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해받는 북한교회와 한국교회의 침묵
"포장된 평화와 선조들의 값 비싼 믿음을 바꾸어도 되는 것입니까?”
두만강 처소에서 양육한 북한형제
“선생님은 언제든 한국에 나가시면 괜찮겠지만 나는 이제 북한 땅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같이하던 동무들과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합니까!”
2000년대 초반 조·중 국경의 두만강 상류의 00처소에서 ‘일대일 양육’을 한지 4일째 되던 날 철수 형제가 ‘시험’이라는 주제를 마치고 나서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던 질문입니다.
철수 형제! 지금 공부한 주제에서 성경구절은 외웠습니까?
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아! 그렇지요! 하나님이 능히 피할 길을 주시고 감당하게도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철수 형제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그렇지요. 지켜주신다고 했디요. 이젠 아무 걱정안해도 되갔지요. 그렇지요!”
5박6일 동안에 ‘파송’까지 마친 주일 날 둘이서의 예배를 마치고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 백성이 되느냐고 하는 물음에, 그 날 저녁 교회 담임 목회자 부부(양육받은 사역자)가 참여한 가운데 세례를 베풀었으며 다음 날 새벽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엔 눈물의 성찬까지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를 보내며 말했습니다. 철수 형제는 이제 조선의 인민일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같이 하셨는지를 나에게 간증해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20년의 시간이 다가 옵니다만 난 한 번도 철수 형제에게서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북·미 회담에 가려진 북한교회의 실상
6.12일 미·북 정상회담의 성패를 앞두고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그 진정성에 대한 우려도 증폭되고 있습니다. 민족의 생존과 운명이 달려있는 이 중대한 문제를 앞에 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며 기도했던 예례미야의 심정을 살피며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이 어떠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교회가 당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1999년부터 두만강 유역에 발을 딛고 지금까지 그 뜻을 찾는 본 사역자가, 아직도 끊이지 않는 박해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북한교회와 그 역사의 실상’을 다시 보고합니다.
김일성 시대의 교회 박해와 그 실상(1945~1994)/교회가 다 말살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분단 이후 정치적 회유와 압박의 혼란기에 북한의 교회는 해체되었으며, 6.25를 지나면서 남은 교회와 성도가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렇게 발각된 성도들은 순교와 강재노역으로 멸절되어 갔습니다. 6/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와선 한국교회에서도 북한에 교회와 성도가 과연 존립하는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북한교회는 교회와 성도가 멸절되어 가던 암흑의 시기 40여 년 동안에 비약적으로 부흥하던 한국교회와는 일절 단절돼 있었고, 단 한 번의 선교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교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박해의 상징성. 김일성의 교회 핍박에 대한 가장 실증적인 증거는 1945년에 북한에서 핍박을 피해 남한에 온 목사들과 신도들입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45년 12월 2일에 한경직목사 중심으로 설립된 “영락교회”(예장통합)와 또한 북한 출신 김창인목사가 6.25때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한에 내려와서 이룬 “충현교회”(예장합동)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발전역사에 크다란 족적을 남긴 북한 출신의 지도자들과 그 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은 북한교회의 핍박과 그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김정일 시대의 성도 박해(1994 ~2011)/환란을 통한 새로운 성도들의 출생
“북한에 교회가 과연 존립하는가”하는 물음은 90년대에 기근과 홍수로 인한 식량사태가 그 답을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식량사태가 심각했던 1990년 중반에서 2003년 경까지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땅 8개 시·현의 조선족교회에는 탈북 유민 북한교인들이 자유로이 출석(30-40%)했으며, 심지어 북한사람들만 모이는(100여명) 교회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엔 탈북자들에 대한 제재가 전혀 없었으며 사역자 본인이 10톤이 넘는 차량에 국제난민 기구의 비상식량 / 서바이블킷을 싣고 이틀에 걸쳐서 ‘두만강 상류의 화룡시 숭선 지역부터 하류인 훈춘시의 경신’까지 식량배급 처소인 / 조선족교회를 다녀도 중국 공안,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단 한 차례의 검문, 검색도 받아 본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제난민 기구의 식량배급 창고로 연길시의 북쪽/북대, 지역의 폐학교 건물을 사용했었는데, 그곳에서 숙식하며 작업하였던 사람들 30여 명이 모두 탈북자들이였습니다.
