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에 독자적 지역 성공회로 발전… 전 세계 교인 수 약 1억만 명
성공회(聖公會)
성공회(Anglican Communion)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된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英國國敎會)의 후신이다.
영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기독교 초기인 주후 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 초 아를공의회(Council of Arles, 314년)에 영국 주교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조직교회가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를공의회는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도나투스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14년 8월 남부 갈리아지방 아를에서 열린 서로마제국의 최초의 교회회의이다.
영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지도아래 교구제도에 기초하여 교회를 조직 운영하였으나, 오랫동안 대륙의 교회와는 대부분 단절된 채로 지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이르러 국왕 윌리암 1세와 대주교 란프랑쿠스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의 교회개혁 노선에 맞춰 교회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때 영국교회도 ‘서임권 논쟁’으로 국가와 갈등이 깊었다.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와 왕의 통치를 받는 국가가 수장권을 놓고 다툰 것이다.
게다가 14세기에는 교황청의 대분열과 영국과 프랑스 간에 분쟁이 생겨 교황권의 영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중세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헨리 8세(Henry 8, 재위 1509-1547)는 스페인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의 딸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분쟁이 생겨, 1536년 영국의회는 헨리 왕에게 ‘영국국교회의 지상 수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영국은 교황청과 사이의 재정, 사법, 행정적 유대 관계를 단절시켜 대륙의 종교개혁과 맥을 같이하는 교회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궁녀인 안나 볼린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헨리에게는 이들 외에도 4명의 왕비가 더 있었다.
영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하여 공동충성하고 “성공회 기도서”에 규정된 관행들을 동의하는 것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교회에 개혁의 불을 지핀 주인공은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이다. 14세기 영국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위클리프는 1370년 ‘교황에의 저항’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교황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며, 진정한 교회는 교황이나 추기경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자들의 전 회중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위클리프의 주장을 따르는 많은 사제들이 ‘청빈한 설교자들’이라는 선교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가톨릭의 화체설, 면죄부, 순례행각, 성직자 독신제 등을 비판하고 교황제도를 비성경적이라고 규탄했다. 이들을 ‘롤라드파’(Rollards)라고 불렀다. 롤라드파는 성경을 유이무이한 권위로 인정하고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이단자들로 몰았다.
이런 와중에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했다. 캐서린은 본래 헨리의 형 아더(Arthur)와 결혼했으나 채 몇 달이 안 되어 아더가 죽자 동생 헨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생활 15년 동안 태어난 자녀들이 모두 죽고 딸 메리 하나만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헨리는 후사를 얻기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의 결혼을 위해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고,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가 10세에 등극하여 외삼촌 서머세트(Somerset) 공작의 섭정을 받았다. 서머세트는 개혁신앙을 지지했고, 1547년 의회는 성찬식에서 평신도들에게도 잔을 주도록 명령했다. 1548년 초에는 성상(聖像)들이 제거되고, 1549년에는 사제들의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병약한 에드워드가 1553년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복 누나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결혼이 무효화 된 캐서린의 딸로서 가톨릭 신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6세 치하의 교회법령들은 모두 폐기되고, 개혁신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죽은 1558년까지 약 300명의 개혁신앙인들이 순교했다.
메리가 죽은 후, 안나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26세에 즉위하여 약 반세기에 걸쳐 치세하며 개혁신앙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가톨릭 측의 저항은 오래 지속되어 1563년에 가서야 정부는 겨우 안정기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때 훗날 ‘청교도’라고 불리운 열성적 개혁주의자들의 ‘퓨리탄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는 칼빈의 장로교적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청교도운동은 17세기에 이르러 영국 내란과 공화정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영국교회의 개혁은 왕실의 정치적 동기에서 정부 주도로 일어났으며, 교리신학이 그 중심이 아니고 정치와 교회법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성공회 기도서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라고도 부르는 영국국교회의 공식 예배서이다. 영국교회는 라틴어 예배를 영어 예배로 대체했다.
맨 먼저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뒤 1544년에 ‘성찬식 법령’이 공포되어 일반신자들도 이종배찬, 즉 빵과 포도주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48년 말, “영국국교회의 용도에 따른 공동기도와 성례 집행, 그리고 다른 교회의식들과 행사들을 위한 책”이 상정되어 1549년 성령강림절부터 사용되었다.
공동기도서는 성직복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의식과 관련된 몸짓들은 대부분 그대로 허용했다. 그러나 평신도 앞에서 성찬을 높이 들거나, 진설(陳設)하는 행위는 금지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 제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치르신 ‘충분하고, 온전한 제사’의 유익을 얻은 예배자들의 자기 헌신으로 대체되었다.
기도서에는 아침, 점심, 저녁 기도문, 각종 예배문, 의식문이 나타나 있어 전 세계 성공회는 통일된 기도와 예식을 갖는다.
