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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6
    다윗은 그의 시 23편을 여호와의 선함과 인애하심이 자기를 따르실 것이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이라고 그 끝을 맺고 있다. 여호와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그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나라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일대푸니”라는 말은 “라다프”는 “추격하다”(pursue)의 미완료형으로 전쟁용어이다. 전투에서 도망가는 패잔병들을 추격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칫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망가는 다윗을 붙잡기 위하여 추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 문맥을 살펴보면 그러한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뒤를 따라가며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더 맞을 것 같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양치는 목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목자들이 아침에 양들을 몰고 초장을 향하여 나갈 때는 대개 양들 앞서 나간다. 그러나 저녁이면 양들이 앞서고 목자와 목자의 개가 뒤따르며 양들이 곁길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양들을 좌우로 그 방향을 조종하여 집에 도착하여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6절은 귀향 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그의 말년을 생각하며, 그의 귀향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곁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의 선함과 인애하심으로 그를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셔서, 그가 영원토록 여호와의 집에서 거하는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다윗은 이 땅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묻힘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적인 신앙은 다윗뿐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진 소망이고 신앙이었다. 아브라함은 본향을 생각하고 찾았으며, 만일에 그가 떠나 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곳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 11:13-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액면 그대로의 그곳이 가나안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모세가 쓴 “바다의 노래”(출 15장)를 보면 “주님의 인애로 주께서 구원하신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그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십니다.”(출 15:13)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고, 방금 홍해를 건넌 상황인데,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처소”이다. 히브리어 “나바”라는 말은 “거처”(dwelling place), 특히 유목민들이나 양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가,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거하며 양들을 먹이다가 다시 자기 본 집으로 돌아올 때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출 15:17에도 “주께서 주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의 유업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시여, 그 처소는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오 주님, 그 성소를 주님의 손으로 만드셨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주님의 유업의 산이라는 말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유업(유산)으로 주실 산이라는 뜻이고, 바로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이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은 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할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궁극적인 뜻은 그의 백성과 동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이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편기자들은 항상 주님이 계신 곳과 주님을 사모하고 살았다. 시편 26:8; 27:4; 84:1-2 등은 시편 저자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거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바라며 쓴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 그보다 하나님 그 자신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애하심이 무엇인가? 먼저 선이란 무엇인까? 히브리어 “톱”()이라는 말은 “좋다”(good), “즐겁다”(joyous), “적절하다”(suitable), “바람직하다”(desireable)등 그 사용 범위가 다양하고 넓은 말이다. 윤리적인 면에서 사람의 성품을 가리켜 “선하다” ‘착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이 어휘는 한 마디로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그 어휘가 사용되는 그 문맥을 살펴 그 의미를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예를 살펴보면 성경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진 자를 고치는가 엿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나?“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선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 악은 목숨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 생명이 육신의 생명이든, 영혼의 생명이든 그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선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살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젊은이가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영생의 길을 묻자,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막 10:17, 18). 하나님 한 분 외에 사람을 살리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에게도 선하다는 말을 피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한 분 외에서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선하신 것이다. 선이란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지고의 선이다. 하나님이 지고의 선이시다. 다윗은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그를 지켜 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살렸고, 자기를 지켜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인애라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인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말은 “변함없는 사랑” “한량없는 사랑” “faithful love” “steadfast love”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많은 경우에 언약적 문맥 속에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언약적 사랑”(covenantal love)이라고도 지칭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의 반역적이고 배신적인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인애, 곧 “헤세드”()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는데(요한 13:1), 이때 “아가파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신약적인 말로 하자면 “헤세드”가 바로 “아가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한량없이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그를 팔아먹으려고 자리를 뜨는 유다에게도 떡을 떼 주셨다. 그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 배신의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사람은 변할 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이고 아가페이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뒤를 따라 다녔고, 다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과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이 자기를 지키시고 자기를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자기 발걸음을 지켜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여호와께서 계신 그 여호와의 집에 그가 이르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며, 그때 그는 여호와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8-3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5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모두 미래형이다. 그러나 한글 번역 바른 성경은 1절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원문대로 미래형을 쓰고 있다. 그러나 2-6절에 나오는 동사들 “눕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함께 하십니다” “안위하십니다” “넘칩니다” “따를 것이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미래형이라기보다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 시편 역자는 이 시를 통하여 현재 역경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의 형편을 토로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현재 돕고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의미상 뜻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P. C. Craigie (WBC) 는 원문의 뜻을 놓치지 않고 잘 살려 모두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현재 그의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갈 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육신의 목자보다는, 장차 자기에게 생명의 떡과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시고,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의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영혼의 목자, 곧 메시야를 바라보고 고대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이제 4절은 그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를 다녀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개역성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번역했다. 일반적으로 사망이 있는 곳은 어디나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음침하다거나 어둡다거나 하는 표현은 죽음의 분위기를 묘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마치 어둡고 차거운 동굴 속에서 목을 웅크리고,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괴물과 같은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사망”이라는 말은 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은 히브리어 “브게이 찰마벳”()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어두운 골짜기”라는 말이다. 아마도 킹제임스 역 (KJV)을 따라 영역본이나 한글 역본들이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라고 번역하며 ESV, NAS 등도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NIV, NET 등은 “가장 어두운 골짜기”(the darkest valley)라고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골짜기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유다광야의 깊은 골짜기는 대낮이라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하고 무섭다. 