그룹이 오순절운동이다. 박 교수는 이런 오순절운동이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WCC 등 진보신학과 타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장로교 보수 신학자의 입장에서 오순절운동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박용규 교수 자신이 속해 있는 장로교 합동측의 신학, 즉 개혁주의 전통 아래에서 복음주의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신학적 틀에서 다른 운동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신학지남 2020 여름호, pp.214-217).

필자는 이제 한국교회에 기여한 그의 학문활동과 교수 사역을 넘어 원로학자로서 더 큰 기여를 기대하면서, 한국교회 1대 교회사가들의 미진했던 부분의 역사를 2000년대까지 취급, 정리연구해 간행한 공로는 한국교회 후학들에게 큰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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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두암 박용규 박사(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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