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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 제5회 총회장 양전백(梁甸伯)목사
    평북 의주 출신양전백(梁甸伯 1870.3.10~1933.1.17)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출생하였다. 9살 되던 해에 가산이 기울어져 생활고로 할 수 없이 구성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유교가문 출신 유학자 이정로(李珽魯)의 문하생으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김관근의 전도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학에서 깨닫지 못한 진리를 기독교 복음을 통하여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후 자기가 살고 있는 구성에서 한문과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구성에 최초로 신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함으로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서울에서 마팻(馬布三悅)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자마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가 세운 신시교회를 돌보게 된다. 그 사이 청일전쟁이 끝나자 마팻 선교사를 만나 그간의 자신의 활동을 보고했는데, 보고를 듣고 있던 마팻이 그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당돌함에 큰 감명을 받고 놀라 곧 그를 조사(助師)로 임명하였다.1896년부터 같은 북장로교 소속 위대모(Norman C. Whittem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그의 선교구역인 평안북도 일대를 순회하다가 선천(宣川)에 자리를 잡았다. 선천읍교회에서 장로 장립1897년에 선천읍교회를 담임하면서 모여드는 조선 청소년들을 그냥 놓아둘 수 없어서 명신학교를 설립해 자신이 교장이 되었다. 선천읍교회에서는 그의 신앙에 감동되어 1902년에 그를 선천읍교회 초대 장로(長老)로 세웠다. 그를 유심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양전백 장로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시켰고,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9개월간 목회 현장 실습기간에 그곳의 뜻있는 유지들과 선교사들의 협조를 얻어 신성학교(信聖學校)를 설립하였다.양전백은 3년간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드디어 190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총회를 섬겨운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31 참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최초 7인 목사 중 한 분졸업하던 그해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에 양전백을 포함한 장로회신학교 졸업생 7인이 목사안수를 함께 받고 노회원이 되어 내일의 조선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었고, 그때로부터 선교사들의 보조역할을 초월해 같은 동역자로서, 때로는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함께 조선교회를 이끌어가는 일꾼이 된 것이다.양전백 목사는 장로 출신 목사로 평북지방 대리회의 순회전도사가 되어 평안북도 초산, 위원, 강계, 자성지역을 맡아 압록강 건너 편에 있는 즙안, 통화, 회인현까지 관장하였다. 그의 활동력과 실력을 인정한 평앙선교부는 1909년 양전백을 다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소속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그를 정식 임명하였다.제3회 총회 부총회장 거쳐 제5회 총회장에 선출1912년 처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자 그는 제3회 총회 부회장으로 선임이 되었고, 노회적으로 총회 안에서 목회자로 교계 지도자로 성장해 가던 양전백 목사는 1916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평양 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회집된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목사 장로 각각 67명, 선교사 회원 50명이 회집한 가운데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양전백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7인 가운데 조신인으로는 김필수 목사에 이어 두번째로 교단장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양전백 목사가 피선되었던 제5회 총회에서 처리된 몇 가지 결의안을 살펴보면, 그동안 장로회신학교의 이사(理事)는 미북장로회와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와 카나다선교회 등 4개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로만 독점되어 온 것을, 한국교회의 전체를 아우르는 소위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취지로 조선에 장로교와 함께 입국하여 선교해 오고 있는 감리교와 연합하는 공의회(公議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했으며, 신학교 이사에도 조선인 목사 3인을 파송 선교사와 함께 참여시켜 신학교를 운영해 가기로 하였다.교단 소식지 기독신보 창간 이 총회에서 공의회 조직 준비위원으로 총회장 양전백을 비롯, 서기 함태영 목사, 배유지 증경총회장, 배위량 선교사 등이 선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단소식지로 기독신보(基督新報)를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발행하기로 하여 1916년 12월 8일 창간하기도 하였다.한편 경상남북도를 한 노회로 하던 행정구역을 경북·경남 노회로 분리하기로 의결하였으며, 북평안노회 역시 교세의 증가로 북평안·산서(山西) 노회로 분리하기로 가결되었다(예장합동 제98회 총회 결의요람, 2013 서울, p.13 참조).양전백 목사는 이외에도 1908년에 선천에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보성여학교도 설립해 선교영역을 확대해 나갔으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민족독립운동가로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105인 사건 연루로 3년간 옥고, 3.1운동 33인 민족 대표1919년 3.1운동 거사계획에도 동참하여 독립선언서의 33인 서명인 중 기독교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춘수, 이갑성, 신석구 등과 함께 날인을 해 민족대표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출감 후 그는 1927년 조선장로교회 역사편찬의 책임을 지고 전국 각 지방 노회, 대리회를 통해 수집된 자료들을 정리해 총회에서 1928년 출간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長老會史記)를 집필 중 병고로 1933년 1월 17일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그의 장례식은 선천기독교연합 사회장으로 성대히 치루어졌고, 그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대통령장으로 추서하기도 하였다(교회사대사전① 기독지혜사, 강병도 1994, p.540 참조). 그는 한국기독교가 민족교회(民族敎會)임을 몸으로 보여준 행동하는 교회지도자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1-20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열전/ ㉗ 제45회·46회 총회장 한상동(韓尙東)목사
    경남 김해군 명지 출신한상동(韓尙東, 1901.7.30~1976.1.6)목사는 1901년 7월 30일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鳴旨)에서 한재훈(韓在勳)과 배봉애(裵奉愛) 사이에서 4남4여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때에 5촌 당숙인 한금출씨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어릴 때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10년에는 다대포에 있는 실용학교(實用學校)에서 수학하였는데 당시 교사였던 김성권으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애국정신을 배웠다. 1916년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본격적인 수학은 못하고, 1918년에는 자기의 모교였던 실용학교의 임시 교사로 부임하였다. 1921년 5월 31일 그의 나이 만 30세 되던 해에 동래군 기장면 김두천씨의 장녀인 김차숙과 결혼하였다.그해 9월부터 자신의 인생문제로 고민하다가 박창근(朴昌根)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1924년 4월부터 다대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3월 세례를 받은 그는 이전까지의 삶과는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으나 당시 완고하던 부모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다. 핍박은 정도 이상의 것이었다. 신자가 된 그가 가족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가적인 풍습인 조상제사 문제를 거역했기 때문이었다. 교회 출석을 하기 시작한 후 2년째 되던 해에 1926년 한씨 문중에서 파양선고(양자해제)를 받게 되었다.당시 무자한 가정에 양자를 삼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거절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청년신자 상동(尙東)에겐 자기와의 싸움이자 신앙의 길이 얼마나 험한 시련인가를 채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채험은 후일 조선교회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노진현과 함께 광림학교 교사 생활한상동이 교사로 있던 학교는 호주선교부가 1906년에 설립한 초등학교 과정의 학교로써 학생들이 100여명이되었고, 교사 역시 7,8명 정도 되는 소규모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교장은 예원배(Albert Wright) 선교사였다.이 학교에서 함께 교사로 일했던 노진현(盧震鉉)과는 이때부터 동료가 되었고 후에는 함께 목사의 길을 걸어갔다. 이들은 때로는 신앙의 동료로, 때로는 이견을 보이면서도 조선교회의 역사를 이어가는 기둥들이 되기도 하였다.한상동은 광림학교 교사로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교사로 1년 6개월간 일하던 그는 그 학교를 사면하고 1928년 서울에 있는 피어선고등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피어선(Dr.A.T.Pierson)을 기념하기 위해 1911년에 설립된 학교로써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는 학교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기치 못한 폐결핵으로 학교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는 고향 다대포로 돌아와 정양하던 중 경남노회 부인 전도회가 한상동으로 하여금 전도사로 일하게 주선하였는데, 그의 첫 목회지가 경남 고성군에 있는 학동(鶴洞)이었다. 이곳은 학림(鶴林)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는데 경남 부인전도회가 이미 김석진(金錫珍)씨를 파송 전도한 적이 있는 곳이었는데, 1928년 6월 한삼동을 파송해 전도하게 한 것이다. 이곳의 사역은 한상동에겐 최초의 목회경험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결신자를 얻게되어 새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초량교회 28회 당회록 1929. 5). 그후 그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 소재리로 가서 일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한상동은 몰라보게 건강을 회복해갔다.평양 장로회신학교 32회 졸업1933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3년의 과정을 마치고 김진홍 방지일 이유택 등과 함께 1937년 3월 32회로 졸업과 함께 그해 4월 부산초량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초량교회에 부임한 그는 1937년 5월 제39회 경남노회에서 정식으로 초량교회 강도사로 허락되었고 그해 12월 7일 향서교회에서 모인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상동 목사는 안수와 함께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로부터 위임목사 청빙을 받고 1938년 1월 6일 문창교회에서 위임식을 거행했다. 문창교회는 1903년 호주선교사였던 아담슨(Rev. A. Adamson) 선교사의 전도로 시작된 이 교회가 아마산지역 최초의 교회였고, 한석진 함태영 목사 등 유수한 목회자들이 목회했던 교회였다. 한목사가 부임하기 직전의 목사는 주기철(朱基徹) 목사였다. 그가 평양 산정현교회로 이거하게 되어 한상동 목사가 청빙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이 교회에 부름을 받기는 했으나 사역기간이 길지는 못하였다. 