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호 목사(한국에흐예언약학회 회장)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아담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 주어졌고, 노아에게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주어졌다. 아브라함에게는 후손과 땅과 복의 언약이 주어졌고, 모세를 통해서는 율법이, 다윗에게는 왕권의 약속이 주어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언약의 역사로 이해해 왔다.
이러한 이해는 분명히 중요하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의 삶과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언약의 흐름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을 더 깊이 읽다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언약의 역사 뒤에 더 깊은 차원의 하나님의 선언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선언이 바로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 에흐예 ” 의 말씀이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두려워했다. 자신이 누구이기에 바로 앞에 서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할 때, 그들이 “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 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히브리어로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보통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또는 “나는 내가 될 자다”로 번역된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 주는 정보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자기 계시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선언이다.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의존하고, 자라면서 환경과 사회와 관계 속에 기대어 살아간다. 사람의 존재는 본래부터 다른 것에 기대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시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자신 안에 생명과 뜻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처럼 외부 조건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이 점은 성경의 구원 이야기와도 깊이 연결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언약은 늘 인간의 반응과 실패를 동반했다. 하나님은 신실하셨지만 인간은 흔들렸고,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 율법이 주어졌지만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왕이 세워졌지만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긴다. 인간이 계속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인간에게 주어진 언약만으로 구원이 완성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어떤 길로 그 일을 이루실 것인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 에흐예 ” 선언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과 같다.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완전한 순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스스로 뜻을 세우시고, 스스로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 에흐예 ” 라는 이름은 단순한 존재의 선언이 아니라 구원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너질 때에도 무너지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언약에 실패할 때에도 자신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 자체가 바로 이 사실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였고,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고 길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짖음 속에서 기억하셨고,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셨다. 출애굽은 인간이 이룬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내가 함께한다” 는 말도 에흐예 선언과 연결된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시며 친히 이루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언약 역사에는 두 층위가 보인다.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 언약의 역사이다. 또 하나는 그 모든 인간의 실패 뒤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더 깊은 구원의 역사이다. “ 에흐예 ” 선언은 바로 그 두 번째 층위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 에흐예 언약 —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약속의 선언 ” 이라는 말은 낯설지만 매우 중요한 표현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무관하게 행동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끝까지 이루어 가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언약을 주셨지만, 동시에 그 언약이 결국 자신의 뜻 안에서 완성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인간은 구원의 길을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그 길을 여셨다. 인간은 죄를 해결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그 문제를 담당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에흐예의 하나님이 자기 뜻을 역사 속에서 실행하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 에흐예 ” 언약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던진다. 성경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의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의 길을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지 약속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하신 뜻을 스스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