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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기독교인 기업인의 죽음
    해외 자원개발 비리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아오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대기업 회장은 교회의 장로였다. 대기업의 회장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겠는가 마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선택해서는 안되는 죽음이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 친분있는 한 목회자를 만나 자신이 정 관계 인사 약 100여명에게 150여억원의 돈을 뿌렸다는 증언을 했고, 또 구체적 액수를 적은 사람들의 실명을 밝힌 쪽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우리사회에서 기업을 유지하려면 정 관계 인사들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돈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들에게 보험을 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정부의 부패척결로 자신이 표적수사의 대상이 되자 이들에게 구명을 호소했으나 외면당했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들의 이름을 밝히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 기업인이 뇌물로 기업을 보호하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 모든 기독교인은 청지기이다. 비록 세속기업을 경영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청지기 정신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사람을 입은 기독교인의 신앙 실천이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면 이는 이중적 신앙인이다. 신앙은 곧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기독교인 기업인이 탈세나 이중장부로 정당한 세금을 탈루한다면 이것은 세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범죄이다. 만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 4항에는 "모든 성도들은 위정자들과 정부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세금과 기타 공과금을 납부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정부의 합법적인 명령에 대하여 양심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국민의 정직은 사회적 자본이다. 정직하지 못한 사회는 언제나 불안과 분쟁에 휩싸인다. 기업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설교자들은 정직한 기업인이 성공한 사례를 기회있을 때마다 역설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이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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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4-16
  • 종말을 보고 판단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유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에 본받을 것이 있는지 판단하라고 권한다(13:7). 그때나 이제나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지 못했던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성경에는 영적 지도자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여러 군데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전 9:27)고 했고,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3:1)고 까지 경고하고 있다.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다(마 15:14). 이는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사람은 관뚜껑을 덮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양떼를 목양하는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도 마찬 가지이다. 그가 일생을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충성했는지, 아니면 처음 결심과 처음 사랑을 버리고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망하는 길을 간 것인지는 그의 종말을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처음 소명을 받았을 때는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가겠다는 사명감에 충만했다가도, 종교적 세속적 성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쯤 되면 곧 돈과 명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턴 목에 힘이 들어가고 옛 친구를 멀리하게 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이 이에 딱 들어 맞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달랑 고무신 한 켤레 신고 교회에 들어와 목회자가 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교회를 위해 충성하다가 은퇴할 무렵에 이르러 세속적 욕심에 사로잡혀 더러운 물신(物神)과 손을 잡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하여 교회를 보호해야 할 목회자들이 오히려 교회에 분쟁을 야기한다. 이로인해 지금 전국에는 수천개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모두가 은퇴하는 목회자와의 돈 몬제이다. 아예 교회가 가난하여 돈이 없을 때는 그것으로 분쟁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좀 여유가 생겼다 싶은 교회는 은퇴하는 목회자가 교회보다 자신의 노후를 먼저 생각하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어제까지 교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지니고 있던 목회자가 하루 아침에 교인들의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이런 현상은 한국교회가 갑자기 부요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수많은 교인들을 거느리고 유창한 설교로 교인들을 감동시키며, 평소에 교계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의 말년에 세속적 노욕(老慾)을 부려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인들을 실망시킨다면 이런 지도자를 교회가 끝까지 존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엊그제 한국교회원로목회자의 날 실행위원회가 150여 명의 원로목사들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귀한 일이다. 여기에 모인 원로목회자들은 일생을 오로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망하는 지도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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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9
  • 횃불회는 신동아그룹의 산하기관인가?
