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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8. 제57회 총회장 박성겸(朴聖謙) 목사
    황해도 안악군 출생박성겸(朴聖謙 1910.2.26~1984.4.2)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평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안악지방은 평양과 신의주, 원산에 이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영향으로 기독교 복음이 일찍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세 역시 평양과 의주에 비길 정도로 기독교가 활발하게 뿌리내려진 곳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개화한 지방이었다. 성겸 소년은 일찍이 부모들이 복음을 받아 신종하여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일찍부터 교회에 출입하였고, 초기 선교사들과 조선인 조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이 자나라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 역시, 1905년 소위 한일합방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내 세웠으나 실상은 을사늑약이란 말이 말해주듯 조선의 국권을 강탈 당한 암울한 시대였다. 이러한 때에 성겸 소년이 태어났으니 그의 앞날이 어떠했겠느냐에 대하여선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족적인 저항이 의병들의 무장투쟁이었고 민족의 계몽 및 실력 향상을 위한 신민회(新民會) 활동과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 시위였고 3.1독립운동이었다. 그 중심세력은 전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종교단체들이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힘을 모으고 만세 시위에서부터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운동의 실체가 되었다. 이와같은 종파의 이념과 교리를 능가한 연합활동으로 3.1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독립이란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독립을 명분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자유와 정의, 독립과 저항의식을 비폭력 무저항으로 힘을 합쳐 민족 구원과 국권회복이란 대의를 위해 양보와 희생 그리고 애국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총회 주일학교 및 장년부 공과 집필교단지 ‘기독신보(기독신문)’ 발행에 기초 놓아‘은성문화사’ 설립 목회자료 공급한학에 능통한 문필가요 교정가“총신대 아세아지역 출신 유학생 등록금 면제”성겸도 복음을 접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배우며 교회가 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가 조국의 해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과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신은 교회와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가장 효과적이며 실질적인가를 생각하며 성장해 갔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미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에 안악군 내에는 교동교회(橋洞敎會)를 비롯 덕산교회(德山敎會), 서하면 대동교회(大同敎會), 안악에는 읍내교회(邑內敎會)와 무석교회(武石敎會) 및 삼상교회(三上敎會) 등이 설립되었다(史記 上 1928, p.24). 정치 경제적으로는 심히 어려웠으나 종교적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복음이 전래되어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개화되어 있었고 일제가 만만하게 대중을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찍이 교회가 운영하는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졸업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1938년 6월에 졸업한 후, 같은해 11월 28일 황해노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장립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1938년부터 1947년까지 송화군 상리면 도은교회(1907. 6. 10 설립) 위임목사로 10년 간 시무하였으며, 1940년부터 1947년까지는 은율성경학교 강사로 성경을 가르쳤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는 수교교회 위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황해노회의 서기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북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북한에서 공산당의 교회에 대한 간섭으로 박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1951년 1월 14일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가족들과 교인들을 이끌고 월남하였다. 그는 안악에서 멀지않은 황해도 장연군에 속한 백령도로 피난 와서 백령도에 있는 화동교회, 진촌교회와 사곶교회를 맡아 목사로 시무했다. 1952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진촌교회 안에 부설 진촌유치원을 설립 교회교육의 확대에 힘썼으며,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에 힘쓰기도 하였다. 박 목사는 1969년 4월 28일 서울금성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32년 간의 목회사역을 마감하며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도 함께 거행하였다. 1967년에서 1973년까지 총신대학교 실행이사를 역임하였고, 1969년 1972년 어간에는 총회 주일학교 공과 발행인 겸 장년부 공과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1971년 4월 16일 황해노회 100회 기념식 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4월 4일부터 5월 5일까지 대만기독교장로회 총회에 본교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1972년 9월 27일 교단신문인 기독신보 발행을 위한 동록업무를 추진해, 오늘의 기독신문 발전의 기초석을 놓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1984, p.103 참조). 박 목사가 백령도에서 서울로 온 것은 1953년 휴전이 된 직후 10월 25일이었다. 빈손으로 상경하여 금성교회(金城敎會)를 설립 황해노회에 가입하였다. 1950년 이후 1970년도까지 박 목사는 황해노회 노회장을 6번이나 역임하였고, 황해노회 교직자회 회장을 2번이나 역임하면서 교정(敎政)의 경험을 쌓아갔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총회교육부장으로 재임하며 교단교육에도 큰 공을 세웠다. 박 목사는 문필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친히 1956년 8월 31일 은성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설립,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목회관련 저서와 설교집을 발행해 공급하였다. 은성문화사를 통해 출판된 대표적인 저서들을 보면 빛과소금(1955. 1. 30), 성신의 검(1956. 3. 5), 예수와 나(1956. 12. 30), 목양의 길(1957. 11. 18), 생명의 꼴(1958. 6. 20), 중생의 씨(1959. 9. 20), 사상의 포로(1960. 11. 15), 한알의 밀(1961. 4. 18), 피의 제단(1962. 10. 24), 성구금언 예화(1962. 5. 25), 신약설교 전집 전6권, 불의 역사(1964. 9. 30), 새예식서(1969. 5. 5) 황해노회 100회사(1971. 3. 30), 한국목사대사전 등이 있다. 박성겸 목사는 한학에도 능통하여 그의 저서는 구수한 음식처럼 많은 목회자들에게 참고서 역할을 한 교단 안에 몇분 안되는 문필가요 목회자였다. 그는 1972년 9월 21일에서 27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그동안 한생을 복음을 위해 헌신한 것과 노회를 비롯 총회와 신학교 등을 위해 수고하였다는 뜻으로 전국교회가 그에게 안겨준 영예이기도 했다. 그의 이와같은 노고를 인정하며 1969년 2월 26일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훼이트성서대학과 페이스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가 주어졌다.그가 재임했던 제57회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 안건을 열거하면, ① RES에서 본교단은 탈퇴하기를 하다. ② 그동안 시행해 오던 지역별 대회제도를 폐지하기로 하다. ③ 총신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아세아지역 출신 유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 주기로 하다. ④ 정봉조 목사를 총회 총무로 인준하다. ⑤ 총회신학대학 학장에 김희보 목사를 인준하다. ⑥ 전북 전주에 있는 바울신학교를 총회 인준학교로 하다(제100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이숭회, 김창수 편, 예장총회 사무행정국 2016, p.24).박성겸 목사가 남긴 설교 가운데서도 그가 추구했던 삶의 지표와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본문으로 ‘청심자수복(淸心者受福)’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기초로 하여 청심자의 생활에 대해 이같이 설교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생활에 반영됩니다. 마음이 부정하면 그의 행동도 불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생활도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모인 군중 그를 따르는 이들은 세속생활을 떠난 진선미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청결한 마음 즉 청심(淸心)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요 15:3)이라 하셨고, 둘째는 죄의 고백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박 목사는 평생을 자신의 삶을 이 말씀처럼 살았고 성역을 끝까지 매진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p.67-69참조). 박 목사는 슬하에 네 자녀(혜선, 호선, 승선, 은성)를 두었고, 그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다하고 1984년 4월 2일 74세의 일기로 사모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영면하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4-20
  • 77. 제94회 총회장 서정배(徐貞培) 목사
