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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5
    들어가기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주일이 맞는 것인지, 안식일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교회의 주일 예배가 중지되고 있어서 특별히 주일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께서 기뻐 받으시는 주일 예배인지 배우면 좋겠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2:1-14이다.본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전통적인 안식일의 규정을 무시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비를 불러일으켜,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모의를 하게 되는 사건이다. 1-8절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길가다가 배가 고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꺾어먹은 사건이고, 9-14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긴 자로 고소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논쟁이었으나,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부르는 사건으로 비화하였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안식일이 왜 있는 것인가?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 활동을 마치시고 쉬셨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쉬셨을리는 없다.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2:2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안식일”(Sabbath)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그가 하셨던 그의 일을 마치셨다[]. 일곱째 날에 그가 하신 모든 일을 그치셨다 [“샤바트”): 중지하다, ceased]라고 기술하고 있다. “쉬다”는 개념의 “안식일”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에 사용하신 말이다. 여기서 “샤바트”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쳤다,” “그쳤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 후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 보면 이는 완성된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감이 내포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다. “거룩하다”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라는 말은 “성별하다” “바치다”(consecrate)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일곱째 날은 복되고 거룩한 날, 곧 하나님의 날이다. 둘째로 안식일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을 위한 날이다. 사람은 일만하고 살 수는 없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쉼이 필요한 존재아다. 사람은 일의 노예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점에 있어서 동역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따라서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일을 그치시면, 사람도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노동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개념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구체화 된다. 사람이 제7일에 일을 멈추고 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었다. 십계명 중 제 4명에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7일에 쉰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 (the sign of covenant)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의 언약의 표였던 것과 같이 제7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요, 언약의 표었다. 따라서 제7일에 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는 범죄였다. 여호와께서는 제7일에 일하는 자는 언약을 범하는 자는 법대로 죽이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쉬는 훈련을 광야에서 40년이나 시키셨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훈련이 필요했다. 먹는 훈련, 안 먹는 훈련, 쉬는 훈련, 일하는 훈련, 여호와의 언약백성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안식일은 바로 쉬면서 안약백성으로서 도를 훈련받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제 7일을 거룩하게 구별집행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다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새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신 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세상 만물을 살리신 날이다. 그리하여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 언약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날, 곧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뻐하고, 기념하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므로 바로 이 날이 새하늘과 새땅이 처음 열린 날이고, 새로운 세계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고, 나의 인생도 새롭게 시작된 날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되었다. 그래서 주간 첫 날이야 말로 예수님의 날, 주님의 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이다”이라고 선포하셨다. 한글 성경은 “주인”이라고 번역을 해놓으니까 “집 주인” “가방 주인” “자동차 주인”처럼 좀 왜소한 느낌이 든다. 헬라어 “큐리오스”라는 말은 “The Lord,” 곧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주일”이라는 말을 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제7일을 안식일로 칭하시지만 제7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는 율법은 아담과 함께 땅에 묻혔다. 더 이상 우리에게 안식일은 없다. 구약성경만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새창조의 날, 모든 역사의 새로운 시작의 날, 주간 첫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리며, 새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축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제7일에 땅 속에 묻혀있는 예수께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언약의 생명 축제를 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식일에 생겼던 사건을 살펴볼 차례이다. 본문의 두 사건 가운데 첫 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길가다가 배가 고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익어가는 밀 이삭을 꺾어 먹기 시작했다. 땀 흘려 농사지은 이삭을 잘라먹은 이들을 우리 눈으로볼 때는 분명 도적놈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여기서 문제 삼은 것은 이들이 남의 밀 이삭을 꺾어 먹은 것이 아니라 마침 이 날이 안식일이라서,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3:24-25; 24:19-22에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을 위하여 바구니나 낫을들고 밭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이를 허락하였다.문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은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해야 할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윗이 한 일을 상기시키신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하나님의 잡에 들어가 율법대로 오로지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 진설병이란 레 24:7절에 “여호와의 화제를 위한 기념 제물의 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화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이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을 모두 화제라고 한다. 속죄를 위한 제사는 짐승을 불로 태웠다. 그래서 화제는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을 상징하는 제사이다. 화제는 성소 밖 뜰의 제단에 양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이기 때문에 성소 안에서 드릴 수는 없다. 따라서 진설병의 역할은 성소 밖 뜰에서 드리는 화제를 상징하고, 생각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이 거룩한 빵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최후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떡은 특별히 구별된 것이어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 빵을 먹었다(삼상 21:1-5). 그들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것 같다. 제사장 아비멜렉은 이들에게 거룩한 빵을 내 주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나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는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를 불순종하는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분이시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불쌍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살아야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이 갑질하는 자들에게 “내가 안식일의 주, 곧 하나님이다”고 선언하신다.두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사건이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졸개들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이었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그것을 붙잡아 끌어 올리지 않겠느냐?고 되물으신다. 이 세상에 아무리 안식일에 일하지 마라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죽게 내버려두고 안식일이 지나도록 기다릴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럴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전제로 계속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안식일 법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다. 양을 치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법보다 중요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다.이 말씀은 안식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안식일이란 아무 일 안하고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리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 기본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빚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좋았다”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토브”()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good”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goodness”라는 말이 바로 “선”이란 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그 의미가 선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은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선한 것이다. 반대로 악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방해하고, 거역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것이 선이다.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향하여 “네 손을 펴라”하시니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다(13). 온전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사단이 망쳐놓은 일을 바로 잡고, 온전하게 하고, 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선한 일이다. 살리는 일에 골든 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 죽어버린 뒤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죽은 생명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살리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성전도 중요하고 율법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죽은 자들을 살리려 오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아무리 성전이 크다고 할 망정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보다 더 클 수 없다. 아무리 성전이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중요해도, 성전은 예수님의 모형에. 불과하다(요 2:18-22). 그래서 예수님의 사람들은 이제 돌로 만든 성전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성전을 없애버리셨다. 돌로 만든 성전이 재건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만든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대신 예수님을 우리의 성전으로 주셨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전 3:16-17).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고,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주일에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예배에는 말씀, 기도, 찬송, 교제, 그리고 전도가 있어야 한다(행 2:42). 함께 모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격파하셨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나라를 세우셨다. 우리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로운 백성 삼으셨다.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으셨다.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에게는 제7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창조의 날, 곧 새 역사의 시작의 날이 중요하다. 부활절 전 안식일에 예수님은 땅속에 계셨다.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새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부활절 날이 중요한 것이고, 부활절하신 첫째 날, 곧 안식후 첫째 날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해야 할 주의 날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4-24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4