한번 들어가 길을 잃으면 나오기가 힘든 곳이 여기저기에 있다. 끝이 곧 나올 것 같은 골짜기를 따라가면서 이제 곧 길이 나오겠지 하고 걷다보면 점 점 더 깊이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 강도나 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시편 84:6에 보면 “바카 벨리”(눈물 골짜기)라는 곳도 있다.사람이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되는 데 다윗은 바로 이러한 때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역 성경에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히브리어 “라아”라는 말은 “악”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더 쉽게 말하면 “나쁜 일”(bad thing)이라고 할 수 있다. “라아”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은 “톱”인데 이는 “좋다, 선하다”(good) “아름답다”(beautiful), “유익하다” 등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선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좋은 아침”(Good morning)이라는 인사말도 현대 히브리어로는 “보켈 톱”이라고 한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사람이 시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쁜 일이 생긴 것이다. 제일 나쁜 일이 죽음에 이르는 일, 악한 일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죽음”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망의 그늘 아래 앉아 있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금 지나가고 있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엇인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작은 일을 더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아예 인생이란 불안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존재 자체가 불안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내일 무슨 일이 나와 나의 가족, 나아가서 이 세상에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윗도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다니며 무슨 악한 일, 곧 나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키 아타 임마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하신 주께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안위하신다는 것이다. 안위한다는 말은 “에나하무니”()에서 어간 “니함”이라는 말은 “위로하다”(comffort, console)는 말이다. 목자의 지팡이(, rod)는 주로 사나운 짐승들을 막아내고, 싸울 때 쓰는 무기이고, 막대기(, staff)는 양들을 인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히브리어 원어는 둘 다 막대기라를 뜻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을 막아 보호해주시고,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나에게 참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함께하신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스가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군사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왕, 아하스를 폐위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침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하스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 나라와 이방신을 의지했지만 “임마누엘”이라는 아들을 주셔서 다윗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며 불안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셨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윗이 사용하는 “임마디”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항상 나 함께 하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목자이신 여호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셨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그의 복음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사야서 9:1-2의 성취를 선언하신 것이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마 4:12)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리고 죽음의 땅,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그의 시에서 말하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자기를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실 그 목자,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망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진리의 빛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쳐주시며,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세상의 빛이라”(요한 9:5)고 선언하시고, 이 맹인을 고쳐주셨다. 사망의 음침한 어둠의 길을 걷던 자를 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교시켰다. 그러자 요한 10장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이 목자가 아니라 강도요, 절도요, 삯군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한 목자 예수님 자신은 죽음의 그늘에 앉아 어둠 속에서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선한 목자이니,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는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어 놓는다.”(요한 10:14-14)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인생들의 그 마음을 아시는 목자이시다. 그리고 이 불안의 근본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지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이 바라본 그 목자-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님이셨다. “임마누엘”(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니엘”(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임마디”(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이다. 우리는 바로 이 사망의 음침한 죽음의 계곡에서 진리의 빛으로 오신 목자,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나가야 한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며, 참 빛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참 목자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8-2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94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자기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며,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눕게한다”(야르비체니), “인도한다”(에나할레니; 얀헤니), “소생시킨다”(에소뱁) 등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 데, 특히 여호화를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동사 “숲”은 “돌아오다”(return) 의 사역형으로 쓰여져, “돌아오게 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메이 메뉴홋”은 “잔잔한 물가”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쉴만한 물가”(refreshing wat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여기서 “영혼‘은 무엇이며, 영혼이 어디에 갔기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그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니쉬맛 하임”(생명의 호흡)을 코에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네패쉬 하야”(생명체)가 되었다. 개역성경은 “니쉬맛 하임”을 “생기”로 “네패쉬 하야”는 “생령”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께서 생기라는 특별한 기운을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므로 사람이 “생령”이라고 하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믿는다. 그러나 “네패쉬 하야”라는 말은 생명체, 영어로는 living soul, living being, living creature 라는 말이다. 여기서 living soul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 혹은 피조물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므로 그것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어떤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패쉬 하야”는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함께 쓰여지고 있는 어휘이다(창 1:20, 24, 30; 2:19). 이 경우 “네패쉬”를 “영혼”으로 번역하면, 마치 동물들도 사람처럼 영혼을 가진 존재로 오해하기 쉽다. 따라서 한글 역본에서는 “생물”로, 영어로는 “living creature”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다같이 “네패쉬 하야”를 쓰고 있기 때문에 마치 사람과 동물 사이에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거나 동물도 사람과 같은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동물도 “네패쉬 하야”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이성과 감성과 지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동물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생명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이외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넣어주셨다는 언급이 없다.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 넣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되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생명체이다. 그래서 사람은 육체와 구별되는 요소로서 “영혼을 가진 존재,” 말하자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패쉬 하야”를 “영혼”이라고 번역을 할 경우, 이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호흡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생명체와, 동물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 주어지지 않는 생물을 다같이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용법에 주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생물”을 사람과 같은 “영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창세기 2:7은 결코 사람의 구성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의 호흡을 그의 코에 불어 넣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이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이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우리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되어 생명이 유지 되었고, 이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어도, 우리 마음속에 어머니의 존재와 그 품속을 떠날 수 없듯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를 가진 존재이다. 우리는 영혼아 있는, 곧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체이다. 따라서 생명의 호흡이 끊긴 인간은 흙덩이에 불과하다. 영혼이 떠난 인간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곧 네패쉬를 소생시키셨다고 말한다. 