    경북 김천 출생서정배(徐貞培 1944.8.11~1016.5.28) 목사는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대양리 천동에서 부친 서기준과 모친 구옥희 사이에 1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40년대는 일제 말엽 조선총독부가 전쟁물자를 거두기 위해 조선천지를 수탈하던 시기로, 세상천지가 어떻게 돌아갈지 기약없는 불안한 시대에 시골 한 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었다. 농민들이 애써 지어놓은 농산물은 자기들이 맡겨놓은 것인양 공출이란 미명하에 약탈해갔고, 백성들은 들과 산을 헤메며 풀뿌리와 채소로 연명하며 가난을 동무로 삼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1945년 갑자기 맞이한 8.15광복절은 우리민족에게는 천혜의 복음이었지만, 준비되지 못한 당시 우리사회는 8.15 해방이 한편으로는 전 사회가 좌우의 사상적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이 정배 소년이 태어난 시대적인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가 태어난 지역엔 이미 대구에 자리 잡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부(Mission Station)에 의해 경상도 북부지방인 김천지역에도 일찌기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보면 1904년(甲辰年) 합동공의회 시절에 이미 경부선을 끼고 있는 김천읍 황금동에 선교사 부해리(Rev. Henry Bruen, 1874-1957)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고(史記 上 1928, p.116), 이듬해 1905년(乙巳年)엔 김천읍에 유성교회(柳城敎會)와 광기교회(光基敎會)가 설립되었고(史記 上 1928, p.133), 드디어 1906년(丙午年)에는 정배 소년의 고향(대양리)에도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金泉郡 大陽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當地人 幾名이 傳道人에게서 福音을 듣고 信從함으로 敎會가 設立되었는데 宣敎師 傅海利 領袖 金仁倍 助師 李載旭 李漢奎 等이 視職하니라”(史記 上 1928, p.163)고 기록하고 있다.소년 서정배는 점점 자라면서 마을에 있는 대양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주일마다 학교처럼 출입하게 되었다. 처음엔 신기하기도 하고 생소한 환경이기도 하였지만 경제사정으로 멀리 나가 학교교육을 자유로이 할 수 없었던 정배 소년에겐 교회야 말로 학교를 유치원이요, 지적(知的) 영적(靈的)인 자양분을 받고 성장한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불신가정서 태어나 주일학교서 신앙교육대구신학교·총신대 거쳐 목사 안수울산 대광교회 설립 중형교회로 성장시켜인자하고 조용한 성품의 지도자 면모 가져“사회법정 고소자 회원권 정지” 결의그가 청소년기를 고향에서 보내면서 세상적인 지식에는 어두웠어도 교회교육을 통하여, 또 신앙생활을 통하여 점점 성숙한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같은 고향 주위에도 이웃에 복전교회(福田敎會)와 좀 떨어진 선산(善山)에 청산교회(靑山敎會)가 들어서게 되어 일제하에서 해방된 조국은 기독교로 말미암아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점점 안정되어 갔다. 소년 서정배는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등지고 김천에서 대구를 거쳐 울산광역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1975년 대구신학교(현 대신대학교 전신)를 거쳐 총신대학교 신학연구원을 졸업하고(제68회), 울산광역시 남외동에 전세를 얻어 예배실로 6평을 할애하여 강단과 의자를 갖추고 오늘의 교세가 된 대광교회를 가족과 함께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본격적인 목회의 길을 걷게 된다. 그해 10월 16일 제109회 부산노회 정기회에서 정식 등록과 함께 교회설립 허가를 받게 되었으며, 이듬 해 1980년 7월 11일 같은 울산에 반구동 9-7번지를 대영교회의 도움으로 성전을 지을 대지 92평을 매입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 위의 대지에다 53평의 아담한 단독예배당을 짓기 위해 기공식을 가졌다. 그때의 감격을 서정배 목사는 자주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12월 7일엔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리므로 오늘의 중형교회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될 줄은 주님밖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982년 11월 26일엔 미조직 교회가 제1대 장로 장립식을 하면서 교회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당회가 조직되었다. 이듬해 3월 11일엔 노홍균 집사 기증으로 종탑을 건립하였고, 1983년 4월 20일엔 서정배 목사 위임식과 노홍균 집사의 장로장립이 있었다.1984년 8월엔 목사 서재실을 건립하였고, 1988년 10월 14일엔 약사동 619-21번지에 있는 주택 1동을 구입해 목사관으로(연건평 46평 2층) 사용하게 되었으며, 1991년 12월 1일엔 내외선교사업을 위해 선교위원회를 조직, 첫 사업으로 1992년 10월 26일 울산시 다운동 97B6N에 전도사 조헌제를 파송하고 성산교회를 개척했다. 또 1993년 11월 22일 파키스탄에 대광교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설립기금을 현지인 사역자 알 타프칸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예배공간 확장 필요성이 대두되어 1996년 1월 4일 신축대지 163평을 구입, 새성전으로 연건평 360평 규모의 성전을 신축해 1996년 3월 1일 준공 헌당예배를 드렸다. 서정배 목사는 1989년 4월 10일 개최된 19~20 회기의 울산노회장에 이어 2007년 4월 55-56 회기의 노회장을 재임하였고, 2015년 9월 12일엔 원로목사 추대예배와 함께 제2대 정일제 목사 위임 감사예배를 온교회와 노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었다. 서정배 목사는 시무하던 대광교회를 개척이후 한 눈 팔지 아니하고 오직 한 교회만을 위해 한생을 모범적인 목회자로 헌신 봉사한 보기드문 전형적인 목회자였다. 그의 이러한 헌신과 충성심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2008년 9월 22일 예장총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듬 해 2009년 9월 21일부터 25일까지 울산 우정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4회 총회장으로 당선, 교단의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그는 인자하고 조용한 지도자의 성품을 갖추어 지도자의 면모를 가졌다. 서정배 목사는 대구에 있는 대신대학교 출신으로서 첫번째 총회장으로 당선돼 모교의 채플에 초청되어 후배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후배들을 격려하던 모습이 새롭다. 그 당시에 필자가 대신대학교에 몸담고 있어서 그 광경을 목격하였기에 서 목사에 대해 열전을 기술하면서 더 깊은 감회에 잠시 잠겨본다. 그는 CBS 이사로, CTS 대표회장으로, 한국찬송가공회 이사장으로, 여러 기관에서 교단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은퇴 후에도 부산에서 간행되는 교계 언론기관(크리스챤타임 대표 양원 장로)의 후원회 이사장으로, 다방면에 봉사자로 몫을 감당해오다 뜻하지 않은 병고로 2016년 5월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재임했던 제94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 보면, ① 임시목사에 대한 헌법개정을 위해 연구위원을 선출하기로 하다. ② 타교단과의 강단교류 권한에 대한 법적 해석의 건은 현행대로 하기로 하다. ③ 세계개혁주의 보수교단협의회 조직 및 세계대회 개최를 추진하기로 하다. ④ 세례교인 헌금제도는 제93회 총회 이전으로 환원하되 모든 상비부 산하기관 특별위원회의 지출예산은 수입예산에 맞춰 조정하기로 하다. ⑤ 사회법정 고소지에 대한 제90회, 91회 총회 결의는 폐지하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결정된 총회결의에 반하거나 거역하는 회원은 회원권을 정지하고 회원으로서 가지는 권한과 지위를 박탈하여 그 효력은 즉시 발생하도록 하며 소속 하회에 통보하여 불이행시 총회가 직접 척결하는 내용을 권징조례를 적용하여 시행하기로 가결하다. ⑥ 총회기관 구조 조정하기로 하다. ⑦ 해외한인교회 노회 조직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조직하다. ⑧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교단의 입장정리를 신학부에 맡겨 처리하기로 하다. ⑨ 구제부 횡령사건 처리를 위하여 기소위원 3인을 선정하고 특별재판국을 설치하다. ⑩ 상설재판국 시행을 위하여 규칙을 수정하고 시행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의 회의결의 및 요람, 김영남 황규철 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사무행정국 2014. 서울 p.38-39 참조). 서 목사는 그가 급성암으로 소천한 대구 계명대학교 부속 동산의료센터에서 2016년 5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장례절차가 이루어졌다.슬하에 사모 이성자와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성일은 한의사로 사회봉사를 하고 있으며, 딸 현숙은 출가해 가정을 이루어 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4-14
  • 76. 제96회 총회장 이기창(李基昌) 목사
    전북 익산 출생이기창(李基昌 1949.3.25~) 목사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창 소년이 태어난 전북 역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부가 일찍부터 들어와 선교의 기반이 잘 다져지고 있었고, 익산 지역 역시 군산지부가 자리잡고 있어 기독교 선교영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익산은 불교 영향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파생된 원불교 발상지가 되어 보이게 보이지 않게 불교의 영향이 강한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 기창 소년이 태어난 시기 역시 일제 말엽이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라 소위 정부수립 전후 혼란했던 해방 공간(약3년)에 세상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의식주 문제가 넉넉하지 못하였으나 부모님의 사랑과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여러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큰 탈 없이 자랐고 제법 장남의 자질까지 보여 부모님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여러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이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익산에 있는 혜성고등학교에 입학, 새로운 배움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어 조국의 미래를 위해 농업기반을 잘 닦아야 경제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시 국립대학으로 출발한 전북대학교 농업경제분야 학과로 진학하였다. 그러던 중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을 받고 졸업하자 마자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학대학원)와 신학석사(Th.M)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였다. 총신은 일찍부터 신학은 인문학의 바탕 위에 고도의 학문성을 쌓아야 한다는 교육이념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신학준비과정으로 교양과 어학 및 철학 위주의 신학예비과정으로 2년 과정의 예과(豫科) 과정을 두었다. 이기창 목사는 전주북문교회(全州北門敎會) 8대 담임목사로 부름받고 부임한 해가 1982년 9월 3일이었다. 당시 북문교회 당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조건이 세가지였다. 첫째 일반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를 졸업한 분, 둘째 40대 미만의 젊은 목사로 신앙인격과 비젼을 겸비 하신 분, 셋째 말씀선포에 은혜가 깊고 교회 행정에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는데, 이 목사가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인격과 신앙 그리고 영력(靈力)을 갖춘 분이었던 것이다. 여호와이레란 말이 있듯이 이기창 목사야 말로 전주북문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자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농업경제분야 전공한 목회자전주북문교회 제8대 담임목사예배·기도·성경공부 통해 신앙생활의 역동성·선교의 활용화 이뤄지역복음화와 지역발전에 기여이기창 목사는 전주북문교회와는 이미 인연이 있었다. 1978년 7월 16일 북문교회 강도사로 부임해, 동년 10월 1일엔 부목사로 취임 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온화한 성품과 진실성이 이미 성도들에게 검증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 부흥발전의 목표를 세 가지로 설정해 온 교인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였다. 첫째 예배운동이었다. 예배의 경건성을 강조하며 신령과 진리의 예배본질을 일깨우는데 힘을 다하였다. 둘째 기도운동이었다. 기도를 통해 상처를 치유받고 기도를 통해 교회부흥의 기초와 원동력으로 삼아갔다. 침체되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일깨우기 위해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상기도를 생활화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셋째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교육에 힘썼다. 침체된 교회와 교인의 분위기 쇄신과 교회의 동력화를 위해 전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토대로 한 신앙의 생활화에 힘썼다. 구체적으로 온교인들에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권찰 성경공부반 개설, 신학교류에 준하는 신앙교육 신앙정도에 따라 여러개 반을 편성 운영하였다. 