이때는 일제에 의해 신도국가주의(神道國家主義)가 고양되기 시작한 시기로 그의 목회 현장에 영적 전운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으로서는 이미 예견한 일이었지만 소위 시국인식이라는 이름아래 교회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일본의 정책에 순응할 것을 요구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목사는 문창교회 부임한지 두달 후 같은해 3월 6일 주일에 (3대탄식)이란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선의로 창조한 만물을 국가가 악의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만물들이 탄식한다며 신사참배 반대 의사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그후 1938년 9월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게 되자 한상동은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실의 한가운데 영적 투쟁의 지도자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신사참배 반대운동 주도 5년간 옥고그는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상 일제당국 뿐만 아니라 장로교 총회 결정에 반대하여 싸워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집에 칩거하면서 은밀하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939년 10월에는 밀양 마산교회에서 약 2개월간 시무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경남지역에서의 신사 불참배운동을 조직화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교회조직을 계획하였으나 주기철의 반대로 실행하지는 못하엿다. 주기철은 모든 점에서 한상동과 의견을 같이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들만의 새로운 치리회(治理會) 구성은 시기상조로 본다면서 반대하였다. 이에 한상동 목사는 최상점, 손명복, 이인제, 조수옥, 최덕지 등과 함께 이 지역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규합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사참배 행위는 범죄행위임을 인식시키는데 힘썼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이 조직화 되어가자 일제 당국은 소위 일제검거라는 이름으로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모두 검속하였다. 결국 한상동 목사도 1940년 7월 3일 체포되어 해방되기 직전까지 5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으로 2천여명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으며 최소 30명에서 5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해방과 함께 출옥 해방과 함께 8월 17일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한상동은 출옥한 동료들과 함께 평양에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교회가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은 것은 민주적 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했지만 한목사는 교회가 영적으로 패배한 이유을 신학교육의 실패에서 온 것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신학교육이 교회재건의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일찍이 감지하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신학에 맡길수 없다는 일념으로 정통신학을 수립하여 교회의 지표를 삼고자 하여 1946년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 설립하기로 가결하는 것을 보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하는 보수정통 총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착안하고 이 일에 주남선 목사와 함께 뜻을 모은다. 한상동은 주남선과 함께 뜻을 같이해 1946년 4월 서울에서 전 만주 동북신학교(東北神學校) 교수 박윤선을 만나 신학교 설립의 의견을 교환하고 협조를 얻게 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당시 경기노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조선신학교로 가느냐, 한상동이 구상하고 있는 신설될 신학교로 가느냐 고심끝에 한상동 목사의 신설신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그해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해 하사관 훈련수련관에서 박윤선 박사를 강사로 오늘의 고신대학교로 이어지는 첫 신학 강좌가 열였는데 수강생이 63명이었고, 그 중에 손명복, 이경석, 이인제, 홍반석, 최성용, 한영원 등이었다. 고려신학교 설립 및 고신교단 창설그는 한국장로교회를 이끌 수 있는 학교로써 옛 평양신학교를 이어 계승해 갈 수 있는 학교를 계획하고 당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박형룡(朴亨龍) 박사를 교장으로 모시기 위해 교섭위원으로 남영환을 보내 교장으로 취임해 달라고 하였으나 당시 국내에 유행하는 호열자의 발생으로 귀국이 잠시 지연되자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임시교장으로 하여 좌천동 일신여학교 교사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개교식은 김치선(金致善) 박사의 ‘신학과 신조’란 제목의 설교와 미국 정통장로교 소속 종군목사 뱃졸드(Rev. John Betzold)의 축사로 진행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임시 총회 중요결의안 등을 살펴보면, ① 1960년 12월 13일 승동교회의 속회 총회에서 고려파와 합동 원칙 방안을 결의 하다. ② I.C.C.C국제기독교연합회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기로 하다. ③ 권사의 연령을 50세 이상으로 개정하여 받기로 하다. ④ 강도사가 된자는 1년 후 해노회에서 목사 안수키로 하다. ⑤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를 통합하되 교사(校舍)는 서울에 두기로 하다. 1960년 9월 22일 승동교회에서 합동 하였으나 고신측의 일부가 옛 고신교단으로 복구선언함으로 한상동 목사는 고신으로 돌아가게 됨으로 예장 오늘의 합동측과 나누어지게 된 아쉬움으로 남이 있다고 하겠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1-12
  • 26. 제10회 총회장 이기풍(李基豊)목사
    평안도 평양 출신이기풍 목사(李基豊, 1865.12.23~ 1942.6.30)는 1865년 12월 23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순영리(남하수구리)에서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줄줄 외웠고, 12세 때 지방관청에서 실시하는 초시 백일장에 서 장원(莊元)으로 뽑혔다. 장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앞으로 큰 출세를 해 한자리 할 것이라고 찬사들이었다. 초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면 더욱 학업에 열중해 인격과 학문을 닦아야 하는데 기풍은 집필묵을 멀리하고 만다. 이 정신적 수모와 멸시를 푸는 방법으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며 분풀이로 주먹을 쓰기 시작했다. 말을 탄 평양좌수에게 갑자기 달려들어 다리를 덥석 쥐고 말에서 끌어내려 내동댕이 치면서 ‘이 고약한 진드기같은 놈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뱃가죽에 살이 디룩디룩 찐 날도둑놈 같으니라구’ 중얼거리며 거리를 활보하였다.그는 즉석에서 포졸들에게 묶여 투옥되어 꼬박 3개월을 유지장에서 살다가 출옥했다. 옥에서 나왔어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사무엘 마팻 선교사 테러몇년이 지난 후 하루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생전 구경 한번 한적없는 서양 코쟁이 한 사람이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기드문 큰 체구에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코쟁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비위가 상해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기풍은 당시 평양에 와 있던 사무엘 마팻(Rev. Samuel A.Moffett) 선교사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가만가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선교사가 자기 집에 막 들어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친구집에 찾아가 저 양코베기가 우리나라에 왜 왔는가? 저것들도 날도둑놈들이 아닌가? 저놈들을 우리나라에서 하루빨리 몰아내자고 부추겼다.얼마 후 우연히 장터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둘러섰는데 무슨 일인가 하여 어깨 넘어로 들여다보니 평양에서 쫓아내려던 바로 그 양코베기가 한 가운데 서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천당가고 안믿으면 지옥갑니다”라며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두리번 거리며 땅에 있는 돌맹이 몇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군중들은 이기풍이 무리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 둘 슬금슬금 피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기풍이는 “요새끼 잘 만났다. 내 돌 맛좀 봐라 하면서 몇번 선교사를 향해 던졌는데 돌 한 개가 마팻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는 그 자리에 꺼꾸러져 흘러내린 피가 땅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도 마팻을 일으키려고 하는 자들이 없고, 한 사람씩 불뿔이 흩어졌다. 그도 시치미를 떼고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는 또 평양 장대현교회 건축 현장에도 나타나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며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고, 문자 그대로 평양거리는 이기풍의 거리였다. 이러한 거리에 외국인이 나타났으니 이기풍이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던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외국인들이 우리 조선을 얕보고 어떤 구실을 삼아 점령할 것이라는 말에 이기풍은 ‘그럴 수 없다. 나혼자 힘으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이기풍의 회심이기풍은 그 날도 담뱃대에 그림을 그려 한 다발 묶어 들고 거리에 나가 전을 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 앞을 지나가는 서양인(西洋人) 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을 본 이기풍은 잊어버리고 있던 마팻 선교사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 서양인은 손에 전도지를 들고 있었고 예수를 전도하는 선교사였다. 이기풍은 그 사람을 마팻 목사로 착각하였다. 그 선교사는 원산(元山)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구역을 삼아 전도하다 평양에 잠시 들려 노방전도를 하던 스왈론(W.L.Swallon) 목사였다. 스왈론 선교사가 이기풍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기풍의 귀에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았다. 깜짝놀라 일어난 이기풍은 주섬주섬 깔아놓은 짐을 챙겨 도망을 쳤다. 집에 돌아온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마팻 선교사가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새벽녘이 되었을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기풍아,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잠에서 깨어난 기풍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원산에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때 그에게 전도하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침 그가 살고 있는 집을 알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기풍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우리 주님께서 형제를 사랑하고 계십니다”라며, 스왈론 선교사를 소개해 줬다.기풍을 알아본 스왈론(Swallon) 목사는 “잘 오셨습니다”라고 유창하게 조선말로 인사했다. 이기풍은 지난 이야기를 소상하게 보고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속죄의 길을 물었다. 스왈론 목사는 함께 기도해 주었다. 그때 이기풍은 눈물을 흘렸다. 스왈론 목사의 기도소리가 기풍의 영혼을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스왈론 목사는 기풍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형제여 당신의 죄는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기뻐하십시요.” 이 말을 들은 이기풍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후련하였다. 그간 지루했던 청일전쟁이 끝났다. 평양에도 평화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기풍은 원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기풍은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깡패가 아닌 유순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평양으로 돌아왔다.마팻 목사 찾아 용서 구해이기풍은 먼저 마팻 목사(S.Moffett)댁을 찾아갔다. 마팻은 이기풍은 알아보지 못했다. 이기풍은 마팻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구했다. “선교사님! 저를 아시겠습니까? 저는 평양 깡패 이기풍입니다. 선교사 댁에 돌을 던지고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는 선교사님에게 돌을 던진 불량배입니다.” 하고서 이기풍은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마팻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돌로 턱을 쳤다는 말에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형제여 울지 마시오. 