소생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그의 영혼이 죽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생애가 결코 평안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사실 다윗은 그의 아비 집에서 목동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면 블레셋 사람, 골라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민족의 영웅이 된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죽을 때까지 하루 한 날 평안한 날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다윗의 인생이 결코 꽃 방석에 앉아 신선놀음을 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누린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의 목자로 묘사하며, 그 목자의 보살핌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번 돌이켜 보면 다윗이 누비고 다녔던 유다 광야에 푸른 초장이나 잔잔히 흐르는 물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는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적인 표현이고 비유라고 해야 맞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그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인도해주셨다는 고백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고, 40년 동안의 광야 훈련을 거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역사적인 사실을 돌이켜 보며, 그들을 목자처럼 인도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는 고백적인 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 시의 시제(tense)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자들은 1절은 미래형, 그리고 나머지는 현재형으로, 그리고 어떤 곳은 시제를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P. C. Craigie (WBC) 는 원문을 잘 살려 모두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과거처럼 그들을 돌보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실 목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로 소개하며, 자신은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하나님, 곧 하나님-목자로 소개하고 선언하신다(요한 10:15, 18). 그리고 목마른 영혼들에게(시 42:1) 자기에게 나아와 참 쉼을 얻으라고 초청하신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 11:28-29)여기서 예수께서는 인생살이에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 곧 영혼의 쉼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고, 생명수이며, 더 나아가 그의 살과 피가 바로 영원히 살게 할 참된 양식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참되 음료라고 말씀하신다(요한 4:14; 6:31; 54-56). 아마도 다윗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마시고 마셔도 목마른 이 세상의 떡이나 세상의 물과는 다른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형으로 말한다. 다윗이 찬양하고 감사하는 목자는 현재 목 마르고 배고픈 인생들에게 잠간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추겨줄 수 있는 모세와 같은 목자라기보다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의 양식을 주실 목자, 그의 피곤한 영혼에 참 휴식을 줄 수 있는 목자를 바라보고 이 시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바로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응답하시고, 자기가 그 양식을 주실 수 있다고 선언하신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 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 10:53-56)다윗은 그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성경에서 “의”(righteousness)라는 말은 보통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표현은 예수님과의 뗄려야 뗄 수 없는 최고의 관계, 곧 최고 극치의 “의”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영혼의 양식을 주셔서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려 참다운 의의 관계로 인도하실 선한 목자시라는 것이다. 다윗은 분명 이러한 목자를 마음에 두고, 그리면서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목자가 참 목자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8-0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3
    야곱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자기의 자식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한다. 이때 요셉을 축복하며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겼던 하나님, 오늘날까지 내 일생 동안 나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창 48:15)이라고 부른다. 개역성경은 KJV는 의 분사형을 대부분의 다른 역본과는 달리 “먹이다”혹은 “기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먹이고, 기르는 것이 꼭 양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동사의 원래의 뜻대로 양을 먹인다는 의미에서 “목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야곱은 돌이켜 보면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나 형에게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아비를 속여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연유로 그를 죽이려는 형의 칼을 피해 집에서 도망 나온 이후, 그는 일생을 나그네로 살면서 그의 고백대로 130년 동안 험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창 47:9). 그런데 그는 그의 일생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셨다고 고백한다.야곱뿐만 아니라 다윗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름 없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서 철없이 살다가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트린 후, 일약 민족적인 영웅이 되고 왕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산 사람이었다. 밧세바와의 사건이 그의 온 인생을 뒤바꿔 놓은 것이다. 외적과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죽이려고 끈질지게 쫓아다니는 그의 장인 사울 왕을 피해 적군의 진지로 피신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자식들의 불화로 하루아침에 왕자들이 몰살당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을 떠나 피신해야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그런데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민족적 지도자나 왕을 그들의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에서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아시리아의 산헤립도 그의 역대기에 자신을 목자로 부르고 있다. 성경에서도 모세는 그의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하나님께 자기 뒤를 이어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민 27:16-17).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왕과 백성 관계를 맺는 언약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왕이기 때문에 여호와는 그들의 목자이고, 자기들을 여호와의 양으로 간주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시편 79:13에는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목장의 양이오니 우리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며 대대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노래하며, 시편 80:1에서는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간청한다. 시편 95:6-7에서는 “오라 우리가 경배하며 절하자.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 손의 양이기 때문이다.”라고 제안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되는 점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한 민족이 그들의 민족 신을 향하여 “목자”에 비유하며 목자로 부르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얼마나 인격적이고 친밀하며 깊은 내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점이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동시에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소유주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을 목자로 세우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양을 치게 하신다. 여기서도 고대 근동의 봉건 정치 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잘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목자의 일은 첫째로 양들을 목마르지 않고 배부르게 먹이고 보살피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로 양들을 초장과 물가, 그리고 우리 안으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는 양들을 야생의 맹수나 도적들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먹고 사는 일에만 열심이지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향하여 “자기만 먹고 내 양떼를 먹이지 않았다”(34:1-8)고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충실하고 책임감 없고 탐욕스럽고 희생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해고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양들의 목자가 될 것을 선언하신다. “참으로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한다. 보아라, 나 곧 내가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 필 것이다. 자기 양떼를 흩어졌을 때 목자가 그 양떼를 돌보는 것 같이, 나 역시 내 양떼를 돌보아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겔 34:11-12). 특히 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그의 양떼들을 모으시고 상한 것을 싸매주고 병든 것을 고쳐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나아가서 23절에는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에게 목자가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다윗은 이미 5백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은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신 목자, 그리고 다윗과 같은 목자가 오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목자가 나타나 자기들을 모으고,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며, 보호해줄 목자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요한복음 10장에는 갑자기 예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한 강론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갑자기가 아니라 사실은 9장의 연속이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게 되자 그를 선지자로 인정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가르침과 법을 따르지 않는 그를 출교한 사건을 두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강도와 절도와 삯꾼에, 소경되었던 자를 양에 비유하시며, 자신이 참된 목자이심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양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아는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시고, 심지어 자기는 양떼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한다고 말씀하시다. 마치 다윗이 양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자나 곰들과 싸웠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과 다른 목자였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데, 자기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신다(요한 10:18).