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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한국교회 목회자 자존감 회복 방향’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발표회에서 이윤호 목사가 발제한 ‘나는 소형교회 목회의 어려움을 이렇게 극복했다’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첫째,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국민일보 2017.10.21.일자 신문에 “한 해 문 닫는 교회 수 3000, 실패하는 원인 10가지” 라는 기사가 있다. 평신도 사역전문가가 말한 10가지는 다음과 같다.1.뚜렷한 목회전략 없이 개척 2.주님보다 사람에 의지하는 타성 3.교만한 일꾼 세움 4.헌금의 사유화 5.능력을 과신함 6.말로 상처를 줌 7.변질된 목회 동기 8.잘못된 친교 9.수평 전도 10.설교를 잘한다는 착각 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기사를 읽으면서 실패하는 원인이 목사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목사가 된 것일까? 목사는 누구이고, 목회는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정체성문제를 이길 수 있었다.한동안 교회들이 활발하게 진행했던 노인대학이나 노인교실들도 이제 복지관, 문화센터에 어르신들을 다 빼앗겼다. 고령화 시대를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고 이러한 기회를 잡으려는 시도들이 의식 있는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왜 그럴까? 첫째, 정보의 부족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둘째, 실버세대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연령을 고려한 사역을 준비해야 한다, 한아름교회를 개척하면서 먼저 실버목회를 왜 해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질문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어떤 사역에 어떻게 집중하시기를 원하실까? 이에 대한 결론은 한마디로 “오직영혼구원” 이었다. 내 생각, 내 철학, 내 비전, 내 가치관, 내 욕심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만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오직영혼구원’이 목회의 뿌리이며 기본이고 핵심이다 생각하니 이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실버목회였다. 영혼구원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세대가 실버세대이다. 주일학교는 중요하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반드시 세워야한다, 동시에 실버세대는 시급하다, 발등의 불이다. 그들이 기력이 더 쇠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더 이상 어르신들을 외면하지 말라!”둘째, 경제적인 문제개척을 시작하면서 매월 받는 사례는 없고 사택은 아내와 4명의 자녀, 총 6명의 가족이 생활하기에 비좁았다. 교회는 매월 임대료를 부담해야 되고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시작당시 매주 1만원 정도였다. 교회 임대료와 사역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고, 후원자들을 찾아야 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주중에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처음으로 일한 곳은 시각장애인들의 예배를 위해 매주 월요일 차량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받은 수입으로 가족들 주일헌금과 십일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7년 5월부터는 이웃교회에서 운영하는 주간보호센터의 차량운행을 하고 있다. 오전 오후 2시간씩 운행을 하면서 받은 월급은 교회와 사역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노회와 교회, 개인들에게 사역편지를 보내고 후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다행히 2015년 가을 노회 이후 노회와 몇 교회 후원으로 교회 임대료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었다. 실버처치를 하면서 매주 사랑의 쌀 1Kg씩을 포장해서 나누어 드렸다. 개척초기에는 매주 20kg의 쌀 2포대 정도였지만 1년이 지나면서 3포대로 늘어나고, 2018년 겨울부터는 매주 20kg짜리가 5포대씩 나가고 있다. 개척 3년부터는 서울의 노숙자 기관에서 매월 20포씩의 쌀을 후원받아서 6개월 정도는 나눔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2019년부터는 정부의 쌀값 인상과 후원기관의 어려움으로 더 이상 후원을 받지 못하고 교회와 개인 후원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셋째, 일꾼이 없는 문제실버처치를 매주 금요일 오후 2:00에 시작을 하였다. 매주 유인물과 간식을 준비하고 쌀을 포장하여야 한다. 처음에 20-30명 오실 때는 혼자서도 이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대 입소문이 나면서 30명, 50명, 70명 100명까지 이어지면서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다행히 자녀들이 장성하여 군대 재대후 복학 전에 도움을 주었고 사역을 위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것이다.치매 친화적교회를 생각하면서 <올리사랑바이블센터> 안에 올리사랑봉사단 활동을 한다. 어르신들이 한 달에 한번 만두를 만들어서 이웃과 기관에 봉사하며 나누는 활동이다. 매월 1회 수요일에 만두를 500개정도 만들고 있다. 주민센터, 경찰서, 소방서, 장애인시설, 미화원등 다양한 봉사도 함께 하고 있다.<한아름 섬김프로젝트>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을 받았기에 목회자를 돕는 방법이 없을까? 기도하던 중 <종려가지> 한치호 목사님께서 도서를 후원해 주어서 안양노회(통합) 안에 있는 작은교회에서 부정기적으로 도서 1권씩을 보내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해피시네마>를 통해 영화 1편씩을 감상을 합니다. 70-80년대 영화를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치매예방을 도우며 전도하고 있다.주일예배에는 예배반주를 딸이 하였지만 이제 성장하여 다른 교회 예배반주자로 섬기고 있고 막내가 피아노를 배워서 예배반주를 돕고 있지만 대부분 반주는 반주기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 식당은 아내가 감당해 준 덕에 해결이 되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주일 예배에 평균 18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다.소형교회에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목회자 부부와 자녀들이 하다보니 함께 동역할 일군이 절실히 필요하다.넷째, 예배 공간의 열악함개척자들마다 형편이 각기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50평의 공간에 반은 교회 반은 사택으로 하여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예배 공간이 협소하다보니 의자는 30개정도를 놓았다. 교육관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하였다. 예배 때마다 문제는 화장실이다. 사택 쪽에 화장실이 있다 보니 어르신들이 사택으로 와서 이용해야 했고, 주일 식사도 사택 식당을 이용하여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택과 예배 공간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매주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어르신들의 수가 늘어났다. 매주 금요일 실버처치에 처음에는 30여명에서 1년 후에 50여명, 2018년 10월부터는 100여명까지 오시는 것이다. 예배공간이 더 이상 수용을 못하니 3층 계단까지 서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 예배공간을 주옵소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12월초에 같은 건물 4층을 임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재정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목회자나 교회를 통해 은행권에서 대출이 어려웠고 여러 가지 방법을 놓고 기도하고 있을 때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통해 임대(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와 예배당수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4층을 임대하고 교회수리를 위해 4일 동안 예배당 리모델링을 하고 매주 금요일 실버처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배공간에는 보조의자를 놓아서 80여명이 앉을 수 있게 되었고 목양실과 교회 창고, 식당을 구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아직도 계단에 서 계시는 어르신들도 있지만 화장실은 편안한 가운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다섯째,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개척초기 좋은 의도요 사랑이 담긴 동기에서 묻는 것이겠지만 개척교회 목사의 입장에서 교회의 상황과 처지에 대해 자꾸만 묻는 분들을 만나면 곤혹스러웠다. 특히 실버처치를 한다고 했을 때 돈으로 연결하는 모습에 심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고령화 시대에 실버처치 참 좋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냉랭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이 시대 시니어목회, 치매친화적교회를 세워야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와 사역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이제는 앞서가는 준비된 목회라라는 반응을 듣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신문들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었고(기독교연합신문, 기독공보, 가스펠투데이, 2018년 교회성장12월호), 매일 올리는 SNS 글을 보고 후원하며 기도 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또한 CTS 7000미라클 (2019.5 https://youtu.be/4pK4p43VV0E) 에서 자세하게 소개를 하여주어서 사역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기도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2-20