모르고 한 일이니 다시 하지 않으면 되는 거요.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이기풍은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마팻은 “나는 벌써 용서하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마팻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기독교 교리를 말씀하였고 이기풍은 들으며 깨우침을…받게 되었다.(목회의 증언, 안재정 편, 도서출판 목양 1999. p.19-22).그리하여 이기풍은 1903년 평양신학교 첫 입학생이 되었고, 1907년 첫 열매로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목사가 되어 조선의 남단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907년은 평양대부흥의 기운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해였다. 한국장로교 최초 7인 목사로 안수받고 제주도 선교사로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이 모여 최초의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이 역사적인 창립노회 노회장으로 마팻 목사가 선출되었다. 여기에서 7명의 첫 조선인 목사가 임직되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기풍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초대교회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변화받아 바울이 되었던 것처럼, 깡패 이기풍이 조선교회의 지도자로 변신, 한국 초대교회 베드로 역할을 하게 될줄 주님 외에 누가 알았으리요. 처음엔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가는 일에 무슨 연유에서인지 마음이 약해져 있었을 때, 사모가 강력하게 그에게 항변을 하면서 “우리가 안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겠어요. 두말 말고 속히 떠납시다.”라면서 이기풍 목사를 다그쳤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는 사모는 다음에 제주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데려 가기로 하고 처음엔 혼자 입도하기로 하였다. 목포항을 떠난 여객선이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이기풍 목사는, 제주에서 상황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목포에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모를 제주도로 오게 하여 본격적인 선교사로, 목회자로써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제10회 총회장에 피선이기풍 목사는 1921년 9월 10일에서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회 총회부터 3회까지 선교사들이 이끌었던 총회를 7번째 조선인 목사로 영광되고도 어깨가 무거운 총회를 메고 가게 된 것이다. 이기풍 목사가 피선된 10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함남노회와 함북노회가 합쳐 3개 노회(함남, 함북, 간도)로 분리하기로 하다. ② 평남노회를 (평양, 평서, 안주) 3개 노회로 분립키로 하다. ③ 경북노회를 (경북, 경안) 2개 노회로 분립하기로 하다. 이기풍 목사는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 서서 일제와 투쟁 중 여수경찰서에 끌려가 수감됐다. 그는 밤마다 취조를 당하였으나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심한 구타로 끝내 몸이 쇄약해졌다. 그는 취조하는 일본경찰을 향해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배반할 것 같으냐? 일본 천황은 사람이요, 천조대신은 죽은 신이다”라며 끝까지 버티다가, 출옥 후 1942년 6월 20일 집에서 요양 중 순교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같은책, pp.50-52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0-29
  • 25. 제3회 총회장 배유지(裵裕祉 Bell Eugene)목사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배유지 선교사(1868.4.1~1925.9.28 裵裕祉)는 미국 켄터키주 스코트선교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목사로 1893년 내한하였다. 1891년 켄터키주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을 졸업하고, 1894년 켄터키신학교(Kenturky Seminary)를 졸업하였다.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서울에 도착해 전남선교부가 설치된 나주에 부임하였다.그해 9월 6일 나주읍에 최초로 나주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곳의 유림(儒林)들과 양반들의 텃세가 심해 외국인에 대한 반발이 커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897년 10월 1일 서해안에 새로 개항된 목포로 선교기지를 이동해 이듬해 목포선교지부를 개설하였으며, 뒤따라 부임한 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吳元) 및 여선교사(Straffer, Fredrica) 등과 함께 전도 및 부녀자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로 부임하기 전에는 하위렴(W.R.Harrison)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조선어 훈련을 먼저 받다. 배유지와 오웬 선교사는 나주에서 목포로 이동, 새로운 둥지를 잡고자 선교사역을 착수했으나 나주에서처럼 향교를 중심한 유림들과 양반들의 텃세 때문에 정착하는데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기독교문사 1982. p.745). 할 수 없이 그들은 변두리로 밀려나 유달산이 바라다 보이는 목포 양동 공동묘지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겨우 선교사들의 주택과 교회당을 겸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웬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 때문에 목포진료소를 설치할 수 있어 이를 매개로 주민들을 상대로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이곳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주로 해남, 진도, 완도, 강진, 장흥 지역민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오웬이 이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목포진료소 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소문이 나게 되었기 때문이다(총회를 섬겨온 일군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22-23).목포에 선교본부 설치하고 교회개척배유지 선교사는 선교방법의 일환으로 응접실을 설치하고 변창연(邊昌淵)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면서 결신자들을 위한 상담실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1900년 3월 5일 4명의 원입교인(原入敎人)으로 최초의 목포교회(木浦敎會)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해 여름에 이르러서는 30명의 세례(洗禮) 지원자 중 6명이 문답에 합격해 세례를 베풀었고, 8명의 원입교인이 증가해 꾸준하게 발전하여 갔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1901년 4월 순회전도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해, 배유지 목사는 부인(Lottie Withespoon Bell, 裵周良)을 잃었다. 그는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02년 가을에 다시 내한하여 목포지부에서 선교사역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1903년에 이르러서는 목표교회 교인수가 계속 증가하여 200명에 이르렀다. 배유지 목사는 200명 이상의 교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그는 석조(石造)예배당을 계획하고 목포교회 신축계획을 세우고 예배당을 완공하여 이곳 목포선교지에서 별세한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한 의미를 부여 <Lottie Whidespoon Beel>기념 교회당이라 명명하였다. 숭실학교 수피아여학교 설립이때 당시 목포 인근에는 이미 6개의 예배처소가 세워졌고 100명의 원입교인이 확보된 상태였다. 이리하여 1904년 봄에 개최된 선교연회(Mission Conference)에서 광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광주선교부 책임자로 결정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광주가 앞으로 행정구역 위치로 보아 전남지방의 중심 도시로 발전될 것을 예견하고 광주지부를 신설할 것에 대해 꿈을 꾸어 왔고, 오웬과 함께 1904년 12월 성탄절 아침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첫 광주교회(光州敎會, 현 광주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2004년에 광주제일교회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며 기념예배를 드렸으며 커다란 자연석에다 광주제일교회100주년기념비까지 세워 초창기에 이 지역에 와서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던 그들의 노고를 기억하였으며, 21세기를 향한 광주지역 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꿈을 안고 국내 개척선교를 비롯 해외선교사를 파송, 복음의 빚을 갚아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광주지역 선교의 포문1904년 12월 성탄절을 맞이해 그 축하예배를 자신의 사택 사랑방에서 집례함으로 광주지역 선교의 포문을 열었다. 이 모임은 1905년 1월부터 기도회(Pray Meeting) 모임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자 북문안(北門內)에 첫교회를 세운 것이 오늘의 광주제일교회의 전신이다. 6년 후 1910년에는 교인 총수가 500명을 기록하였다. 1908년 그의 사랑방에서 몇 사람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이듬해엔 남학생까지 모집해 성경을 가르친 것이 시초가 되어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가 세운 교회는 광주제일교회(양림동 소재)를 비롯해 송전교회, 장성군 모생리교회, 해남군 우수명교회, 곡성군 옥과리교회, 장성군 소룡리교회, 순창군 쌍계리교회, 해남군 신덕리교회, 장성읍교회, 광주월성리교회, 담양읍교회 등 수없이 많아 배유지 선교사야 말로 호남선교의 대부라 할만 한 선교열매를 거둔 선구자였다. 뿐만 아니라, 배유지 목사는 수년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직을 감당하며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영성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광주기독병원(당시 제중병원) 탄생에 산파역도 감당하였다.한국서 두 부인 잃고 끝내 자신도 순직1911년 10월 15일엔 전주에서 개최된 전라노회 창립노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1914년 황해도 재령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서 모인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선교사 총회장으로는 세번째) 피선되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한영제 편, 같은책 p.745). 총회장으로 당선된 배유지 목사는 이미 광주선교부를 신설하고, 1908년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세워 교회와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재임했던 장로교총회 중요결의 안건을 보면 △길림성과 만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다. △주공삼씨를 동경연합교회(현 동경한인교회) 선교사로 파송하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다(제98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안명환 편, 예장총회 2014, p.13참조).배유지 목사는 이 땅에 와서 두번째의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그것은 그의 둘째 부인(M.W. Bell)이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참상을 취재한 후 귀가 길에 교통사고로 순직한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선교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전라도지방 선교에 헌신, 전도자의 열정을 불태웠다. 배유지 선교사 자신도 격무에 과로로 결국 1925년 9월 28일 광주선교부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택이었던 양림동의 집은(2층 양옥) 현재까지 <벨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유족으로는 3남(Henry, Euqene, William) 1녀를 두었는데, 딸은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린턴(W.A Linton)의 부인이 되어 군산에서 선교하였다.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0-16
  • 24. 제40회 총회장 한경직(韓景職)목사