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에스겔 34장에서 약속하신 자신이 한편으로는 목자 같은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목자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갇힌 양들과 같이 무기력한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강도와 절도와 삯꾼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셨다. 그리고 그의 우리(축사)로 인도하시고(요 10:16), 그의 양을 삼고, 먹이고, 보살피고, 인도하시며, 보호하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불러 그의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도록 목자의 사명을 주셨다(요한 21장). 베드로는 목자가 된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곳곳에 다니며 목자 노릇을 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양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에 자기들만이 아니고 장로들과 신자들을 다 목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삯꾼 목자가 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자가 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한다. 그리하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목자장으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벧후 5:1-4).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장이시고, 우리는 모두 목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만족해야 한다. 우리도 어쩌면 야곱이나 다윗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다 나름대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 온 자들이다.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잘 나서, 혹은 능력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 기적이고 신비이다. 오로지 감사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어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 고백이 매일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도 목자가 되어야 한다. 항상 양 노릇만 할 수은 없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7-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2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왕들이다그러나 그 왕도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이다예수님의 왕도는 섬기고 살리는 일이다그때 인생은 부요해지고 충만해진다우리 신자들은 우리가 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고 왕 다운 언행을 하며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 대리통치자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고대 근동 세계 사람들은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왕의 기능이 신을 대신한 지상 통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사람이 왕이라는 의미이다. 시편 기자는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가리켜 “관”을 쓴 존재라고 지칭한다(시 8:6).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타라”는 “모자, 왕관”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세상 만물을 그의 발아래, 곧 통치 아래 두셨음을 깨닫고, 사람을 향한 그의 배려에 대하여 놀라고 찬양한다(시 8:5-6). 아담은 창조 시부터 대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한 왕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대왕)-아담(왕)-만물의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만물이라는 어휘가 “콜 츠바암”(모든 그들의 군대, 창 2:1)의 해석적 번역이며, 군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일종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있는 전형적인 군대의 조직처럼 창조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직은 바로 (강대국의) 대왕-(분봉)왕-(약소국의)백성의 질세 체계로 이루어진 고대 근동의 봉건체제를 유지시켰던 계약관계와 서로 유사성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께서 대왕이 되시고, 아담은 왕, 그리고 백성들은 신민이라고 보고, 하나님 앞에서 아담, 곧 인간은 그가 다스리고 돌봐야 할 만물과 언약적 연대성을 이루고 있어서, 아담과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그의 대왕에게 충성하면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아담과 함께 복을 받고, 반면에 아담이 그의 대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할 때는 만물은 아담과 함께 대왕의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창조시부터 왕이었고,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함께한 만물의 왕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결국 아담의 타락을 불렀고, 사람은 아담과 함께 타락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괴물이 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왕이지만 대왕이 되고자하는 탐심과 역심으로 오히려 죄와 죽음에 갇히게 된 반역의 왕이 된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하나님의 심판과 처형을 기다리는 타락한 왕과 만물에게 구원은 오로지 대왕이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밖에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왕을 세우고, 그가 아담의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새 왕에 대하여 첫째는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 따라서 여자의 후손인 사람인 동시에 뱀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영적인 존재를 제압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신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임을 암시하신다. 따라서 새 아담은 처녀의 몸에서 낳게 될 “임마누엘”임을 계시하시고(사 7:14),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으로 소개한다(사 9:6). 말하자면 “사람”(인자)의 아들”(Son of Man)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새 아담이 왕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 아담도 왕이어야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중심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고 하시기 때문에, 새 아담은 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 아담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사 9:6-7; 11:1). 이사야 9장에는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는데, 그는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고, 이름은 위대한 섭리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며 평강의 왕이라는 것이다 (9:6). 대왕이신 하나님과 그 권위와 능력이 동일하신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로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러야 할 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아담이 죽든지, 아담을 대신한 다른 존재가 대신 죄 값을 치르든지 해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서고, 권위가 보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새 아담이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것이다. 새 아담은 아담의 범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매맞고 고난당하고 죽어야 한다. 그러나 부활해야 만이 죄 값이 온전히 치러졌음이 증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 아담이 옛 아담의 죄 값을 온전히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권세가 새 아담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은 바로 새 아담의 속죄 사역이 잘 예언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왕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와서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왕, 그리스도가 되셨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했다(행 2:36). 물론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고백했었다(마 16:16).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골로새서 1:15은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듯이, 새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보좌들과 주권들과 통치들과 권세들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가 바로 만물의 으뜸, 곧 머리라는 것이다. 새 아담이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주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왕이라는 사실은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왕 되심을 인식하고 믿고, 대우하고, 그를 경배하며 충성하며 찬양해야 한다. “왕의 왕, 주의 주”라고 찬송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다.새 하늘과 새 땅, 곧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새 나라의 왕으로 임명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왕,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이제 새 아담, 새로운 왕 앞에 나와 그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새 왕국,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자가 되면 그리스도의 백성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는 것이다. 롬 5:17에는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스렸다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스리다”는 말을 헬라어 “바시레위오”(βασιλευ、ω)를 번역한 것인데 “왕이 되다”(be king), “다스리다”(rule), “통치하다”(reign) 등의 의미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왕노릇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은혜와 선물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 곧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이룬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죽음을 무기로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왕, 생명을 살리는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룬다. 예수님과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인증하는 예식이 바로 세례이다. 예수께서 왕이 되셨으며,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한 왕이 된 것이다. 로마서 8:14-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니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했다.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왕이 되지만, 실제로는 왕으로서 실감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왕이라는 자부심이 없이 살아 살아간다. 비록 우리는 세상 나라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왕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세속적인 왕이 있는 반면,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왕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돈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를 탐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왕이 되고 싶어 한다.