  • 학술/ 시대의 위기 속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3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제8회 전 회원교육’에서 정일웅 목사가 발제한 ‘현 시대 속 목회자의 나라사랑’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저는 개인적으로 현 정부와 우리 대통령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공산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정치체제의 이념실험(1919년-1990년)은 벌써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실패한 작품이며, 폐기처분 된 것이 언제인데, 이제는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그 실패한 이념을 또 실험하려고 선동하고 용납하려는 그 어리석음의 행동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의 나라들은 일찍이 공산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정치이념이 개인의 자유를 전제하지 않는 정치상황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줄곧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이념체제를 분명히 전제한 가운데, 자본주의가 초래하게 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접목하여, 동독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서독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북한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이란 주체사상의 망상에 사로잡혀 위장된 평화와 통일의 주장을 당장 중단하고,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미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국가체제의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주의체제와 헌법을 존중하는 전제하에, 서유럽의 나라들에서 성공한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정당의 허용을 실험하는 논의를 이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러한 방식을 조심스럽게 한국정치인들에게 제안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정당정치에서도 기독교사회주의 정당이나, 사회주의 적인 정당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미래정치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견지해 온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를 견고히 전제한 가운데서의 허용을 생각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님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해방이후 지난 74년 동안 겨루었던 남북한의 정치이념의 체제경쟁은 분명히 북한이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핵무기로 더 이상 정권연장을 꾀하지 말고, 동독처럼 솔직히 우리 대한민국에 북한정부를 자발적으로 넘겨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며, 만일 더 유지하겠다면, 또 다시 백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성급한 남북통일을 기대하지 말고 지금부터 인도적 차원에서 서로 협력과 경제적인 지원을 통한 교류를 순차적으로 해 나가는 과정을 밟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대통령은 남쪽 대통령이 아니라, 당당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남북관계를 선도해야 하며, 국제관계를 견지해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전광훈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왜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에서 밤을 새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부짖고 있는지를 현 집권당과 대통령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납득할만한 대통령의 솔직한 대답을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국론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분이 대통령이며, 그것을 수습해야 할 분도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또한 지금 돌아가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안들을 직시하며, 이웃사랑과 나라사랑의 공동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고 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그간의 지나친 개인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어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하려고 했던 과오를 인정하고, 여러 교파들로 분열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실수들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일전에 기독언론지에 설교문(칼럼)하나를 또 발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12장41-4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작성했던 것인데, 정확히 말씀드리면, 임우성목사님께서 기독언론지에 게재하겠다고 설교문 하나를 작성해서 보내주시라고 해서 쓴 글입니다. 제목은 “지금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한국교회 성도님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인용했던 성경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에게서 떠났던 악령이 되돌아와 깨끗하게 수리된 집에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집을 온통 지배함으로, 그 사람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 악해지게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단락의 말미에 “이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4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전체사역이 악령(귀신)을 내쫓는 일임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 곳에는 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쫓겨난 악한 영들이 더 많이 들어와서 현재의 상황보다 더 악한 상황을 만들게 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대비하는 유일한 대책은 선한 영들로 그 빈집을 가득 채우게 하는 것이며,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통하여 예수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그 집을 가득 채우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예수의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파하는 일임이어야 함을 깨우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생각하면 바로 3년 전, 한국정치는 그 당시 박대통령을 탄핵하였고, 우리사회에 만연된 정치권력남용의 적폐(불의)가 청산되며, 불의한 법과 제도가 고쳐지는 정치개혁의 과제를 안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하여 ‘기회는 평등하며,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한 공약(의지)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기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나는 지금, 대통령의 공약은 빈공약이 되어가는 듯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그 말은 바로 지금의 이러한 혼란스러운 나라를 말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도 됩니다. 역시 정치인의 레토릭(수사)은 참으로 현혹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그토록 국민의 불신을 받던 법무부장관후보자를 임명한 때였습니다. 매스컴의 연일 보도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족의 불의한 행태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문정부의 인물들이 적폐의 대상임을 국민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후보자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소요는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극을 치닫고 있는 모습이 지난 10월 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행위는 더 심각한 국론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는 참으로 악한 영들에 지배당하는 정황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의 마음에는 우리 문대통령이 또 탄핵당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함께 예수님의 이 본문말씀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악한 세대가 또한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사회가 3년 전에 박근혜정부의 부패와 불의를 비난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했던 일이 또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한국교회는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성도들에 기도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사회의 국론이 분열되지 않고, 우리 대통령이 국민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며, 정치가 화합과 안정을 되찾고, 우리 국민들의 염원인 올바른 사법개혁이 이루어지며, 평등하며 공정하며, 정의로운 사회로 발전되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할 것을 제언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대통령은 참으로 포용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지자만이 아니라, 반대자의 대통령이 되어 남남갈등을 극복하며, 마침내 남북평화통일의 초석을 놓는 일에 크게 기여하는 대통령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기를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적극적인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된 한국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방법입니다. 그간 한국교회가 분열하면서도 연합활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여러 개의 연합체들이 생겨나 있기도 합니다(한기교연, 한기총, 한교연, 한장총, 한장연, 한교총). 그러나 이러한 연합기관들은 저의 소견으로는 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아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에서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개인이 각각 행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전도서 4장11-12절을 인용하면,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아멘!  한국교회가 이와 같이 하나로 연합하여 해야 할 책무는 크게 5섯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전 세계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함께 모여 선교전략과 방법을 협의하여 세워야하며, 둘째, 사회봉사의 역할을 감당하며, 셋째, 이단적인 가르침을 방어하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며, 넷째. 신앙의 가르침을 통일시키며, 다섯째, 대사회, 대정부 및 정치, 대 북한, 대 국제적으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더 크게 미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2-06