    부활, 악에 대한 선의 승리(고전 15:21-22)2020년 부활절을 맞는다. 올해의 부활절은 다른 어느 때보다 부활의 의미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전염병이 하늘과 땅과 바다의 길을 막고, 사람들의 목을 죄고 있다. 가정집 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학교, 병원, 공공건물, 심지어 교회의 문도 닫혀있는 상태이다. 죽음의 권세 아래 갇혀있다. 이태리의 한 화장장 앞에 시신을 화장하기 위하여 즐비하게 늘어놓은 관들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마침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위로와 힘과 소망을 얻으면 좋겠다.부활의 전제는 죽음이다. 바울은 고전 15:22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게 된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말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그가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시 8:5-6). 이로써 하나님은 대왕이 되시고, 사람은 왕이 되고, 만물은 그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가 이루어지고, 사람과 만물은 이 틀 안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질서 있는 세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그러나 만물의 왕,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여 죽음을 초래함으로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고 아담과 함께 죽음의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고 벌이다. 값을 치러야 할 범죄이고, 죽어야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여기서 “좋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토브”()라는 “좋았다”(good)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즐겁다, 선하다는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선하다”는 의미로 쓰여진 경우가 많은 데, 이때는 악하다는 말과 대치되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이다. 악이란 생명을 죽이고 멸하는 것이나 선은 생명을 불어 넣고 살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물으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목숨을 구하는 것을 선으로, 목숨을 죽이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생명이 약동하는 세상을 바로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시기에 선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은 아름답고 선한 이 동산에 사탄이 들어와 뱀을 사주하여 죽이는 일을 한 것이다. 악의 씨를 뿌리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온 세상과 그 세상을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빠져들어 가버린 것이다. 악의 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던 이 세상을 계속 사단의 세력에 방치해 놓을 수는 없어 이들을 구원하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문제는 아담이었다. 모든 만물의 왕으로 세움 받은 왕, 아담의 대왕에 대한 불복종의 범죄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다. 그 새로운 왕이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고, 그 새로운 왕을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세상을 해방시키고, 새 아담, 새로운 왕의 통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대하여 바울은 롬 5:14에서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언약적 연대성의 우두머리,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게 되는 이 원리가 모형(type)이고, 새언약의 우두머리 새 아담,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원리가 실형(antitype)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왕을 창 3:15에 언급하신다. “여자의 후손”이다. 여자의 후손은 누가 될 것인가? 그는 뱀을 사주한 사단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영적 존재이자, 여자에게서 낳은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신성과 인성을 겸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죽고, 부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활이 바로 그가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부활을 해야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그와의 새로운 연대성 가운데 새 생명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천지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지, 사탄과 악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악은 망하고,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새 아담으로서의 모든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왕으로, 새 언약의 우두머리로, 새 생명의 창조주로, 새 역사의 창시자로 오신 것이다.이제 우리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새로운 왕이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만 하면,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그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그와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 생명을 가진 자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새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이 생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100세 인생을 설계해서는 안 되고, 영원을 향한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둘째는 부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생명을 살리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그러나 사단 마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단을 반드시 벌하시고 멸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으셨다거나 살리시지 못하셨다면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퍼부으셨다(창 3:14). 그리고 그의 아들을 살리시고, 이 세상은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비록 오늘 선한 일을 하다가 멸시 당하고 환난과 핍박을 받으며, 심지어 억울한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인생을 비루하게 살지 않는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오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내가 승리할 것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이다. 이 세상은 불의와 부정과 불공평한 악이 절대로 승리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자로서, 역사를 주관하시며(control), 선하신 분(good) 이시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4-10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3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에서는 이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려고 마스크를 사기 위해서 아우성이고, 각급 학교는 봄학기 개강을 미루고 있고, 회사원들은 재택근무가 늘고 있다. 거리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는 이미 바닥을 쳤고, 민심은 흉용해가도 있다. 두려움이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휘감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역대급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젠가 진압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식들의 안전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편한 인간관계로부터 생긴 두려움, 물질의 소유와 손실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정신적인 소외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이유도 없는 막연한 정체불명의 두려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우리 인간들은 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이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우리들의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억누르고 억압하여 마비시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생명체요 대단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사단과 비슷한 존재이다. 한번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온통 정신이 마비되고, 손발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한결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바닷속 같은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일까?현대 실존철학자들은 대부분 인간의 불안 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방식이 불안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죽는다는 유한성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키에케골은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방치되어 비연속적인 순간으로 떠밀려 움직여 나가는데, 이 가운데서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불안을 한계상황이라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의 불안은 모체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심리상태라고 말한다. 안전하고 영원할 것 같던 자궁이라는 환경에서 세상으로 떠밀려 나오는 순간, 태아는 최고도의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눈꺼플을 통해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은 아프고, 정지상태에 있던 폐의 움직임은 울음이라는 언어로 고통을 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 경험하게 된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인간은 그렇게 불안을 안고 세상과 만난다.”고 말한다 (‘불안은 다스릴 수 있는가?’ 『한국경제』 2015.06.10.).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한계성과 인간으로서의 그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그 불안의 시작이고, 인간의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에 떨면서 발버둥치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평안을 기대하고 잠시 그를 통하여 평안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든 우상일 뿐 자기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모든 것의 시조가 아담이지만 두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조도 아담이었다.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열리자 그들이 벌거벗을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와 징벌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이 대답하기를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창 3:10)라고 대답했다.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내가 숨었습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한글 개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은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거룩한 창조주이시오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런데 보잘 것 없은 한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고 선언하셨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아담이 아니다. 아담은 변했다. 아담은 죽을 죄인이 되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러한 자에게 두려움이 없겠는가? 