    평남 평원군 출신한경직(韓景職 1902.12.29~2000.4.19)목사는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태어났다. 간리는 평양 동북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옛날 원산(元山)에서 조랑말을 타고 평양으로 가던 선교사 한 분이 순천에서 자산 사인당으로 빠져야 할 길을 잘못하여 이 마을 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해는 저물고 갈 길을 더 갈 수 없어서 부득불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마을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중 청년 셋이 평양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함께 마을 동쪽 언덕위 돌매나무 밑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자작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온 동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한씨 문중에서만도 20여 가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마을 복음화에 정성을 쏟은 사람은 마포삼열(S.A. Moffeft)이었다. 마을 동쪽 고개 넘어 있는 법흥사 부속 건물을 헐어서 얻은 재목과 기와로 첫 예배당을 지었다. 처음 모여 예배를 드렸던 그 자리에 예배당을 지은 것이다. 장로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그대로 이 마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들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윗마을 동구밖에 학교를 세웠는데 이름을 진광학교(眞光學校)라 하였다. 설립자는 배위량(Rev. W.M.Bard) 선교사였다. 한목사가 10살되었을 때 어머니가 별세했다. 한목사는 어머니가 대단히 부지런하며 인자한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릴때 어머니를 따라 목화를 따러 다니던 일들과, 간혹 밤에 잠에서 깨어나 보면 어머니는 그때까지 물레질을 하며 가족들의 의복을 준비하던 일이 늘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고 하였다. 만혼을 한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두가지 결심을 했는데, 내가 만혼을 했으니 내 아들만은 일찍 결혼시켜야겠다는 것과 내가 배우지 못했으니 아들만은 힘 닿는데까지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한경직은 그래서인지 13살에 결혼을 하게된다. 부인은 뒷 동네에 살던 김씨댁 규수였는데, 연상이어서 살람살이에 능했다. 한목사가 남평양영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첫아이(순희)를 낳았고, 미국 유학시절에는 특별한 환경에 처해 있는 부녀자들을 위하여 세운 송현학교(松峴學校)에서 공부하여 어린딸을 키우며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한목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에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여서 폐결핵으로 2년간 투병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한목사가 살아있을 때에는 종종 부인 김찬번 여사를 가르켜 그이는 나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한목사가 영락교회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목회자로서 발돋음하게 된 뒤에는 말없이 희생적으로 보살폈던 김찬빈 사모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한경직목사 뒤에서 그림자처럼 건강을 챙기며 남편을 섬기던 감찬빈 여사가 갑자기 무릎관절에 고장이 생겨 투병 하다가 1974년 12월 31일에 먼저 주님의 품으로 안기게 되자. 그 어느 누구보다 당황하고 안타까워했던 사람이 한경직 목사였다. 오산학교에서 애국애족사상 전수한목사는 진광학교를 마치고 민족의 얼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해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을 만나 애국애족사상을 마음속 깊이 아로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평양숭실전문학교로 진학했다. 학교 건학 이념이 첫째 신앙, 둘째 애국, 셋째 과학의 교과로 숙지시키는 기독교정신에 기초한 초급교육으로 단단히 다졌다.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하기 위하여서 좀더 공부해야겠다는 비젼에 눈을 떳으나 학비가 문제였다. 이때 숭실대학교 교수로 있던 방위량(Rev.W.N.Blair 方偉良 D.D.) 선교사가 한목사에게 미국유학을 권유함과 유학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방목사 자신이 준비해 주었다(목회의 증언, 안재정 편, 도서출판 목양 1999 서울 p.176-178, 183). 문제는 한국에서 미국까지 가는 여비 가 해결되지 않아 염려하고 있던 차 남강 이승훈 선생을 찾아가 의논을 하는데 스승께서 추천 및 소개서를 두 통 써 주었다. 한 통은 K선생께, 또 한 통은 윤치호 선생에 가져갈 소개서였는데, 먼저 찾아간 K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두번째 윤치호 선생을 찾아가 추천서를 내 보였더니 당시 돈 100원을 선뜻 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하여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꼭 갚고 싶으면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도와주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목사는 100원을 준 그 의미를 평생을 새기며 목회와 고아원과 양로원 혹은 학교를 세우며 이웃과 민족을 위해 일하는 데 뜻을 두었다고 후일 후배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미국 엠포리아대학과 프린스톤 유학한목사는 처음에 캔사스주에 있는 명문사학 엠포리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는 장로교 계통의 대학답게 학생들에게 신앙지도에 철저를 기하는 학교였다. 이미 숭실대학에서도 교육받은 바 있었지만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기독교교육이었다. 학문 심오함과 공부의 매력을 이곳에서 더욱깊이 깨닫게 되었고 조국의 복음화에 견인차 역할을 해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한목사는 후일 후배들에게 엠포리아대학의 유학생활에 만족했고 학문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엠포리아대학을 마치고 프린스톤신학교로 가서 본격적인 신학을 터득하게 된다. 이 학교 재학 중 특히 구약학을 가르쳤던 스티븐슨 교장, 교회사를 가르쳤던 릿츨, 성서학을 가르쳤던 어도만, 희랍어의 메천교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린스톤신학교를 마치고 예일대학으로 가 교회사를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예기치 못한 건강에 이상이 왔다. 종합진단결과 당시 흔했던 결핵이었다. 예일신학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단념하고 뉴멕시코에 있는 엘바커크요양원으로 가 정양을 하게 되어 그곳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되고 치료가 잘되어 모교가 있는 평양(平壤)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숭신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 한편 모교 숭실대에서도 부름받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당국은 미국에서 선교사 밑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를 들어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예상치않은 신의주 제2교회로부터 부름을 받게된다. 어느날 김기범이란 분이 한목사를 찾아왔다. 자기는 신의주 제2교회 장로인데 우리교회 전도사로 초빙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달려왔노라고 했다.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김장로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당시 신의주 제2교회는 전임자(최득의목사)가 압록강 건너 안동현교회로 가고 은퇴한 최명준목사가 설교자로 임시 시무하고 있었다. 이곳에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회가 3000여명으로 성장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군들, 김수진, 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73). 공산당 박해 피해 월남, 영락교회 설립1945년 광복이 되었으나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남쪽엔 미군이 주둔해 이데올로기 대결로 북쪽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한목사는 월남하기로 작정하고 당시 백마에서 활동하던 윤하정 목사와 함께 김치선(전 숭실대총장, 법학자)의 안내로 1945년 10월 서울에 왔다. 그가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를 개척 시무했는데, 6.25전쟁으로 평안도 교인들이 서울로 피난오게 되어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성장하기에 이르렀다. 6.25전란으로 흩어졌던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신자들은 자연히 영락교회에 나오게 되니 고향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한편은 흩어졌던 이산가족들이 만나게 되는 영혼의 고향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모여드는 신자들을 천리교당을 인수한 건물로 수용할 수가 없어 1949년 돌예배당을 신축, 국내에는 물론 세계적인 장로교회로 발돋음하기에 이른다. 그는 기독교계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성직자로 목회자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무엇보다 교회적으로 민족복음화 전군신자화 세계복음화의 꿈을 안고 한국교회 여타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과 세계복음화에 앞장서 열심히 일하였다. 6.25직후 밥 피일스 박사, 빌리 그레이함 박사, 조세광 목사 등을 계속 초청해 개교회와 연합적인 모임을 이끌어갔고, 73년 빌리그레함전도대회를 비롯 EXPIO ’74국제대회, 77민족복음화대회, 80세계복음화대회 등을 타교단 지도자들과 함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기초한 복음전도운동 맨 앞자리에 서서 진두지휘를 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 총재로서 앞장섰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발기 오늘의 연합기관으로 대정부 대사회 창구역할을 하게 했으며, 1955년 4월 22일-26일 그가 목회하고 있던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 한국교회지도자로 우뚝서게 되었다.그가 이끈 40회 총회 중요결의 안건을 보면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1955년 7월19일 교역자(목사) 신분증을 발행하기로 하였고 △전국 500개 무교회 면마다 교회개척하기로 하였고 △대한신학교와 총회야간신학교를 통합하여 직영야간신학교로 하기로 했으며 △용문산기도원 설립자 나운몽씨의 가르침은 장로교신경에 맞지 않음으로 이를 막기로 결의했다. 1970년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이어 1992년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탬플턴상(Templeten)을 받기도 했다.한경직목사는 98세를 일기로 2000년 4월 19일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락교회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얼굴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0-10
  • 23. 제77회 총회장 이삼성(李三盛)목사
    황해도 황주 출신이삼성 목사(1922.3.1~2008.2.10)는 황해도 황주군 소해리에서 태어났다. 매봉산 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쌀과 목화의 산지이다. 그리고 유명한 사과가 풍성하게 소추되는 조용한 시골에서 자랐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1946년 어느 봄날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났다. 공산당이 창궐하던 당시 교회생활을 하며 신앙을 영위하던 나에게 유치장 생활과 공산당원들의 계속적인 내게 대한 감시로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계속 죄어져 오는 감시의 사슬에 나는 아내와 형님, 동생 등 조카들에게 3일 후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고향을 떠난 것이 50년이 넘어서도 다시 되돌아가지 못한 거짓말장이가 되고 말았다. 그는 야곱이 그의 인생 말년에 자기가 죽기전 요셉을 만나리라 했던 과정이 지금 나의 심정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나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통일의 노래 가사처럼 죽어 꿈에서라도 통일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 두고 온 가족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 작고 하기 전 그의 소회이다. 공산당의 박해 피해 서울로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서대문안 신문로에 있었던 피어선성경학원에서 대학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그만치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는데 그 일이 큰 경험이 되어 단국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고(기독교대백과사전 제12권 p143 참조), 후에 총회신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1953). 이듬해인 1948년부터는 한국교회 최초순교자가 된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전도단>을 조직하여 전도운동에 나섰다. 