  • 학술/ 시대의 위기 속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2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제8회 전 회원교육’에서 정일웅 목사가 발제한 ‘현 시대 속 목회자의 나라사랑’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2. 세상나라의 정치와 권력은 언제나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주목하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회자들은 세상나라의 일들, 특히 정치와 권력사용과 관련하여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대답은 역시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세상나라를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보여주는 성경말씀은 바로 로마서13:1-7절 사이에서 발견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일러줍니다. 그 이유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합니다. 즉 세상정부와 정치와 권력(칼)은 그들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세상나라의 최고 권력자이며, 통치자인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의하여 뽑아 세워지는 민주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역시 권력자는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 자가 통치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를 통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사도바울은 세상정부의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천지만물의 주권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세상정부를 통하여 인간사회의 질서가 지탱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1-2), 그리고 국가의 사법적인 권력(칼)을 통하여 선이 포상을 받으며, 악이 징벌을 받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3-4). 그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입법권과 경찰권과 사법권의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선과 악의 분별을 통한 통치권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은 우리 기독인들이 양심으로 행할 것과, 6절에서 각종세금납부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국가의 다양한 대표자들에 대해, 기독인들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질서의 중요성을 일러줍니다(벧전2:17). 그러나 바울은 이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국가의 통치 권력이 악을 저지르며, 총체적인 불의를 행하는 국가로 전락될 경우에 그 통치자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깊은 신학적인 행동철학의 통찰이 요구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교훈하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은 이해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행했던 일이 바로 병자치유와 특히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전체를 종합하면, 귀신(악령)을 내쫓는 모습으로 요약됩니다(막9:14-29,마8:28-34,마12:22-30). 여기에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정한 악한 영(사탄)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귀신축출사역은 역시 복음전파의 맥락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귀신축출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 즉 예수의 영이 임하는 자리를 내어 주고, 악한 영들이 쫓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또한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기독교(교회)의 복음전파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의 확장이며, 동시에 세상의 악한 영들과 대립하여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을 뜻합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고,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는 환경으로 바꾸는 일이 기독교복음전파의 사명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바울은 벌써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전심갑주를 입으라고 권고하였으며,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엡6:10-13)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예수의 영(성령)에 붙들린 택함 받은 성도들을 모으는 곳일 뿐 아니라, 이 땅에 정의롭고, 공정하며, 평화로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도록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미칠 하나님의 일꾼을 양육하며, 훈련하는 영적전쟁준비의 장소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상정치를 예의주시하며, 특히 그곳에서 악한 영들이 좌지우지하는 환경이 되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복음의 사회적인 책임(빛과 소금의 역할) 때문에 유럽에서는 세속정부에 기독교정당이 생겨나기도 합니다(유럽에서 독일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생각하면 세상의 통치자, 또는 권력자가 기독인이라면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명을 책임 있게 수행할 것입니다(미국의 트럼프대통령처럼). 그러나 비기독인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오늘날 민주화가 이루어진 국가에서는 국민을 위하고, 인권존중과 사회적 약자보호와 사회복지실현을 통한 경제평등과 평화지향의 환경조성에 정치적인 책임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불신자 통치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가치실현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나라사랑은 그런 점에서도 선한 정치가 펼쳐지기를 위하여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주일 공 예배에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교회들은 국회의원과 각 지역의 시장, 구청장, 경찰과 각 주민 센터의 장과 직원, 통반장들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나라사랑이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중요한 방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자들의 모습이 그 반대일 경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통하여 불의한 일과 부당한 정치행위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청와대 앞과 광화문에서 대통령하야운동을 벌써 6개월째 지속하고 있는 광훈목사의 나라사랑 행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전히 질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행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찬반견해가 있는 줄 압니다. 지난 8월경 한 통계는 전광훈목사의 행동에 대한 여론이 반대가 86%, 지지가 14%로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11월의 여론은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지지자의 상승으로). 다만 본 강연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광훈목사가 내건 시국선언과 투쟁에는 중요한 명분이 포함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정되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국가적인 위기에 관한 그의 통찰입니다. 아마도 전목사는 이러한 중요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가치가 대통령과 집권여당에게서 잘 계승되기보다는 허물어지는 위기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그간의 친북성향의 언행에서 의심과 불신을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전목사가 제기한 7가지 대통령정책비판참고). 물론 전광훈목사의 지나친 기우이거나 오해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문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북미회담의 중재자역할에서 보여준 그간의 지나친 친북적인 언행들이 단초가 되었으며(평창동계올림픽 연설에서 6.6현충일 연설에서 김운봉(신영복)을 거론한 일), 더욱이 현 정권의 배후세력으로 회자된 소위 정치권에 등장한 주사파인물들의 활약과 관련하여 결코 단순한 루머로만 넘길 수 없는 근거들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목회자들의 나라사랑은 현 정치시국을 예의주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특별히 문대통령의 정치사상이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얼마나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지가 질문되며, 무엇보다도 이승만정부와 박정희정부로 이어진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체제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며, 오히려 대한민국건국의 역사를 1919년 3.1운동과 1919년 4월11일 상해임시정부수립으로 보려는 대통령의 주장에서 불신이 증대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수년간 전교조들에 의하여 한국역사가 왜곡되어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교육된 좌편향(친북)적인 교육행위들은 결코 한국교회가 외면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대통령이 종교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북한을 너무 쉽게 판단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단순한 민족감정을 앞세워 그토록 회자되고 있는 연방제통일을 정치적으로 고집한다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분명히 이의를 제기하고, 전광훈목사와의 반정부투쟁에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사회의 젊은이들을 충동하던 촛불시위논리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란 정치논리만으로는 엄청난 종교박해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1-22