인류 최초의 인간이 갖게 된 최초의 두려움은 온 세상의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갖는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인간이 겪는 최초의 두려움이고 불안이었다. 우리 인간은 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과 함께 죄인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죄인 아담이 경험했던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 함께 경험하고, 함께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면 다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두려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죄가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보통 가까운 친구나 친족이나 상담사를 찾아가거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잠시 마음이 시원하게 느끼고, 잠을 자고 나면 좀 평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시 찾아온다. 두려움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근원적인 해결은 없다. 설령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와 연결된 일이다. 우리의 불안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는 바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예수께서 체포되기 전 성만찬 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주니,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마라.” (요한 14:27)이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 20:19, 21, 26)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자기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셨음을 선언하신 복음의 메시지였다. 불안의 문제가 그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시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먼저 알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한글개역이나 바른성경,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본들의 요한 20:22의 번역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들에게 (그들을 향하여 「개역」)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어 성경 원문대로 번역하면 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을 내 쉬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고 되어있다. 결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숨을 내쉬며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오순절 이전에 받은 첫 번째 성령세례라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한번 있었던 일이다. 두 번, 세 번 계속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위임식이다.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누가의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반면, 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요한의 성령세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키며,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쉬지 않았다. 그냥 숨을 쉬셨다. 자신이 죽은 사람이나 유령이 아니라, 숨을 쉬는 살아있는 사람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 것이다. 그의 부활하신 몸이 살아있는 인간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몰아내고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바로 사흘 전 만찬석상에서 빵과 포도주로 예수님과 새언약을 맺은 자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배신한 것이다.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살기 위하여 도망갔을 것이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들 나름대로의 이상과 꿈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꿈과 이상은 산산이 부숴지고,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안해하고, 자신들에게 화도 나고, 앞날이 두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죄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진 자들이다. 아담처럼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차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인간의 두려움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이 평안하도록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속의 모든 불안을 몰아내시고,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평안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재하실 때, 비로소 참다운 평화, 원초적인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5-1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여라. 이 평화를 위해 너희가 한 몸 안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는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머물게 하여라.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여라.” (골 3:15-16)여기서 바른성경은 헬라어 “에이레네” 를 “평화”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은 “평강”으로 번역하고 있다. 평강, 혹은 평안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안이 너희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마음”보다는 헬라어 원문은 “카르디아”(καρδια) 곧 “심장”(heart)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평안이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는 평안을 약속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평안하도록, 평안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평안을 얻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고 말하면서,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머므르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머무르게 하다”라는 말과 “다스리다”는 말이 중요하다. 헬라어 “에노이케오” 라는 말은 “to dwell in,” 곧 “안에 머무르다,” “거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라는 말이다. 말씀이 항상 내 속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브라뷔오” 라는 말은 마치 재판관처럼 행한다는 의미이다. 통치한다(rule)는 의미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마음을 “불안”이 다스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치며,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깃들려면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머므르려면,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하게 머믈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과 더불어 감사와 찬송이 넘쳐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성령과 말씀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마음에 평안을 원하다면 말씀이 내 속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쳐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로 말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쳐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내 마음 안팎에서 말씀과 성령과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쳐야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우리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온갖 정체불명의 불안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충만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도망간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3-2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2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레 19:1)고 요구하신다. 성도들의 거룩함, 곧 성결은 신구약성경 윤리의 핵심이다. 성도들의 금식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의 성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 58:6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하는 말씀이다. 일부의 설교자나 성경 선생들은 경건 생활이나 병 고침을 위하여 금식을 권하며,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길을 찾고, 알기를 기뻐하며, 의로운 법도를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다. 아주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행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버리지 않는 자처럼 살았다. 그리고 이들은 변함없이 주기적으로 금식하였다.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주 일상적으로 하는 종교 활동의 일부였다. 금식을 함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보다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경건의 방법으로 금식을 한 것이다. 히브리어 “촘” 혹은 “춤” 이라는 말은 사람이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람이 금식할 때는 보통 삼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얹고, 울거나 애곡을 했다(더 4:16). 금식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이었다. 금식이야 말로 이스라앨 사람들이 자기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무랄 데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고, 이들을 알아주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그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다. “우리가 금식하나 어찌하여 주께서 보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나 어 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시지 않으십니까?이것을 8절과 연계해서 보면 아마도 병든 자가 금식하며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자 토해내는 불평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이들은 금식하면서도 자기의 쾌락을 구하며, 자기 일꾼들은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3). 금식을 한답시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앉아 있으면서 다투고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행위는 위선이며, 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여호와께서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4). 이들은 신앙적이고, 경건한 체 하지만 그들은 무자비한 위선자요, 자기중심적인 형식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의 쾌락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금식을 통하여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식을 통하여 자기의 쾌락을 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경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증스러운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금식이냐?”그런데 이 성경 구절이 우리 한글 역본에서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냐?”(5)로 번역하고 있다. 6절에도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기뻐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모든 영역본은 "the fast that I choose"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 ESV. NIV. NASB. RSV. JPS 등 거의 모든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역한 TNK 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금식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개역 성경 오역의 한 구절이 한국 성도들의 신학과 신앙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 성경 번역자들에게까지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금식을 장려하는 자들의 주장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시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금식 기도원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인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한국처럼 금식 기도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왜 금식을 선택사항으로 말씀하셨을까? 금식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성별된 경건생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란 금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4절에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금식이냐?”