교역자들의 교인 가정심방 강화에 이어 교회의 목표로는 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요한 4:24), ②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행 1:8), ③ 그리스도의 분부하는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교회(마 28:10~20)로 정하였다.다음으로 성도의 생활지표로 ① 성경중심의 삶(행 17:11~12), ② 기도에 힘쓰는 삶(살전 5:17), ③ 전도에 전력하는 삶(막 1:38), ④ 주일성수의 온전한 삶(계 1:10, 시편 58:13~14), ⑤ 십일조와 헌금에 성실한 삶(말 3:10)을 제시하여 집중해 나갔다.이기창 목사의 부임 이후 또 다른 집중사역은 선교활동 전개와 예배당 증축 사업과 여전도회 확장사업과 찬양대의 획기적인 부흥과 발전이었다. 다음으로는 교세의 확장에 힘입어 교육공간 확보는 새교육관 건축의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유·초등과 중·고등부 및 청년 모임의 원활을 기했다. 이에 교역자(부목사, 강도사 및 전도사) 확충을 가져오게 되었고 교회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선교의 활성화를 위해 기구를 개편했다. 1990년 6월 24일 선교위원회를 조직, 해외선교와 국내선교를 동시에 균형있게 시행하였다. 처음으로 선교목사(소방은 목사)를 청빙, 국·내외 선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1991년도에 해외선교사 지원(싱가폴 조기술 목사), 소방은 조영아를 터키에 파송하였고, 국내선교지 지원이 25개 교회였다.해마다 해외선교사 지원과 국내선교 지원교회는 점점 증가했고, 1995년까지 해외 선교사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위에 언급한 터키 외에 네팔에 허인석 선교사, 독일에 이남백 선교사, 페루에 이천현 선교사, 호주에 서정권 선교사, 케냐에 김수찬 정영은 문승호 선교사, 태국에 이춘우 선교사, 남아공에 박진호 이한진 김창길 박성자 선교사, 영국에 민경수 선교사, 필리핀에 소광은 이석태 선교사, 중국에 김진완 허철희 박재용 선교사, 코소보에 한태진 선교사, 불가리아에 김아진 선교사, 인도에 이병구 임수정 선교사, 미안마에 김병갑 선교사를 파송,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여전도회 역시 눈에 띄게 확장되었는데 1991년 제3여전도회로 확대되고, 2000년도에 이르러는 10개의 여전도회로 늘어났고, 이들이 교회 봉사와 선교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전주북문교회50년사, 하재준 편, 전주북문교회 2005, p264 참조).그가 남긴 설교 가운데 누가복음 19장 41~44절의 본문으로 <예수님의 눈물>이란 설교를 보면 그의 목회철학과 목회관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눈물을 흘렸을까요? 첫째 예루살렘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다. 둘째 예루살렘성이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셋째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량하게 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이기창 목사님이 내 조국이 내가 목회하고 있는 전주성을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눈물로 사역앴다고 여겨진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 p.367-369참조). 이기창 목사는 2011년 9월 19일~23일까지 그의 모교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6회 총회에서 명예로운 예장 총회장이라는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자기가 속한 전주노회 노회장을 비롯 전북신학교 교수 및 지역사회를 위하여서도 여러 방면에 기관장들과 협력, 지역복음화와 지역발전을 위해 대소사를 챙기는 다정다감한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그는 교단 대표로 기독교텔레비전(CTS) 대표이사를, 같은 재단의 CTS전북방송 이사장, 총신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그가 재임했던 제96회 총회 결의안 중 중요사항을 살펴보면, ① 헌법개정위원 15인에게 맡겨 헌법을 개정하기로 하다. ②총회 총무 임기를 3년으로 하고 1회 연임 가능한 것으로 개정하다. ③ 강단용 성경은 개역판과 개정개역 4판을 병행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다. ④ 헌법정치 제4조 4항에 <20년 이상 시무> 는 <부임 20년>으로 하다. ⑤ 만 70세 유권해석 재요청 건은 제93회 총회 결의대로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하기로 하다. 이기창 목사에게 2004년 2월 28일 미국의 퍼시픽대학교(Pacitic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그의 목회사역과 교회행정력을 인정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다. 슬하에 2남1여의 자녀가 있으며, 장남 강천 목사는 아버지의 성직을 이어 미국에서 교민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4-01
  • 75. 제86회 총회장 예종탁(睿鍾卓) 목사
    경북 청도 출생예종탁(睿鍾卓 1936.8.30~) 목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 327번지에서 부 예장기와 모 전두이 사이에 2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 역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노략하여 이 백성들이 마음놓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가고 있었고, 조선의 청소년들에겐 정말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경제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부모들이 처한 환경 또한 말이 아니었다. 농사터전에서 애써 농사를 지어 보았자 일제당국에 의해 공출당해야 했고 그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숨겨둔 양식으로 모두가 연명해야 했으니 그 고통과 생활고를 어찌 다 표현하랴. 그래도 다행인 것은 부모님께서 일찌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어 처음엔 팔조령(八助嶺)이란 높은 재를 넘어 대구남성령교회(현 대구제일교회)로 39리가 넘는 거리를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후일엔 청도군 풍각면 소재지 송서(松西)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의 초석을 다지었다. 종탁 소년의 가장 큰 축복은 바로 부모님들의 신앙의 그늘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는 어릴적부터 예배당에 나가 성경을 듣고 배웠고 찬송을 부르며 인격을 형성해 나갔다. 같은 면 소재지에 있는(학산리) 이서초등학교를 다니며 철없는 시절을 자연과 함께 마음껏 호흡하며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는 군청 소재지에 있는 사립학교인 모개중학교로 진학 20리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사회는 희망이 없고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나 부모님의 교육열에 힘입어 순조롭게 중등교육을 받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종탁 소년의 심적 밑바탕엔 신앙이 큰 밑거름이 되었고 힘이 되었다. 어릴때 전쟁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6.25전쟁의 여파로 북쪽으로부터 종탁소년이 살고 있는 청도에까지 많은 피난민이 밀어닥쳤고 청도를 거쳐 정처없이 부산으로 피난가는 행렬을 목격해야 했다. 처음부터 목회자에 대한 소명감이 분명동현교회 개척 설립·세계 각국에 선교사 파송방송 및 문서선교에도 지대한 관심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세계선교비젼 가져1953년 정전이 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갈 무렵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사립학교인 대륜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대륜학교는 민족주의자본에 의해 세워진 학교다. 그곳에서 조국과 민족의 중요성을 배우고 깨달았다. 일제하에서 태어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일찌기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정상적인 교육을 받게 된 것은 동시대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동료들에 비하면 종탁 소년에겐 주님의 은혜가 실로 컸다고 하겠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고 있는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 본과로 진학하였다. 고향교회인 학산교회(현 이서교회) 이병철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지 10여년 만에 주의종들을 훈련시키는 선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어느 누구보다 감격스러웠고 새로운 사명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총회신학교 제6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충현교회(김창인 목사)의 교육기관에 속해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맡아 열심으로 목회수련을 쌓아ㅏ다가 이듬해 11월 6일 충현교회의 후원으로 개척 전도사로 파송을 받게되었다.아직 예배처소를 마련하기까지 당분간 당시 충현교회 김경철 집사 개인 자택에서 6명의 개척교인이 모여 설립예배를 드리고 교회명을 서울 동쪽 언덕받이에 있다고 해서 동현교회(東峴敎會)라 명명하였다. 개척 이듬해인 1970년 4월 29일 서울시 강동구 마천동 3리의 3호에 성전 대지 100평을 매입하였다. 5월 17일 교회 대지위에 천막교회를 마련, 임시 예배처로 사용하다가 9월 17일엔 40평 규모의 첫번째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이어 1975년 6월 두번째 성전 대지 188평(마천동 184의 46)을 매입하였고 1976년 5월 13일 예종탁 목사 위임식을 거행했다. 1980년 4월 동서울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 노회를 섬기며 행정의 역량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9월 세번째 성전대지 452평을 송파구 방이동 64-12에 마련하였다. 교회가 은혜 가운데 점진적으로 부흥발전하여 지역 내에서도 중형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자 예종탁 목사는 해외선교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92년 2월 16일 아프리카 잠비아에 홍종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계기로, 1994년 12월 11일엔 에콰도르에 이영, 김진희 선교사 1997년 3월 2일 AX국에 한요셉 이한나 선교사를 계속 파송하였고, 그 사이 1999년 11월 20일엔 어느덧 교회설립을 30주년 기념예배와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이와같은 현지에 파송하는 선교사업 외에도 후원선교와 총회세계선교회(G.M.S)와 S.I.M 한국국제선교회 기독교방송국(C.B.S), D.O.M 선교회, 송파기독교연합회와 송파교경협의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문서선교 일환으로 문서선교(아름다운 동행)를 위해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같은 노력은 예종탁 목사의 선교열정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동현교회 2017년도 교회일람 p.32참조).2000년 9월 예장총회에서 예종탁 목사는 본교단 부총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2001년 9월 18일에서 21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6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총회의 행정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그의 리더쉽을 쌓았다. 총회선거관리위원장과 총회 정치부장을 비롯 기독신보 이사, 송파기독교연합회 초대회장, 송파경찰서 경목, 기독교방송 제21대 재단이사장(2003.2~2006.3)을 역임하면서 한때 어려움을 겪었던 C.B.S를 본 궤도에 올려놓은 역량을 발휘하였고, 기독교텔리비젼(C.T.S) 방송국 공동회장을 맡아 봉사하였다. 예종탁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오로지 한 교회만을 위해 전생애를 복음의 멍애를 매고 충성한 모범적인 목회자로 교회행정가로 충성 봉사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2017.2.19 오후 1시 인터뷰).