  • 학술/ 시대의 위기 속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제8회 전 회원교육’에서 정일웅 목사가 발제한 ‘현 시대 속 목회자의 나라사랑’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문제제기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매 주말만 되면, 광화문 사거리에는 “대통령하야”를 외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서초동 검찰청 앞과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친정부를 위한 데모로 야단들입니다. 왜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대통령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너희들 떠들어라, 권력은 내가 쥐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오기로 청와대 안에서 버티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통령 은 그의 취임사에서 참으로 감동을 주는 멋진 말 하지 않았던가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광화문에 나가서 기꺼이 만나 함께 대화하겠다! 역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달라야 하는가봅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지금 이념대립이 극렬해지고 있는 혼란스러운 현 시국상황을 경험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던져진 화두는 “목회자의 나라사랑”에 관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나라사랑의 방법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나라사랑”은 과연 청와대 앞에서 전광훈목사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대통령처럼 가만히 시간이 지나가도록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나라사랑일까요? 곤란한 질문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전광훈목사는 왜 청와대 앞과 광화문광장에서 벌써 약 6개월째 저렇게 “문대통령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합법적으로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을 그렇게 물러가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치는 것이 정당한 행동일까요? 아마도 전목사님은 3년 전 박근혜대통령의 탄핵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됩니다. 그는 비록 한국교회의 한 목회자요, 소위“한기총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것이 과연 목회자의 참된 나라사랑하는 모습인지? 먼저 질문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처음 전광훈목사가 이러한 행동을 시작했을 때(6월), 소위 한국교회의 자칭 원로님들이 기자들 앞에서 전목사의 행동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대통령하야를 외치려면, 목사직 내려놓고, 정치인의 이름으로 행동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고, 그 대표직도 내려놓으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그 기자회견을 보면서, 질문이 생겼습니다. 전목사가 목사직을 내려놓고, 한 정치인으로 행동하라는 비판에는 동감하지만, 그러나 전목사가 지금 제기한 대통령의 정책실패와 국론을 분열시키는 언행과 관련된 7가지를 지적한 대통령을 향한 전목사의 비판은 정당해 보였으며, 그 문제의 당사자인 대통령을 향해서는 한마디도 충언하지 않는 원로님들의 행위가 참으로 아부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목회자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목사이전에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아마도 전목사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여 있다면, 어떤 면으로라도 목회자는 당연히 나라사랑의 의지를 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나라사랑에 관한 표현과 행동은 과연 어떤 것이 좋은지? 이러한 질문에는 역시 신중성이 요망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정교분리원칙”에 관한 올바른 이해요망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치자가 독재를 하거나 잘못해도, 교회는 오직 침묵하고, 조용히 기도나해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교분리”라는 이 원칙이 왜 생겨난 것인지? 그 본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보면, 한국교회가 그간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그것은 교회가 국가(정치)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고 침묵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권력)가 교회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국가는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시된 원칙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광훈목사의 행동은 이러한 원칙을 바로 잡아, 행동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목사는 그가 청와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하면서 그의 행동에 대한 명분을 히틀러 독재정치에 맞서서 외쳤던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친 운전수에게 운전대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인데, 이 말을 내세우면서 전목사님은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대통령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목사를 향하여 우리 모두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문제인대통령이 과연 독일의 독재자였던 히틀러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일인가?” 전목사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비쳐졌는지 모르지만, 국민 다수의 시각에서는 전목사의 지나친 오해가 아닌가? 지금 반박되고 있기도 합니다. 원래 “정교분리”의 원칙은 미국 3대 대통령 제퍼슨이 미국 헌법에 제정한 것인데,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으로 간주된 교회를 정부나, 정치권력이 간섭하여 좌지우지 못하도록 지상의 교회를 정부와 정치적인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교회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로 등장하면서, 황제의 권력이 유럽의 교회를 1000년 이상 지배하고 다스리는 시대가 있었지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루터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분리시켰습니다.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고 통치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아들하나 얻고 싶어서 로마교황청에다 이혼허락을 여러 번 청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수장령을 발표하여 교회위에 국왕이 있다는 소위 주장을 펴고,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면서 국가종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이“앵그리컨 처치”(Anglican Church)라 부르는 우리말 성공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교분리원칙이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식민통치시대를 거치면서, 일제의 정치권력이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일을 방지할 목적으로 정치가 교회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교회(종교)도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교회가 일제의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교회와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르는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조선교회는 지혜로운 선교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부(정치)를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주기철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항거하다가 순교했지만, 1939년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우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후 정교분리원칙은 이승만 대통령 덕분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 명시되었는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이며,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정교분리원칙의 본뜻은 국교를 막자는 것이며, 교회가 국가나, 정부(정치)의 권력남용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교분리원칙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게 그동안 진보교회와 보수교회의 이해가 달랐습니다. 한국의 진보교회 지도자들은 그동안 독재정치권력에 대항하여 민주화투쟁을 주저하지 않았으나, 보수교회지도자들은 일제식민통치시대의 경험을 근거로, 교회가 정치권력의 부패와 독재정치에 아무런 비판을 행하지 않았으며, 그러나 뒤로는 오히려 독재정권에 붙어 이득을 취하면서 지지까지 하는 상반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정치하면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관습에 빠져, 정교분리원칙만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정부를 간섭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력이 교회를 보호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방점이 있으며, 권력을 남용하여 악을 저지르는 정치권력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아니라, 교회의 보호를 위하여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지 않도록 분리를 말하지만, “정교분리원칙은 정치와 종교는 구분되지만, 결코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도 그러하지만, 역시 목사의 직분으로도 정치에 대하여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정한 역할과 공동체(국민)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임을 질 감당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목사의 직분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정치적인 혼란으로 바른 구원의 길을 찾는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된 진리, 구원으로 안내하는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선지자적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가와 종교는 각각의 역할을 가진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사회적인 역할 때문에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닌, 깊은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목회자의 나라사랑에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1-15
  • 학술/ 한복협 10월 월례회 ‘2020년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