고 물으시는 질문은 “아닙니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고, 5절에는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와 같다”라고 참다운 금식이 어떤 것인 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금식은...”이라고 말문을 여신다. “불의의 사슬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스는 것이 아니겠느냐?” (6) 고 말씀하신다. “또 굶주린 자와 네 음식을 나누며,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을 집에 데려오고, 네가 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를 입혀주며, 네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7)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는 참다운 경건 생활, 즉 진정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만족해하시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경건 생활은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먹는 것이다. 굶주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압제받고 핍박 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자기는 금식한답시고 일꾼들은 부려먹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함께 먹고, 헐벗은 자와 함께 나누고,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여 화평을 도모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이다. 안 먹고, 안 하고, 슬퍼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위선을 부리는 형식적인 생할과 행동이 경건이 아니다. 자기의 비뚤어진 의, 자기 과시성 위선과 형식적인 봉사 활동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본문 후반부 8-14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선택하신 참 금식, 곧 참 경건이 어떤 것인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급이 어떤 것인가를 열거하고 있다. 8절에는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다”고 했다. 참 금식, 곧 사랑과 희생과 공의와 생명을 살리는 헌신의 빛이 마치 어둠 가운데 찬란하게 비추는 새벽별처럼 비칠 것이라는 것이다. 10절에는 이들의 “네 빛이 흑암 속에 나타나 네 어둠이 대낮같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뒤에서 호위해주신다고 했다.9절에는 이러한 희생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네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때에 그분께서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금식기도를 해도 안 들어 준다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금식기도보다는 구체적인 의롭고 선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성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네 치료가 신속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위선적인 금식을 배제하시는 말씀이다. 11절에는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마치 물댄 동산같이 되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피패하고 메마른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는 행동하는 성도들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황폐한 곳을 재건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무너진 곳을 다시 쌓는자” 혹은 “길을 복구하는 자”라고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무지, 광야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되살리고 재건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13-14절은 특히 안식일에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여호와의 거룩한 날을 존귀하게 여기고 여호와를 즐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히 대하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금식이라는 자기를 들어내기 위한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경건 생활보다는 오히려 먹으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며,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살리며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금식, 경건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하기 위하여 경건생활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금식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랑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3-02
  • ◈ 바바바 144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131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때에 만날 큰 도움이시리라”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떨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병균이 전 세계 수많은 생명을 사냥질 하고 다닌다. 모든 생명 활동이 다 정지 상태이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 안전지대로 피난을 가서 걱정없이 활동하며 살고 싶은 생각을 안 해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디 안전지대가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과연 피난처가 있는 것는 것인가?다행히 성경에 보니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다. 본문 1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때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7절과 11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신다.”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시작과 끝을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중간에 또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는 “셀라”라는 말이 3,6,11절에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높이다”(to lift up)는 의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음을 이곳에서 높이 올려라 (to higher pitch), 혹은 음성의 변화 (change of voice), 혹은 기악곡의 삽입을 위하여 성악은 멈추라. 혹은 “영원히”(forever)라는 의미라고 다양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주제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하여 문단을 나눌 때 사용하기도 한다. 본 시에서는 분명 자연적인 재해와 전쟁의 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오로지 여호와만이 그 백성들의 피난처이시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찬양하는 시이다. 때라서 이 시의 전반부는 자연의 재앙을 다스리는 하나님(2-7)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절에 “환난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은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그래서 땅과 산이 바다에 깊이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소리치고, 거품을 내고, 거센 파도에 산이 요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의 말로 하자면 밤중에 지진으로 말미암은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민족들이 소란하고, 왕국들이 요동한다. 그러나 바닷물이 밀려와 산을 덮치고, 땅이 흔들리는 이 상황 속에서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는 요동하지 않는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읍으로 흐르는 강은 오히려 거룩한 성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강들이 요동치지 못하고 오히려 졸졸 흐르는 개울물처럼 흘러 하나님의 처소를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지진이나 바닷물도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알고 그 앞에서는 잠잠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성읍이 어디인가?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거처를 산에 두신다. 성경에 시내 산, 호렙산, 시온 산 등을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시편 48편에 보면 “북방의 시온 산은 높고 아름다우며 온 세상의 기쁨이 되니 위대한 왕의 성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의 궁전에 계시니 자신을 피난처로 알리셨다.” (48:2-3)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발하시는 소리는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크시고, 자연의 힘보다 더 세고 강하시다. 감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처를 어떤 피조물이라도 넘볼 수 없다. 자연 재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우리가 직접 체함을 해보지 않아 적나라하게 그 파괴력을 실감할 수 없지만 사진이나 뉴스 기자들의 보도를 보는 광경은 참으로 무섭고 참담하다. 일본의 쓰나미 현상이나, 미국의 칼리포니아와 호주의 산불, 그리고 알프스 산에서 트렉킹하던 사람을 삼킨 눈사태 등은 공포 그 자체이다. 요사이 중국 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마비시켜 가고 있다. 나라들이 문을 닫고, 모든 집, 학교, 공공건물, 상점, 백화점, 심지어 병원까지 문을 닫고 있다. 중국에서는 전염병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자들이 한 달여 만에 4만명, 사망자가 1,000명을 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당하는 대재앙인 것 같다. 일본에서 발이 묶인 크루스 여행자들 3,700명이 하선을 못하고 배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피난가고, 도망가야 하는 것일까? 마치 닭장에 갇힌 닭처럼 결국 잡아먹히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므로 성이 요동치 않을 것이다.”(5)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만이 견고하게 서 계신다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재양의 날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 산이 진동하고, 바닷물이 요동칠 때, 그리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때, 우리는 여호와께 피난을 가서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왜 하필 나인가? 이러한 재앙이 왜 우리를 삼키려하는가? 하나님은 왜 하필 나만 구원하셨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고 계속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다음 이 시의 후반부는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자연 재해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전쟁이다. 전쟁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조리게 하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는 생각만 해도 무섭다. . 유다 왕 아하스 때에 북 이스라엘과 아람 군대가 유다를 치러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과 백성들이 마치 바람에 사시나무가 흔들리듯이 그들의 두 무릎이 부딪쳐 떨었다고 했다. 이스라앨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산으로 도망을 가든지, 절벽에 구멍을 파서 그곳에 피난했다. 갈릴리 바다 곁에 있는 알베르 산 절벽에는 예전에 피난민들이 구명을 파고 피난살이를 했던 흔적이 지금도 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데리고 아둘람 굴로 도망갔는데, 지금도 그 바위 동굴이 있다. 엔게디에는 사울을 피하여 도망가던 굴이 있다. 마사다는 유명한 피난처이다.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함락되고 망할 때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 로 도망가서 3년 동안 항거하며 항거했지만 결국에는 자살로 막을 내렸다.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이며, 망하느냐 흥하느냐하는 문제라서 그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가 전투에 임할 때,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받는다. 신 20:3-4에는 제사장이 다음과 같이 축복하고 격려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오늘 너희는 너희 적들과 싸우러 나간다. 너희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며, 당황하지 말고,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여호와 네 하나님 께서 너희화 함께 가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과 싸우고 너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신 20:3-4)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언급하는 말씀이 두려워하거나 떨지 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를 피난처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피난처이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그치게 하는 분이라고 말한다(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아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신다.”(11) 라고 말한다.여호와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전쟁을 막고 그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만이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갈 생각 말고 하나님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해야 한다. 오늘날의 전쟁은 도망간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 피난 갈 생각을 해야 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이라고 부른다. 만군이란 큰 군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늘에 천군이 있고, 지상에는 지상군이 있다. 지상군은 상비군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이든지 누구든지 그의 군대로 불러 쓰실 수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은 상비군을 두어 상비군을 지휘할 수 있는 왕을 달라고 했다. 하나님은 왕을 주셨다. 그러나 왕과 그의 상비군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아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기자는 91:9-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네가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희 거처로 삼았으므로, 불행이 너를 덮치지 못하고, 재앙이 네 장막에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너의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또한 48:14절에는 “참으로 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라는 말로 자연 재앙과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9