전도여행은 원만하지 못했으나 주님의 도움으로 목회하기 전에 좋은 경험이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준비된 후원자들을 만나 성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 선교회에서도 1947년부터 6·25가 나던 1950년까지 봉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당시 전도했던 황해도 옹진교회는 주일예배에 400명이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했고, 해변가에 있는 안동에서도 한동교회가 세워진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기적이었다.본격적인 신학도로 인천제2교회 부임이삼성은 옹진읍, 해주, 광산교회와 은동교회 그리고 연안읍 미산리교회를 개척하며(1948~1949) 빌립집사와 같은 전도 능력을 보였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젊은이를 하나님께서 어여삐 보셨던지 본격적인 주의 종의 사명을 감당시키기 위하여 총회신학교로 그를 이끌었고 본격적인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학도(神學徒)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6년 4월 29일 인천제2교회로 부임해 1999년 12월 9일 은퇴하기까지 그의 사역은 일진월보였다. 그는 농촌을 무대로 전도하며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회상하듯 농촌교회 지원과 기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교회 안의 남여 전도회를 동원 원·근을 불문하고 농촌의 어려운 미자립교회들을 지원하고 도왔을 뿐만 아니라, 선교위원회를 조직해 다방면으로 국·내외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기에 이른다. 교회개척과 인천신학교 설립이 목사는 자기과시적인 단견적인 선교가 아니라 한 교회라도 집중지원하며 개교회로 하여금 자립하게 하였고, 그런 교회가 경북에 3개 교회, 경남에 3개 교회, 충남에 1개 교회, 경기에 4개 교회, 모두 18개 교회에 이르렀다. 교회가 복음의 열매라면 신학교는 전도의 터전이라는 생각으로 교단 안의 전도자 훈련기관이 수도 서울에만 집중되고 있음을 깨닫고 인천과 경기지역에도 전도자 양성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인천에 신학교육기관의 모판으로 삼겠다는 계획아래 어느 누구도 실행하기 힘든 인천신학교(仁川神學校)를 1971년 3월에 설립 후에는 예장총회 인준신학교로 발돋움하게 되어 수많은 목사 후보생들과 여교역자 양성, 나가서는 선교사들을 양성하게 되는 인재 양성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친히 교장으로 교수로 봉사하며 후엔 이사장으로 학교를 육성하고 지원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그는 1953년 인천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이래 평생을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바탕위에 하나님 중심·성경중심·교회중심으로 목회에 전념하였고, 지역사회와 교단발전에 이바지한 수고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 1980년 4월 5일 미국 남부에 있는 아트란타 대학교(Atlanta University)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다(인천 제2교회 40년사, 이삼성 편 1989, p.190-193 참조).또 이삼성 목사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한 21:16)라는 말씀대로 한 생을 성실과 진심을 다해 목양일념을 실천한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1954년 8월 목사 장립을 받은 후 지금까지 오로지 교회를 위한 기도와 헌신의 목자로 당시 교인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어린이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개별적인 교육시설이 없었던 때인 1966년 10월 2일 20여평의 단독건물로 교육관(敎育館)을 건축해 지방내 여러 교회들의 부러움을 샀을 정도로 진취적이고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당시 그 신앙교육 요람에서 교육받은 학생들 중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늘 인천제2교회를 섬기는 중견인물(장로·집사)들이 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당신의 대를 이어 제2교회 3대 담임목사인 이건영목사가 그때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인천제2교회 40년사 p.195).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안정은 곧 교회 안정이요, 목사관(牧師館)의 규모는 교인 가정집 규모의 예표이기에 온 교인들은 목회자가 안정적인 목회사역을 위해 목사관 건축(2층 양옥 28평 1968.10.27준공)에 이어, 교회신축에 꿈을 주었다. “앞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택의 몇십배 훌륭하게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칠것을 다짐하며 온 교우들에게 기도할 것을 선포하고 성전건축 준비에 착수하였다. 당시로써는 과하다할 정도로 전국에서 세번째로 손꼽힐만한 성전을 붉은 벽돌 건물로 고딕식 예배당을 1972년 3월 22일 기공하여 10개월 만인 1973년 9월 13일 성황리에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고딕식 예배당 헌당과 교육관 건축성전 완공 후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성전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받치고 셋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성도에게 감동되어 난생 후 가장 많은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고 후일 회고하였다(같은책 p.197). 교회안의 각급 주일학교는 그 교회의 미래요 교회성장의 밑바탕이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교육장소의 협소함의 문제가 대두되어 교회와 인접한 550평의 대지를 온교인들의 교육관 건립을 위한 전교인 적금통장운동을 벌여 1978년에 대지를 구입해 1984년 5월 21일 기공 1986년 1월 11일 완공, 주일학교 교육환경이 개선되어 교회부흥발전에만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 노회 안의 여러 연합기관의 모임의 장소로써 교단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기에 이르렀고, 오늘의 제2교회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53년 전쟁의 와중에 전도사로 부임했던 1989년 은퇴하기까지 36년 동안 한 교회에서 아름답고 성스러운 목회사역을 감당했던 이삼성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7회 총회는 교단의 최고 명예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총회장으로 선출된 그 장소는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피와 땀과 노력이 깃든 인천제2교회 목회현장이어서 본인에게 더없이 감회가 깊었다.1992년 9월 22일~25일에 모인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한 안건들을 보면, 이 해에 유독 많은 노회들이 분립되어 교단성장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노회분립허락 <북전주와 전주> < 경남과 경상> <대전 대전서 동대전> <경안과 경안서> <군산과 군산동> 등이다. △헌법 수정만 노회수의한 결과 통과됨 △총신 및 지방신학교 이사장 및 교장은 겸임치 않기로 함 △전도국을 설치하기로 하다 △선교사 파송 창구를 일원화 하기로 하다 △총신대 교수 임용시 단독목회 3년 협동·교육목사 5년을 경유한 자로 한다 △의사규정, 감사규정, 은급정관 은급시행 규정 받기로 하다 △농어촌 미자립교회 재정지원 후원회를 구성키로 하다 △주일 오후예배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것임으로 그대로 시행하기로 하다 △군목부를 신설하여 전도국 산하에 두기로 하다 △구제주일은 12월 둘째주일, 순교자기념사업주일은 6월 첫째주일, 농어촌주일을 5월셋째주일에 지키기로 하다.이삼성 목사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필자가 1990년 가을 총신 71회 동기들이 인천에 모여 회의를 마치고 인천제2교회를 방문, 후배들에게 환영 및 편달의 한 말씀을 청했을 때, 가장 아쉬웠던 점은 교회 가까이에 있는 학교 건물을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놓친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또 한 가지는 목회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 한 마디 부탁에 칠판에 참을 인(忍)자를 크게 쓰면서 목회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명심해야 할 덕목이요, 자기의 목회철학이었다는 말씀이 아직도 아련하게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목회관을 가지고 반평생 목회와 교정을 이끌었던 이삼성 목사는 자기가 평생 섬기고 가꾸었던 목회현장에서 2008년 2월 10일 주일에 사모하던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자료제공 2015. 9. 10 인천제2교회 고재만 부목사).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0-02
  • 22. 제41회 총회장 이대영(李大榮)목사
    이대영 목사(1887.4.23~1968.11.2)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과 김동혜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일명 금당실 마을로 서양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믿는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위 교동대감으로 불리는 이유직이라는 사람이 1893년 낙향하여 생활 하던 중 금당실에 형 이유인을 기념하는 한옥저택(99칸)을 지어서 1899년 전후에서 몰래 예배를 드린것이 금곡교회(金谷敎會)시작이다. 아마도 이유직은 동학혁명에 가담해 쫓기던 중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피신하던 중 믿음을 얻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다 금당실 마을은 유교가 절대적인 한편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아 마을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용이하지 못해 은둔의 신앙으로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며 주변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교회로 모이는 형태였고 차츰 교인의 수도 하나 둘 늘어가는 방식이었다.이러한 고루한 재래신앙으로 꽉 차있는 예천(醴泉)지역에서 본격적인 선교사의 발걸음이 닿은 것은 1907년 일이었다. 금곡교회로 발전한 금당골교회는 평신도교회이며 자생(自生)적으로 시작한지 7년만에 예천군에 공식적으로 미국 북장로교 소속 부해리(傅解里 Rev.Henry Munro Bruen)선교사와 이희봉 조사(助師)에 의해 전도를 받게 된 것이다. 최초 신자인 나만기(羅萬基)가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괴당교회가 세워지고 금당실(금곡)교회도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상곡교회(上谷敎會)라는 정식 교회 이름을 가지면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예천군 지보면 상락교회는 이웃한 의성군 삼분동교회를 출석하던 성도들이 1906년 분립해 교회를 세웠다. 이는 삼분동교회 신자인 오의근씨가 사돈인 양조환씨를 전도하며 수개월동안 삼분동교회로 출석하다가 1906년 상락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이때부터 예천군의 3개교회(상곡, 괴당, 상락)가 부해리(Henry Bruen) 선교사에 의해 지도를 받았으며 대구 선교부(Taegu Sfation)에 등록할 때 상곡(上谷)과 상락(上樂)교회를 양조환씨를 설립자로 등록하였다. 이때 괴동교회는 나만기가 최초신자로 기록되었지만 상락교회와 상곡교회(금곡교회)는 양조환이 설립자가 될 정도로 믿음이 좋고 선교부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세워질때, 친구인 나만기의 전도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반대로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드러내 놓고 선교사와 함께 활동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대영은 1907년 예수를 믿기 시작할즈음에 이미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이듬해 1908년에는 장남 이규원(李奎元)이 출생하였다. 하지만 완고한 부모님들의 반대와 박해로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되자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3년만인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해 가족을 데리고 영일군 흥해면(현재 포항시)으로 이사해 층해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대영은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경상노회 전도인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인 예천지역을 2개월동안 순회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의 삶에 진력하였다. (대구교회사학 3권 장영학의 글 p.29~30참조 1912 대구)흥해교회서 본격적인 목회활동본격적인 목회사역은 흥해교회 사역이 그에게 있어서 본격적인 목회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대영이 무급전도인으로 활동할 시기에는 노회가 간섭하거나 보고를 받지 아니하였지만 유급 전도인이 되었을 때는 노회가 지도하기에 정식으로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이대영은 흥해로 이사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훈련은 물론 전도인의 소양도 갖추게 되었다고 본다. 