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 저술
  • 동경성서학원서 공부… 한국성결교회 ‘사부’요 ‘교부’로 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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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신... 한학에 능통 동양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에 관심

이명직(李明稙) 목사는 1890123, 서울에서 한산 이씨 이승태(李承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중시조로 삼는 일파로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신(文臣) 양반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유명한 인물인 이상재(李商在)도 한산 이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직의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이라 하고, 또 어떤 연구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라고 한다.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는 지금의 성북구 종암동이다. 이명직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던 것 같다.

이명직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다. 김기삼은 이명직 연구의 글에서 소시에는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은 물론, 통감을 읽어 동양의 역사와 한학 문장에 능통하였다고 말했다. 이 한학 공부는 이명직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와 동양 사상, 특히 유교를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조선의 운명이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직은 자신이 한편으로는 정치를 공부하고 출세해서 이름을 펼쳐보려는 야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삼림에 들어가서 도승이 되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중 하나는 성취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명직의 집 뒤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과 저녁에 들리는 예불 소리와 종소리가 그의 귀에 인상 깊었고, 승복을 입은?승려들이 삭발을 하고 염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그에겐 신비감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그는 15세 때부터 장차 도승이 되어 금수강산을 유람하리라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16세 때 자신이 잠간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서 선교사들 통해 기독교 만나

그러나 이명직은 어떤 기회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공부를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선교사들이 경성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원래 선교사들은 조선사회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세운 선교활동의 일환이었지만, 이 가운데 젊고 똑똑한 상류층의 사람들도 선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반의 자녀들이었기에 낮은 계층이 다니는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양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주선했고, 이런 이유로 인해 생겨난 곳이 황성기독교청년회였던 것이다.

이명직이 18세 되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출세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의 표어가 있었는데, "이 시대에 나도 남과 같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권하였고, 이것은 이명직의 꿈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1907년 박갑은과 결혼했다. 이것은 유학 전에 아버지가 계획한 소망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1908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역을 떠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주일만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 동경에 이명직이 도착한 곳은 동경조선연합교회였다. 한국에선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교회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경에 와서는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출세를 꿈꾸고 동경에 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신실한 신앙을 갖게 만들었다는 소명을 의식하게 하였다.

 

동경YMCA에서 김정식 만나 동경성서학원 입학

이명직은 동경의 한인 YMCA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김정식(金政植)을 만나게 된다. 김정식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상재 이승만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감옥에서 출옥한 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황성YMCA 부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이 경성의 YMCA 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경성YMCA가 동경에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YMCA를 설립하고 김정식을 총무로 파송한 것이었다.  

김정식은 많은 조선유학생들을 지도하며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이 시절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조만식과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조선독립의 열의를 일깨우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명직의 신앙생활은?외형적으로는 출중하였다. 주초(酒草)의 금지는 물론, 민속행사 때처럼 백지에 자신의 과오를 적어 불태워 날리기도 했다.

원래 이명직은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은 법학을 공부해 양명출세를 꿈꾸었다. 대학에 들어갈려고 1년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경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라왔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사업이 갑자기 실패로 돌아가고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속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온 이명직은 그래도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도를 찾던 중?동경의 어느 거리에서 구세군의 '가로전도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나팔을 불고 찬송을 하며 열심히 전도하는 구세군인들의 전도 광경을 보고 이명직은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럴 때쯤 김정식이 동경성서학원을 소개해 주어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원은 동양선교회가 세운 성경학교로 미국 시카고의 무디성경학원과 비슷했다. 이 학원에서는 오전엔 성경공부, 오후에는 전도, 저녁에는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하였다. 그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1911년 이명직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개성전도관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개성전도관은 동양선교회가 경성의 무교동과 진남포에 이어 세번째 세운 전도관으로 1909년에 문을 열었다. 먼저 사역하고 있는 주임교역자는 강태온이었다. 1912년에는 후배인 이명헌이 개성에 와서 노방전도를 통해 구도자가 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사역하였다. 이때로부터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전도자로 또 지도자로 성장해 같다고 볼 수 있다.