이러한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미국에 있는 트리니티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 박사(D.D) 학위가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의 목회철학은 그의 설교 <세계선교의 비젼을 가진 교회>(성경 사도행전 13장 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안디옥교회를 예를 들면서 어떻게 세계선교비전을 이룰 수 있을까를 되새기고 있다. 첫째, 안디옥교회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을 가진 교회였으므로 세계선교비젼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안디옥교회는 희생정신이 투철했음으로 세계선교의 비젼을 실천할 수 있었다(역대 총회장의 증인 홍정이 편, 총회출판부 2005. p.289~292).그가 재임했던 제8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제비뽑기 선기시행을 위해 총회임원 선거규정을 개정하다. ② 북한교회 재건위원회 명칭을 총회 남북교회교류 협력위원회로 변경하다. ③ 총회교육의 개혁과 질적 발전을 위해 총회교육 개발연구원을 두기로 하다. ④ 대신대 칼빈대 M.Div 소지자는 총신 신대원 두 학기를 이수한 뒤 강도사 고시 자격을 부여키로 하다. ⑤ 대한성서공회가 발간한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은 재수정할 때까지 공예배사용을 유보하다. ⑥ 평동노회 분립키로(평등, 서북) 하다. ⑦ 교회간 거리 측정은 대지간 직선거리 300m 이상으로 하다. ⑧ 다단계 판매질의건은 교회에서 판매금지하기로 가결하다. ⑨ 전산문서(FAX)는 취급시 참고문서로는 가능하다. 원본문서만 정식문서로 인정할 수 있다. ⑩ 무지역노회에 소속한 교회와 목사가 지역노회 이적건은 공동의회 결의로 청원하면 교회와 목사를 이명해 주기로 가결하다, 단 고의로 이명해 주지 않을시는 지역노회 결의로 이면한다(제100회 총회 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 사무행정국 2016. p.35참조).예 목사 슬하엔 2남1녀가 있으며, 장남 예성철 목사는 아버지가 개척 설립한 동현교회의 바톤을 이어받아 성실한 목회자로 성장해 가고 있고, 차남은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해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예종탁 목사는 37년을 오직 한 교회만 은혜롭게 섬기고 2006년 3월 11일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필자가 볼 때 예종탁 총회장이야 말로 경북의 오지 청도(淸道)라는 개천에서 나온 한국교회의 용의 자리를 차지한 걸출한 기독교지도자라 칭찬할만한 신실하고도 겸손한 성직자 가운데 한 분이라 생각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3-23
  • 74. 제97회 총회장 정준모(鄭浚模) 목사
    경남 울산 출신정준모(鄭浚模 1955.3.17~) 목사는 경상남도 울산시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상장하였다. 그가 태어난 역사적 배경을 잠시 돌이켜보면 1950년 민족통한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해 국토가 분열하고, 휴전으로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일제 시대에 비해 행운이라면 그래도 준모 소년에겐 행운이었던 셈이다. 당시 대구와 경북지역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으로 확정되어 부산에 이어 대구에도 윌리엄 베어드(William M.Baid 배위량)와 그의 처남 제임스 아담스(Rev. James E.Adams)에 의해 선교지부(Mission station)가 설치되었고, 대구에 이어 안동에도 선교지부가 설치된 후라, 대구는 물론 경북 전역에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준모 소년이 살고 있던 산촌에도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고, 초등학교와 중학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며 열심으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 살면서도 이미 상당히 개명(開明)된 사고를 가진 부모님의 덕택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당시 2년제였던 대구교육대학에 진학, 장차 이 나라를 어깨에 메고 나갈 후진양성의 꿈을 꾸면서 열심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업과 인격형성에 미친 것은 신앙이였다. 주의 종이 되겠다는 더 큰 세계적인 비젼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 대구 근교에서 근무하게 되자 내일에 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부족한 학문을 보충하기 위하여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해 문학사(文學士) 학위를 받았다. 앞으로 다원화 되어 가는 사회에 교회가 펼쳐나갈 꿈을 꾼 것이다. 이어서 영남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학교의 사회적 풍토와 아동의 사회화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고, 이때가 1981년이었다. 이어 총회신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 3년 과정을 마치고 ‘성경 영감교리에 관한 역사적 고찰과 성경적 증거’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Div), 총신대학교 일반 대학원에 진학 ‘Samuel F.Moor 한말선교사 활동과 사회개혁에 관한 연구’로 신학석사(Th.M) 학위를 취득하였다(1987. 3). 그리고 좀더 시야를 넓히고 선진신학의 조류를 터득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개혁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석사 과정과 선교학박사 과정을 동시에 이수하였고, 아프리카 남아공의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실천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대구 인근 지역에서 준비된 사역자로 활동하던 중 대구시 남구 송현동에 있는 대구성명교회(大邱聖明敎會)로 부터 부름을 받아(1994년 12월 8일 부임) 20년이 넘게 한 교회에서 한 생애를 주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여 성명교회를 오늘의 대교회로 이끌어 낸 중심인물로 우뚝서게 되었다. 교육대학 졸업한 초등학교 교사 출신미국과 남아공 등서 유학한 신학자교회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제자로 청소년 수련원 통해 미래교회 비전 제시“사회법정 고소자는 소속노회가 면직”결의그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 침산제일교회 고등부 수련회 마지막 철야집회에서 강사로부터 바울의 인생관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자신도 바울 사도처럼 주를 위해 살게 해 달라고 서원의 기도를 드렸고, 이후 6년 동안 위의 기록에 나타난 세상학문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 성직의 길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대구 성명교회30년사, 남문영 편, 코람데오 발행 2001 대구 초판 p.95 참조). 정준모 목사가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울산은 오늘날엔 자동차 산업과 제조업을 위주로 한 공업단지로 유명하지만, 당시엔 한가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산에 일찍 도착한 베어드에 이어 독일계의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왕길지(Rev. George O.Engel) 선교사에 의해 울산지방에는 일찍 기독교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장로회 사기(史記)에 의하면 1895년(을미년)에 울산 병영교회(兵營敎會)가, 1901년(신축년)엔 전읍교회(錢邑敎會)가 설립되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 1928년 p.31, 89참조). 청년기에 들어선 정준모 목사가 대형교회로의 성장기초가 마련된 성명교회에 부임 하자마자 그의 포부는 21세기 모델교회로 예수의 제자되어 제자삼자라는 비전을 선포한 것이다. 정목사가 부임하기 직전 사역자는 법통으로 이름난 조정호(曺正縞) 목사였다. 조목사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을 졸업한 노회안에서도 원칙과 정직으로 통하는 법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그가 10년 넘게 내일의 중흥을 꿈꿀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잘 다져놓은 교회를 패기에 찬 준비된 젊은 목사 정준모가 바톤을 이어 받아 비약할 수 있었다.정목사는 성명교회의 경건한 예배와 봉사의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모시켜 복음의 공동체로 생명이 넘치는 교회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서는 제자화 훈련을 급선무로 여겼다. 1995년 1월 10일 위임식을 거행한 후 교회 앞에 제시한 비젼은 ‘감사하는 25년, 꿈꾸는 25년’이란 목회 표어아래 변화·비젼·역사·치유를 목회비젼으로 제시하고, 이 목표달성을 위해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바로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계획 아래 권찰들을 훈련시켰고, 프리셉트 성경공부반을 개설 전교우들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995년 교회 설립 25주년을 맞이해서는 25주년에 촛점을 맞추고 전교회 기관이 동원되어 백일장, 직분자 좌담회, 역사자료전시, 부서별 찬양대회, 미자립교회 지원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 교인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며 스스로 교인됨의 긍지와 교회사랑은 주님의 은총임을 자각시켰다. 그리고 성경공부 정착화에 힘쓰며 지역사회 발전에 맞추어 새로운 성서(城西)시대를 꿈꾸며 교회 목회비젼으로, 심령부흥회와 청년들의 7대 사랑운동전개 등 미래교회상을 펼쳐나갔다. 따라서 비젼을 향한 헌신의 결과로 21세기 비젼과 대구북부지역에 성서청소년수련원을 마련키로 하고, 택지준비작업에 들어가 기도 중 몇 차례에 걸쳐 청소년수련원 부지가(4026평) 마련되기에 이르렀고, 이곳은 이후 성명교회비전센터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 사이 1997년 소위 경제위기로 알려진 IMF시기를 맞았으나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잘 극복하고 오늘의 21세기 대구성명교회 글로벌시대를 열게 되었다. 2000년은 성명교회가 3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였다. 이렇게 교회가 순조롭게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준모 담임목사의 대·내외 활동 영역 또한 확대되었다. 대구기독교방송국에 정기 설교방송과 기독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로, 총신대학교와 모교인 대구대학교에도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고, 교단지인 기독신문 논설위원 및 교단 장년부 주일 공과집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로, 정책위원으로 대신대학교 교수 및 재단이사로 총회교육부서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2011년 9월 20일 제96회 예장총회에서 부총회장에 당선되고, 이듬해 2012년 9월 17일~21일 사이 그가 시무하던 대구성명교회(비젼센터)에서 개최된 제9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어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그가 재임했던 제97회기에서 결의된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총회설립 100주년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로 하고 종합발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다. ② 총회임원 선출을 절충형(제비뽑기+직선제)으로 하기로 규칙 개정하다. ③ 총회설립 100주년을 기하여 전면적인 헌법 개정을 위하여 헌법전면 개정위원회를 설치키로 하다. ④ 고 박형룡 박사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하다. ⑤ 총회산하기관의 총회결의 없는 부동산 구입은 불가하며 매년 공인감사기관의 감사결과를 총회에 보고하도록 하다. ⑥ 노회와 총회의 결정사항에 대하여 절차없이 사회법정에 직접 고소하는 자가 패소할 시 소속노회가 면직하도록 하고 노회는 5년간 총대권을 정지하기로 가결하다. 정 목사의 슬하엔 2남1녀의 자녀가 있으며 아들들은 모두가 미주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사명자의 길을 걷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3-16
  • 73. 제90회 총회장 황승기(黃承起) 목사