당시 경상도 노회의 인준을 받고 1915년부터 정식 유급 전도인으로 세움을 받고 먼저는 고향 예천지방으로 가서 2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였고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였던 대구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실시하는 ‘겨울남자성경반’에 등록 수년간 본격적인 성경공부와 전도방법을 익혔고 좋은 성적으로 공부를 하였기에 유급 전도인으로 추천받아 본격적인 전도사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보면 예천군 선전교회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교회가 부흥했다.(예수교사기 하 1968. 서울 p.179 참조) 이후 이대영은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경산노회에서 신학 입학을 허락받아 처음으로 시무교역자인 조사(助師)로 부임한 것이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에 있는 장산(長山)교회였다. 이 교회는 1902년 같은 동리 한주혁씨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거서이 교회의 시발점이었다.1917년, 평양신학교 입학1917년에 이대영은 드디어 평양에 소재한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에 입학 신학수업을 받게 된다.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5년제로써 매년 3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를 하였고 6월 16일부터 이듬해 2월말까지 8개월 반 동안은 섬기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부한 것을 현장에 적용해 실습하게 하였다. 이대영 학생은 이미 조사로서의 사역과 입학시험의 결과로 신학교 2학년에 입학이 허락되었다. 당시 학당장은 마포삼열(Rev. Samuel Moffett)목사였고, 이대영의 나이는 30세의 나이로 결혼한지 10년이나 되어 10살난 아들 규원(奎元)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동안 가족들은 시무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혼자서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신학교 구내에는 미북장로교회가 세운 기숙사 2동, 남장로교회 1동 호주장로교회가 지은 기숙사 1동이 있었으며, 그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소속학생들을 위해 학교 밖에 마르다기념관이란 기숙사가 따로 1동이 있었다. 이대영은 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1917년 장산교회를 잠시 사면했다가 1918년 이듬해에 재 부임하였으며, 1920년에는 대구교회로 알려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그 당시 담임목사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이만집 목사였지만 3·1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있었기에 이대영 조사를 청빙하여 전임사역자로 시무케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대영은 신학교 5학년으로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그해(1920) 12월 2일 신학교 교정에서 열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식에서 17명의 동료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동기들 중에는 경북노회에서 함께 사역한 강석진과 28회 총회장을 역임한 윤하영이 있다. 1921년 1월 12일 저녁 7시부터 14일가지 대구 동산성경학원에서 개최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서 이튿날(13일) 속회된 회의 벽두에 강석진과 함께 첫 강도(설교)의 기회를 가졌다. 이대영은 성경 느헤미아 1장을 본문으로 “느헤미아의 성공”이란 제목으로 전 노회원 앞에서 시험을 치루었고 같은날 저녁시간에 교회사기(박문찬 목사), 정치(박영조 목사), 신경(어도만 선교사), 서영(김영옥 목사) 등의 고시과목을 치루고 고시위원들이 본회에 문답이 잘되었다는 보고에 이어 그 자리에서 역사적인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맏은 이대영 목사는 고향인 안동읍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당시 안동선교부(Andong Station)의 권찬영 선교사의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는 조건으로 노회의 허락을 받고 1921년 2월 부임했다. 기독교에 입신(入信)한지 14년만의 일이요 고향을 떠난지 11년 만에 고향인근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중국 산동성으로 선교사 파송이대영 목사의 사역에 있어서 전기가 된 것은 장로교 제10회 총회(1921. 9)에서 중국 산동성(山東省)으로 파송된 선교사 직이었다. 1922년 6월 13일에 중국 산동성 래양(萊陽)에 도착 선교지를 답사하고 선교업무에 들어갔다. 선교비는 총회 전도국이 관리하며 행정까지 지원하였다. 이대영 선교사는 중국 선교사로 사역 하면서 자신이 중국 선교에 죽도록 헌신할 각오를 하였기에 철저히 중국 목회자들의 모임에 동참하기 위해 중국교회(中國敎會)로 이명까지 해 자신을 중국화 하려고 노력했다. 이대영 목사의 활동지역인 산동성 주묵현은 홍승한 목사가 1923년초 안식년으로 귀국한 상태여서 할일은 더 많았다. 선교사역 중에는 중화기독교회 교동노회(膠東老會)에 가입하였다. 또 선교사역 중에도 항상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피선교지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이 타국 선교사로서의 이질감이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도록 마치 중국인처럼 토착화된 선교의 모델이었다. 나중엔 표준 중국어와 산둥어를 익히면서 중국말로 설교하는 경지에 이르자 현지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1913년 박태로 김영훈 사형순을 산동성에 1917년 이들의 철수한 이후 다시 방효원 홍승한 목사를 재 파송한데 이어 1918년 박상순을 파송했으나 여러가지 재정적인 사정으로 잠시 지체하기로 했으나 1925년 이대영 목사를 파송 중국대륙을 향한 선교사역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 41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대영이 총회장이 된 총회에서는 다시 태국에 최찬영 김순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기성교회로 부터 500m 내애서는 교회 개척금지로 하고 전도관의 박태선을 이단으로 결의, 경남노회를 경남 마산 진주 3개 노회로 분리키로 했다. 그의 마지막 사역지는 승동교회였으나 1959년 교단 분열의 바람에 휩싸여 편한 목회는 아니었다. 총회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던 이대영 목사는 1968년 11월 2일 81세를 누리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9-17
  • 21. 제55회 총회장 김창인(金昌仁)목사
    평북 의주 출신김창인 목사(金昌仁, 1917.11.18-2012.10.2)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서부동에서 1917년 11월 18일 부 김택연과 모 김택신 사이에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김창인이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은 고종황제의 서거와 한일합방의 비애가 채 가시기 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그로인한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인 압제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비운의 시대였다. 창인이 8세 때 일찍 아바지(36세)를 여의고 부족함이 많았던 어려움 속에서도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믿음이 좋았던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기도와 열심한 신앙생활은 그의 보통학교 시절에 신구약성경을 14번이나 통독할 수 있었고, 어려운 교회 전도사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35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를 따라 새벽 4시에 찬물에 목욕을 하고 예배당에 나가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또한 육신의 밥을 먹기 전에 성경을 먹어야 된다는 것을 배웠다. 보통학교 때 이미 성경 14번 통독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그의 생활이 변화되었다. 그는 10세까지는 의주읍 서교회에, 11~18세 까지는 의주군 위화면 상안교회에 출석하여 어린 나이지만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최선을 다하여 믿음을 지키며 교회봉사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끔 창인이를 향해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참 재미있다. 네가 말하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또렷또렷 분명하게 들려서 참 재미가 있다”라고 종종 말했다. 또 어떤 때는 “창인아 너는 내 입 안에 있는 혀와 같구나. 입 안에 있는 혀는 생각하기 전에 벌써 순종하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네가 미리 해놓으니 내가 네게 할말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는 늘 칭찬을 하였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이 창인을 향해 “어머니의 사랑은 저것이 다 받아”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 다섯 형제를 믿음으로 잘 키워놓고 공산치하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북한 땅에서 순교하였다. 중3때 부흥회 인도창인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교회에서 우리교회에 와서 한시간만 설교해 달라는 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설교를 부탁한 교회도 이상하지만 아직 중학교 3학년인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염치좋게 “그러지요”라고 답하고서는 주일날 자전거를 타고 혼자 그 교회에 갔다. 창인이가 이렇게 한데는 나름데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소년 다윗을 통해 골리앗 거인 대장을 때려 눕혔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라는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가자마자 기도하고 강단에 올라가 주일낮예배 설교를 겁도 없이 하고 내려와 점심을 먹는데 제직회를 한다고 떠들석하더니 제직회를 마치고 최헌금 장로님이 집사님 한 분과 같이 와서 하는 말이 제직회에서 결정했는데 3일동안 김선생이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가 무슨 선생입니까 못합니다”라고 거절했더니 그러지 말고 사흘동안만 부흥회를 해달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갑자기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혼자 힘으로 맷돌을 돌려 밀가루를 만들어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려고 했다면 아마 그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린 바 되어 지팡이를 들었다가 놓았을 뿐인데 60만 대군을 먹이고 이끌어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았는가? 만나는 하나님이 주셨다. 너는 성경만 들고 서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성령의 감화가 왔다. 이같은 용기와 감화는 어릴 때 중학교 가기전 14회나 신구약성경을 통독한 경험에서 얻은 감화요 지혜에서 비롯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성경을 읽다가 오늘은 이 본문이면 되겠지 하고 준비해 강단에 서면 자기도 모르게 90분 설교가 청산유수처럼 폭발하였다. 시간시간마다 똑같은 경험이었다. 마지막 저녁 설교를 하고 내일 새벽기도회만 끝내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마지막 아침상을 받고 있는데 또 최헌금 장로와 몇분의 제직들이 제직회에서 결정했다면서 부흥회를 3일간 더 해달라는 것이었다. 김창인은 “이게 무슨 소리요 안되겠수다”라고 했다. 못한다더니 잘만 하는데 공연히 거절하지 마세요. 하면서 욱박지르는 것이었다. 더는 못한다고 입으로는 말했는데 그 속에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동안 사흘도 네가 했느냐?” 이 음성에 창인 전도사는 “주여 옳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하고는 부흥회를 또 3일간 이어갔다. 이것이 김창인이 전도사 아닌 중학교 3학년 때 한 일이었다. 큰 나무가 될 묘목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했던가. 창인 학생이 바로 그 꼴이었다. 장로교 전도사로 본격적 사역김창인의 본격적인 사역은 1936년부터 장로교 전도사로 나선 것이다. 그는 처음에 의주군 주내면 청전교회에서 정식으로 그의 목회일생이 시작되어 용천군 동산면 성동교회를 거쳐 1937년 의주군 월화면 추봉동 혜천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교회봉사의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그였으나 억지로라도 그에게 자격을 찾는다면 성경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통독하고 요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칭 전도사의 역할을 한 경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 중에도 바울 사도를 제외하면 현대 우리들이 목회자 학력기준에 해당되는 지도자들은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 창인 전도사 자신도 이런 면에서 스스로 자위를 하고 용기와 열심을 내 교회에 봉사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전도사로 나서게 된 배경은 중3때 부흥회를 인도한 경험과 14번이란 성경통독의 성경지식이 큰 밑거름이 되었고 김창인을 거목으로 일으키는데 큰 지렛대 역할을 했던 것이다.