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한국 기독교의 사회개혁 지도력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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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수년 전 보수계 교단연합단체인 한기총의 분열로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전혀 교계 지도자감이 안되는 각 교단 인사들이 자파 교단의 총회장 자리 하나씩 차지한 경력을 빌미로 돈 몇 푼씩 들고 나와 교계연합단체에서교권행사를 하다가 결국 연합단체도 망가뜨리고, 자신도 망해갔다.

 

이후 한교연과 한교총이 연이어 발족했으나, 어떤 연합체도 교계의 대표성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한 정부의 교회에 대한 강압조치로 한국교회는 회복키 어려운 폐해를 입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한국교회뿐 아니라, 우리사회의 통합과 개혁에 커다란 손실로 작용하게 될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2024년 새해를?열면서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 중 하나가 곧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이다.

 

지금은 22대 총선을 앞두고 있어 우리사회 전반이 정치권에 휘둘리고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여기에는 특히 한국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에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로서 불교와 유교가 기능하고 있고, 한국 천주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역시 사회적 지도력으로 볼 때 기독교(개신교)에 비견하기 어렵다.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은 우리사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는 기독교 외에 어떤 종교적 이념이나 정치 이념도, 사회 개혁이나 통합 이념으로 내세울 만한 사상이 없다.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근대화와 사회개혁을 과감히 지향해 왔다. 근대 학교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서구 선진문화의 창구역할을 통한 사회지도자 양성, 사회개혁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전래의 가치관과 풍속을 타파하는 일 등은 오늘날 우리사회를 선진국으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한국기독교는 70-80년대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통한 사회정의와 시대적 양심의 기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사회로부터 기독교가 외면 당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먼저 우리 내면에 있다. 첫째는 교단의 분열이다.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이민교회를 모태로 하기 때문에 서구에서 발생한 많은 '교파주의' 교회가 이식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교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교파에서 수많은 '교단'이 나뉘었다는 것이다. 같은 교리, 같은 신학,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교파에서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교회는 세계에서 한국교회 밖에 없다. 특히 한국장로교회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그러다보니 교단연합단체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둘째는 초기 사회개혁의 명분으로 삼아 왔던 미신이 교회 안에 기복주의로 변질해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복주의는 사회개혁이나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독선적 경직성과 부패현상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무서운 적이다.

 

셋째는 이런 문제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신학적 활동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현재 교계에는 신학대학이 60여 개에 이르고,여기에 종사하는 신학자만 해도 1000여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작금의 한국 신학계는 교단신학의 교권적 강화에 기여할 뿐, 교회개혁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 이들 신학교가 교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보수주의 신앙에 입각한 교회제일주의로 나타나 정통과 다른 체험은 무조건 부정되는 이단시비로 발전하게 되고, 대사회적으로는 현대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는 교회지상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결국 한국교회로 하여금 사회개혁에 지도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땅히 통일한국의 사상적 토대를 기독교에서 찾아야 하는데, 기독교마저 갈갈이 짖어져 있으니 그 기대가 난망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교회관' 바뀌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에는 6만여 개가 넘는 교회당과 3만 개가 넘는 잘 건축된 예배당, 수백억원씩 들여서 지은 산속의 기도원, 20만이 넘는 안수받은 목사, 1천만에 이르는 신도가 있다. 이것만 보면 한국기독교는 탄탄대로를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흥망은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갑자기 나타난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교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일이 있다. 영국은 성공회와 침례교와 감리교와 구세구과 퀘이커의 고향이고,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낳은 위대한 신앙전통을 가진 기독교 나라이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는 세계교회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는 무엇보다 교회본질의 회복이 요구되고 있다. 그래야만 500, 1000년의 한국교회를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는 교회(에클레시아)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로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의와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이다. 우리 자신인 것이다. 절대로 건축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입으로는 교회란 에배를 위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그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그 공간을 '교회' 또는 '성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인들이 힘에 겹도록 대출을 받아서라도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짓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예배당 크기가 마치 그 교회 신도들의 신앙의 척도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회''교회당'이 구분되지 않아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 교회는 그 교회당에 모이는 믿는 사람들이다. 한국천주교는 '교회''성당'을 명확히 구분한다. 성당은 교인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 곳이다. 중국교회는 '교회''교당'을 구분한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교회''교회당'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당을 팔면서도 교회를 판다고 한다.

둘째는 설교자들의 기복적 메시지의 문제이다. 작금 한국교계에서 괘 이름있는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기복과 축복만 강조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의 자유에 대한 말씀을 듣기 어렵다. 누가 어떻게 예수를 잘 믿어 얼마큼 큰 돈을 벌어 예배당을 잘 지었다. 누가 어떤 중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기적같이 나았다. 믿는 자는 이런 축복을 받는다는 따위만 강조된다. 이런 것은 설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성과 지성은 무시된 채 맹신과 광신이 믿음인양 떠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인류 지성사를 이끌어온 기독교의 논리와 지성은 간데 없고 무지와 억지만 난무하는 꼴이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의 수준이라면 한국교회도 오래지 않아 우리사회에서 영국교회처럼 '교회가 사라지는 때'를 맞이하게 될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한국기독교 교회관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강춘오 발행인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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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한국교회가 기도해야 할 가장 우선적 문제는 연합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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