    "최순영 장로님 내외분의 건강과 신동아그룹의 회복을 위해 기도 합니다.”신동아그룹과 최순영장로의 회복과 건강을 위한 특별기도가 신동아그룹과는 전혀 상관없는 한 교계 선교단체 모임에서 진행돼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이고 있다. 재)기독교선교횃불재단은 지난 30일 ‘2015 횃불연합대성회’의 통성기도 시간에 위의 주제로 기도를 진행했다. 횃불재단은 지난 1980년대 서울 한남동의 한국기독교선교원으로 시작된 초교파 선교단체로 현재 전국 12개 주요도시에 지역 횃불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이들 횃불회는 연중 행사로 함께 모여 횃불연합대성회를 열고 있다. 이렇듯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는 기독교 선교단체인 횃불재단의 행사에서 신동아그룹의 회복과 신동아그룹의 회장인 최순영장로의 건강을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뜬금없는 일이다. 전혀 상관없는 두 단체 간의 연결고리를 굳이 찾자면, 이사장인 이형자권사가 신동아그룹 최순영장로의 부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횃불재단의 연중 행사 중 가장 큰 대성회에서 전국의 횃불회원들이 모여 이사장의 가족과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뿐 아니라 이날 대성회에서 한 지역 횃불회장은 “신동아그룹의 재산을 찾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대표기도를 하기까지 했다. 대표기도는 성회의 주제를 놓고 참석자들을 대표해 기도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날 참석자들과 전국의 횃불회원들은 신동아그룹의 몰수된 재산 찾기에 모두 동의하고 함께 한다는 것인가? 혹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아직 과거 신동아그룹 사건에 대한 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 이는 자칫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지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무릇 선교단체라면 오직 선교와 복음전파에만 매진해야 할 것인데, 어찌해서 한 개인과 기업의 문제를 버젓이 단체 안에 끌고 들어와 공식 행사의 기도 주제로 삼을 수 있는가? 횃불회는 2000년대 들어서 주춤하기는 했지만 지난 80~90년대 한국교회 발전에 나름에 공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 횃불회가 다시금 부흥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공적 선교단체로서의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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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15-04-09
  •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공하려면 통합측이 바로 서야
    에큐메니칼 정신만이 세계교회가 살 길이라고 믿는 예장통합측은 1959년 합동측과의 분열이라는 커다란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세계교회와 함께 에큐메니칼 노선을 견지해 왔다. 기독교는 2천년 역사에서 정통과 이단의 오랜 시비 끝에 20세기에 들어 에큐메니칼 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각 교파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교파 간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데 있다.통합측은 그러한 에큐메니칼 정신에서 로마 가톨릭도 용인한다. 로마 가톨릭은 십계명을 변조하여 사용할 뿐 아니라 화체설, 교황무오설, 연옥설, 마리아 승천설 등 성경과 전혀 관련없는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믿는다는 이유로 ‘교리는 다르지만, 다른 전통을 가진 교회’라며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넓은 신앙적 아량을 가진 에큐메니칼 교단인 통합측이 왜 같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표현만 조금 달라도 가차없이 이단 시비를 제기하는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통합측의 행태이다. 통합측은 80년대 이후 60여명이 넘는 인사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그것도 덩치가 큰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감히 건들지도 못하고, 만만한 군소교단 소속 목회자들만 이단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이는 대교단의 교권의 횡포 외에 다르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이단 논쟁을 ‘동물의 왕국’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포식자들이 높은 곳에서 짐승떼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리에서 이탈했거나, 나약해 보이는 놈을 골라 끝까지 공격해 쓰러뜨리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뜯어먹고 마는 동물의 왕국 말이다.지금 한국교회 주변에는 심각한 이단의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주우상주의와 교리적 이단 집단들이 자기네도 성경적인 정통이라며 설쳐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이단대책이 겉도는 것은 걸핏하면 엉뚱한 이단 시비를 해대는 통합측 같은 교단이 있기 때문이다. 통합측의 이단감별사들이 통합측 교단만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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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4-09
  • 독생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품 속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인카내이션(Incarnation), 즉 성육신(聖肉身)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장 근본교리에 해당되는 이 ‘독생자’에 대한 오해가 깊다. 흔히 ‘독생자’(獨生子)를 ‘외아들’로 오해하는 일이다. 사도신경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가 좋은 예이다. ‘독생(자)’는 헬라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ηV)이다. 여기에다 아들이라는 휘오스(υι´οV)를 붙이면 ‘외아들’ 혹은 ‘독자’로도 번역된다. 누가복음 9장 38절에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누가복음 7장 12절에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라고 한 것이 그 예다. 같은 모노게네스를 쓰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그 ‘독생’과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독특하게 나신 분이다. 이를 니케아 신조는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라고 했다.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외아들’로 오해해 이삭과 같은 ‘독자’로 보기도 하고, ‘맏아들’로 오해해 세상에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맨 먼저 나신 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서 8장 29절에 “이는 그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장 6절에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등을 인용한다.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은 “양자(養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자격을 얻은 것이지”, 독생하신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와 같은 동격은 아니다. 독생자를 맏아들로 보는 자들은 성도들을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의 동생쯤으로 보는 위험한 이단설과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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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4-09
  • 부활절과 ‘팽목항’-이광호 목사