강제압송과 새로운 북한교회 출생 그리고 죽음과 핍박. 도강을 통해 복음을 접했거나 또 중국땅에 거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이 2003년을 기점으로 모두 강제 북송되어 오늘의 북한성도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믿음의 댓가로 엄청난 핍박을 받아 북한 땅은 순교의 피로 다시 물들었는데, 알려진 사실 중에 200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가족 10여 명이 두만강의 식량 배급처소에서 받은 성경을 보급하다 국가반란 죄목으로 총살 당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2005년 평안남도 남포시 주민 102명이 예배를 드리다 적발돼 40명은 총살 당하고, 62명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15관리소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출생한 북한의 성도들은 통치자의 권력을 위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김정은 시대의 박해(2011~2018년 현재) / 박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정일 시대 후반까지 근근이 이어오던 친척 방문이나 북한 내 장마당을 통한 성도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도 통제되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북한내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의 국경지역까지 와서 북한성도와 연관된 교회나 관계처소, 인물들을 납치하거나 습격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2015년에 발생한 조선족 목회자 한충렬목사의 살해 사건”입니다. 당시 한충렬 목사는 백두산, 중국명 창빠이시의 조선족 목회자로 북한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사실 조선족의 현직 목회자가 북한사역을 한다는 것은 중국에서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긴 하였지만, 북한의 공작원들이 중국땅, 그것도 교회 근처까지 와서 목사를 칼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는 것은 김정은 정권이 어떻게 기독교를 핍박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으며, 자신과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과 어떠한 두려움도 모른다는 무모한 박해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가 받은 박해의 의미
나는 1980년도 말 영국의 런던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청빙을 받아 담임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절 90년대 초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유럽 목회자 세미나”가 로마에서 열렸었는데, 그때 성지순례로 갔던 곳이 ‘카타콤’이였습니다.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으로 피해 들었던 곳! 끝을 모르는 깊은 지하에 수 없이 많은 미로와 같은 길을 내고, 오직 믿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생명을 내걸고 예배하며 살다 묻혔던 그들이 남긴 고통과 박해의 현장이 오늘도 우리 앞에 성지순례길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듬해에 목회자 세미나가 열렸던 곳이 터키였는데, 그곳 사도 바울의 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례하고 갑바도기아 지역의 석회동굴 속에서 새처럼 둥지를 틀고 그 척박한 곳에서 믿음을 위해 살았던 2~3세기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느낀 점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생존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과, 수 세대를 걸쳐가며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참혹한 삶의 고통과 희생을 받았다는 남은 흔적들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갇힌 하나님의 백성과 우상화 된 북한의 체제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의 변방 산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두만강 유역에 아시아의 철광산지역으로 유명한 북한 함경북도의 무산시가 있습니다. 한때 이 지역을 통해서 많은 탈북자와 중국에 머물렀던 탈북유민, 그리고 식량과 의약품을 구해갔던 도강자(강을 건너는 사람들)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때 내가 “두만강프로젝트”사역을 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10대 소년들이 영하 30도의 추위에 헐 벗은 몸으로 식량자루를 메고 가다 돌아서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30대가 되었을 그의 모습을 저 역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먼저 복음을 받은 시어머니의 전도를 받고 와서 양육과 세례를 받은 두 아들을 군인으로 두고 있던 공상당원이었던 아주머니, 평양과 신의주를 다녀오며 수 년간 일꾼 사역을 하다 발각되어 잡혀가던 군용트럭에서 뛰어내렸는데 척추가 부려져 죽은, 항상 웃는 얼굴의 명순이 자매님!
또한 해산이 임박한 산모가 태어날 생명의 양식을 위해 도강하다 우리처소 앞 볏짚 더미에서 출산고통 중에 발견되어 도움을 받고 아기와 함께 믿음의 사람이 되어 돌아가 선 큰 아들을 데려와 함께 신실한 일꾼/사역자가 되었던 분! 이같이 다 기록할 수 없는 두만강이 낳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30여 만의 북한 성도가 지금은 체제의 종이 되고 통치자의 노예가 되어 저 땅에서 고난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도올립니다!
저 북한 땅에서 교회와 믿음을 지키겠다고 남았던,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교회와 성도들을 다 멸절시키고, 당신이 진노로 허무신 담을 넘어 활란 중에 새로이 태어난 성도들을 다시 잡아가두고, 이제는 어린 생명들까지 더욱 핍박하는 저 우상화 된 백두혈통 통치체제를 언제까지 용납하시는 것입니까 ?