    본고는 지난 10월 1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10월 월례회에서 임석순 목사가 발제한 ‘한국교회 미래에 적용할 실제적 목회 패러다임’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측하게 하시는 것은 역사적 소명, 즉 미래에 그들을 사용하시기 위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와 미래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말씀을 통해 찾고,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해 예측하며 어떻게 실천해갈지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1. 한국교회는 어떻게 성장해 왔는가? 1900년대 한국 교회의 기초를 세운 한국 교회 1세대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큰 부흥이 있었고, 많은 기적과 이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 1세대 선배들은 너무도 훌륭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1세대 거목들이 하나, 둘 떠나고 한국교회는 그 분들이 이루어 놓은 서광 위에 교회가 빛을 보았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세대가 광야에서 출생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들은 자신들이 건축하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에서는 큰 성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생활하던 광야 2세대가 가나안에 입성하자마자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들처럼 한국교회의 2세대들도 한국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2.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은 1960년에 5천개의 교회, 6만 명의 성도를 기록했고 40년이 지난 후에는 교회가 6만개, 성도의 수는 9백만으로 늘어났습니다. 40년 만에 어마어마한 급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단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성도의 감소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갤럽 설문 조사에 따르면 2015년도에 한국 국민 중에 종교인이 50%이고 이 중에서 22%가 불교, 21%가 개신교, 7%가 천주교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를 계산하면 2015년도의 종교인은 5천만 국민 중 2500만 명이고 그중에서 21%가 개신교인이라면 개신교인이 약 5백만 명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2000년의 9백만 성도에서 4백만 명이 줄어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9백만이라는 숫자만을 믿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성도들은 이중 삼중 등록교인도 많은 사례를 보면 이 숫자가 가능한 수라고 판단됩니다. 2015년도에 나타난 기독교인 감소율을 근거로 2025년의 한국 교회 성도의 수를 추정하면 300만 명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다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퓨리처 센터에 따르면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성도가 미국 성도의 35%이며 유럽은 69%, 한국은 23-25%라고 합니다. 2025년도에 한국 교회에 그러한 성도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성도는 300만 명보다 현저히 적은 수일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6년 안에 마주할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현재 교회 안의 세대는 이스라엘의 2세대라고 할 수 있지만 분명 6년 이후의 미래세대 대다수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세대와 같을 것입니다. 결코 머지않은 미래가 이토록 심각한 상황인데도 미래세대를 돌보아야 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매우 안일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이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1) 여호와를 잊지 말라.“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6:12).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 바로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자들, 배불리 먹고 사는 세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은 복음을 소유한 자신의 정체성을 알라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교회들이 놀이터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재미로 교회에 나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으면 성도들은 여호와를 잊게 됩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잊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가 세상 것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을 찾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가르침과 목표를 향하여 가야합니다.“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을 수단 삼아 기도하고 찾기도 하지만 반드시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리지 않으면 풍요 속에서 여호와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2) 여호와를 경외하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호와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말라기 3장 16절의 ‘그 때’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 모두가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때입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다 완악해져서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 시대에도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호와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에는 세상보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심을 보이는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세상 것이 없어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고백의 삶을 사는 지도자가 있어야합니다많은 신학적 지식 보다 여호와 한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3) 여호와를 섬기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우리는 반드시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곧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선교의 현장이든 봉사의 현장이든 섬기는 자리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다음세대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고 우리의 공동체와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한국 교회와 미래세대가 맞이할 미래를 대비하는 일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6:13).가나안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과 넘치는 풍요 속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맹세할 만한 이름이 없습니다. 이는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물질로 목회하는 패러다임, 세상의 힘으로 선교하는 패러다임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목회하고 선교하는 패러다임화 되어야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없습니다.(막9.14)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패러다임을 가져야 합니다.5) 오직 하나님만 따르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신6:14).가나안 세대들은 반드시 세상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만을 따르는 순종을 보여줄 때 이 가나안 세대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먼저 보이고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나가는 글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세속화 된 우리의 모습을 매일 회개하는 것은 영적 전쟁터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장하는 방법이며 미래세대를 지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힘을 얻는 그리스도인을 키워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키워가지 않고는 미래세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섬김과 기도 순종의 패러다임으로 교회가 전환되지 않으면 미래목회는 놀이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미래세대 목회는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에 문제가 있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위기 가운데 있으나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질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일어날 때 세상은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키우는데 기도하고 전력한다면 미래세대가 일어날 것입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0-24
