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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일사 주재용 박사(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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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1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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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박사(서울교회사 연구소장/ 대신대 전 한국교회사 교수)

기독교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중교회사관주창

<한국기독교100년사>, 민중사관에 따라 다섯 시기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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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사학자

일사 주재용(一史 朱在鏞) 박사는 19331031,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하리에서 태어나 초중등교육은 고향에서 마치고, 고등학교는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83월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 진학하여 19652월 한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마친 후, 학교에 조교로 남아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육군 군목생활과 19746월 카나다 몬트리얼에 있는 맥길대학교에서 학위(Ph.D)를 위한 유학생활을 제외하면 평생을 신학교육과 교육행정으로, 때로는 신학관계의 연합회 기관장으로만 생을 일관하였다.

일사는 한신대에서만 일생을 몸담아 성직자로, 교육자로 일관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19992월에 간행된 그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교회·역사·신학' 간행사에서, 이쾌재 목사는 "지난 날의 일사 선생은 활동 영역이 매우 광범하였습니다. 교회사를 전공하는 신학자로, 목회자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자로, 교회의 설교자로, 저술가로, 각종 기독교 연론매체와 출판사들의 논설 또는 편집위원으로, 교회사학회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동북아시아신학협의회 핵심 지도자로, WCC 각 위원회의 한국대표로, 그 밖에도 의식개혁운동이나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등 그의 활동은 실로 폭 넓고 다양한 면모를 보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일사 선생은 어느 한 측면에서만 평가한다면 더 많은 다른 측면들을 간과하게 되고, 따라서 그를 공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신대 학장 및 총장 등 학교 발전에 공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사 선생의 진면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가 한신대의 학장과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신대의 발전을 위하여 온 몸을 받쳐옴으로써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문민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학내외의 온갖 시련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신대의 건설을 집요하게 주도해 나갔습니다. 한편 결코 쉽다고 볼 수 없는 기장교단과의 관계도 정연한 논리와 설득력으로 잘 풀어가며 원만하게 이끌어왔습니다... 하지만 일사 선생에 대하여 늘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게 명석하고 치밀한 학문적 자질을 타고난 일사 선생이 오랜 기간의 총장직 수행에서 오는 학문적 공백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이 말은 교회사 학자로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아직도 매우 크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 은퇴 기념논문집은 공직생활에서 해방된 일사의 학문적 완성을 촉구하는 독촉장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라고, 그의 공적과 아쉬움을 극명하게 토로한 글을 마치고 있다.

또 그의 기념논문집에는 그의 스승인 한신대 명예교수 이장식 박사가 쓴 '스승이 보는 주재용 교수'란 글이 실려 있다. "내가 한신대에서 교무과장으로 일을 때, 그는 군목에서 제대하여 한신대 교무과 직원으로 취직하였다. 그는 이미 대학원에서 신약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앞으로 교회사로 전공을 바꾸 겠다고 하여 대학원의 내 교회사 과목 몇 가지를 수강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김정준 학장의 소개로 캐나다 몬트리얼에 있는 맥길대학 신학부로 유학차 떠났다. 신약학과 교회사는 밀절한 관계가 있어서 신약 전공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옮기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두 분야의 학문의 패턴은 많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성서학은 주석, 본문비평, 성서우너어 등 꼼꼼하고 치밀한 학문이고, 교회사학은 다독을 통해서 상대적 비평과 종합적 판단을 내리는 학문이다."

그후 이장식 박사가 미국 예일대학 연구교수로 갔을 때(1968), 캐나다에 가서 유학하고 있는 주재용을 만났는데 졸업논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네스토리우스 연구로 제목을 제의하여 주 박사의 논문은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교회사학자들 가운데 네스토리아니즘 관계 논문을 쓴 이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이 열전을 쓰면서 발견하게 되었다. 한신대 명예교수 이장식 박사, 한신대 재직 중인 황정욱 박사, 작고한 장신대 김광수 박사, 수원중앙교회 이경운 박사(한국경교역사연구원장) 등이 있다.