 

해방정국에서 성결교단 정비...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 기록으로 남겨

일제 시대를 지나 동양선교회의 전도관은 교회 수의 증가로 전도관 체제를 탈피하고,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자연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8.15 광복 이후 혼란기를 겪으며 교단이 안정되기도 전에 19506.25 전쟁의 발발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교단을 새로이 정비하고 조직 발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명직 목사는 자연스럽게 성결교단의 중심에 서서 일하게 되고, 교단장의 일로부터 인재양성의 중심이었던 경성신학교를 복원하는데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라는 저서에서 "이명직은 성결교회 초대 인물의 일원으로 성결교회와 신학교를 키워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이 교단의 사부요 교부이다. 이 교단이 이만큼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은 그의 공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오영필 목사는 그의 저서 <성결교회 수난사>에서 이명직을 가리켜 "성결교단을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남여 교역자를 양성한 유일한 사부"였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가 남긴 많은 글 중 1929년에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를 기록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에 주목한다. 이 글은 성결교회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저서는 1928<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가 나온 바로 이듬해에 발간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장로교단에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 교단역사가 출판물로 공간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책 이름이 좀 긴 것 같지만 성결교회를 지원하고 후원하고 있는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를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조 및 개교회들의 실재를 잘 소개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교단 역사 사료이다. 그 형태를 보면 판형도 책자다운 국판형으로, 내용은 위에서 아래로 즉 세로 쓰기로 되어 있으며, 고어체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양장본으로 총 198면에 이른다. 여기에는 동양선교회 계통과 신앙개조 및 성결교회의 연혁과 조직, 성서학원 그리고 각 지방교회의 역사 및 교역자와 선교사들을 소개하는데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총 74매의 교회 및 교역자들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어 역사서로써 역사성을 지닌 저서라 하겠다.

 

성서학자, 교회행정가, 신학교수로서 '교회사가'

이 책의 서문을 쓴 당시 경성신학교의 곽재근 목사는 조선에 전래된 동양선교회의 성결교회가 한 세대도 덜 된 이 때에 이명직 목사에 의해 저술 출판된 성결교회 략사 출판에 대해 "지나간 역사를 정리 못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는데, 본 교회의 원로 이명직 형이 몇 년 전부터 이 일에 뜻을 두고 재료 수집 및 기타에 전심 노력한 결과 이에 책 한 권을 제작하니 곧 우리가 기대하던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이다. 그 미묘한 춘추필법은 독자로 하여금 심오한 섭리와 놀라우신 축복과 엄위하신 권위를 일목요연하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책의 출간을 반기웠다. 무엇보다도 이명직이 친히 쓴 서문을 보면 이 책의 간행 의미와 저술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이스라엘 르비딤에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싸워 승전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17:14)라고 하셨고,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행하신 일 곧 그 역사를 기록하여 자손에게 전하라 하셨은즉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우리의 제1 총리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길보른(Emest A. Kilbourne)으로 말미암아 일으키셨는데, 22년 후 오늘에 앉아 생각하니 하나님의 축복의 현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22년 전에 카우만 부부가 가방을 들고 태평양을 건널 때에 이렇게 성공하리라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카우만 부부의 믿음의 안중에는 벌써 이러한 환상이 나타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 믿음과 같이 이루어졌으니 일본, 조선, 중국에 전도자를 양성하는 성서학원이 4곳이요, 성결교회로는 일본에 200여 곳, 조선에 70, 중국에 20여 곳, 동양 전체는 그로 말미암아 '순복음'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적이 아니며,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짐작할 수 없어 그 능력과 그 축복하심을 만분의 일이라도 증거하기 위하여 감히 붓을 들어 본 약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넓고 크신 능력의 역사를 어찌 졸필로 다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다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해도 거룩한 주의 역사에 이즈러짐과 더럽힘이 없으면 다행이라 하겠다..."(같은 책 서문 p.2).

본 필자가 성서학자요, 교회행정가요, 신학교수요, 한 교단의 사부요, 교부로 추앙받는 이명직 박사를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칭하는 이유는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희년을 맞이해서도 겨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차재명 1928, 창문사)를 출간했는데, 조선에 후반 선교자로 시작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30년 한 세대가 되기 전(1907-1929)에 교단사(교회사)를 정리해 친히 저술하여 간행했다는 것은 신학자와 행정가로서만 아니라 먼 미래를 바라 볼 줄 아는 사안(史眼)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명직 목사를 한국교회사가의 반열에 올려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명직 목사의 저서가 간행된 후 40년 만에 서울신학대학의 그의 제자 이천영 교수에 의해 서울신학교로서는 최초로 문교부의 교수 저작지원금으로 <한국성결교회사>(1970)가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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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명직 목사(1890-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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