그리고 같은 믿음의 터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세계의 비상한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저 신뢰를 잃어버린 통치자에 대하여! 오늘도 끊이지 않는 핍박을 당하고 있는 북한의 성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침묵’을 하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과연 ‘포장된 평화와 선조들의 값 비싼 믿음을 바꾸어도’ 되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언제든 한국에 나가시면 괜찮겠지만 나는 이제 북한 땅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같이하던 동무들과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합니까!”
2000년대 초반 조·중 국경의 두만강 상류의 00처소에서 ‘일대일 양육’을 한지 4일째 되던 날 철수 형제가 ‘시험’이라는 주제를 마치고 나서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던 질문입니다.
철수 형제! 지금 공부한 주제에서 성경구절은 외웠습니까?
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아! 그렇지요! 하나님이 능히 피할 길을 주시고 감당하게도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철수 형제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그렇지요. 지켜주신다고 했디요. 이젠 아무 걱정안해도 되갔지요. 그렇지요!”
5박6일 동안에 ‘파송’까지 마친 주일 날 둘이서의 예배를 마치고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 백성이 되느냐고 하는 물음에, 그 날 저녁 교회 담임 목회자 부부(양육받은 사역자)가 참여한 가운데 세례를 베풀었으며 다음 날 새벽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엔 눈물의 성찬까지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를 보내며 말했습니다. 철수 형제는 이제 조선의 인민일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같이 하셨는지를 나에게 간증해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20년의 시간이 다가 옵니다만 난 한 번도 철수 형제에게서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북·미 회담에 가려진 북한교회의 실상
6.12일 미·북 정상회담의 성패를 앞두고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그 진정성에 대한 우려도 증폭되고 있습니다. 민족의 생존과 운명이 달려있는 이 중대한 문제를 앞에 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며 기도했던 예례미야의 심정을 살피며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이 어떠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교회가 당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1999년부터 두만강 유역에 발을 딛고 지금까지 그 뜻을 찾는 본 사역자가, 아직도 끊이지 않는 박해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북한교회와 그 역사의 실상’을 다시 보고합니다.
김일성 시대의 교회 박해와 그 실상(1945~1994)/교회가 다 말살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분단 이후 정치적 회유와 압박의 혼란기에 북한의 교회는 해체되었으며, 6.25를 지나면서 남은 교회와 성도가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렇게 발각된 성도들은 순교와 강재노역으로 멸절되어 갔습니다. 6/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와선 한국교회에서도 북한에 교회와 성도가 과연 존립하는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북한교회는 교회와 성도가 멸절되어 가던 암흑의 시기 40여 년 동안에 비약적으로 부흥하던 한국교회와는 일절 단절돼 있었고, 단 한 번의 선교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교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박해의 상징성. 김일성의 교회 핍박에 대한 가장 실증적인 증거는 1945년에 북한에서 핍박을 피해 남한에 온 목사들과 신도들입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45년 12월 2일에 한경직목사 중심으로 설립된 “영락교회”(예장통합)와 또한 북한 출신 김창인목사가 6.25때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한에 내려와서 이룬 “충현교회”(예장합동)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발전역사에 크다란 족적을 남긴 북한 출신의 지도자들과 그 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은 북한교회의 핍박과 그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김정일 시대의 성도 박해(1994 ~2011)/환란을 통한 새로운 성도들의 출생
“북한에 교회가 과연 존립하는가”하는 물음은 90년대에 기근과 홍수로 인한 식량사태가 그 답을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식량사태가 심각했던 1990년 중반에서 2003년 경까지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땅 8개 시·현의 조선족교회에는 탈북 유민 북한교인들이 자유로이 출석(30-40%)했으며, 심지어 북한사람들만 모이는(100여명) 교회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엔 탈북자들에 대한 제재가 전혀 없었으며 사역자 본인이 10톤이 넘는 차량에 국제난민 기구의 비상식량 / 서바이블킷을 싣고 이틀에 걸쳐서 ‘두만강 상류의 화룡시 숭선 지역부터 하류인 훈춘시의 경신’까지 식량배급 처소인 / 조선족교회를 다녀도 중국 공안,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단 한 차례의 검문, 검색도 받아 본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제난민 기구의 식량배급 창고로 연길시의 북쪽/북대, 지역의 폐학교 건물을 사용했었는데, 그곳에서 숙식하며 작업하였던 사람들 30여 명이 모두 탈북자들이였습니다.