    2020년 새해가 되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한 단락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본문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생에는 결산의 날이 있다는 것과 그 결산을 대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이다. 이 비유에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두 종류의 종들이 등장한다. 착하고 충성된 두 사람의 종과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한 사람의 종이다. 주인은 외국에 여행을 떠나며 이 종들을 불러 가각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 한 참고서에 보면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한 노동자의 20년에 해당하는 품삯이라고 했다. 주인은 이 돈을 그의 종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하지 않았다.옛날에는 종은 주인의 소유였다. 따라서 종의 가진 사사로운 물건이나 재산도 다 주인의 것이었다. 종의 아내나 자식들도 다 주인의 것이었다. 종이 죄를 지어 집에서 쫓겨날 때는 그가 소유였던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내나 자식도 남겨 두고 홀로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종이란 자기 죄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소유는 아니다. 맡겨 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다같이 일률적으로 똑같은 금액을 주지 않았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었다고 했다(, each according to their ability). 주인은 종들의 입장에 볼 때 결코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었다고 했다. 돈을 나누어 주는 주인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혹은 그의 종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돈을 준 것이 아니었다. 이윤을 남긴 두 종은 주인이 그 돈을 자기들에게 “맡기셨다”(20, 22)고 말하고, 주인도 그 돈을 땅에 묻어 둔 자에게 “내 돈”을 이자놀이 하는 자에게 맡겼어야 했다고 말한다(27). 주인은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주었지만 그 돈은 여전히 주인의 소유였다.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 줄 때, 구체적으로 그 돈으로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지만 주인은 주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고,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 분명 아무런 뜻 없이 준 것이 아니었다. 돈을 받은 종들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의 반응은 같다. 이들은 “즉시” 나가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즉시”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계산을 해보거나 저울질을 하지도 않고, 손에 돈을 받자마다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평소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주인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주인에게 유익하게 되고,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시키고 명령하지 않아도 주인을 위한 일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손발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즉시”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이들은 이 일을 기쁨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들과 너무나 다르다. 그는 주인이 준 돈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는다. 고민이 생긴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장사를 한다고 하드라도 반드시 이익을 남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그에 따르는 보장이 생각나지 않은 것 같다. 그 경우에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다. 그가 생각한 주인은 엄한 분이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데서 모으는 자, 말하자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이다. 어쩌면 피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 깍쟁이요 구두쇠이며, 냉혈한이다. 이러한 주인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소한 본전은 까먹어서는 안 된다고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 돈을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땅 속에 묻어두자는 것이다. 그의 지혜는 거기까지였다.여러 해 후에 주인이 돌아왔다. 19절에 보면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계산을 하였다.”고 했다. 계산의 주체가 주인이다. 종들이 먼저 주인에게 나와서 “주인님, 제가 그동안 사업을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보고 한 것이 아니다. 주인이 앞장서서 주도적으로 이들의 실적 보고를 받은 것이다. 자기 돈을 남에게 맡기고 그것을 점검하거나 결산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산은 주인의 권리요, 의무이며, 사명이다. 결산을 하지 않는 주인은 주인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나와서 그들이 받은 돈으로 갑절의 이익을 남겼다고 보고 했다. 주인은 이들에게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게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내가 네게 많은 것을 맡길 것이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21,23). 여기서 주인은 칭찬과 더불어 상급을 준다. 주인은 이들이 착하고 충성되다고 칭찬한다. 성경에서 “착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하나님의 창조활동이나 치유활동에 있어서 “살리는 것을 선하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시면서 “선한 일”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3:4). 선을 행한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창조하고 살리는 일이다. 특히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데 좋았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토브”()를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살리는 일이야 말로 아름답고, 선하시고, 기쁜 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하인들도 각각 주인이 맡긴 돈으로 원금의 배를 남겼는데 주인은 이들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한다. “충성되다”는 말은 변함없이 꾸준하다는 의미이다. 오락가락하거나 중단하기를 거듭하지 않고 꾸준하게 한 길을 가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다.주인은 이윤을 남긴 이 둘을 향하여 이들이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앞으로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 주인은 분명 앞으로 많은 일군이 필요한 사명을 띠고 돌아왔음을 암시하며, 이를 위하여 앞으로 그가 함께 일할 인물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종들은 주인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충성했겠지만 이들은 앞으로 주인이 믿고 쓸 수 있는 더 큰 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은 이들에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고 말한다. 그 주인이 여는 파티에 초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그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개의 종이 감히 주인의 파티에 초대되어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주인의 인정을 받고, 주인과 함께 앉아,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돈이나 건강이나 자녀나 사회적 지위보다 더 귀한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종에게 주인의 반응은 차겁고 준엄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다(26), 그리고 30절에는 “무익한 종”이라고 명명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대조적으로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그에게 노를 발한 것은 그가 그를 악평한 것에 대한 되치기라기보다는 종의 생각대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첫째로 주인은 종이 자기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종의 주인이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곳에서 모으는 사람으로 알았더라면 그는 자기의 돈을 이자놀이 하는 자들에게 맡겨 그 이자라도 받을 수 있게 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한 일 이 없다. 그의 생각이 악하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 게으른 자이고, 손해를 끼쳤으니 그는 무익한 자이다. 주인은 그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고 그를 바같 어두운 곳에 내쫓아 내어 거기서 이를 갈며 통곡하게 하라고 명한다. 주인의 말대로 가진 자는 더 풍성하게 되었지만 갖지 못한 자는 그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었다. 종의 신분도 빼앗겼다.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입성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며 주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처럼 그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이후 재림까지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다. 그동안 제자들은 종들처럼 주께서 주신 복음을 가지고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첫째, 예수님의 재림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주신 능력대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셋째는 다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성과에 대한 결산을 하시고 상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특히 열심히 일하여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주시고, 헛생각하며 게으름 피우다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적극적으로 주인의 유익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이다. 선함과 충성된 자는 주인에게 이익을 남긴 자이다. 주인은 이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다. 앞으로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맡기시겠다는 것이고, 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주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격의 없는 관계성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이다. 주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그의 생각에 구두쇠요 냉혈한인 주인의 횡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자이다. 종은 주인 생각을 먼저하고, 주인의 유익을 위해 지혜를 짜야지,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유익을 위한 꾀를 짜내기에만 골몰하면 안 된다. 그는 결국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 되어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는 본전을 까먹더라도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손발을 움직였어야 했다. 손해에 대한 변상의 문제는 주인의 긍휼에 달린 문제이다. 아무것 안 한 것이 문제이다. 악인이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자이다. 결국 그는 그 집에서 추방당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달리 그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며 우는 모습이 처량하다. 2020년 새해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있다. 