  • 학술/ 한복협 9월 월례회 ‘한국교회에 고(告)하는 청년들의 외침’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개최한 9월 월례회 ‘한국교회에 고하는 청년들의 외침’ 중 이창현 국장이 발표한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의 발제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1990년대에 멈춘 한국교회지난 20년간 한국사회 내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에도, 교회는 1990년대 이후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다음세대, 선교, 해외 유명학자 초청, 한국교회의 미래 등 늘 비슷한 주제로 대형 컨퍼런스는 달력행사처럼 돌아온다. 학생들의 교육환경은 나날이 변해감에도 주일학교 침체와 붕괴 우려만 나올 뿐 8,90년대 스타일 집체식 수련회 외에 딱히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명망있는 담임목사 1인의 능력으로 교회 전체를 평가하고, 이 담임목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교회구조는 더 심화되고 있다. 대형교회 성장전략, 개척교회의 몰락, 고령화 추세 속에 젊은 세대가 배제된다는 우려, 신학교가 배출하는 목회자가 많다는 지적, 문화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대중문화의 변화 속도를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 등 1990년대나 지금 2019년이나 한국교회의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40대의 입장에서 굳이 1990년대를 꺼내 드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외형적) 최고점(最高點)에 있었던 이 시기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현 40대는 N97세대로 70년대에 태어났고, 80년대 한국사회 고도성장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90년대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한국교회의 현 체제가 확립되고 외형적 부흥의 열매를 보이고 있을 때, 우리는 10대, 20대를 보냈다. 체계가 잡힌 유년주일학교를 거치고, 청소년 시절 CCM을 듣고 수련회와 문학의 밤을 통해 신앙을 키웠고, CCC, IVF, YWAM 등의 학생선교단체가 양적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때문에 정체 혹은 하락세에 있는 한국교회를 보는 40대의 시선은 복잡하다. 한국교회 최전성기시절을 보내며 계속하여 교회는 전진할 줄 알았고, 우리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더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뒷걸음질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우러러보았던 많은 목회자들이 몰락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여러 대표적 교회가 그 역할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을 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교회가 1990년대에서 멈추어버린 것 같다.한국교회와 40대의 간극 :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90년대에 멈춘 한국교회는 40대의 현실 앞에서 간극을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 교회는 지역에 기반하여 매년 태신자 초청주일 같은 행사를 연다. 분명 좋은 행사이고,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2년 전세 때문에 이사를 반복하거나 아예 경기도 외곽으로 떠밀린 40대의 입장에서는 지역에만 기반한 목회가 다소 아쉽다. 연간 20조 안팎의 사교육비가 지출되는 현실에서 40대에게 자녀교육은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 교회는 자녀교육과 관련한 획기적인 예산편성이나 구조변동에 발걸음이 더디다. 공공부문은 인터넷으로 투명하게 행정공개를 하고 있고, 회사에서는 명확한 지출기준을 가지고 세세한 재정보고를 해야 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주먹구구식 회계보고의 모습을 보인다. 인터넷 댓글, SNS를 통한 자유로운 의사개진이 일상이 되어 있는 40대의 눈에 교회는 공론의 장이 부족하고, 수평적 발언이 금기시되는 곳이다. 특히 40대는 한국사회의 최신 변화에 민감하고 이에 대한 교회의 해답 또는 공동체적 고민을 기대한다. 40대에게 재테크, 부동산 폭등, 비정규직, 이혼, 자녀의 교육격차, 남북통일, 복지문제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 문제는 언급자체가 금기시되거나 설교시간에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의견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삶의 한복판의 문제가 교회에서 괴리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다. 40대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있거나 세상 속에 감당하는 영역이 너무 제한적이다. 한국교회는 2040 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떤 관심이 있는가? 또한 내 의견이 교회에 받아들여질까 의문도 든다. 이미 교회는 단단해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리더십은 고령화되었고, 그 기준에 맞추어 눈도장을 찍어야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 권사가 된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스스로 교회를 세워가며 직분을 받는 것이 영광이었지만 우리세대는 이미 구조화된 교회 속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게다가 40대는 근본적으로 한국교회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파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진다. 내 인생을 걸만큼 교회는 진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주저함 속에 40대는 점점 한국교회에 외치는 것을 꺼린다. 40대가 보는 한국교회는?그럼에도 40대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분석해본다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1)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교회가 제대로 대응 하지 못했다.광복이후 한국사회는 한시도 쉴 틈 없이 변화를 겼어왔다. 그러나 최근 20년의 한국사회는 변화에 있어 그 이전 시대와 약간 결을 달리한다. 87년 체제 성립 이전과 직후까지 ‘경제화’와 ‘민주화’라는 거시적인 담론이 우리사회를 지배해왔다면 지난 20년은 복합적인 여러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경계를 무너뜨렸고, IMF와 구조조정을 거치며 사회는 파편화되었다. 정치경제 거대담론에 우선순위가 밀렸던 가정, 문화, 여성, 교육, 환경 등 다양한 이슈가 등장했다.2002년 한국교회에 뜨거운 감자였던 ‘주5일제’ 논쟁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을 앞두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어떻게 교회가 대응해야 하는지 찬반양론이 붙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일성수 문제에만 매달렸을 뿐 주5일제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함의와 구체적 변화에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때의 논쟁 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사회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방어에 급급하고 내부성장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9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집을 사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여성 대졸자가 늘어나고, IMF로 맞벌이가 보편화되었으며, 가사분담, 워킹맘, 자녀교육, 저출생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변동이 있었다. 세 번의 정권교체, 기업구조조정, IT 산업의 발전으로 개개인의 참여가 증대되고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도 거세다. 특히 10대, 20대를 거치며 한국교회의 정점을 경험하고,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의 극적인 변화를 함께 체험한 현 40대에게 있어서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대응 없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한국교회가 과거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고, 한국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된 긍정적 사실마저도 뒤로하고 개체화된 교회성장에만 매몰되어 간다.(2) 교회 내부가 경직되고, 구조화되었다.사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적인 문제도 있다. 1970년대를 전후로 다양하게 개척되었던 한국교회들은 이제 성장을 넘어 구조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개척교회 시절부터 교회와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헌신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1세대(193~40년대 출생)들은 이제 은퇴하였다. 이후 성장을 맡았던 2세대(1950~60년대 출생)들은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인원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인구고령화 추세 속에 계속하여 주요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2세대의 헌신 또한 존경 받을만 하고, 귀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존경받는 걸출한 2세대 리더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갈 비전도 보이지 않고, 3세대(1970~80년대 출생)는 아직 미약하고 너무 파편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상황 속에 더 큰 문제는 한국교회는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경직되고, 구조화된다는 점이다. 중대형교회는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일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옥상옥(屋上屋)을 만들어가고 있다.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시스템이 완성된 교회는 1세대 개척세대에게는 유연하고 효율적인 구조였겠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틀이 된다. 40대가 교회 안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도 의견 수렴의 창구, 작은 역할이라도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정해진 구조 속에서 사라지기 쉽다.(3) 교회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정면돌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40대 평신도의 눈에 보이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특징은 교회가 정작 교회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일관성 없이 대응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성추문, 교회 세습, 재정 비리, 교회 권력 다툼, 법령 위반 등 여러 사건이 있었고,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일부 사건은 최근 들어 일반 언론에까지 이슈가 되었다. 평일 내내 신문기사, 방송뉴스를 장식하는 교회문제를 접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우리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할까?’ 기다린다. 그러나 교회는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 개교회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 교회 내 분란이 생긴다는 이유로, 아직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침묵한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출석하는 다른 교회에서도 비슷하다. 질문하고 싶다. 교회의 문제를 교회에서도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교회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정작 교회의 문제는 침묵하고 성도 개개인의 삶이나 일반적인 사회문제만 언급하는 설교를 들으며 40대 평신도들은 어떤 삶을 반추하며 살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교회에 기대가 있기에 그 대답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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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9-10-16