강제압송과 새로운 북한교회 출생 그리고 죽음과 핍박. 도강을 통해 복음을 접했거나 또 중국땅에 거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이 2003년을 기점으로 모두 강제 북송되어 오늘의 북한성도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믿음의 댓가로 엄청난 핍박을 받아 북한 땅은 순교의 피로 다시 물들었는데, 알려진 사실 중에 200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가족 10여 명이 두만강의 식량 배급처소에서 받은 성경을 보급하다 국가반란 죄목으로 총살 당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2005년 평안남도 남포시 주민 102명이 예배를 드리다 적발돼 40명은 총살 당하고, 62명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15관리소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출생한 북한의 성도들은 통치자의 권력을 위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김정은 시대의 박해(2011~2018년 현재) / 박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정일 시대 후반까지 근근이 이어오던 친척 방문이나 북한 내 장마당을 통한 성도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도 통제되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북한내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의 국경지역까지 와서 북한성도와 연관된 교회나 관계처소, 인물들을 납치하거나 습격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2015년에 발생한 조선족 목회자 한충렬목사의 살해 사건”입니다. 당시 한충렬 목사는 백두산, 중국명 창빠이시의 조선족 목회자로 북한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사실 조선족의 현직 목회자가 북한사역을 한다는 것은 중국에서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긴 하였지만, 북한의 공작원들이 중국땅, 그것도 교회 근처까지 와서 목사를 칼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는 것은 김정은 정권이 어떻게 기독교를 핍박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으며, 자신과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과 어떠한 두려움도 모른다는 무모한 박해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가 받은 박해의 의미
나는 1980년도 말 영국의 런던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청빙을 받아 담임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절 90년대 초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유럽 목회자 세미나”가 로마에서 열렸었는데, 그때 성지순례로 갔던 곳이 ‘카타콤’이였습니다.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으로 피해 들었던 곳! 끝을 모르는 깊은 지하에 수 없이 많은 미로와 같은 길을 내고, 오직 믿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생명을 내걸고 예배하며 살다 묻혔던 그들이 남긴 고통과 박해의 현장이 오늘도 우리 앞에 성지순례길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듬해에 목회자 세미나가 열렸던 곳이 터키였는데, 그곳 사도 바울의 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례하고 갑바도기아 지역의 석회동굴 속에서 새처럼 둥지를 틀고 그 척박한 곳에서 믿음을 위해 살았던 2~3세기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느낀 점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생존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과, 수 세대를 걸쳐가며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참혹한 삶의 고통과 희생을 받았다는 남은 흔적들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갇힌 하나님의 백성과 우상화 된 북한의 체제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의 변방 산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두만강 유역에 아시아의 철광산지역으로 유명한 북한 함경북도의 무산시가 있습니다. 한때 이 지역을 통해서 많은 탈북자와 중국에 머물렀던 탈북유민, 그리고 식량과 의약품을 구해갔던 도강자(강을 건너는 사람들)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때 내가 “두만강프로젝트”사역을 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10대 소년들이 영하 30도의 추위에 헐 벗은 몸으로 식량자루를 메고 가다 돌아서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30대가 되었을 그의 모습을 저 역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먼저 복음을 받은 시어머니의 전도를 받고 와서 양육과 세례를 받은 두 아들을 군인으로 두고 있던 공상당원이었던 아주머니, 평양과 신의주를 다녀오며 수 년간 일꾼 사역을 하다 발각되어 잡혀가던 군용트럭에서 뛰어내렸는데 척추가 부려져 죽은, 항상 웃는 얼굴의 명순이 자매님!
또한 해산이 임박한 산모가 태어날 생명의 양식을 위해 도강하다 우리처소 앞 볏짚 더미에서 출산고통 중에 발견되어 도움을 받고 아기와 함께 믿음의 사람이 되어 돌아가 선 큰 아들을 데려와 함께 신실한 일꾼/사역자가 되었던 분! 이같이 다 기록할 수 없는 두만강이 낳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30여 만의 북한 성도가 지금은 체제의 종이 되고 통치자의 노예가 되어 저 땅에서 고난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도올립니다!
저 북한 땅에서 교회와 믿음을 지키겠다고 남았던,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교회와 성도들을 다 멸절시키고, 당신이 진노로 허무신 담을 넘어 활란 중에 새로이 태어난 성도들을 다시 잡아가두고, 이제는 어린 생명들까지 더욱 핍박하는 저 우상화 된 백두혈통 통치체제를 언제까지 용납하시는 것입니까 ?
그리고 같은 믿음의 터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세계의 비상한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저 신뢰를 잃어버린 통치자에 대하여! 오늘도 끊이지 않는 핍박을 당하고 있는 북한의 성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침묵’을 하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과연 ‘포장된 평화와 선조들의 값 비싼 믿음을 바꾸어도’ 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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