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상의 권세와 부와 명예를 탐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작은 자가 되고,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대속물로 주고자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10:42-45). 그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매맞고, 찢기고, 상처받고, 고난 받으시며,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다. 새 하늘, 새 땅, 새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 제물로 주시겠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도리는 아니다. 이 세상나라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고, 자기가 섬김을 받기 위하여 남을 짓밟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섬기고 살리는 나라이며, 왕은 예수님처럼 섬기고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7-1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1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나름대로의 머리 속에 담아 둔 이미지가 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절을 짜맞추어 생각해낸 것도 있지만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 꾼들의 만담을 듣다 보니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이 나도 모르게 머리 속에 굳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참다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그림과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 곧 자기가 태어난 나라, 자기를 길러주고, 자기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주고, 언젠가 자기가 묻혀야 할 자기 조국을 모른다면 그는 그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는 거주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려 간다고 너희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할 것이다.” (요한 14: 2-3)예수님의 이 말씀을 되새겨 보면 예수께서 세상을 떠날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신다. 그곳은 아버지 집 안에 있는 곳이다. 그곳은 앞으로 제자들이 거주할 곳이다. 이곳은 분명 우리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서울시 몇 번지가 아니고,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미지의 세계 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곳, 그래서 하나님이 왕이신 그곳에 제자들이 있을 곳을 예수께서 마련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과는 별개의 세상이 존재함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떤 모양인지,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계시적인 기록이 없다. 우리가 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 뿐이다. 그는 분명 우리와 똑 같이 숨을 쉬고, 먹을 것을 잡수신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이고 이동하시며, 우리의 시야에서 자유롭게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신다. 전혀 다른 기능을 한 사람의 모습니다. 아마도 우리도 그러한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령한 사람들이 신령한 몸을 입고, 신령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와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모든 만물의 왕이신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고 이 만물의 통치권을 아담에게 넘겨 주셨다. 자신은 대왕이 되시고, 아담은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반란으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멸의 대상이 되 버렸다. 그러나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죄와 죽음의 심판을 내리신 그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똑같이 적용하여 새 아담을 세우고, 새 아담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살리시려는 계획을 세우신다. 그리하여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대리통치자인 새 아담과 그와 언약적 연대성을 맺은 새로운 피조물들,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려는 것이다. 물론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의 마음 판에 새겨 두어, 다시는 말씀을 버릴 수도, 변개할 수도 없이 말씀과 함께 죽고 말씀과 함께 사는 새 사람들이 될 것이며, 이때는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넘치는 세상(사 11:9),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이웃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렘 31:3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의 위치이다. 아담과 새 아담은 다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운 왕들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다. 반면 새 아담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동정녀의 몸에서 낳게 하셨다. 그래서 새 아담, 예수님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아담과 비교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며, 통치자이고, 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보다 모든 면에서 수월한 통치자이시다. 그의 출생 이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땅에 오셔서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왕으로서의 위치에 있어서 그는 아담과 비교 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영광을 갖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왕이 되시고 그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면 언제 시작된 것인가?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곳에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그 순간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그의 권세 아래 가두어 둘 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속죄적 죽음이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의 죄 값을 충분히 치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와 죽음이 더 이상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붙들어 메고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새 아담이 되신 것이다. 새 아담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의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왕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던 자들은 이제 새 아담이 새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고백을 함으로 새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묶이게 되는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가, 새 아담의 의로운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적용된 것이다 (롬 5:14).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창조된 세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바로 예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왕노릇하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순간에 시작된 것이며, 예수님의 왕권은 바로 부활의 순간에 선포되고 그의 통치는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모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눅 13:33). 세상 나라 사람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제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몰려오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새 나라의 백성의 인침을 받는 것이다 (사 2:1-4; 11:9; 요 12:20-26).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새 하늘이고 새 땅이다.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있고, 우리 가정에 있고, 우리 교회에 있고,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거처로 갈 것이다. 우리들의 이 육신의 몸이 변화되어 신령한 몸이 되고(고전 15:4),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일 수 있는 참다운 자유의 몸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치고 가야 할 그곳, 곧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그 거처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 저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거하기가 불편할 것 같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3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0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북왕국은 이미 아시리아에게 망하였고, 이제 바빌로니아가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레미야 17장은 이러한 배경을 두고 여호와께서 유다의 죄를 지적하며 유다에게 내릴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유다의 죄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요 아들인 자들이 바알에게 제사하고, 여호와를 떠난 것이다(1-4).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그들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다이야몬드 촉으로 새겨 놓으시고, 유다에게 주셨던 유업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이방 땅의 종으로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미리서 선고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유다의 죄 목록을 나열하시며 이들이 받을 죄 값을 시의 형식으로 선언하신다. 5-11절은 그 형식과 주제가 시편 1편과 유사하다. 시편 1편이 의인과 악인을 각각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에 비유한 것이라면, 예레미야 17:5- 11은 여호와를 떠난 자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 각각 사막의 가시덤불과 물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다. 시편이 인생들의 현재 삶을 주로 다루는 것이라면 예레미야서의 시 귀는 인생들의 결말을 다루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 흐르는 신학적 주제는 시편이나 예레미야서나 다같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시편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하며, 그는 결국 여호와께서 아시지만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서 결국은 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역 성경에서 “인정하다”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 사이에 가장 가까운 관계, 부부 간의 성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하는 사람과 마치 부부와 같은 관계를 가지시겠지만,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시류를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의인은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뿌리가 없다. 정함이 없다. 