하나님서 우리가 부르실 때에 우리는 그의 결산대 앞에 나아가 우리가 선악간에 우리가 우리 몸으로 행한 바를 모두 저울에 달아보게 될 것이다(히 9:27; 고후 5:10).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1-1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8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는데, 팔이 무거워지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와 모세를 앉게 하고, 자신들이 모세의 양팔을 떠받쳤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모세가 아론과 훌의 부축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결국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본문에서 모세가 기도했다는 말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가 왜 손을 들고 서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 산을 향하여 광야 길을 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하는 기적을 통하여 이집트 군대가 더 이상 추격할 수도 없고, 이스라엘도 이집트 되돌아 갈 수 없도록 완전하게 과거와 차단을 시키셨다. 이스라엘은 이제 해방되어 자유민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당장 먹고 살아야 문제가 있었고, 점차 그들이 거주할 땅이 필요했고, 새로운 정착지에 사는 동안 그들을 외적으로부터 지켜 보호해줄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이들과 언약을 맺어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들의 이러한 민생문제도 해결해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과 언약을 맺기 위해서는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언약의 주로서의 능력을 보여 주셔야 했다. 따라서 홍해로부터 출발하여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출애굽으로부터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기까지의 여정은 언약을 맺기 위한 준비 기간이며, 여호와의 자기소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한 피차 상대방의 선택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 기간에 이스라엘에게 마라(15:22-27)와 르비딤에서는 물을 공급해주시고(17:1-7), 만나와 메추라기로 식량을 주시고(16:1-36), 이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싸우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17:8-16). 말하자면 아말렉 사건은 이러한 배경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손석태『출애굽기강의』(서울:ESP, 2005), 118-122).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나오게 한 물로 그들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 동안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다. 아말렉은 그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창세기 14:7에 처음 언급되고 있다. 엘람왕 그돌라오멜이 소돔과 고모라를 칠 때에 가데스로 가서 아말렉 사람의 모든 들판을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36:12에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아주었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들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들은 에서의 후손들이다.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 그의 쌍둥이 형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사들을 모집하여 출전하도록 지시하고 자기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게 하고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붙잡았다. 해가 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들을 칼로 쳐서 무찔렀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 일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들려주어라. 내가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겠다”(14)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의 기(깃발)”라고 부르고,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 맹세하시기를 대대로 여호와께서 싸우시겠다고 하셨다”라고 하였다(16).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 처음으로 치른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한 전쟁이 아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하였지만 그 배후에는 여호와가 계셨다. 여호와께서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리거나 눈에 보이는 어떤 이적을 보이신 것은 없다. 그러나 모세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참여하고 계심을 이스라엘이 보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후에야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이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확인시키며, 그날의 전투를 책에 기록하여 역사에 남게 하라고 지시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여호와 자신이 대대로 아말렉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하신다. 이 전쟁은 출애굽 때 여호와께서 이집트의 바로와 싸우실 때와 유사점이 많다. 여호와께서는 이때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출 7:4; 12:7,41)이라고 부르시고, 모세를 앞장세워 바로와 그의 신들과 싸우고 심판하시며(출 12:12), 재앙을 퍼부으셨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쓰신 무기가 바로 10 재앙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를 가르라고 명하신다(14:16). 모세가 “그의 손을 내미니 여호와께서 큰 돌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셔서 바다가 마르고 물이 갈라졌다.”(21)고 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을 위해서 싸우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축제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는 용사이시며,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이시다. 그분이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가 택한 장교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은 곳에 내려갔다.”(출 15:3-5)고 노래한다. “용사”()라는 말은 전쟁에 능한 장수를 일컫는 말이다. 여호와를 그들을 위해서 싸우신 용사로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나 홍해를 건너는 작전은 다같이 “여호와의 전쟁”(YHWH’s War, 혹은 Holy War)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친히 전투에 앞장서 그의 백성들을 승리로 이끄시는 전쟁으로 이때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직접 싸우지는 않는다. 다만 전쟁이 끝나갈 때, 전리품을 거두는 일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수아가 야전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에 앞장서서 싸웠을지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분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명심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아말렉과의 전쟁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 광야의 행진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시고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는 언약을 맺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 됨을 알리고 체험토록 한 사건들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계속하여 아말렉에 대한 이름을 하늘 아래서 없애버리겠다고 선언하시며(14), 나아가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하셨다. 그래서 모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와의 기,” 곧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의미로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면 신상을 대신하여 여호와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가게 될 것이다. 이후 여호와께서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바밸론을 포로로 잡혀간 중간사 시대에 유대인 에스더와 아말렉 족속 하만과의 목숨을 건 갈등 대결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에스더가 승리하고 아말렉 후손인 하만 망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대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방패가 되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용사가 되셨다.이상을 살펴볼 때,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의 전쟁에서 모세의 역할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알리고 보여주는 표적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신적 전사(The Divine Warrior)로서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돕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1-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7
    이사야는 그가 살던 세상을 “사람들이 그 땅을 바라보면 어둠과 고통뿐이며 빛도 그 구름으로 인해 어두워 질 것이다.”(사 5:30)라고 기술하고 있다. 전운이 온통 팔레스타인에 뒤덮고 있어서 왕 아하스를 비롯하며 온 유다 백성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어 그를 안심시키시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믿으라고 명하신다. 그 증거로 하나님은 처녀가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일컫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사야 1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처녀가 낳을 아이가 어떤 분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알려주신다. 이스라엘에게는 소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안심을 시키고 격려를 하신 것이다.본문은 11:1-5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아기의 정체와 그의 할 일, 6-10절은 그 아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새 세상의 모습, 11-16절은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한 남북의 이스라엘은 동족끼리 싸우다가 결국 망하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다시 불러 모아 서로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이루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절은 10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을 수미상관법을 사용하여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을 강조하고 특히 1절을 더 부연, 확장하여 설명하고 있다.이사야는 여기서 처녀가 낳을 아들, 임마누엘을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그 뿌리에서 나온 한 가지라는 비유로 말씀하신다(사 11:10).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이새의 뿌리라함은 다윗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왕조가 영원토록 이어가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삼하 7장). 다윗의 후손 가운데 임마누엘을 주신다는 것이다.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농부에, 자신을 포도나무에,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면(요 15장) 여기서 말하는 나무나 뿌리에 난 싹은 분명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 임마누엘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어떤 영인가? 지혜와 분별의 영, 권면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셔서 공의와 공평과 성실로 세상을 다스리고 재판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리고 재판하는 지도자, 왕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력, 전략과 전력, 지식과 겸손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두 번째의 권면과 능력이라는 말은 설명이 필요하다. “권면”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모사”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한국어의 모사는 간신들이나 반역자들이 꾸미는 음모를 의미하는 말같이 그 용도가 본문에 적절하지 않다. 