해방 후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김창인 전도사는 1948년 12월 3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그해 12월에 서울 장충동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잠시 목회를 하다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 그곳에서 동일교회를 개척했다. 이름을 동일교회(東一敎會)라 한 것은 그 곳이 부산시 동구 동대신동 1가여서 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정부가 서울로 돌아오자 김창인 전도사도 수복된 서울로 올라와 그 해 9월 6일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 자리잡은 한명덕 권사(당시는 집사)댁 2층에서 19명이 모여 동일교회로 개척예배를 드리고, 같은 해 9월 21일 충무로 5가 36번지의 대지를 매입 건축을 시작했다. 1954년 10월 기공예배를 드리고 1년 후 상량을 올리고 교회를 완공하였다. 교회 이름을 충현교회로 바꾸고 시작한 목회방향은 주일학교 부흥이 교회의 부흥이란 신념으로 노력하고 힘쓴 결과 충현교회 주일학교 부흥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고 교회도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1983년 역삼동으로 이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는 충현교회 설립기로 교회 부흥의 기초를 다지며 교회당 건축에 힘을 기울이며 주일학교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면, 1964년에서 1973년까지는 교회의 외적발전은 물론 내적인 교회 성장발전에 주력하였다. 또 1974년부터 1983년 어간은 충현교회의 확장기였다. 그간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세계선교와 북한선교 뿐만 아니라 교회내 각 위원회와 각급기관의 조직 정비 확대로 체계적인 교회운영에 진력하여 교회 인근에 약자들과 교단발전과 남북통일에 대비, 대외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그리고 김창인 목사는 충현교회 단일교회 지도자에서 1970년 9월 24~28일 대구서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제55대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의 수장으로서만 아니라 대외적인 교회의 연합과 일치로 한국교회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총회장 재임시 총회결의 사항을 보면 ①설악산에 총회 수양관을 세우기로 하고 강원노회로 하여금 추진키로 하다. ②재일대한기독교총회와 유대관계를 갖도록 하다. ③서만수 선교사를 인도네시아에 파송하기로 하다. ④경남대회를 조직하기로 허락하다. ⑤지방신학교(칼빈신, 대전신, 부산신, 서울신)를 인준하다. ⑥총회산하 각 노회는 1개척 교회를 설립하기로 하다. ⑦총신대학교 대학부 입학시 추천은 당회장으로 하기로 하다. ⑧성경에 근거한 요리문답, 예배모범, 헌법적 규칙, 주일성수토록 하다. ⑨총회는 세계적 복음화운동을 전개하여 성경관과 신앙이 우리와 같은 국제기독교단체와 교류를 하도록 하다. 그는 40년의 목회 역정을 마감하고 1987년 자신이 개척하고 성장시킨 충현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대부분 자신의 강단에서 외친 설교들인데 △예수님의 좋은 일꾼 △구역장과 심방 △이사야 강해집(1-6) △칭찬 듣는 교회 △시가서 설교집 △서로 사랑하자 △선교란 무엇인가? △예식과 설교 △바울서신 설교집 △성도의 가정 △나의 힘이되신 여호화여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일꾼 △교회란 무엇인가 △절기설교집 △성도의 시험 △복음서 설교집 △자유란 등이 있다.김창인 목사의 목회철학의 중심사상은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였다. 평생을 주님과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여 목회 하다가 2012년 10월 2일 9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경기도 광주 충현동산에 성도들의 애도속에 잠들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9-04
  • 20. 제18회 총회장 차재명(車載明)목사
    평북 용천 출신차재명 목사(車載明·1881.4.6-1947.4. 26)는 평안북도 용천군 동산면 용암포에서 태어나 1905년 기독교에 입신 그 다음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해는 조선이 사실상의 국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이 시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훗날 조선 기독교계 지도자가 된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차재명 목사 역시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강점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국가의 주권이 일제에 강점 당한 1910년 당시 유명했던 이승훈이 선천(宣川)에 세운 기독교학교요 미션스쿨이었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해 새문안교회의 조사(助師)로 봉직하면서 언더우드(Underwood) 목사를 도우며 새문안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1912년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에 장로(長老)로 피택되었으며, 이후 교회의 재정적 후원과 협조를 받아, 191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차재명 목사는 새문안교회가 키운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분이라 하겠다(새문안교회 100년사, 윤경로 편, 새문안교회 1995, p.235). 새문안교회 최초 한국인 담임목사차재명 목사는 언더우드와 쿤스 선교사에 이어 한국인으로써 최초로 모교회인 새문안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시무하고 있던 영등포교회를 사임하고, 1920년 12월 26일 성탄절 다음날 위임예식을 온 성도들의 환영리에 드리고 새문안교회에 부임해 장장 21년간 생애의 후반부를 크게 봉사하였다. 차재명 목사는 관서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관서지방의 총회 총대들의 협력으로 총회적으로도 어려움 없이 총회를 위하여 원만하게 일할 수 있었다.그가 총회를 위하여 일하면서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으로써 최초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정리한 일을 들 수 있다. 그의 이름으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는 1928년 기독교창문사에서 발행한 대한예수교장로회사로써 최초의 정사(正史)였다. 이 역사책은 차재명 목사가 총회로부터 위임을 받아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펴낸 책으로써 지금 한국교회 사학자들만 아니라, 100년 이상 혹은 9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교회들은 반드시 읽고 참고해야 할 총회역사 교과서 이기 때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편찬이 책에 약간의 미진함이 있다는 사실을 전재함에도 어느 교회가 몇년도에 누구에 의해 복음을 전달 받았으며, 또 누구에 의해 교회와 지교회가 설립되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총회를 섬겨운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83). 최근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神學指南)에 본서에 대한 해제논문이 나와 여기에 언급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은 1928년에, 하권은 1930년에 원고의 교정까지 완료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의 경제적 어려움과 뜻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인해 40년이나 지난 1968년 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백낙준 박사)에 의해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 사기(史記) 두권은 1934년에 발행된 Harry Rhodes가 편집 간행한 History of the Korea, P.C.U.S.A (1884-1934)와 더불어 한국장로교회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영어로 된 이 책은 한국주재 장로교 선교사가 선교초기부터 한국선교 희년을 맞이하는 1934년까지 학술적으로 잘 정리된 사료(史料)라면, 전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하 두권은 한국 북장로교회 역사만 기록한 영문판보다 한국장로교회(韓國長老敎會) 전체의 역사를 아울러 기술했다는데 더 중요한 사료라 하겠다. 기독교 역사가 곤잘레스(Gonzalles)는 말하기를, 만일 유세비우스(Usevius)의 교회사가 없었다면 초대교회 문헌 3분의 1은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말헌 적이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존재 의미 또한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책이 출간되어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은 장로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교회 전체의 축복의 선물이라 할만하다. 이 책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과정을 알 수 있고 공의회(公議會)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독노회와 총회로 어떻게 발전, 조직케 되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 상권의 서언을 양전백 목사가 쓴 것은 왕길지(G.Enge)가 오랫동안 편집 책임을 맡아 수고했지만, 마지막 양전백이 검열위원장으로 책이 출판되기까지 실무책임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의 간지에 <저작자 겸 발행자가 차재명(車載明)으로 되어 있다.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같이 교섭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고 총회장 이름으로 발행하려고 하였으나 일제당국이 허락하지 않아 불가불 차재명 명의로 발행되게된 것이다. 발행소도 서울 서대문 신문내 교회당이다. 이같은 상황은 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를 출판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사기」(史記) 하권의 서문은 당시 한국교회사학회(韓國敎會史學會)를 이끌어 가고 있었던 백낙준 박사(연세대 총장)가 썼다. 그동안 하권의 원고가 탈고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는데, 동경(東京) 한인교회 담임목사였던 교회사가(敎會史家) 오윤태 목사로부터 제보를 받아 교회사학회 창립기념사업으로 백낙준 박사가 출판부에 의뢰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하)는 김광수(金光洙) 목사가 지적한대로 교회안의 공식문서인 당회록과 노회록 및 총회록에 의해서만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어느 개인의 작품이 아닌 문자 그대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개교회와 총회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추호의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총회가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각노회 편집위원회에서 개교회 역사를 수집정리 해 위원회에서 엄밀히 검열과 교열을 했음으로 초기 한국장로교회 정사로 인정된 「정사서」(正史書)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신학지남 2014 가을호(통권320호) p.145-167참고). 연합사업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차재명 목사의 새문안교회 21년간(1920-1941)에 진행된 일들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차목사의 사역자체가 매우 다양했고 그 중엔 미묘한 사건도 있었고, 교회 내적으로 새문안교회의 행정일체를 대대적으로 정비쇄신하였고, 외적으로 노회와 총회를 비롯 연합사업과 교회일치운동에 많은 협력을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제하의 운신의 폭이 제한되고 시대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 초창기의 문헌들, 즉 당회록 제직회록 교적부(생명기록부) 공동의회록 및 각 기관회록 등이 잘 정리되었다. 나가서 1913년에 조직은 되었으나 유야무야했던 면려회를 1921년 5월에 재조직해 활성화시킨 것과 교회행정쇄신 조치로 교인들에 대한 심방제도를 기구화 시켰고, 주일학교 조직을 강화한 점을 새문안교회100년사(p.240)는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차목사의 새문안교회 20주년기념식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면, 1941년에 이르러 교회에서는 가장 기쁜 한 가지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차재명 목사의 근속20주년기념행사이다. 동시에 20년 근손시무한 이들의 표창도 있었는데 송순명, 이용석, 박희병, 김경환 장로와 김진애, 염준애 집사였다. 교회는 차목사가 이들 6명에게도 기념품과 표창장으로 그동안 교회를 위한 수고에 교회가 감사를 표한 뜻깊은 행사였다.차재명 목사가 예수 믿게 된 동기차목사의 어머니는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믿음의 여성이였고, 신실한 신자였다. 차재명은 청년시절에 이미 한문공부를 많이 하여 그 지방에서는 한학자로서 양반으로서도 쟁쟁한 인사였다. 어머니가 출석하고 있던 교회는 조그만한 시골교회였다. 한번은 그 교회 목사와 여집사들과 겨울인데 집에 심방을 와서 재명에게 예수 믿자고 강권하였다. 그러나 목사의 권고와 전도에 들은 척도 아니하고 외면한 채 못마땅하다는 듯이 벽을 향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때 목사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가난 차재명은 목사가 기도할 때 가만히 밖으로 나가 꽤나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떠와서 목사의 머리 위에 부었다. 목사는 그래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저 청년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소서 회개하고 주님 믿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고하는 것을 보고 감동이 되었다. 자기가 그렇게 기도하는 목사 머리 위에 불을 부으면 벌떡 일어나서 노발대발하며 책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개의치 아니하고 자기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는 그렇게 완고하던 자기마음이 감동되어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편, 성은출판사, 1978, 서울 p.801-802). 차재명목사가 자기가 시무하던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던 대한예수교장교회 제18회 총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위해 마지막 영광스러운 중책을 잘 감당했으며, 1947년 4월 26일 자택에서 영민했다. 그가 총회장시에 결의된 안건으로 ① 총회사무국을 설치하기로 하여 총회행정을 정상적인 업무화 하였다. ② 평양노회를 평북노회와 용천노회로 발전적인 분립을 허락하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8-27