자기의 분명한 인생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류를 따라 떠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1-4절 서론에서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맺어 온 그동안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끊겠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언약의 백성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 산으로 데려와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는 언약을 맺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을 통하며 하나님과 백성,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비유하고, 해석하고, 그러한 관계를 염두에 둔 생활을 해왔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왕이신 여호와의 백성, 여호와의 신부, 여호와의 아들이 된 셈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보호하시는 일을 하셨으며,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았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에게 살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가나안 땅을 그들의 새로운 거처로 주셨으며, 또한 바로의 노예,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기 유산을 물려주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산, 상속 재산으로 물려주시고 그들을 유업의 백성 (기업의 백성), 가나안 땅을 유업의 땅(기업의 땅)이라고 부르셨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관계를 잘 유지하고, 더 돈독하고 견고하게 발전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아내로서 정절을 지키며,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더욱 영광스럽게 했어야 했다.그러나 본문의 서론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고, 아세라 기둥을 세웠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가장 영향력이 큰 바알 신의 아비, 엘(El)의 아내이다. 이들은 모두 가나안 땅의 번식을 주장하는 신으로 알려졌다. 유다는 그의 신랑 되신 여호와를 버리고 아세라를 따라 간 것이다. 신부로서 음행을 저지르고 반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가 유다에게 준 유업을 빼앗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땅으로 쫓아내서, 그곳에서 종노릇하게 할 것을 선언하신다(17:3-4).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으로부터 땅, 곧 유업을 뺏는다는 것은 시내 산에서 유다와 맺은 언약을 철회하여 신부에게 주었던 거처를 빼앗고, 그들에게 주었던 유업, 곧 유산을 철회한다는 의미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이혼서를 가지고 아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입양 관계가 깨진 아들은 그의 본 신분인 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선택하시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를 떠나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고, 사막의 가시덤불 같이 되며, 소금 땅에서 살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시내 광야나 네게브 지역은 광활한 모래 자갈밭이다. 식물이 살 수가 없다. 나무도 없고, 풀도 없다. 몇 키로 사이에 사방 2-3m 넒이의 가시덤불이 듬성듬성 나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는 어떤 생물도 살기 어렵다. 소금 땅이란 사해 근방의 땅이 암염으로 이루어진 계곡, 절벽 등을 말한다. 사해는 빗물에 소금이 씻겨 그 염도가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의 유다의 운명이 바로 이러한 가시덤불과 같이 되고, 소금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들이 여호와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며 자기의 온갖 욕심을 다 채웠지만 그들을 여호와를 떠났다. 시류를 따라 자기 욕심을 채우고 산 사람들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자고새에 비유하신다. 자고새는 가을이면 사해에 몰려드는 꿩과의 새인데 알을 많이 낳아서 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새가 남의 알을 훔쳐다 품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의 재산이나 재물을 빼앗아 부자가 된 자를 바로 이 자고새에 비유하는 데, 자고새의 새끼들이 자라면 품어준 어미의 품을 떠나 버리듯이 불의한 자들의 재물도 결국은 다 빠져 나갈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막의 가시덤불과 같은 인생들의 말로를 가리키는 말씀이다.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신실하게 충성된 사람은 어떤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다. 그 뿌리를 시내까지 뻗어 더위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잎사귀가 푸르고 가문 해에도 염려 없이 열매를 맺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17:7-8). 시편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하고, 궁극적으로 여호와께서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편이나 예레미야서나 다같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시류를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 사막의 가시덤불이나 소금 따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처럼 망하게 될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서 그를 알고, 그가 하나님을 아는 깊은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아세라 상을 세워두고, 자고새처럼 살아간다. 시류를 따라가며, 죄를 사모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을 살피는 자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하다고 선언하신다(9, 10). 우리는 우리의 속마음을 감출 수 없고, 우리의 깊은 생각을 숨길 수 없다. 무엇이든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밝혀지지 않을 것이 없다. 비밀이 있을 수 없고, 죄가 들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 마치 사막의 가시덤불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 같다. 언젠가는 소금 땅에 버려져 썩지 않는 송장이 될 것 같다. 이러한 절박한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시여 저를고치소서!”하고 매달린다(14). 여호와 하나님만이 병들고 부패한 우리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기에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14). 시편의 의인은 궁극적으로 말씀이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예수님과 띠를 띠어 새 언약적 관계에 들어간 자를 의인이며 복 있는자라고 했다. 예레미야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 말하자면 시류를 따라 아세라를 따르지 않는 자를 복 있는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과 언약적 관계를 맺고 그 안에 거하는 자만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열매 맺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2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9
    한국의 5월은 온통 축제가 몰려있는 달이다. 어린이 날, 어머니날, 어버이날, 그리고 부부의 날 등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 내지 축제일이 다 5월에 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에 대한 기독교적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른 가정, 바른 사회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한다. 가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성경적인 가정관을 바로 확립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가장 나중에 가정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그 크라이막스요 그 종결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창조하기 위하여 세상을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 같다. 첫째,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다. 창세기를 보면 가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짝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이 하나가 되도록 묶어 가정을 이루게 하신다. 따라서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기 때문에 거룩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꼭 전제하고 믿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나의 것이다. 혹은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나게 되었든지, 또 어떤 배경의 사람과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든지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맺어 주시기 위하여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섭리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서, 우리가 좋아해서, 우리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혼은 하나님이 맺어주시고, 짝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맺어 주시기 때문에 아무리 저 사람과는 결혼 안해야겠다고 맹세해도 결국 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고, 저 사람 아니면 못 산다고 아무리 매달려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혼은 안 되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세우셨다고 믿는 믿음으로 가정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정을 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또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남의 가정에 손을 대고, 가정을 위태롭게 하고, 위해를 가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가정 파괴범이 하나님을 대적한 가장 큰 죄인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게 지키고,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가정만은 지키고 남의 가정만은 손을 대서는 안 된다.둘째,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언약적 구조를 가진 유기적 조직체로 만드셨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 것을 약속하고, 계약을 맺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동성애의 결혼이란 있을 수가 없다. 동성애나 동성결혼은 동물의 세계에도 없는 일입니다. 동성연애는 성경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자는 다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 중에 죄악이 동성연애이고 동성 결혼이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창조의 질서를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짓이다. 스스로 망한는 짓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이다.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어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가정은 바로 언약적 체계와 구조를 가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위로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있고, 그리고 다음에 만물이 있어서 이 안에 언약적 대표성과 연대성이 이루어지듯이 가정에도 이러한 조직과 질서가 있다.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이 제일 높은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남편이 아담처럼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가정의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남자를 여자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대신한 가정의 주인이 바로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아버지가 대표자가 된다. 