    충남 서천 출생황승기(黃承起 1938.2.17~) 목사는 충청남도 서천 출생으로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소명을 받아 선지학교를 진학하기까지는 녹록한 여정이 아니었다. 승기 소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해에 태어났으니 그 시기는 일제가 조선의 목줄을 쥐어잡고 마지막 숨을 조이는 소위 일제말기여서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의 성장과정 역시 순탄할 수 없는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하며, 정치적으로는 조선이 끝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고물기차처럼 미래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시기였다.그는 농촌에서 부모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래도 큰 희망이었고 큰 위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열강제국들도 조선은 염두에도 없었고 민족지도자들은 조국해방을 위하여서는 힘이 있어야 된다고 러시아로, 만주로, 미국으로 내일을 기약하고 하나 둘 해외로 떠나가야만 했다. 일제의 학정은 도를 넘었다. 이 민족을 짐승처럼, 노예처럼 취급하기 시작하였고, 내 손으로 피땀흘려 가꾼 농산물도 공출이란 명목으로 싸그리 탈취당했으며, 아들들은 징용으로, 딸들은 취직을 미끼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납치돼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승기는 그래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8.15광복을 맞이하였고, 조국의 기초 교육기관이었던 국민학교 교육을 해방과 더불어 받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 속에 있었으나 점점 안정되어 갔고, 승기 소년 역시 교회와 학교라는 기관에서 지덕체(智德體)의 삶의 본질을 터득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 남부지역 고향서 목회인본주의적 교회성장주의 경계교계 안팎의 여러 기관 맡아 교정에 기여‘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적극 참여“면직 확정된 목사는 교단 산하 교회서 성례나 예배 집행할 수 없다” 결정1959년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 예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본과(3년 과정)로 진학 본격적인 목회자 훈련을 받게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곳이 고향에 있는 고내곡교회였다. 농촌의 자그마한 교회였으나 신학훈련 후 처음 부임지라 발이 부릅트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앙적 열정을 쏟아 부었다. 얼마 후 고내리교회와 홍산교회를 거쳐 공덕중앙교회를 담임했고, 후에는 강경제일교회와 논산중앙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목회사역을 하던 중 대전남부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교단의 중진이신 박요한 목사로부터 후임으로 와서 목회해 달라는 부름을 받아 대전남부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그때가 1987년 8월 1일이었다.황승기 목사는 주변을 신뢰하고 포용하며 후진들에겐 관대하지만 매사에 원칙 적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만은 개혁주의적이고 보수성이 강해 자유주의적 신앙에 대하여서는 엄격하고 단호하였다. 황승기 목사는 철저한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성경에 입각한 정확한 해석과 적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목회 역시 역사적 칼빈주의에 입각한 목회였다. 교회를 운영하고 치리하는데 있어서도 외형적인 성장을 위한 인본주의적 방법보다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교회를 이끌어 갈려고 애썼다(대전남부교회 50년사, 임해순 편, 금강문화사 2005 대전, p.96~97참조). 그의 대표적 설교라 할 수 있는 본문 사도행전 20장 25~35절을 인용한 <교회를 보수하자>라는 설교에서 그의 목회정신과 철학이 잘 표현되고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신앙생활로 판별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과 생활이란 합성어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내우외환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수하여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 p.340 참조).그에게는 교정(敎政)의 수완도 있어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직분을 맡아 교단과 교계를 위하여서도 기여하였다. 1989년 제74회 총회에서는 총회 부서기로 활동하였고, 1990년 제75회 총회에서는 서기로 교단행정을 맡기도 하였다.총회 안에서도 법통으로 인정되어 85회기 선거관리위원장, 87회기에선 총회재판국장을 맡아 교회의 질서와 총회의 기강확립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경목부장,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와 재단이사로 교단 인재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총회 인준신학교인 대전신학교 교장과 이사장으로 봉사하며 후진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지방에서 사역할 때에는 군(郡) 정화위원과 강경경찰서 경목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청주신학교와 대전산업대학에 출강, 사회를 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황승기 목사의 목회사역 중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사회 봉사분야가 있다. 그것은 한동안 한국교계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심혈을 기울인 일이다. 이 일에는 설립자 박진탁 목사와 함께 초창기부터 계속 참여해 나중에 운동본부 재단이사를 맡았고, 대전 충남 본부장을 맡아 교계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회자로써, 지역사회 지도자로써 생명존중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폭넓은 신앙과 지도력에 바탕한 일이었다.1992년엔 대전시기독교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교계지도력을 이끌어 선교에 이바지 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대전엑스포 당시 <EXPO 선교협의회> 대표회장으로 선교하는 공을 쌓기도 했다. 황승기 목사의 이와같은 폭넓은 대외적인 활동으로 대전남부교회를 대전의 중심교회로 인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고, 이와같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5년 9월 27일에서 30일까지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9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그가 재임했던 제90회기에 결의된 중요 안건을 적어보면, ① 1979년에 이탈한 개혁총회(정규오측)와 합동하다. ② 총회 임원선거 규정을 <총회선거규정>으로 개정하다. ③ 성서공회와 합의에 의해 수정된 개정개역판(제4판) 성경을 본교단에서도 채용하기로 하다. ④ 2007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사업을 총회 산하 각 노회 교회기관 전체가 참여하여 전개키로 하다. ⑤ 서북노회 소속 평강제일교회 및 광성교회 가입을 취소하고 총신대학 교수회가 제출한 박윤식 관련 연구보고서를 총회공식입장으로 채용하다. ⑥ 총회 규칙상 총무선출과 관련 조항을 개정하다(임기 5년, 지역순환 구도로 선출) ⑦ 성경과 헌법과 총회 결의를 무시하고 교단 및 총회장을 피고로 하여 소송을 제기한 자는 교단 산하 모든 공직을 정지시키기로 하다. ⑧ 면직 확정된 목사는 교단 산하 교회에서 성례나 예배를 집례할 수 없다. ⑨ 2000년 제85회 총회에서 수정된 7년에 1차식 시무투표의 기준년도는 헌법개정일 공포(2000년 9월)로부터 시행한다. 황승기 목사는 대전남부교회 부임 후 전임 박요한 목사에 이어 한 교회에서 두번째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 슬하에는 최지선 사모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그 중 2녀는 목회자 사모가 되어 미국 유학 중에 있으며, 나머지 자녀들도 부모의 신앙을 대이어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구성원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대전남부교회50년사, 임해순 편. 같은책 p.96~97참조). 황승기 목사는 그의 체구가 말해주듯이 대전남부교회와 한국교회의 든든한 기둥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신앙의 용장이기도 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3-03
  • 72. 제93회 총회장 최병남(崔炳男) 목사
    중국 북경 태생최병남(崔炳男 1943.1.2~) 목사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태어났다. 부모세대가 조국의 피폐했던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땅으로 이민 갔던 조선의 디아스포라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위로는 누님이 한분 있었고 최병남 소년은 외동아들로 이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태어난 1940년대는 소위 일제 말기에 속했던 시절로 조선의 미래를 꿈꿀수 없었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8·15 직후 부모님의 손에 이끌리어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다. 최병남은 귀국하여 어린 유년시절부터 충현교회(당시 충무로 소재)에 출석해 신앙생활을 하며 성장했다고 후일에 언급한 바 있다. 그가 기독교에 입신해 신앙생활을 했으나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중학교 1학년때 성령충만함의 은혜를 체험 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할 때는 늘 제일 앞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렸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다가갔다. 그는 고교진학을 앞두고 약간의 고민은 있었으나 미션계통이 대광(大光)고등학교를 선택해 성경을 배우며 정기적인 교내 채플을 통해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받기에 이르렀고, 고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주저함 없이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지원해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최병남은 신학교를 마치고 당시 동도교회(東都敎會·최훈 목사 시무) 전도사로 부름받아 사역하던 중 1975년 이은희 사모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동도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시작해 강도사를 거쳐 부목사로 사역한 기간은 당회장 최훈 목사의 강도높은 목회훈련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동도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중 뜻한바가 있어 도미(度美) 유학의 길에 오른다. 그 때가 1981년이었다. 그 때는 최 목사에게 1남2녀의 자녀를 두었을 때이고 그의 나이 또한 39세로 40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늦은 유학의 길이었다. 주위의 선배들이나 동료들의 만류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로 생각하며 미래의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되어야 겠다는 큰 포부도 있었기에 미련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공부도 해야했지만 교회를 담임하면서 학업을 진행할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서 목회와 학업의 병행이 어려울 것이란 염려에도 불구하고 최 목사는 담임한 교회도 배로 성장하였고 학위도 동료 유학생들 중 가장 먼저 마칠 수 있었다. 목사안수 받은 후 미국 유학서울 왕십리교회서 대전중앙교회로 부임경목 활동 통해 지역사회와 유대 도모기도와 전도와 성경공부로 교인들의 영성훈련총회산하 상비부에 총무제도 신설이렇게 미시간주 그랜드래피드에 있는 칼빈 신학교(Calvin The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마치고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있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로 가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유학생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풍성하게 주셔서(히 4:16) 미국에서 유학생활하던 중 막내딸까지 하나 더 얻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렇게 영성으로 지성(知性)으로 준비된 최목사에게 서울 왕십리교회의 부름을 받고 1986년 12월에 부임해 목회사역을 하게 된다. 