    추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니 어김없이 부활절이 다가 온다. 해마다 돌아오는 기독교 절기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기 일쑤다. 입술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사건을 언급하지만 종교적인 행사에 관심을 치중하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목적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16일 팽목항 인근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사건이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 주를 이루는 300명가량의 사망자를 낸 선박침몰 사고 자체도 문제였지만 사고 직후 납득할 수 없는 무책임한 구조 활동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 이후의 후속조치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 했으며, 일 년이 지나도록 사건의 원인조차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어떤 구체적인 책임을 졌는지 조차 아리송할 뿐이다. 아직도 미심쩍은 부분들을 숱하게 많이 남겨두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권은 앞으로 그에 대한 진상을 낱낱이 규명해야 한다. 정부와 관련자들은 지금이라도 백성들 앞에 모든 것을 한 점 의혹 없이 밝히지 않으면 국민들의 혼란을 더하게 할 따름이다. 국가는 일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직접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은 자식과 형제를 잃은 가족의 슬픈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럴 때 기독교인으로서 세월호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웃의 고통에 참여하며 약자인 저들의 편에 서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세월호 침몰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에 연관 지어 종교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인들이나 할 법한 일이다. 성경은 결코 그와 같은 종교 행위를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며 참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부활절을 맞아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는 고난 주간을 세월호 참사와 연관 짓고 팽목항을 찾아가 종교적인 행사를 한다고 한다. 4월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일주년이 될 뿐 아니라 부활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세월호 사건을 연관지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는 금년 부활절을 앞두고 이미 그곳에 다양한 종교적인 조형물들을 설치하고 행사를 시작한 모양이다. 그리고 부활절 당일이 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곳에 모여 부활절을 지킨다고 한다. 관련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홍보를 하며 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왜 굳이 그곳에 가서 부활절 행사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팽목항에서 부활절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교훈과 무관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란 사실이다. 그곳에서 시도하는 부활절 행사는 이미 사망한 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발생하지 않는다. 부활절을 맞아 그와 같은 행사를 하는 것은 결코 건전한 성도들이 취할 행위가 아니다. 또한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4월 16일에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천주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팽목항에서 법회와 미사 등을 계획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저들처럼 하는 것은 세상의 시류에 편승한 억지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에 찬사를 보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건전한 교회가 취할 태도가 될 수 없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연관 지어 종교 행사를 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순수하게 따르는 성숙한 신앙인들이라면 그와 같은 행사를 주관하지 않는다. 교회가 기억해야 할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참사와 연관 지어 기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진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자는 의미가 아니다. 국가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세월이 가면 잊혀 질 것이라 생각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자들은 도리어 나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부활절을 이용하여 그에 접근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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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부활, 설교의 중심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게 달린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 기독교는 이 역사적 순간을 통해 부활의 복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로부터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겁없이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의 제자그룹은 모두가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이었다. 어부와 세리와 장사꾼들, 그리고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힘 없고 빽 없는 그 시대의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 그들은 세상이 겁나지 않은 특별한 존재들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지극히 소시민에 불과했던 촌무지랭이들이 세상을 바꾼 주역이 된 것이다. 대관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세상에서 한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사건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이 인류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잘 몰랐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실감한 것은 오순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이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모두가 예수 부활의 증언자들이었다. 역사적 교회는 예수 부활을 증거하고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해온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국가 권력과 맞물려 권력집단으로, 종교화 된 교권집단으로, 지극히 샤마니즘적인 기복집단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설교자의 그 많은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부활절 한 주에만 겨우 선포될뿐, 예수님은 부활의 주(0)가 아니라 만사형통의 주(0)로 둔갑되고 있는 것이다.예수의 부활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 시대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증언되거 체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설교가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예수 부활의 증언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을 설교하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의 임재도 함께 하신다.