  • 19. 제12회 총회장 함태영(咸台永)목사
    함경북도 무산 출신함태영목사(1873.12.2-1964.10.24 咸台永)는 함경북도 무산(茂山)에서 출생 1884년 서울로 이사왔다. 그리고 1895년 관립 법관양성소를 열사 이준과 함께 제1회로 졸업하고 판사로 임용.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후엔 대법원 판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08년부터 부친과 함께 연동교회에 다녔다. 한때는 복부대종으로 고생을 했는데, 기도로 치유함을 받고 신앙생활을 잘했다. 1909년 연동교회가 양반과 상놈 논쟁에 휩싸여 양반들이 상놈들과 함께 자리할 수 없다고 해 대부분의 양반들과 그 자녀들이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세웠다. 그때가 1909년 6월이 었는데 함태영의 아버지 함우택을 비롯 이원금장로 오경선 등과 함께 상놈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예배 드릴 수 없다고 떠났는데도 함태영은 부친을 따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법관으로써, 선교는 인간 사회제도가 마련한 계급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연동교회를 지키는 편에 섰던 것이다. 당시 연동교회는 지체 높은 양반신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주로 상인출신과 갓바치출신 소위 상놈 내지 천대 받던 서민 출신들이 고관대작들 속에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도 양반들은 그의 자녀들을 상놈의 자식들과 함께 공부시킬 수 없다는 여론이 자자했고, 장로 선출시에도 양반출신 아닌 상놈들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연동교회 상놈 편에 서서 대변그때의 장로 고찬익이나 이명혁은 과거에 허랑방탕한 생활을 해왔던 노름꾼 출신이었고, 특히 고찬익이 끌어들인 임공진은 광대출신이라 그를 장로로 세우는데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 당시의 사회풍조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함태영은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계급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주장하여 연동교회에서 일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게일(奇一, Gale)목사와 그의 연동교회는 이러한 사회적 관습과 전통보다는 개인의 신앙적 결단을 더 중시하였던 것이다.그는 교회의 분립이라는 위협과 비극에 직면하면서도 인간이 세운제도나 권세보다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려는 선교적 사명과 성경적 인권사상을 내세웠으며, 이러한 사회적 전통보다 개인의 신앙적 결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눌려 억압받고 있는 상인들과 상놈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교회와 기독교의 참복음의 진리임을 믿고 이러한 어려운 사회 환경과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마귀와 대결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함태영이 이런 결백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반대하는 소위 양반쪽의 무리 100여명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1910년 7월에 세운 것이 오늘의 묘동교회이다. 이같은 현상은 어느쪽이 의로우냐 아니냐 보다는 당시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생긴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다 하겠다. 검사·판사·대법관 거쳐함태영은 관립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1907년까지 13년이란 결코 짧지 아니한 기간을 한성재판소의 검사 시보로 시작하여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대심원 판사를 역임한 당대의 법조계의 대원로가 되었고, 그는 신앙인으로써 법관으로써 굽힐줄 모르는 지조있는 법조인이었고 불의에 굽힐줄 모르는 우리나라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선구자였다. 한 예로써 그가 법관으로 있을 당시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사형을 7년으로 감형시켰고, 독립협회 사건으로 피검된 이상재를 엄벌하라는 당시 법무대신의 명을 거절하였다. 이에 노한 법무대신이 황제에게 이 보고를 하기 위해 전화 거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뺏어 깨트려 발로 밟아 내던지고서 이상재를 무죄석방조치하기도 하였다.그의 목회활동을 잠시 일별해 보면 그가 36세 되던 1908년에 생각지도 못한 복부대종으로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기도로 고침받는 신유의 체험을 하고서 연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 집사가 되었고, 1911년에는 장로(長老)가 되었으며, 1918년에는 남대문교회의 조사(助師)가 되었다.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그해 12월에 목사장립을 받고 처음으로 청주교회(淸州敎會)목사가 되었다. 그후 경남 마산교회의 교역자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 총회로까지 문제로 확산되자 총회 특별위원으로 선정되어 마산에 내려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어서 1928년에는 마산교회 목사로 부임해 그동안 어려웠던 문제를 수습하고 발전시키던 가운데 있었는데 모교회였던 서울연동교회의 청빙을 받고 이듬해 1929년 10월에 부임했다. 그의 연동교회 부임은 연동교회의 내분을 수습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셈이 되었고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41년 13년간 담임목사로 있던 당회장 직분에서 물러나 원로목사가 되었다. 그는 노회와 총회를 위하여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26년에 충청노회 노회장으로, 1928년에는 경남노회 노회장, 1932년에는 경성노회(京城老會) 노회장과 1946년 경기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고, 총회적으로는 총회서기를 비롯 총회 부회장을 2회, 1948년에는 교정의 수장자리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장으로 피임되어 해방 직후 혼란했던 해방공간의 와중에서 교회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조선신학교 설립에 기여1940년엔 조선신학교를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나중엔 교단 분열이 되자 기장(基長)으로 이적해 가, 조선신학교 후신인 한국신학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1947년 해방직후 남부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기독공보사 사장, 1952년에는 이승만과 런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에 당선되어 교계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교회사대사전 3권, 강병도 편, 기독지혜사 1994. p.784-785 참고).세계 우방국 방문 친선 활동함태영은 1919년 3월 1일에 봉기한 독립운동의 주동자였다. 이승훈과 함께 3·1운동의 주동자로써 기독교 측의 대표로써 3·1독립운동의 거사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이승훈과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시절에는 한 기숙사에서 1년 반 동안이나 같이 지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3·1독립운동 선언서에는 서명이 빠졌다. 그 이유는 월남 이상재 장로와 함께 서명한 33인 중 16명의 기독교대표들의 가정문제를 뒷바라지 할 세력이 있어야 겠기에 함태영의 서명을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 카나다선교사로 한국에 나와있던 스코필드 박사 역시 외국인으로써 심정적으로 한국독립운동가로써 33인의 자격에 버금가는 역할을 했다는 독립운동의 비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함태영의 정치가로써 법조인으로써의 총회장과 부통령 퇴임후의 그의 행적을 여기에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956년 8월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카나다연합교회의 초청으로 가서 그 연합교회 총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귀국길에는 세계 우방 각국을 방문 친선활동을 벌렸으며, 교회들을 예방하기도 해 한국교회의 후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1953년 11월엔 하와이 교포 50주년 기념식에 대통령을 대신하여 축하사절로 참석하기도 하고, 1956년에는 그의 이런 공로를 인정 받아 카나다 마운트엘리손 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4년에는 서울의 중앙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78, p.927). 함태영 목사는 세번의 상배(喪配)를 당하였다. 고숙원 집사가 53세(1943)로 세상을 떠나자 70세의 독신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손수식사를 장만해야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964년 10월 24일 92세를 향수하고 그의 영원한 고향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슬하에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홍역으로 한 주일동안 3남매를 잃기도 했고, 한 아들(요한)이 대동강에서 익사하는 등 두 아들만 남았는데 병소(秉昭)와 병춘(秉春)이고, 장손인 인섭(仁燮)은 농립부장관을 지내고 춘천농과대학장을 지냈으며, 아들 병춘은 연동교회에서 유아세례를(1932) 받은 집사로 연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주미(駐美) 대사를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전두환)으로 재직시 미얀마(전, 버마)를 방문 도중 아웅산 태러로 순직하였다(연동교회 100년사, 고춘섭편, 금명문화사, 1995, p.299).한성복심법원 판사였던 함태영은 1898년 어느날 한 젊은이가 입헌군주제 같은 위험한 주장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젊은이가 큰일 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청년이 붙들려 왔다. 청년 이승만이었다. 함태영은 이승만을 복심에서 감형했다. 함태영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평양신학교를 거쳐 서울 연동교회 목사로 재직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후 함태영을 심계원장(감사원)에 임명했다. 1952년 부통령 선거에 서울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함태영을 공식지지 했다.”(조선일보 2015. 7. 21(화) p.8)함태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시 결의된 사항을 보면(12회 총회록 참고), 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조직됨. ② 이대영 목사를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로 파송하다. ③ 예배당을 연극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므로 당회는 신중히 생각 처리하기로 하다. 연동교회 100년사에서 함태영 목사의 인격에 대하여 이와같이 평가하고 있다. 함태영 목사는 청렴결백하고 내유외강한 전형적인 한국인이었고 우리나라 법조계의 원로로써 지조와 지혜의 명법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한 모법적인 지도자였다(연동교회 100년사, p.299).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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