부임 후 만 5년동안 1991년 말까지 제대로된 목회철학을 펼쳐보이며 충성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대전중앙교회로부터 또 새로운 주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오늘날 목회현장에 비해 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밖에 없는 인도하심이었다. 왜냐하면 그 흔한 이력서 한장 없이 대전중앙교회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12월에 대전중앙교회로 부임해 2012년 12월 25일 원로목사로 추대 받은 날짜지 20년이 넘게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한 후 교회에 출간한 교회지(敎會誌)「대전중앙」 창간호 특별대담에서 부임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정든 왕십리교회를 떠나 새로운 임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기도하는 중 분명히 하나남의 음성을 들었고 그래서 이렇게 오게 되었는데 장로님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님들이 매우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이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수준도 있고 열심도 있어보여 장래 발전 가능성이 많은 교회로 보였습니다.” 그는 대전중앙교회를 섬기면서 1994년 3월엔 대전노회 노회장으로 봉사하였고, 1994년 4월 25일부터 5월 6일까지 미국에서 개최된 21세기 교회성장세미나에 참석해 세계교회의 교회성장사를 살펴보기도 했다.이듬해 1995년 가을학기부터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계획세미나> 과목을 강의하기도 했고, 대전시 경목(警牧)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와 유대를 도모하기도 했으며,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필자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본 최목사의 풍기는 언행역시 고넬료에 비견할 만한 인물임을 느끼었다. 그가 은퇴직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으로 여러 부서에서 봉사할 땐 항상 성직자로서 겸손함과 경건성의 리더쉽을 발휘 한기총을 원만하게 협력하며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의 목회비젼은 늘 기도목회라 했다. 그의 지론은 모든 일이 기도라는 무릎만큼 교회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에게도 기도중심의 삶을 살도록 지도한다. 기도없는 삶은 개인이나 교회가 모두 실패라고 말한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강조했고, 때로는 횃불새벽기도회, 때로는 특별산상기도회를 계획, 교인들을 독려한다. 특히 교회창립5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는 1천번제 새벽기도회를 추진 신자들의 영성을 깨우치기도 했다. 다음엔 전도목회를 강조하였다. 최 목사에게 기도가 목회의 우측 날개라면, 전도는 목회의 좌측 날개라 할만큼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조했다. 최 목사는 기도하는 교회로, 전도하는 교회로 지향하면서도 이를 바르게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야 한다는 교회의 영성과 신자들의 역동성을 매우 강조하는 전인적 목회를 지향했다. 최목사에겐 선교적 비젼이 있었다. 그것은 국내 선교와 아울러 해외 선교의 병행이었다. 지역내 열악한 지역에 정기적인 무료의료전도행사를 장애인 선교와 불우이웃에게 사랑의 복음전달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돕는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와 병행하여 몽골에 이혜영 선교사(1991. 8. 파송), 브라질에 양보라 선교사(1994. 6. 파송), 이원길 선교사(1994. 2. 파송), 파라과이에 정금태 선교사(1994. 7. 파송), 북한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파송된 강일구 선교사(1997. 10)를 파송하고, 어떤 곳에는 협력선교를 수행하기도 했다. 최 목사는 목회사역을 하면서 성인교육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제자훈련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교리교육, 책별성경공부, 개인성경묵상, 교회역사 교육 등을 꾸준히 시행해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했다. 구체적으로는 교구별성경공부, 부부성경공부, 제직세미나, 입교자교육, 구역장학교, 중직자교육, 장로피택자교육 등을 통해 교인다운 교인, 제자다운 제자 육성을 위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교인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신앙전달 매체로 <대전중앙>이란 교회신문을 발행 성도들 간의 신앙교류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게 충성을 다해 온 최 목사는 2008년 9월 22일부터 26일 사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3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 총회장)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재임했던 93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총회 로고를 새로이 변경하고, ② 총회산하 상비부에 총무제도를 신설하기로 하다 ③ 2012년 교단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는 기도한국 2009, 칼빈 탄생500주년기념대회를 추진키로 하다. ④ 21세기 총회종합센터 건립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하다. ⑤ 총회주일(세례교인 헌금)을 아래와 같이 시행하기로 하다. •각노회 소속교회 50%이상 납입하지 않을 경우 총대권 제한 •목표금액 95% 이상노회에 대하여는 20%인센티브 주기로 하다. •현행 총대 파송제도(7당회당 목사, 장로가 1명을 세례교인수 비례 총대를 각노회별로 추가배정함으로 교단 규모에 걸맞는 총대수로 확대키로 하다(제100회 총회 결의 요람, 예장총회 2015. p.39 참조). 최병남 목사는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2-23
  • 71. 제95회 총회장 김삼봉(金三峯) 목사
    전남 순천 태생김삼봉(金三峯 1941.2.15~) 목사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어려운 가정에서 4남2여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때는 일제 말기여서 정상적인 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삼봉 소년이 살고 있었던 순천지방에는 이미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들어와 선교지부(Mission Station)가 설립되어 있었고, 많은 교회의 설립과 기독교게통의 교육기관과 의료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덕택에 기독교복음을 일찌기 접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삼봉 소년이 태어난 1941년은 일제가 조선에 있는 젊은이들을 징용해 가며 여성들은 위안부로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만행이 방방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일제는 전국 요소요소마다 소위 신사(神社)를 설치하고 애국충정이란 이름으로 조선인의 정신 말살 계획을 수립, 신사에 머리를 숙이게 했고, 조선말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말을 공용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성씨(性氏)마져 고쳐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케 하였으며, 신사참배 강요로 조선교회가 혼란 속으로 휘몰아치게 되어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체포 구금되기에 이르렀고, 교회는 문을 닫고 자기들의 명령에 순응하는 천주교와 감리교 외에는 교단을 폐쇠시키고야 말았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삼봉 소년은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교회에 출입하면서 지식과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소년의 마음 속에는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늘 목말라 하던 차에 미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세운 순천매산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꿈을 이루었다. 그 때가 1960년 2월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틈새에서도 삼봉 소년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에 다니면서 장차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성장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신학을 해서 하나님의 종으로써 헌신해야겠다는 소명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 본과를 지망해 서울로 진학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마친지 10년만이었다. 그동안은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으로 직장생활을 하며 가사를 돕느라 신학교 지망이 10년이나 늦어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지난 1970년에 총회신학교를 마치게 된 것이다. 서울 신정동서 천막 치고 교회 개척총회 목회대학원 입학해 신학 재교육 받아기독신문·총신대 재단 이사장, 총장 직무대행도 거쳐‘임시목사’제도 없애고 ‘시무목사’로 통일영상콘텐츠 전문성 갖춘 고등학교 설립그는 졸업하자마자 서울 신정동에서 가족중심으로 대한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때가 1972년 6월 18일이었다. 당시 신정 3동에 있는 남의 땅을 빌려 27인용 천막을 치고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의 대한교회(大韓敎會)이다. 1973년 10월 11일 김상봉 강도사는 한서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듬해 1974년 4월엔 같은 강서구 신정1동 372의 2번지에 50평 규모의 첫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다. 1976년 10월 3일엔 강화순, 이문혁 두 사람을 장로로 세워 정식 조직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교회는 순조롭게 성장해 갔고 규모가 확대되어 1978년 11월 7일엔 교회 설립 후 첫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980년 4월 9일 강서구 신정1동 981의 12 현재의 위치에 2차 신축교회를 위한 착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교회의 외형이 이룩됨과 동시에 신자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과 노회와 총회를 섬기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앞장서게 되었고, 교회 내적으로도 1981년 11월 5일과 1984년 12월 9일 두 차례에 걸쳐 장로장립과 장립집사 및 권사를 세우는 큰 임직식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1987년 3월 7일엔 또다시 집사 임직과 권사 취임식과 더블어 그동안 추진되어오던 교회 건축이 완공되어 헌당식 예배를 온 교유들과 함께 드리게 되자 중형교회로 성장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가 이렇게 성장 부흥하게 되자 당회장 김삼봉 목사 역시 교회 내외적으로 봉사하는 사역 또한 점점 확대되었다. 먼저는 자신의 역량 발휘인 밑거름이 되어야겠다는 자의식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신대학교에 위탁하여 시행하고 있는 총회목회신학원(M.M 목회학 석사과정)에 진학, 신학재교육 과정을 이수하였고, 1996년 4월 예장총회 한서노회(漢西老會) 제15대 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 해 6월엔 제81회기 예장총회 공천 부 서기로, 이듬해 1997년 제82회기 총회에서는 서기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1998년 4월엔 서북지역노회협의회 회장, 1999년 9월 총회에선 회록서기로, 2009년 본교단 총회 부회장으로 피선, 이듬해 2010년 9월 27일에서 10월 1일까지 강원도 홍천 대명 비발디파크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5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교회선립30주년 감사예배 순서지 2002, 대한교회 p.4. 