히브리어 “에차”라는 말은 충고(advice), 상담(counsel), 계획(plan), 목적(purpose)이라는 뜻이 있다. “에차” 다음에 “그볼라”, 곧 “힘”(power), 그 파생어로 군대의 “장수”(기볼)라는 말과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이 말은 주로 전쟁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전쟁에서 작전을 짜고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기획, 곧 전략을 의미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힘, 곧 전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백성을 위하여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한 아기 위에 함께 하는 영은 작전과 전력을 가진 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의 왕 베가가 아무리 좋은 작전을 짜고,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전투력을 동원하여 유다왕 아하스를 침공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계획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전략과 전력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략은 꼭 전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 세상의 역사를 기획하시고,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섭리하시며, 그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우리 인생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세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이새의 뿌리에서 난 그분에게 전략과 전력, 창조와 섭리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 인생을 기획하시고 인도하시는(control) 분이라는 것이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아기, 임마누엘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력, 전략과 전력, 그리고 지식과 겸손의 영이 함께 하시는 분이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왕이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말처럼 “오만한 자”이다. 지식이 없이 오만한 왕은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게 한다. 그런데 이사야 9장 6절에는 이 한 아기를 가리켜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전략가 혹은 섭리자)라, 전능한 하나님이시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새의 뿌리에서 낳은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며, 아버지이시고,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한 아기로 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왕, 곧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9절에 보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가 함께 살고 누우며, 어린 아이가 이들을 이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이 말씀은 꼭 이대로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비유이다. 여기에 나열된 짐승들은 다 만나면 잡아먹어야 하고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적대감을 가진 약육강식의 원수들이다. 살기 위해서 먹고, 먹히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지만 먹히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임마누엘이 오시는 그날에는, 모든 생물들이 그들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다 버리고 한데 어울려 산다는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먹고 먹히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싸우지 않고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때 어린 아이가 이 야생 포식자들과 이들의 먹이감과 같은 존재들을 이끈다고 했다(6). 어린 아이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10절에는 이때에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 곧 임마누엘이 만민들의 깃발이 되고, 열방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와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는 곧 “열방들의 안식처”가 될 것이며 그곳이 영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전장터에서 병사들은 앞에 나가는 대장의 깃발을 보고 따라간다. 임마누엘이 깃발이 되어 그를 표적 삼아 따르며, 그가 있는 곳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아기, 임마누엘은 하나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의 자연 만물과 세상에서 억압받고 상처받은 인생들에게 안식과 평화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 특히 이 한 아기가 깃발로 선다는 모습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놋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십자가에 들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만민들의 깃발”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세상 만민들이 전략과 전력의 영이신 예수께서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 왕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깃발아래 모여들 때, 이 세상에 참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야 말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평화를 원하는 자, 안식을 찾는 자, 말씀을 구하는 자들이 열방에서 다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 바로 그 깃발아래 모여들 때, 이 세상은 참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임마누엘이 열방의 깃발로 서는 날 세상 사람들은 이 깃발을 향하여 모여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모으실 것이다. 특히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고 동족상쟁의 남북전쟁을 일삼다가 다같이 멸망하여, 세상의 떠돌이 신세가 된 이스라엘 백성도 임마누엘 깃발아래 모여 지난날의 모든 적대감과 질투심과 증오심을 버리고, 다시 출애굽 때와 같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남북 이스라엘이 이제는 임마누엘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통일이 “임마누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하스는 이것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시리아에 찾아가 조공을 바치고 스스로 분봉왕이 되어 원군을 청함으로 잠시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유다는 바로 그 아시리아의 뒤를 이은 바빌로니아에게 망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은 처녀가 어린 아이를 잉태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굳게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이사야는 한아기, 임마누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섭리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그의 통치력은 확대되고,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사 9:6-7).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이 세우시는 임마누엘의 나라,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정세와 남북한의 대치 상황,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총체적인 불안정이 아하스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두렵게 한다. 온 세상이 온통 아하스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어둠과 불안으로 싸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있다. 하나님은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control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고, 우리 인생을 심판하고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살리고, 멸망에 처한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분이시다. 궁극적으로 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과 함께 하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그분이 바로 한 아기, 임마누엘이다. 그분이 우리의 깃발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2-2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6
    한국의 교회들은 대개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전후에 성례식을 거행한다. 특히 성만찬을 베푸는 일을 한다. 거룩한 성만찬에 참예하기 위하여 집례자들은 물론 성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주님께서 주신 그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에 대해서 그 의미를 잘 아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성만찬에 참여하며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만찬이 예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곧 유월절 밤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제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식후에는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이 말씀대로 성찬 예식은 주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주님의 부활과 재림을 고대하며, 주님의 재림 때까지 행해야 할 제자들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식이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께서 왜 죽으셨는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례에 참예할 때마다 그의 우리를 위한 대속 사역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우리에게 주신 무거운 사명감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예수께서는 그의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그 빵을 “너희를 위한 몸”이라고 칭하셨고, 포도주를 가리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그를 왕으로 삼고자 찾아온 무리들에게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요 6:51)고 말씀하셨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3-55)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한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요한 6:68-69)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가 바로 “말씀”이라는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찬 석상에서 주시는 빵과 포도주가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무리들에게 주신 그의 살과 피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 예수님의 살과 피,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인 말씀이었다(요한 1:1, 14). 그 말씀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필요한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왜 주시는 것인가? 요한복음 6장 56절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온전한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바로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신비한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말씀은 성령과 비분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예수님과 연합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만찬은 우리 제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고, 또한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서 함께 먹고 마심으로 우리가 한 몸이고, 한 지체가 됨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개개인이 한 몸 받고, 한 피 받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고, 자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연합의 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신비한 몸을 이루는 자리임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즐거워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식사 자리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떡을 떼시며 그것을 그의 몸이라고 칭하셨고, 포도주를 가리켜 흘리는 그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찢겨지는 그의 몸을 마치 떡덩이가 찢겨지는 모습으로 비유하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피를 붉은 포도주에 비유하신 것이다. 그의 살과 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포도주를 주시며 계속하여 “너희 모두 이것을 마셔라. 이것은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속죄를 위한 언약의 피라는 것이다. 여기서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개인이, 많은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서,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이 죄인이며, 그들의 죄 용서를 위해서, 자신의 피, 곧 자신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맺는 이 언약은 예수께서 유월절 전날 밤에 제자들과 나누는 새 언약의 성만찬에 대한 모형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그것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속죄의 피”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것은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고 부활하심으로 아담의 죄 값을 치르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죄인들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죄인들이 이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새 아담의 모든 요구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을 대신한 모든 신분과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새로운 왕이요, 새언약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피조물이 그의 발아래 놓이고, 그의 새언약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 새 언약을 주실 것을 미리서 예고하셨다(렘 31:31-34).