    • 연지골
    • 사설
    2015-04-02
  • 북한선교사역 선교사 관리 허점 많다
    최근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또는 한국계 외국인들 가운데 북한선교와 관련된 선교사들이 많다. 임현수목사는 캐나다에서 북한선교를 위해 수년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온 사람이고, 이번에 북한에서 간첩으로 몰린 김국기목사도 합동중앙총회에서 파송된 단동주재 선교사이다. 그 이전에도 북한에 복음을 전한다며 들어갔다가 억류되어 개인뿐 아니라, 관계 정부까지 어렵게 만든 사례들이 여러번 있었다. 이들 중에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북한의 정보원으로부터 속아서 북한으로 갔을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개인적 영웅심이나 사명감에서 북한에 들어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왜 그들을 억류하고 심지어 간첩으로까지 몰고 가는가?임현수목사는 수년간 북한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미 교포사회에서는 친북주의자로 오해받을 만큼 북한을 수차례 방문하고 필요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해왔다. 임목사는 순전히 목사의 사명감으로 동족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김국기목사는 단동에 주재하며, 성경 보내기와 북한의 지하교회를 지원하고, 단동에 탈북자 쉼터를 운영하는 등 이 역시 어려운 북한 인민을 도우기 위해 애써온 사람인데, 2년전부터 소식이 끊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마도 김목사는 이미 그때부터 북한으로 넘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북중 국경지역에서 북한 사역을 하다가 어떤 모양으로든 북한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죽임을 당한 선교사들이 여럿이다. 한국교회가 북한사역 선교사들의 활동을 이대로 방치하다간 더 많은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 북중 국경지대에서 북한 선교를 하는 선교사들은 대체로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할 것을 당부한다. 개인의 사명감만 앞세워 천방지축 나서면 누군가 그 뒷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선교사가 지혜롭지 못해 일을 벌여놓고 또다른 사람이 고생하는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철저한 북중 지역 선교사 관리가 요구된다. 특히 교단이나 선교단체에 적을 두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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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4-02
  • 무교절
    ◇이스라엘 민족은 종살이 하던 에굽에서 해방될 때를 기념해서 해마다 무교절(無酵節)을 지켰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울 때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아울러 먹되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남은 것은 모두 불에 태우라는 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먹을 때는 곧 떠날 사람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출 12:8, 민 9:11)고 했다. 이 절기는 매년 이어져 예수님 시대에도 지켜졌다. 예수와 그 제자들이 가진 최후의 만찬은 무교절 풍속에 따라 준비된 것이었다(마 26:17).◇그런데 왜 이들은 구운 양고기와 함께 발효되지 않아 딱딱한 무교병(無酵餠)과 쓴나물을 먹었는가. 그것은 에굽에서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무교병은 애굽에서 급히 서둘러 나오느라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느긋하게 발효시켜 부더러운 빵을 구울 시간이 없어 발효시키지 못한 떡을 먹었던 때를 기념하는 것이고, 쓴나물은 쓰디쓴 종살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에서 해방시킨 여호와의 강권적인 유월절의 구원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각 가정에서 이 무교절 음식을 통해 자녀들에게 민족의 고난과 해방의 역사를 대대로 가르쳐 왔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족적 고난을 겪었다. 이 일제에 의한 민족 고난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일제 식민 시대를 통해 우리의 말과 이름과 민족정신을 말살 당한 참혹한 시대를 지냈다. 그런데도 해방 후 그 시대의 참혹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국민적 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3.1절과 8.15가 되면 일제를 규탄하는 일과성 행사가 있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젠 그 시대를 직접 겪은 사람들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대 고난의 역사를 증언할 사람도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도 보장받기 어렵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일제 식민 시대의 고난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교회가 사순절이나 고난주간 중 어느 한 주간을 일제 식민 시대의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제도화 한다면 어떨까? 그 시간을 통해 성경의 유월절 구원의 역사와 무교절의 역사를 가르치고, 우리민족의 고난의 역사도 가르치는 계기로 삼으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침략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일본은 역사왜곡 뿐 아니라, 언젠가는 또다시 군국주의화 하여, 그 힘을 이웃 나라를 침범하는 일에 사용할 지도 모른다. 소도 한번 빠진 웅덩이에는 다시 빠지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우리민족이 일본에 또다시 당해서야 되겠는가. ◇일제에 고통 당한 민족 고난의 역사는 한국교회가 앞서서 기념하고, 이를 전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 이스라엘이 무교절을 지킨 것처럼 역사교육의 장이 되게 하면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한민족의 종교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4-01