한국교회가 130여년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한국교회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전문학자가 생기게 되자,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교회사관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백낙준 박사의 '선교사관'(宣敎史觀)을 비롯하여, 민경배교수의 민족교회사관(民族敎會史觀)에 이어, 소위 민중교회사관(民衆敎會史觀)을 주창한 이가 바로 주재용 박사이다. 그는 1984년 한국기독교100주년을 기해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역사편찬위원회가 기획한 <한국기독교100년사>라는 대작을 출간했을 때, 주재용 박사가 집필자로 민중교회사관의 입장에서 집필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즉 일사는 백낙준의 선교사관과 민경배의 민족교회사관을 넘어서 소위 민중교회사관을 제시하면서, 이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개신교회100년사를 들여다 본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의 '민중운동'과 기독교 '민중운동'은 긴밀한 관계

주 박사는 1970년대 이후 문학계와 신학계의 관심을 모았던 '민중'(民衆)의 개념을 한 마디로 기득권자들에 의해 눌린 자요, 소외된 자로서 예수의 주 관심이 되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한국기독교100년사 p.266)라고 정의한다.

주 박사는 연속적인 민족의 수난사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혁명적인 전환시대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이 '민중'의 정체성을 중요시 하면서 한국의 기독교를 한국사의 맥락에서 그리고 한국사를 한국기독교적 맥락에서 들여다 본다. 이 때에 중요한 것은 한국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의식 구조 형성 혹은 한국의 역사 현실에 대한 의식 구조인 바, 저자는 한국교회의 100년사에 있어서 기독교 민중의 역사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일사 주재용은 한국사의 민중운동과 기독교 민중운동의 상호 긴밀한 관계를 보면 한국기독교100년사를 자신의 민중사관에 따라 다섯 시기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기독교 수용기(1876-1896), 일사가 1885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국을 우리나라 기독교 수용기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1876년으로 본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1876년에 이미 만주에서 존 맥켄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조선에 최초로 성경이 전해진지 이미 60년이 된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이 해는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진 해로 쇄국정책의 종식으로 문호가 개방되면서 외세에 의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개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해였기 때문이다(100년사 p.267). 1896년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에 의해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독립협회가 창립되던 해였다. 민족자주의식이 싹터 오르던 해라는 말이다. 그리고 1882-1886년 사이에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되었고, 1893년에는 존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포함하는 10개 조항의 선교정책이 확정되었다.

나아가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갑오경쟁(1894), 전봉준의 동학란(1894), 청일전쟁(1895), 민비시해사건(1895), 아관파천(1896) 등은 조선 민중들 사이에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고, 독립협회의 창립은 기독교적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일사는 1800년 이후 조선조의 '외척세도정치'로 인한 정치. 경제의 몰락과 이에 따른 민중의 피해를 묘사하면서, 특히 1860년대의 진주민란에서 1894년 동학란에 이르는 여러 민중의거를 열거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이같은 민중의 항거 정신에 떨어졌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의 보편사 속에서 꿈틀거리던 민중의 얼 속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짐으로써 한국개신교는 쉽게 민중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 다고 본다(같은 책 p.271).

둘째, 민중교회의 형성기(1896-1919), 일사는 1896년부터 한국개신교가 보다 더 민중에 의해서 주도되는 교회로 본다. 그는 1896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창립으로 시작하여 1898년에 열린 민중대회 성격의 '만민공동회'는 이 시기의 한국개신교가 정치와 사회참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이 만민공동회는 대정부 규탄문을 채택했는데, 외국에 대한 이권허용 규탄, 침해된 주권수호, 정부의 부정과 무능. 부패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때에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독립협회가 해산되었다.