성공회 가입 교회의 자격
성공회는 처음부터 영국 내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 각각 독자적 교구를 이루고 있었고, 1789년에 미국 성공회가 가입한 이후, 주로 영(英)연방에 속했던 지역에서 선교회로 운영되던 공동체를 포함해 1971년에 365개 가량의 교구가 생겨났다. 주로 아프리카에서 많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세 파가 있다. 하나는 가톨릭 전통을 중시하는 고(高)교회(high church)파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파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선호하는 저(低)교회(low church)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광(廣)교회(broad church)파이다.
성공회는 1930년에 열린 램버스(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관)대회에서 성공회의 정체를 밝힌 서술적 결의안을 채택했다. 성공회는 공동체로서 “성공회 기도서 속에 보편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바에 따라, 신앙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급하는 캔터베리 주교좌와 한 몸을 이루며 교통하는 적절하게 조직된 주교구들이나 관구들 혹은 지역 교회들이 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공통으로 지닌다.
그들은 다수 교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공동기도서’에 일반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과 의식을 지지하고 전파한다. 또한 그들은 개별적인 또는 민족적인 교회들로써, 각자의 지역 내에서 기독교 신앙과 삶과 예배를 표현하도록 촉진하며, 중앙의 법적 행정적 권위에 따라 하나로 결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의 공동협의회를 통하여 존속되는 상호 성실에 따라 하나로 결속된다.”
성공회는 4가지 기본적 원리를 갖는다. 첫째, 성경 : 66권의 정경과 교훈으로 삼는 14권의 준정경이 있다. 둘째, 신경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온 공번된 교리를 따르고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따른다. 셋째, 직제 : 삼성직(三聖職), 즉 부제(집사) 사제(장로·목사) 주교(감독)이다. 넷째, 성사 : 그리스도가 설립한 성사를 지킨다(성세성사와 성체성사). 나머지 혼배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조병성사, 서품성사는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거기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성공회는 1947년 이래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정회원으로 활동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 외 교회들 간의 교류를 넓히는데 힘쓰고 있다.
성공회의 현황
성공회는 영국교회의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교회의 화체설과 7성사, 교직자 독신주의 등을 버려 신교(新敎)에 속한다. 그러나 공중예배는 가톨릭교회처럼 항상 기도서에 기초한 양식상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다. 처음에는 공중예배가 ‘미사’라고 불렸으나, 근래에 이르러 ‘감사성찬례’로 바뀌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다. 현재 전 세계 성공회 교인 수는 약 1억 명이다. 이 중 영국에만 2200만 명이 있고, 대부분 영연방에 흩어져 있다.
1889년 전래된 대한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전통과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로 약 110여 개의 지역교회에 5만 여명의 교인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교단으로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성공회(聖公會)
성공회(Anglican Communion)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된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英國國敎會)의 후신이다.
영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기독교 초기인 주후 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 초 아를공의회(Council of Arles, 314년)에 영국 주교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조직교회가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를공의회는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도나투스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14년 8월 남부 갈리아지방 아를에서 열린 서로마제국의 최초의 교회회의이다.
영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지도아래 교구제도에 기초하여 교회를 조직 운영하였으나, 오랫동안 대륙의 교회와는 대부분 단절된 채로 지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이르러 국왕 윌리암 1세와 대주교 란프랑쿠스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의 교회개혁 노선에 맞춰 교회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때 영국교회도 ‘서임권 논쟁’으로 국가와 갈등이 깊었다.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와 왕의 통치를 받는 국가가 수장권을 놓고 다툰 것이다.
게다가 14세기에는 교황청의 대분열과 영국과 프랑스 간에 분쟁이 생겨 교황권의 영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중세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헨리 8세(Henry 8, 재위 1509-1547)는 스페인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의 딸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분쟁이 생겨, 1536년 영국의회는 헨리 왕에게 ‘영국국교회의 지상 수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영국은 교황청과 사이의 재정, 사법, 행정적 유대 관계를 단절시켜 대륙의 종교개혁과 맥을 같이하는 교회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궁녀인 안나 볼린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헨리에게는 이들 외에도 4명의 왕비가 더 있었다.
영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하여 공동충성하고 “성공회 기도서”에 규정된 관행들을 동의하는 것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교회에 개혁의 불을 지핀 주인공은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이다. 14세기 영국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위클리프는 1370년 ‘교황에의 저항’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교황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며, 진정한 교회는 교황이나 추기경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자들의 전 회중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위클리프의 주장을 따르는 많은 사제들이 ‘청빈한 설교자들’이라는 선교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가톨릭의 화체설, 면죄부, 순례행각, 성직자 독신제 등을 비판하고 교황제도를 비성경적이라고 규탄했다. 이들을 ‘롤라드파’(Rollards)라고 불렀다. 롤라드파는 성경을 유이무이한 권위로 인정하고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이단자들로 몰았다.