  • 잊을 수 없는 역사와 부활의 카이로스-홍성표목사
    인류 역사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과 그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이 역사의 한 복판에 오신 성육신 사건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다음으로 역사의 중심과 축을 바꾼 사건은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하시려고 갖은 고통과 쇠 채찍을 말고 가시관을 쓰시며 마침내 골고다 해골산 십자가에 산채로 못 박혀 로마의 권력과 그에 유착된 식민 치하의 유대 매국 세력에 의하여 정치범과 신성모독의 종교 범으로 처형당하신 역사적 예수의 죽임 사건과 그 죽음을 떨치고 죽은 자들로부터 사흘 만에 살아나신 역사적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디시 말하면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하시작한 역사적 예수의 악의 근원적 뿌리를 뽑은 사건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천추의 한은 민족분단이다. 그리고 이 역사는 두 개의 몸이 나누어진 남북의 분단 현실이다. 민족의 분단이 오기까지의 여러 가지 역사적 축적은 차치하고 이 나누어진 남북의 존재는 분단의 악을 서로 악용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도 북은 반은 독립이다. 그러나 남은 여전히 미국의 종속으로 분단을 지속하고 있다. 북의 권력 유지도 분단을 악요하고 있고 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그 한의 70 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민족분단을 빌미로 더럽고 추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의 부할은 그러므로 이 분단의 벽을 평화적으로 헐고 진정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 4월에는 두 가지를 잊어 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를 부르짖다 피 흘려간 4.19와 무구한 생명들과 피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을 차가운 남해 진도 앞 바다에 학살 수장 시킨 4.16 세월호 사건이다. 민주는 다시 쓰레기통에 뒹굴고 세월호의 진실과 한은 삼천리와 우주에 서려 있다. 한국 교회는 혼돈과 어둠에 깊이 묻혀 있고 만물은 신음하고 있다. 십자가의 선혈은 붉게 흘러내리고 역사의 부활 아침은 아직은 동이 트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부활과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의 부활 사건을 맞이해야 한다. 4월은 우리에게 그 메시지를 강하게 말하고 있다. 정의와 진실, 그리고 진리가 외면당하는 역사는 바로 설 수 없다. 죽음의 현실을 보고도 외치지 않고 선포하지 않는 종교는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억울하게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살아서 산자들에게 호소하고 부르짖고 있다. 죽은 자의 한을 풀어 주고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며 인간의 삶의 바른 가치와 정의를 바로 세우기를 주문하고 있다. 이럴 때에 침묵은 거짓이며 진리는 아니고 적어도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아니다. 십자가에 처형 되고 부활 하신 역사적 예수는 지금도 피 흘리시며 예수 없는 교회의 거짓을 고발하고 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갈릴리 작은 소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찢어 생명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의 음성을 들으라. 지금은 비겁함과 물러섬에서 용기와 일어섬을 할 때이다. 그리스도인은 굴종이나 맹목적 복종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죽음의 물을 거스려 생명으로 솟구치는 살아 요동치는 도전과 응전의 동적 존재이다. 부활과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상담해 주며 치유할 뿐 아니라 썩은 역사를 재창조하는 창조의 영이시다. 고리 원전의 위기와 남북의 전쟁 운은하는 악한 세력들을 단호히 물리치고 이 한반도에 살리는 부활과 생명의 영이 충만 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든지 어떤 제한적 전쟁이라도 다시는 있어서는 아니 된다. 미중일러 등의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진정한 독립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 4월에는 4.19가 있고, 잊을 수도 잊어서는 안 되는 세월호의 학살 사건이 있다. 수많은 학살 보다 우리의 가슴을 찢는 어린 아이들의 삶에 대한 몸부림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호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씻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죽고 진실과 정의는 다시 서지 못한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의 부활도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부활은 믿음이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적 사건이다. 이 역사와 카이로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 연지골
    201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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