  • 학술/‘시국선언(교회와 정치) 논란에 대한 토론회’ 주 발제문
    본고는 지난 7월 2일 한국교회언론회가 주최한 ‘교회와 정치 토론회’에서 임성택 목사가 발제한 ‘정교분리와 교회 정치투쟁의 당위성’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정치투쟁 비판의 문제점얼마 전 한기총 대표 전광훈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함으로 한국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그가 발표한 내용의 진위나 단체와 개인의 정당성을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진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할 것이고, 정당성을 따져 편들면 파당에 끼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고자 하는 것은 전광훈 목사의 언행을 두고 권세에 대해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진 교회의 정치참여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고 하는 악한 시도에 대하여는 끝까지 다투고자 한다.지금까지의 논의로도 부당한 권세를 향한 교회의 선지자적 책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에서부터 최근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벌여온 정치투쟁의 역사는 그야말로 찬란히 빛나는 것이며, 두고두고 평가받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정치투쟁은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며,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간섭받거나 폄훼되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에서의 갈등과 상호 비난이다. 필자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복음에는 좌우(左右)도 없고, 진보도 보수도 없다. 백인의 하나님은 흑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남자의 하나님은 여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가난한 자의 하나님은 여전히 부자의 하나님이며, 권세자의 하나님은 역시 서민의 하나님도 되신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의 하나님은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며, 노동자의 하나님은 사업주의 하나님이시요, 병약한 자와 소외된 자의 하나님은 역시 건강하고 풍성한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그런 하나님을 어느 일방의 하나님으로 가두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소치요 불경이다.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수준 높은 교회정치 사상을 폄훼하고, 스스로 세속정치의 어느 일파가 되어 상대를 정적 개념을 가지고 복음과 교회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있음을 통탄한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세속권세자들을 그의 선하심 앞에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봉하는 세속사상과 자신이 발을 담그고 있는 현실정치의 정파 수장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 명백한 것을 두고도 보수이기 때문에 혹은 진보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편들거나 혹은 비난하며, 성경적이지도 않은 주장을 성경과 신학을 동원하여 옹호하고 있다. 필자는 교회와 지도자들은 어느 정파와 주장에도 상관없이 정권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모든 교회가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일에 세상 정치가들의 썩은 냄새를 진동하게 해서는 안된다.기독교에 비판적이며 동시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유명 인사들은 교회의 허물을 담은 책을 저술하고 일간지에 광고하여 대대적으로 교회에게 망신과 부끄러움을 안기고 있다. 이로서 그는 세상으로부터 타락한 교회를 향한 용감한 개혁의 선봉이요 시대의 선지지라는 명성은 얻을지 몰라도, 주님으로부터는 교회를 팔아 명성을 취한 가장 저주받을 자로 정죄를 받을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고쳐줄 힘이 있는가? 그럴 방법이 있는가? 어쩌면 세상을 고칠 힘을 잃어버린 교회인 까닭에 세상에라도 아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정도의 연약함이라면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논자는 대형교회의 비리와 유명 목회자들의 허물에 대하여 험하게 분노하고 질타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논자의 글과 강연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 교회와 목회자를 세상이 공격한다면, 논자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교회와 목회자를 지킬 것이다. 감히 세상이 교회와 그 종들과 백성들을 허물하거나 정죄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성경 그 어디에도 우리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치료받으라는 말씀은 없다. 심지어 세상 재판장으로도 가지 말라고 했다. 세상에서 최고의 선일지라도 그것 역시 복음 앞에서는 악일뿐이다. 한국교회의 정치투쟁을 위한 제언이번 한기총 전광훈 목사의 대통령 하야 성명으로 인한 파장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역으로 이것이 칼이 되어 세상이 한국교회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교회 지도자들, 특히 명성이 있는 분들은 모든 언행에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몇 년전 모 한기총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무릎 굻리고 안수기도를 한 일이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었다. 이런 보도를 접한 필자는 기겁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불필요한 종교갈등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장로가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안수 기도를 받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기독교인의 대통령인 동시에 다른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이름 없는 자국 서민들에게는 고개를 숙일지라도 고관대작들과 외국 정상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자기를 대통령으로 아는 국민들을 위한 배려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단순한 ‘해상교통사고’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지나친 보상 요구와 정치권의 악용에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 단상에서 공공연히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어린 아이를 차가운 바다 물속에서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과 국민의 공분을 조금이라도 읽어냈다면 절대로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작은 교회 이름 없는 종들은 아무리 소리쳐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대형교회에서 유명목사님 한마디가 전파와 활자를 타는 순간 그야말로 핵폭탄이 되어 우리의 선교현장에 떨어지고, 청년 지식인들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귀 아프도록 들린다는 말이다. 하기야 이런 소리를 들을 귀를 가졌다면 그렇게 말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로 인해 정작 필요한 싸움에서 밀리는 빌미를 제공한다. 지금 우리의 정당한 주장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런 구차한 사건들을 다시 끌어와서 교회와 목회자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대항한다. 그러면 교회는 그 일을 변명하고 논쟁하다가 원래의 취지를 담은 투쟁들은 그냥 묻혀버린다. 지금도 그런 일들은 반복되고 있다.기독당에 대해필자는 발제자로서 본 토론회가 교회와 목회자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위한 자기성토의 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이 나라가 위태한 것은 사실이며, 삼척동자조차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쪽에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와 목회자들은 긴장해야 하고, 따라서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정당한 주장만큼 주장자는 윤리적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묻히고 윤리성만 공격당하기 때문이다. 지금 형국이 그러하다. 더불어 향후 기독교가 이런 난세의 정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2020년 4월 15일에 실시되는 21대 총선을 어떻게 준비하고 기도해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직접 정치를 할 수는 없지만, 정치가들이 바르게 정치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한 기독당의 원내 진입에 대해서도 이제는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필자는 ‘교수직을 걸고’ 기독당의 결성을 반대했고, 또 성공할 수 없으며, 원내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비록 천만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신앙과 정치적 결정을 분명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후보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찍고 정당은 기독당을 찍어달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선거 전략으로는 지역 연고에 깊이 뿌리내린 투표정서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근자에 진행되는 정치상황을 보면서, 더 이상 정치적 목소리를 정치 중심지에서 내지 않으면 우리의 조국이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근거는 수없이 많고, 그리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기독교인들의 지역 연고 의식보다 현 상황의 위기의식에 동조하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피부에 닿을 정도로 많아졌다는 면에서, 내년 총선에서 기독당의 원내 진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가능했다. 그러면 우리도 거의 모든 민주국가에서 원내 의석을 가진 기독정당이 있는 것처럼,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로의 원내진입을 위해 모든 기독 정치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함으로 원내의석을 지닌 기독당의 출현을 기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직 목회자들이 후보자로 출마하는 문제는 부정적이다. 당연히 일정한 기간 이전에 목회자직을 반납하고 나서야 할 것이며, 가장 바람직한 것은 목회자들은 권세에 대한 선지자직을 감당하고 훌륭한 기독 정치인을 골라 그들을 현장으로 내보내는 방법이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7-04