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속역사의 모형으로 쓰시고자 선택한 백성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베드로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새 언약의 우두머리로 우리의 왕이 되심과 그의 피의 피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 예수께서 대속적인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와 연대성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왕이 되고, 제사장이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예식으로 비유했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 안에 들어간 우리도 새 언약의 주이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도 이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새 언약을 기리는 언약식사인 것이다. 우리는 그가 주신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새 언약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의 헌신과 사랑을 찬양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는 축제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주홍같이 붉은 죄를 씻어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그의 백성으로 받아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의 죽음 앞에 거룩하고 엄숙해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언약축제(Covenantal Festival)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예식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 언약의 백성이 됨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성찬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만찬은 예수께서 주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전파해야 할 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확립되고, 더 이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 이웃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고, 헌신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2-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6
    종교개혁기념 주간이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31일 비텐버그 교회의 담벼락에 면죄부의 타당성에 대한 95개항의 신학적 토론을 제의하는 대자보를 붙인 날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교회 개혁의 물결이 온 세상을 덮치게 되었고, 개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처럼 개혁을 외치는 나라는 없을 것이고, 또한 아무리 외쳐도 개혁이 안 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부분에도 개혁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가 없는, 총체적인 개혁이 요구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처럼 부담스러운 말이 없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개혁을 외치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말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종교는 사회의 양심이다. 따라서 사회가 개혁되려면 먼저 종교, 특히 기독교부터 개혁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썩으면 사회가 썩는다. 전 세계의 문화 문명은 기독교의 사상과 철학, 윤리와 도덕의 기초와 틀 위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 구실을 못하면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게 되며, 기독교가 무너지고, 그 틀이 깨어지면 세계는 붕궤되고 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본질상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며 인류의 갈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주장이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must always be reformed). 이 주장은 1674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의 야곱 반 로덴스타인이 처음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는 개혁된 상태로만 항상 있어도 안 되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가 개혁이라는 말을 마치 이미 완성된 개혁을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시초부터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완의 종교개혁”을 마치 “완성된 종교개혁”처럼 생각하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것이다.종교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론을 주창하였다. 카톨릭의 제사제도가 성경적이 아님을 밝혀내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고 주장했다. 위대한 발견이요, 교회를 개혁하는 핵심적 기치가 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가졌던 제사장직은 아담의 타락으로 그 본래적 기능을 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대신한 언약적 연대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그와 함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간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제사장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이다”라고 가르치며(벧전 1:9), 요한도 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곧 그분의 아버지를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가르친다(1:6; 5:10). 그러나 에던 동산의 아담은 제사장직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왕직도 있었고 선지자직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사람을 그를 대신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왕으로서의 사명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지자적 직분도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그 말씀을 해석해 주고, 그 말씀을 적용하여 순종하며 살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는 것이 왕으로서의 하는 일이라면, 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바르게 대언하고,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선지자로서의 일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바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그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왕이요, 새로운 선지자로 오시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한 왕,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한 선지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주중의 주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가르치셨다. 세상나라의 왕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착취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들은 낮아져서 백성을 섬기는 왕이 되라는 것이었다(막 10:45).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버리고, 세상 나라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양떼들을 짓밟고, 핍박하고, 착취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속의 권세를 탐하며,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류를 따라가기에 바쁘신 몸이 되어, 종교개혁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여전히 미완의 개혁이고 계속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선지자로서 직분은 종교 개혁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을 입으로 잠간 언급했을 뿐 별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직분과 더불어 “만인 선지자”라는 직분도 있어야 하는 데 만인 선지자라는 말은 낯설기만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다스려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한 선지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아담의 실패를 바로잡는 대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노아의 후손, 아브라함을 불러 그를 선택하신 목적을 밝히시며 그의 후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는 선지자적 사명을 맡기신다(창 18:18-19). 그리고 그를 성경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선지자”로 부르신다(창 19:7).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70인의 장로들을 선택하여 이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영을 주어 예언하게 하신 것도 400년 동안 바로의 노예로 살면서 몸에 배인 노예근성을 뽑아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는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며, 이때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민 11:29)는 원대한 세계적인 뜻을 밝히신다.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종말의 뜻이다. 만인이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하나님을 알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새 언약을 주신다(렘 31: 31-34). 요엘에게도 종말에 모든 백성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시어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요엘 2:28-29). 결국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대선지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직접 말씀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다 (막 1:38).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처럼 그의 영을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로 인치시고, 전 세계의 선지자로 내 보내셨다(마 28:16-20).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선지자 예수님처럼 선지자로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나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적고 있다(막16:15). 만인을 선지자로 세워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전쟁이 없고, 원수 맺는 것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사 11:1-9). 그래서 종교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인 제사장” 뿐만 아니라 “만인 선지자”가 되게 하여 만인의 가슴 속에 말씀 새기는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500년 동안 교회는 이신칭의, 만인 구원, 만인 제사장 등의 구호에 매달려 정작 만인 선지자의 하나님의 비전은 강조하지 못하였다. 미완의 종교개혁을 붙들고 교회 개혁만 부르짖은 셈이다. 물론 칼빈이나 투터, 쯔잉글리 같은 분들은 당대에 선지자로서의 성경해석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종교개혁의 이론을 정립시킨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또한 이들의 선지자적 활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만인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 사명을 교회에 정착하게 하지는 못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평신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해왔다. 그러나 누구든지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선지자로서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대선지자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명령이다.물세례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세우는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의식이다. 물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 대선지자 그리스도와 함께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하고,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말씀을 바로 적용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선지자적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받고, 선지자로서 인치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다. 기독교의 종교개혁은 이제 “만인 선지자”의 기치를 들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곳에 성령은 역사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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