여자나 어머니가 하나님 앞에서 가족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언약적 구조상으로 볼 때, 여자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잘 못 했을 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었듯이 가정에서도 여자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여자는 남편과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가정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정에 두 머리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가 머리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이다. 가정의 비극은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되려고 할 때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여자의 창조는 가정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여자는 가장 나중에 창조된 존재이다. 말하자면 창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의 크라이막스이고 창조의 완성이다. 그래서 여자는 중요하고, 특별하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 역할은 다르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아담은 그 아내를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했다. 사람이 살이 없고 뼈가 없는 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살과 뼈는 불가분리의 유기적 조직체이다. 따라서 부부는 살과 뻐처럼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라는 이 같은 일체성을 나누어서 생각하고, 나누어 대하고, 나누어서 취급하려는 자체가 잘 못이다. 남녀의 우열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 못이고 죄이다. 가정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하는 언약적 유기체이다. 그래서 위에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대리로서 주인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있고, 그 밑에 자녀들이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주인의 역할을 위임했다. 부모와 자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이룬다. 부모는 자식들을 양육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도록 훈련을 시키고 가정의 질서를 지키도록 지도해야 한다. 어머니의 역할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은 가정의 주인으로서 모든 면에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자녀들의 훈련은 어머니에게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가정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가정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항상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있어야 한다. 가정에는 가정 예배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바로 제사장이다. 아버지가 되려면 먼저 가정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노아, 아브라함, 욥,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 등등 무릇 성경의 경건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더라도 집안의 특별한 곳에 신상을 놓고,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절하며 제사나 예배를 드렸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는 가신 드라빔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우리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아버지가 하나님을 대리한 가정의 머리이고, 우리가 모두 한 가정의 피를 나눈 가족이자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유기체라는 것을 확인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함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가정을 다스리며,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그 속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은 구별되어야 하는 성전이다.셋째로 가정은 사랑의 도가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가정을 창조하신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생육이라는 것은 낳고 기른다는 말이다. 자식을 낳고, 길러서 온 땅에 번성하라는 것이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사랑의 씨를 주시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게 하셨다. 그래서 가정의 1차적인 목적은 자식을 낳는 것이다. 자식을 낳되 많이 낳으라고 하셨다. 온 땅에 충만하게 낳아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낳기만 하면 안 되고, 낳고 길러야 한다. 생육하라는 말씀은 낳고,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훈련시켜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교육이 없으면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짐승들도 다 자기 자식들 먹이고, 훈련하고, 교육시킨다. 사람은 자식을 육신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훈련을 시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훈련시키는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연습을 시키고, 훈련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가정은 사랑의 훈련원이요, 사랑의 샘, 사랑의 도가니라고 할 수 있다. 가정에는 든든하 아버지의 울타리가 있다. 그리고 가정에는 항상 감싸주시고 품어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 곰 새끼들이 잠자는 어미 곰의 품 안에서 함께 잠자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 가정의 모습이다. 아무리 밖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집에만 들어오면 맺었던 분노와 한과 상처와 좌절 등이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평안이 스며드는 곳이 바로 어머니가 계시는 가정이다. 그래서 마음이 새로워진다. 가족들의 사랑 때문이다. 가족들의 사랑이 사람을 살리고 새롭게 한다.우리가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 때 우리는 가정에 대한 소중함과 거룩함과 책임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성과 연대성 가운데 이루어진 유기적 조직체이다. 따라서 가정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거하고 계심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8
    성령세례의 반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성경 본문은 첫째는 요한복음 20:19-23이고, 둘째는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의 가속들이나 에베소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은 오순절 성령세례 때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이 복음으로 전하는 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은 요한복음 본문에 이은 두 번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시어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본문의 사건을 자세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그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방안에 들어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계속하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본문은 역사적으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의 해석은 대략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특히 오순절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요한의 오순절”(Johannine Pentecost)라고 지칭한다. 필자도 편의상 여기서 그렇게 부르고자 한다. 첫째는 두 오순절 이론이다.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사도행전 오순절은 같은 성령 세례인데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누가의 성령세례와 요한의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반복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는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이나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레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이에 속한다. Finny 나 로이드 죤스와 등이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한 사람들이다. 요한복의 오순절에는 하늘로부터 온 소리나 불처럼 갈라진 혀가 임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 이외는 다른 사람도 없었고, 방언도 없었고, 세례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오로지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뿐이다. 둘째는 모형론적인 해석이다. 요한의 오순절을 비유적으로, 혹은 모형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Ladd는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여기며,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사건을 “오순절에 성령의 실제적 오심에 대한 약속과 예상에 대한 실제적 비유”라고 말한다. 학자들 간에는 “숨을 내쉬다”라는 헬라어 “엠푸사오”와 창세기 2:7, 하나님의 사람 창조시에 동일하게 사용되는 “나파흐”() 사이의 의미상 유사성에 착안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서로 모형과 실형을 이루는 비유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실제적 사건이다.셋째는 “요한의 오순절”을 이어지는 누가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맛보기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즉 “요한의 오순절” 사건을 그리스도의 선물이 오순절에 완전히 주어지게 될 성령의 부분적인 수여로 보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성령은 제자들에게 그의 은혜와 함께 살짝 뿌려지듯이 주어진 것이지, 그 완전한 능력으로 제자들을 흠뻑 적신 것은 아니다.’라고 보았다.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이 그 본질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요한의 오순절”이 누가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예비적인 사건이라는 가르침은 결국은 두 번의 오순절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같은 한 사건을 각각의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요한은 부활과 성령세례,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서로 연합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세례는 부활 기간 어느 때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성령세례를 예수님의 부활과 묶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듯하다. 보체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의 의도가 당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변증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는 데 있어서 아들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람이라고 주장한다.이상의 요한의 오순절에 대한 해석을 종합해볼 때 이들의 해석과 주장은 본문에 대한 세심한 주석과 구속사적인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정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제자들의 불신과 불안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는 상황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도 두려운 대상임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다. 그런데 21절에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다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들이 얼마나 마음 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한 상태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두 번이나 이들의 평안을 주시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도 자신도 제자들은 보낸다는 사명의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하셨다. 