교회연혁 참조).김삼봉 목사는 총회장에 오르기 전에 이미 2005년 9월 교단지인 기독신문 이사장으로, 2006년 11월엔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2008년 11월엔 총신대학교 총장직무대행 역임 및 부총회장의 경륜을 쌓아 교단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을 나타내 보였다. 그는 교회와 교단 내에서만 그의 역량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사역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서울시 양천경찰서교경협의회 회장, 양천구청교구협의회 회장, 양천구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지역교회와 행정기관과의 협력을 모색 선교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서울지하철선교협의회 회장과 전국교통문화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봉사하면서 특수선교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2002년 6월 6일에는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예배를 드림으로 일선에서 물러나며 2011년 11월 12일 대한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김삼봉 목사의 목회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메세지가 있어 여기 소개하면 성경 골로새 1장 24~29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주님의 몸된 교회와 일꾼’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는 세상적으로 훌륭하고 돈많고 권력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모인 곳이다. 그는 여기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주님의 보혈로 사신 백성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셋째,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 그 어느 기관과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으로써의 모습은 교회의 일꾼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되고 그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며 모든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과 신앙으로 그는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였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진다.김삼봉 목사가 신앙을 교육에 접목해야겠다는 교육비젼을 가지고, 2000년대(3월)에 들어와 3년 과정의 고등학교를 설립 교회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1개학년 6학급으로 3년 18학급(영상콘텐츠학과 영상케미어학과 영상경영과)이 정상운영되고(이사장 윤영민 목사) 있는 것은 한국선교 초기 선교사들의 교육, 의료, 선교를 연상케 하는 간접선교방식으로 중·장기적인 선교과업이라 생각된다. 일반 교육기관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합동측 교단 안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선견지명적인 정책으로 다른 교회에서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삼봉 목사는 앞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새시대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교회로 지향한다고 다짐하고 있다.그가 재임했던 제95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헌법정치 제4장 4조 2항 임시목사의 명칭을 시무목사로 하기로 하다. ② 총회 선거규정을 개정하다(중요개정사항은 총회장 연령 만 60세 이상된 자 삭제). ③ 세례교인 헌금 시행기준을 서울 10,000원 도시 7,000원 농어촌 5,000원으로 하다. 김삼봉 목사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으며 그가 설립 개척한 대한교회를 사위 윤영민 목사가 바톤을 이어받아 원로와 함께 승리로운 목회사역을 이어가고 있다(제100회 총회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2016 예장총회발행 p.40).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2-09
  • 70. 제78회 총회장 최기채(崔基蔡) 목사
    전남 광주 태생최기채(崔基蔡 1934. 6. 7~ ) 목사는 광주광역시 남구 임광동 947번지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비교적 순탄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일제하여서 성공적인 삶을 예견할 수 없는 장래가 불확실한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신세였으나 다행한 것은 일찍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라 하겠다. 어린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대촌 지석초등학교 분교장이었던 신도인 선생님을 통해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후 사회활동과 고학하는 시기에는 잠시 동안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세상적인 삶을 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군에 입대하여 155미리 포병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곽금천이란 친구를 만나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가 나를 찾아와 오늘밤에 나를 따라 갈데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 하니까 묻지 말고 꼭 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어디인데? 알아야 따라가지 …교회에 간다. 야! 이놈아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도사처럼 불법을 설파한 자네가 벌써 그 사이에 변절을 해 나에게 교회엘 가자고 하느냐? 다 믿어도 풍전세유같은 네가 믿는 종교를 나는 안 믿는다 이놈아 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죽은 사람 원도 풀어 준다는데 친구 소원 하나 안 풀어 주려느냐?라고 하면서, 따라가서 영 취미가 없으면 안 다녀도 좋다. 그러나 나는 내일 의가사(倚家事)제대 특명이 나 군문(軍門)을 떠나는데 사랑하는 친구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다”라며 간청하는 것이었다.이렇게 되어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간 곳이 강원도 철원군 화지리에 있는 천막교회 수요일 예배에 참석한 것이 잠시 잊었던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오늘의 최기채 목사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저방으로 가라 최기채 지음, 생명의말씀사 2004, p.166~167). 군(軍)에서 친구에게 이끌려 예배 참석담임목사가 지방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공부‘동명(東明)과 결혼’ 교회에 충성 다짐노회와 총회서 뛰어난 지도력 보여시·소설·수필가로 문인 활동“내가 신학을 지망한 동기는 어떤 사람들처럼 사명감에 불이 붙었다던지 환상을 보았다거나 선교사가 되어 땅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확신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교회에 몸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주위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나를 만나면 농담 삼아 최목사 오랫만이여 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다보니 나도 모르게 과연 내가 신학을 전공해서 목사가 되어야 하려는가보다 가끔 생각하곤 했는데 결정적인 계가가 왔다. 당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북에서 피난 나온 홍동근(洪東根) 목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하였는데, 어느날 나를 부르더니 당시 지방신학교였던 광주신하교 야간부에 등록을 시켜주고는 서울로 떠나신 것이었다. 무슨 일에나 한번 빠지면 헤험쳐 나오지 못하는 기질이 나를 신학에 빠져들게 했고 목회의 길로 들도록 꽁꽁 묶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야간신학을 하면서 이렇게 사명의 길에 들어서 봉사할려면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사립 조선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 졸업(문학사 학위)에 이어 대학원(정치학석사) 과정을 마친 후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신학과 목회를 위해 당시 기라성 같은 신학자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의 문하에서 사명자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에 있어 큰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저 방으로 가라, 같은책 p.168 참조). “지방에 있는 대광교회에서 섬기고 있던 나에게 광주시내에 있는 역사있는 동명교회(東明敎會)의 부름을 받고 부임한 나는 ‘동명과 결혼’이란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날이 1974년 3월 24일이었다.” 최 목사는 동명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장기 목회계획으로 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하기 시작하여 교회 성장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① 상회에 순종하여 교회부흥을 이룩하자(74년). ② 사랑과 화합으로 하나 되자(75년). ③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자(76년), ④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77년), ⑤ 말씀과 기도로 뜨거워지는 교회가 되자(78년)에 이어, 제2차 목회계획을 세웠는데, ① 믿고 배워서 자라자(79년). ② 믿고 자라서 힘을 얻자(80년). ③ 믿고 힘을 얻어 일하자(81년). ④ 믿고 일하여 나누어주자(82년). ⑤ 믿고 나누어 주어 칭찬받자(83년).그는 계속하여 교회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계획하였다. ① 부목사 제도 신설 ② 당회원 증원과 목사관 신축 ③ 목사관 건축 위해 건축위원회 구성 ④ 교회 개척 전도단 조직으로 교회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계속하여 교인수 증가에 따른 행정의 원활화를 위해 교회총무 제도 신설과 1977년 8월에는 교육관 신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부임 후 교회는 일취월장 부흥에 힘입어 유년주일학교와 중고등부와 대학부가 성장함에 따라 인재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동명장학회(東明奬學會)를 설립하여 대학에 훌륭한 성적으로 입학은 하였으나 경제가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는 교인들의 자녀들을 돕기시작한 것이다. 이에 뒷받침 한다는 취지로 당회장 최기채 목사의 저서 판권(인세)을 장학회에 내놓아 장학재원 조성에 기초를 놓기도 했다. 이럴 즈음 1978년 10월경 동명교회에 속한 총회에 교단 이탈 조짐이 나타나 광주중앙교회 정규오 목사를 추종하여 총회 분규상황에 처했을때 본교회 최기채 목사를 중심으로 대성교회 서문교회 대광교회 중흥교회 한마음교회 남평교회는 교리상의 문제가 아닌 상황에서 인정이나 지역상황을 빙자해 명분없는 총회 이탈을 할 수 없다고 의중을 모았다. 그 중심이 동명교회 최목사가 되었다. 최기채 목사는 이렇게 자기의 목회지 동명교회 지도자로써 뿌리를 내렸을뿐 아니라 교정(敎政) 에도 크게 이받이 하였다. 한국찬송가공회 회장으로, 교단지 기독신문 이사장으로, 총신대학 이사장, 학교법인 광주동명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며, 전남노회장과 호남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D.Min)을 이수했고, 카자흐스탄공화국 국립대학교에서 그의 지도력을 인정, 명예문학박사 학위(H.Litt.D)도 수여하였다. 