이와같은 반기독교운동과 아울러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원칙을 강권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한국개신교의 비정치화의 시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사는 이로인해 1895-1905년 사이에는 민중 기독교인들의 수가 급증했다고 보고 그 이유를 1895년의 청일전쟁과 민비시해사건 및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1905년 이래의 외세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엄청난 민중 기독교인의 숫적 증가로 보는 것이다. 이같은 민중 기독교인들의 숫적 증가를 단순히 타계신앙이나 신비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보지 않고 1910년대의 독립과 민권운동을 준비하는 교인들의 신앙훈련이었고 회개운동이었다고 본다. 이후 국권회복운동으로 진행된 3.1운동마저 민중운동으로 치부하고 있다.

셋째, 비정치화 시기(1919-1932), 일사는 한국사와 한국개신교사가 1920년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으로 본다. 1920년의 보통학교의 증설, 언론기관의 설립허가(조선· 동아), 1920년 이후 계속된 미곡증산계획 등은 일제 치하의 조선총독부의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농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전락시켰다. 이 시기의 한국개신교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 던 농민들의 삶에 그들의 항일운동에 호흡을 같이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같은 책 p.276). 물론 일사는 1920년대에 교회 안밖에서 있었던 농민운동을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1920년대에 일기 시작한 공산사회주의 사상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만 본다. 이같은 운동은 민족주의적 의식화 작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계몽단계에 머문 것으로만 치부한다. 이 시기의 개신교회는 역사의식의 결여에 있었다고 한다. 그 실례를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변성욱의 조선기독교를 거론하면서 종파운동으로 진화하였다고 한다.

넷째,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기(1932-1960), 일사는 1920년대 한국개신교의 역사의식 상실과 정체성 위기가 1930년대 이후 포로기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교회는 굴복했다. 한국교회는 교리와 전래 등 신학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교권의 노예가 되었다. 한국개신교는 자유당 정권에 노예가 되어 그 부정과 부패의 역사에 가담했다. 이 기간에 새신학사상을 전개했던 김재준 역시 교회 밖의 문제들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다음 기독청년학생들이 기독교에 새롭게 도전하는 세력이었다.

다섯째, 각성기(1960년 이후), 일사는 19604.19 학생의거를 3.1운동의 정신과 자유민권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한국개신교는 이 역사적 사건의 도전으로 선교적 사명을 다시 시작했다(같은 책 p.280)고 본다. 그는 기독교 민중들의 역사참여 혹은 사회참여를 가치있게 보면서 민중사관에 입각한 시대 구분을 시도하였다.

 

"일사의 민중교회사관은 해방신학의 영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였던 이형기 박사는 주재용의 이같은 민중교회사관에 대하여, 주재용이 주장하는 민중교회사관은 교회사관 중의 하나로는 손색이 없는 역사관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사의 민중교회사관은 확실히 1960년대에 등장한 민중신학에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정희 군사독재와 그의 유신체제하에서 민중의 인권이 유린되고 민주화가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1970년대에 한국의 개신교 지성인들이 결국 민중신학을 탄생시켰다. 이 신학은 중남미의 해방신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이 해방신학에 영향 받은 여성신학, 흑인신학 및 아시아 아프리카신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학이다. 이 해방신학은 기존의 경제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막시즘을 사용한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막시즘적인 경제사회의 구조적 갈등을 문제 삼고 해방을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신학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고 교회의 역사로 연결되는 구속사 보다 보편사 속으로 흐르고 있는 해방의 역사를 더 높이 평가한다. 주재용의 민중사관은 민중을 정의함에 있어서 해방신학적 갈등구조와는 약간 다른 구조를 지향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역사 사회를 갈등구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경향은 복음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변증법이 아니라, 역사 내적인 내재적 변증법으로 나간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주재용은 한국의 보편사 속에서 꿈틀거리던 민중의 얼 속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짐으로써 한국개신교는 쉽게 민중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보편사 속에서 묻어나는 해방의 역사이고, 구속사와 교회역사는 이 보편사 속의 해방의 역사를 위해서 봉사하는 바, 결국 종말론적으로는 구속사와 교회사는 보편사적 해방 속으로 용해되고 마는 것이다. 그가 기독교 민중의 역사참여 축소지향적으로 나간다면 결국 해방신학의 경향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주재용 퇴임 기념논문집, 1999, 한신대출판부 p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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