자세히 이 절의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본문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숨을 내쉬었다 (Ind. aorist active 3ms, 부정과거형). 그리고 말씀하신다(현재형). ‘성령을 받으라.’” 이 번역에 의하면 예수께서 숨을 내 쉰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의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결코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쉰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숨을 내 쉰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의 시제가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점은 헬라어 문법의 시제나 용례 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 요한 자신이 연이어 다른 시제를 쓰고 있다는 것은 의도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의도는 분명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멈추었다는 것은 뒤에 이어지는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숨을 내 쉬셨을까? 어떤 사람은 “숨을 내 쉬다”는 의미의 헬라어 “에네퓌세센"이 창 2:7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창조의 개시를 선언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숨을 내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헬라어 “엠푸사오” 히브리어 대응어 “나파흐”()의 목적어로 “생명의 호흡”()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불어 넣은 것이 어떤 것인지, 어디에 불어 넣으셨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 없고, 단순히 숨을 내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숨을 제자들을 향하여 내 쉬었다는 말도 없고, 숨을 어디를 향하여 내 쉬었다는 방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숨을 내 쉬셨다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여 제자들과 같이 살아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숨이없으면 시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 부활한 살아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여기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위로부터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 말씀이다.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장대로 예수께서 이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셔서 새 사람들이 되었다면 8일 후에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집안에 있을 때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도마에게 그의 손을 만지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시며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더구나 21장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들고 나가서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향에 내려가 물고기를 잡는 옛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을 보면 이들이 새로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후퇴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소위 “요한의 오순절”은 누가의 오순절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고, 나아가서 앞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해야 할 일로서 성령을 받아야 할 절차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개인의 구원이나 성화를 위한 것도 아니고, 반복될 일도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는 위임 의식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 세례를 받으며, 새 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위로부터 받는다. 그래서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며, 그는 선지자의 직임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대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0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7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신 것을 보시고 이들에게 자기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당하여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알려 주시기 시작하셨다(막 8:31). 그리고 그의 발걸음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셨다(요한 11:38-44).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민중들의 소란이 자칫하면 로마 당국을 자극하여 땅과 민족을 빼앗기는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 것이다. 이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나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요 49-53)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아 나라와 민족이 망하는 것을 구하자는 것이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은 가야바의 이 발언이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언이라고 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여 속죄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대속이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바치는 속죄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한 속죄물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속죄양으로 삼아 나라와 민족을 살리게 하겠다는 생각은 특별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죄 값으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막 10:45)고 하신 말씀대로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대제사장을 통하여 해석하고 예언적인 선포를 하게 하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한 후 그와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피조물들을 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신다. 아담을 대신한 “새아담”을 세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창조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고 그의 모든 피조물을 그의 수하에 맡기셨다.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아담과 그 수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하여 그들을 상대하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반역과 범죄도 아담의 통치권에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똑같이 적용하신 것이다(창 3:17).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모두 아담과 함께 하나님께 불순종한 반역자가 되었고, 그 결과 죄와 죽음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이 문제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똑 같은 원리로 아담의 연대성 안에서 죄와 죽음이라는 언약적 저주 아래 있는 그의 피조물들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아담을 대신한 “새아담”을 세우고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통치권 아래 맡기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그를 순종하고 경외하는 새아담과 더불어 새로운 연대성을 형성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하는 것이다(롬 5:12, 15-19). 따라서 바울은 아담을 가리켜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롬 5:14). 그렇다면 “새아담”은 누가 될 수 있는가? 새아담은 어떠한 자이어야 하는가? 첫째로 새아담은 “여자의 아들”이어야 한다(창 3:15). 이 말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뱀을 조종하여 여자를 유혹하게 했던 사단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신적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새아담은 인성과 신성을 겸한 존재여야 한다. 셋째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에 매여 있는 피조물들을 구원하려면 아담의 죄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다(롬 6:23). 따라서 새아담은 아담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성전에서 제물로 드리는 허물없는 속죄양처럼 그 자신을 속죄물로 바쳐져야 했다. 넷째는 새아담은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 있는 피조물의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증거를 보여야 했다. 죄 값을 치렀으니 더 이상 죄가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 있는 피조물들을 죄와 죽음으로 가둬둘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아담부터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고전 15:13, 17, 21-22).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아담처럼 모든 만물 위에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고후 4:4; 5:17)골 1:15; 2:10)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담을 만들어도 안 되고,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신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이 되어야 이 조건들을 충족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제사제도를 통하여 미리서 이스라엘 그의 백성들에게 모형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속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서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많은 사람들의 속죄물로 드리고 부활을 해야만이 새아담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그런데 본문을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바로 예수께서 나라와 민족을 구할 속죄양으로 죽어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바가 하는 말은 예수께서 로마를 대항하여 모여든 반 로마 세력의 우두머리로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양이 되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명분없는 정치범이나 잡범의 죽음이 아니라 적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죽음임을 미리서 알게 하고 인정하게 한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백성들의 소요에 대한 책임을 예수께 떠넘기는 발언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이고 의로운 죽음임을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점에 대하여 요한은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요 11:52).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만민을 위한 속죄적 죽음이라는 것을 공회 앞에서 선언하고, 공회는 이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체 나라를 살린답시고 예수님을 죽이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것은 민족을 위한 짐승의 희생이 아니라 사람을 통한 속죄를 언급하고 예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은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었음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선포하고 공회가 공인했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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