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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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와 차원과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는 십계명의 제 5계명 이하에 나오는 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신앙인들의 죄는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물론이거와 한걸음 나아가 본문 말씀처럼 몸의 사욕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법 아래’ ‘은혜 아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행함의 동기입니다.

 

율법 아래있는 사람은 말씀을 행하여야 구원 받고 행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기에 있어서도 징계가 두려워 행하거나 상급 보상을 바라고 행합니다. 행함의 주체 또한 자신입니다.

 

반면에 은혜 아래있는 사람은 자신은 아무 공로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믿는 믿음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행함의 동기 역시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신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행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b).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5:6).

 

주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지키는 사람은 이날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징계 와” “이날 사고 팔지 말라고 그랬으니. 매매하면 안돼.” 그렇게 지킵니다. 물론 이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주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날 하루를 온종일 거룩하게 지키자 하는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가 되어 지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처럼 남을 정죄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지킬 때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여 율법의 요구까지도 넉넉하게 이루어 주십니다. 보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매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지만, 살면서 율법과 복음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입니다. 자기 힘으로 지키려 하다가 깨어지고 넘어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주님께 대한 간절함과 겸손과 은혜의 소중함도 모를 것입니다.

 

바울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는 탄식하는 과정 몸부림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자신을 부인하게 되고 믿고 의뢰하며 주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고맙고 감사함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지키려 할 때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셔서 행하게 하십니다(2:13). 따라서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행함은 기쁨이고 활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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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율법 아래 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롬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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