이런 와중에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했다. 캐서린은 본래 헨리의 형 아더(Arthur)와 결혼했으나 채 몇 달이 안 되어 아더가 죽자 동생 헨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생활 15년 동안 태어난 자녀들이 모두 죽고 딸 메리 하나만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헨리는 후사를 얻기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의 결혼을 위해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고,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가 10세에 등극하여 외삼촌 서머세트(Somerset) 공작의 섭정을 받았다. 서머세트는 개혁신앙을 지지했고, 1547년 의회는 성찬식에서 평신도들에게도 잔을 주도록 명령했다. 1548년 초에는 성상(聖像)들이 제거되고, 1549년에는 사제들의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병약한 에드워드가 1553년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복 누나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결혼이 무효화 된 캐서린의 딸로서 가톨릭 신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6세 치하의 교회법령들은 모두 폐기되고, 개혁신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죽은 1558년까지 약 300명의 개혁신앙인들이 순교했다.
메리가 죽은 후, 안나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26세에 즉위하여 약 반세기에 걸쳐 치세하며 개혁신앙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가톨릭 측의 저항은 오래 지속되어 1563년에 가서야 정부는 겨우 안정기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때 훗날 ‘청교도’라고 불리운 열성적 개혁주의자들의 ‘퓨리탄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는 칼빈의 장로교적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청교도운동은 17세기에 이르러 영국 내란과 공화정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영국교회의 개혁은 왕실의 정치적 동기에서 정부 주도로 일어났으며, 교리신학이 그 중심이 아니고 정치와 교회법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성공회 기도서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라고도 부르는 영국국교회의 공식 예배서이다. 영국교회는 라틴어 예배를 영어 예배로 대체했다.
맨 먼저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뒤 1544년에 ‘성찬식 법령’이 공포되어 일반신자들도 이종배찬, 즉 빵과 포도주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48년 말, “영국국교회의 용도에 따른 공동기도와 성례 집행, 그리고 다른 교회의식들과 행사들을 위한 책”이 상정되어 1549년 성령강림절부터 사용되었다.
공동기도서는 성직복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의식과 관련된 몸짓들은 대부분 그대로 허용했다. 그러나 평신도 앞에서 성찬을 높이 들거나, 진설(陳設)하는 행위는 금지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 제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치르신 ‘충분하고, 온전한 제사’의 유익을 얻은 예배자들의 자기 헌신으로 대체되었다.
기도서에는 아침, 점심, 저녁 기도문, 각종 예배문, 의식문이 나타나 있어 전 세계 성공회는 통일된 기도와 예식을 갖는다.
성공회 가입 교회의 자격
성공회는 처음부터 영국 내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 각각 독자적 교구를 이루고 있었고, 1789년에 미국 성공회가 가입한 이후, 주로 영(英)연방에 속했던 지역에서 선교회로 운영되던 공동체를 포함해 1971년에 365개 가량의 교구가 생겨났다. 주로 아프리카에서 많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세 파가 있다. 하나는 가톨릭 전통을 중시하는 고(高)교회(high church)파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파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선호하는 저(低)교회(low church)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광(廣)교회(broad church)파이다.
성공회는 1930년에 열린 램버스(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관)대회에서 성공회의 정체를 밝힌 서술적 결의안을 채택했다. 성공회는 공동체로서 “성공회 기도서 속에 보편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바에 따라, 신앙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급하는 캔터베리 주교좌와 한 몸을 이루며 교통하는 적절하게 조직된 주교구들이나 관구들 혹은 지역 교회들이 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공통으로 지닌다.
그들은 다수 교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공동기도서’에 일반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과 의식을 지지하고 전파한다. 또한 그들은 개별적인 또는 민족적인 교회들로써, 각자의 지역 내에서 기독교 신앙과 삶과 예배를 표현하도록 촉진하며, 중앙의 법적 행정적 권위에 따라 하나로 결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의 공동협의회를 통하여 존속되는 상호 성실에 따라 하나로 결속된다.”
성공회는 4가지 기본적 원리를 갖는다. 첫째, 성경 : 66권의 정경과 교훈으로 삼는 14권의 준정경이 있다. 둘째, 신경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온 공번된 교리를 따르고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따른다. 셋째, 직제 : 삼성직(三聖職), 즉 부제(집사) 사제(장로·목사) 주교(감독)이다. 넷째, 성사 : 그리스도가 설립한 성사를 지킨다(성세성사와 성체성사). 나머지 혼배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조병성사, 서품성사는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거기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성공회는 1947년 이래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정회원으로 활동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 외 교회들 간의 교류를 넓히는데 힘쓰고 있다.
성공회의 현황
성공회는 영국교회의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교회의 화체설과 7성사, 교직자 독신주의 등을 버려 신교(新敎)에 속한다. 그러나 공중예배는 가톨릭교회처럼 항상 기도서에 기초한 양식상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다. 처음에는 공중예배가 ‘미사’라고 불렸으나, 근래에 이르러 ‘감사성찬례’로 바뀌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다. 현재 전 세계 성공회 교인 수는 약 1억 명이다. 이 중 영국에만 2200만 명이 있고, 대부분 영연방에 흩어져 있다.
1889년 전래된 대한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전통과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로 약 110여 개의 지역교회에 5만 여명의 교인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교단으로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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