그의 지도력은 본교단 호남지방의 대부로 교단 내외에서 존경받고 있는 신사목사이기도 하다. 최기채 목사에게 또 한 가지 명예가 있다면 문인(文人)이라는 점이다.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에도 시를 쓰고 소설을 집필하고 있으며 목회 현장에서 느낀 바를 수필로 발표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있다. 이런 그의 역할을 인정해서인지 1993년 9월 21일부터 24일까지 그가 목회하고 있던 광주동명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8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으로 선출되어 그가 사랑하고 뜨겁게 사역했던 교단을 위해 마지막 혼신의 정열을 받쳐 봉사하고 많은 후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목회 2선에서 교단과 국가의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재임했던 제78회 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살펴 보면, ① 교단발전을 위해 일만교회운동을 재가동 하기로 하다 ③ 학생지도국, 농어촌국, 재무국을 설치하기로 하다 ③ 평신도 성경교육대학을 설립 추진하기로 하다 ④ 70세 정년 범위는 당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목사, 장로, 권사, 집사에 적용하되 신학교수는 65세로 적용한다 ⑤ 브라질에 지방신학교 인준하기로 하다 ⑥ 트레스디아스는 경계단체로 제지하기로 하다 ⑦ 성경공회 설립을 허락하기로 하다 ⑧ 면직된 목사는 강단에 세우지 않기로 하다 ⑨ 표준새번역 성경사용은 금지하고 개역성경을 바른번역으로 출판하도록 하다(100회총회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16 서울, p.31-32 참조). 최기채 목사는 1974년 3월 24일 부임해 한 교회에서 30년 사역을 영광되게 마치고 2004년 12월 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은퇴해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고 장남 최석 목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의 선교사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다른 자녀들도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2-03
  • 69. 제64회 총회장 한석지(韓錫祉) 목사
    평북 강계 태생한석지(韓錫祉 1922.1.17~2016.12.27) 목사는 평안북도 강계군 외궈면 이남동 에서 태어났다. 한석지가 태어난 강계지역에는 이미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말하면 조선이 1905년 한일합방이 되었고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일반 백성들은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아가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제대로 된 교육이나 미래의 꿈을 꾸고 살아갈 처지가 못되었다. 다행히 선교사들이 일찍 전해준 기독교복음을 접하게 된 것이 행운 중의 행운이라 하겠다. 고향에서 부모님들을 도우며 농사일이나 돕고 살아가고 있던 그에겐 한 줄기 소망이 있었다고 한다면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통해 인간의 귀중함과 어슴프레 그래도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 주일이 기다려졌고, 복음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 올랐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죄악된 인류를 구속하여 천국백성이 되게 한다는 구속의 도리를 깨달은 한석지는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갖은 학정과 수탈로 주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 없었다. 나중엔 교회를 향하여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해 이곳엔 사람 살 곳이 못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청년 한석지는 한숨만이 나왔다. 이러한 절박한 시기를 지나고 아무도 예상 못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될까 희망을 가졌으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 이젠 남과 북 사이에 민주냐 공산이냐 하는 이념의 대립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 대두하자 남과 북의 민족지도자들 사이에 암투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자유와 새로운 삶 찾아 월남청주에서 학업과 신앙생활로 장로장립총회신학교 졸업 후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남북통일과 북한선교에 특별한 관심교단의 후진 양성에 헌신청년 한석지는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삶의 전개를 위해서라도 고향을 등지고 월남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잠시 생활터전을 충청북도 청주에 정착해 북쪽에서 마음껏 배우고 싶었으나 생활형편이 여의치 못해 할 수 없었던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청주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연마한 법률지식은 후에 그가 교단을 위해 노회장으로 혹은 총회임원으로 봉사하면서 법적인 문제를 슬기롭게 짚어내며 법리에 밝은 지도자로 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1년 대학을 마치고 교회를 섬기며 평신도로 봉사하였고 장로임직을 받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의 음성을 듣고 서울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 3년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가 1962년 평양노회에서였다. 청주에서 살고있던 한석지 목사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동암교회로 부임해 함남노회 노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청주에 있을 때는 청주시온초등학교 교사로 후엔 교감이 되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그의 대표적인 봉사사역을 살펴보면, 1955년 청주중앙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고, 1960년 총회신학교 재학 시에는 학우회 회장이 되어 그의 지도력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처음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평안교회 부목사로 잠시 사역하였고, 1964년 동암교회 위임목사로 청빙 받아 승리로운 목회를 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피난 온 동역자들로 구성된 무지역노회로 불리는 함남노회(咸南老會) 노회장을 다섯 차례나 역임하며 교단을 위하여 봉사하였고, 1972년엔 서북대회(西北大會) 대회장으로, 1980년엔 잠시동안 교단 인재양성 기관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서리로 수고하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총신신학원 운영이사로 나중엔 부이사장으로 재선되어 총신을 위하여서도 섬김의 손길이 이어졌다.1991년에는 총회신학원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1992년 동암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함남노회 공로목사가 되었다. 한석지 목사는 월남한 사람으로 그 어려웠던 정치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도 대학교육을 받고서 주의 종이 되기 위하여 총회신학교로 진학, 3년의 정규과정을 마치고 한 교단의 수장이 되었으니 가히 입지전적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교단의 후진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언제나 조국의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에 큰 관심을 가진 지도자였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에는 미국 애트란타(Atlanta)에 있는 임마누엘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다. 총신대학교 김영우 총장은 그의 하관예배에서 그는 평생 교회와 총회, 총신을 위해 봉사한 어른이었다고 피력하였다. 한석지 목사는 가정적으로도 요셉처럼 자손들이 번성하는 축복을 받기도 했다(크리스챤포커스 2017.1. 3자 뉴스 및 기독신문 2017.1.3(화) p.2 기사 참조). 고인의 장례예배에서 총회장 김선규 목사는 고인은 1979년 대구총회에서 비주류측이 개혁을 빌미로 개혁총회가 분리되어 나가는 틈새에서 교단의 안정을 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64회 총회장으로써의 리더십을 발휘 교단의 안정에 크게 이받이 하였다고 치하했다. 한석지 목사는 총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총회회관 건립과 총신신대원 양지캠퍼스 조성에도 그의 역량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설교 중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본문으로 탕자의 회개라는 제목의 설교에 나타난 그의 신앙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탕자가 자유와 향락을 위해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났으나 자연히 비애가 일어났다. 이것은 인류의 가련한 상태이다. 인생은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참 만족과 자유가 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재물과 인격과 자유와 향락을 다 빼앗기고서야 비로서 자기가 있었던 아버지 집의 참 행복을 깨닫고 탕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와 참 행복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그 설교는 자신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첫째 부모슬하에 있었던 생활을 언급하면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의 슬하에서의 안정됨과 행복함을 언급하였다. 둘째, 부모를 떠난 아들의 방탕한 삶의 실태롤 언급하면서 탕자의 생산은 없고 낭비의 삶과 그 결과 궁핍과 배고픔의 모습을 논하고 있다. 그로인해 고통과 저주의 삶으로 전락한 모습을 강조하였다. 셋째, 탕자의 회개를 언급, 아버지의 슬하를 떠난 실존의 모습을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함과 그 자리에서 좌절하지 않고 신앙으로 일어서는 기립의 의지를 회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언급했다. 넷째, 이러한 결단으로 다시 축복의 생활로 복귀하는 탕자의 모습을 통해 큰 축복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을 결론지었다. 여기에서 한석지 목사의 목회관과 삶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의 신생과 신앙, 나아가서 그의 목회철학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저 에장출판부 2015 서울 p.86-88참조). 필자의 생각으로도 이 설교 속에 그의 목회관과 신앙의 핵심을 읽게하는 철학이 담기었다고 보여진다. 그가 재임했던 제64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주교통신학교를 주교통신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기로 가결하다. ② 방배동 소재 총회신학교를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수습을 위한 21인의 전권위원을 선출하다. ③ 미주대회 고시는 미주대회에 전권위임해 주기로 결의하다. ④ 부산노회를 3분(부산, 중부산, 울산) 하기로 가결하다. ⑤ 총회산하 전국교회가 연1차씩 선교협력 기금을 내기로 하다(도시교회는 연 2만원, 지방교회는 연 1만원, 미조직교회는 연 5천원). 한석지 목사는 2016년 12월 27일 94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그가 평생소원했던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슬하엔 2남3녀를 두었는데 장남 한철선 박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총신신대원 원장으로, 2남 한용선은 호주 시드니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혜선, 혜신, 혜옥은 각각 가정을 이루어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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