  • 기독언론포럼/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문제의 제기죽음이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할 필수적 과정이다. 태어남이 있는가 하면 죽는 것도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의 학문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의 학문 분야가 만들어질 때는 그것이 다루는 고유한 주제와 범주가 있는데 죽음학이 담당하는 영역은 더욱 넓고 깊어서 ‘죽음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하다.’ 라는 식으로, 완전하게 결론지을 수 없다.과학은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검증할 수 있는 현상을 연구하라고 강조하는데, 죽음학은 바로 인간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현상의 특징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죽음학은 과학이다. 그러나 과학은 탄생 이전- 죽음 이후의 ‘죽음의 여정’을 포함하여 종교나 철학적 주제의 영역을 다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들 영역을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는 죽음학은 과학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Ⅰ. 죽음학의 이해육체의 질고와 정신적 고통이라는 씨줄과 날줄 사이에서 죽음의 실체를 몸으로 겪는 골짜기를 지났다. 그러나 여기에 놓여나와 새로운 생명을 체험하였을 때 ‘죽음의 죽음’이라는 소망의 미학(美學)을 가슴 밑바닥에서 느끼게 되었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學問的接近)을 시도하며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이 연구를 추진하였다.1)1. 죽음학의 영역죽음학이 다루는 영역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죽음학을 연구하는 기초가 된다.(1) 죽음학의 기원과 함의죽음학은 각 학문 영역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복합과학이라 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회 체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현상 및 관념은 ‘죽음학’(Thanatology) 혹은 ‘생사연구’(Studies of Life-and-Death)의 중요한 대상이다.생사학의 기원은 30여 년 전 미국에서의 시작된 ‘죽음학 연구’이다. 죽음학에서 연구하는 핵심 과제는 정신의학 및 죽음학 전문가인 퀴블러 로스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성장의 마지막 단계’(the final stage of growth)로서의 죽음이다. 당시 미국의 행동과학자들이 많은 미국인들이 죽음을 올바로 대면하지 못하여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점을 발견하고 ‘죽음 각성 운동’(Death Awareness Movement)을 전개하면서 죽음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 마침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호스피스 운동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죽음교육, 호스피스, 죽음 상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죽음학의 연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죽음학의 주된 관심사는 호스피스, 죽음교육 및 죽음과 연관된 현상들의 연구에 머물러 ‘삶의 차원’(dimension of life)이 결핍되었고, 이에 따라 타이완의 푸웨이쉰 교수가 1993년 종교의 죽음에 대한 관심 및 임종정신의학을 결합하여 삶의 차원을 포함하는 죽음학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사학(Life-and-Death Studies)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2)즉 죽음학 혹은 죽음교육은 생사학의 전신이고 생사학은 죽음학이 확충되어 이루어진 영역이다. 타이완 생사학계에서 생사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푸웨이쉰 교수는, 생사학은 다음과 같은 삶의 10대 차원과 가치관을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신체 활동 ② 심리 활동 ③ 정치 사회 ④ 역사 문화 ⑤ 지성 탐구 ⑥ 심미적 경험 ⑦ 인륜 도덕 ⑧ 실존 주체 ⑨ 궁극적 관심 ⑩ 궁극적 진실.1994년 난화(南華)대학에서 타이완 최초로 생사학 대학원을 개설하여 생명윤리학, 참살이(well-being), 생사교육, 호스피스 및 장의 관리 등 5대 영역을 중심으로 죽음학 연구와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학부과정이 만들어졌다.3)(2) 죽음학의 종류생사학이 포함하는 내용을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표준으로 분류한다면 푸웨이쉰의 분류처럼 ‘학문의 생명’과 ‘생명의 학문’으로 나눌 수 있고, 좀 더 통속적인 말을 빌리자면 차이서린(豺麝) 교수의 주장처럼 ‘일반생사학’ 과 ‘응용생사학’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푸웨이쉰은 학문의 생명은 ‘순수 객관적인 학술 연구 혹은 이론 구성’을 말하고 생명의 학문은 ‘우리 실존 주체성의 생명에 대한 체험과 탐구 및 그 이론적 심화’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전자는 생사학 고난 이론의 연구와 구성, 즉 순수과학 혹은 일반생사학의 영역에 속하고 후자는 실천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를 포함하는 응용과학 혹은 응용생사학의 범주에 속한다.① 학문으로서의 생명: 학술적 탐구 혹은 이론 구성학문으로서의 생명 혹은 일반 생사학은 생사 현상과 관련된 학문을 구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종교, 철학 혹은 과학 연구자들이 기존의 이론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현상들을 탐구하기도 하고, 현장 종사자들이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면의 생사학자들의 주요 임무는 생사학의 성격, 연구 영역 및 방법론의 확립 등을 포함하는 학문상의 문제 해결을 통한 학문적 특색을 드러내는 데 있다. 생사학의 연구 과제, 대항 및 범주 등은 매우 광범위한데 일반생사학에서는 아래에 열거하는 주제들에 대한 이론 구성을 포함한다.4)첫째, 죽음과 관련된 질병에 대한 연구와 죽음에 대한 정의하기: 현대 의학은 최신 의학의 연구 성과 및 생명 과학적 지식을 끌어들여 심장병, 암, 에이즈 등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생사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최근의 학계와 의학계, 법조계 등 실무 계통에서의 죽음의 정의에 대한 변화는 죽음과 관련된 현상에 대한 이해를 드높였고, 뇌사, 식물인간 등의 심신 상태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이끌어 내었다.둘째. 죽어감 혹은 죽음의 인간관계 및 정신 상태: 정신의학, 정신치료학, 의료 윤리 등을 종합하여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 및 그 가족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고 개선하는 것도 생사학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죽음에 직면해 있는 환자 및 가족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의료인과 환자 상호관계를 통해 연구한다,셋째, 연령층에 따른 죽음에 대한 개념 혹은 심리 상태: 아동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 태도 및 심리 상태는 성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은 많은 연구 결과에 이미 나와 있다. 생사학자는 연령층에 따른 죽음에 대한 개념 및 심리 상태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하고 문화나 사회적 요소에 따른 차이 등에 대해 확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 추세는 반드시 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혹은 문화인류학 등의 지식들을 결합하여 발전시켜, 아동이나 노인 등 서로 다른 연령층에서의 죽음과 관련된 담론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넷째, 비탄 혹은 애도에 대한 상담 및 치료: 지금까지 생사학자들의 관심의 중점 및 형성된 이론들을 보면 비통 혹은 애도에 대한 상담이나 치료 방법에 대한 연구 성과가 가장 풍성한데, 이러한 연구 성과는 인류의 비탄 행위에 대한 이해에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각종 천재지변과 인재 등의 빈번한 발생에 따라 기존 이론은 사회문화 및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검증을 받아야 할 것 이다.다섯째, 죽음 관련 전문 인력과 조직에 관한 연구: 죽음 관련 전문 인력에 관한 연구는 전문 업종의 정의, 전문화 과정, 전업 발전의 사회문화적 요소, 전문 인력과 당사자 간의 관계 맺음, 전문 인력의 배양 혹은 생애 등의 담론을 포함한다. 조직에 대한 연구는 정규적 조직과 비정규적 조직, 조직의 기능과 운용, 조직 간의 상호 관계 등을 포함한다.여섯째, 죽음과 종교 혹은 철학과의 관련성 문제: 종교적 지식의 영역에서는 과학이 처리할 수 없는 많은 담론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의 존재 여부 등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 여러 종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고, 철학적 지식의 영역에서도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학자나 학파 간에 이론적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진일보한 정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일곱째, 죽음에 관한 의식: 거의 모든 인간의 사회 조직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과 처리 방식에서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각종 형태의 죽음에 관한 의식이 행해진다. 인류학, 민속학, 신학, 철학, 역사학 및 일반 과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문분과에서 의식의 의의와 기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죽음과 대면하여 드러내는 태도나 변화 과정 등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다.여덟째. 죽음교육: 미국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죽음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한국이나 타이완에서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다. 죽음교육은 연령층의 차이나 학력에 따른 교육 내용과 교재 개발, 교육 방법과 교과과정 설계, 평가 방법, 학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연구, 교육의 공헌도와 영향 등의 연구를 포함한다.아홉째, 죽음 관련 윤리와 법률: 자살,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에 관한 연구는 법률, 종교, 윤리 문제 등을 수반하며 생사학 영역에서도 중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이다. 반드시 법률, 신학, 철학, 의학, 윤리학 및 사회 과학(심리학, 사회학 등) 등 유관 학과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연구해야 한다.열째, 죽음의 문학 및 예술: 죽음에 관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의 표현 형식이나 의의, 불치병 환자들의 정신적 조절과 승화에 관한 묘사 등도 생사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지식의 영역으로서 미적 감각 차원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 외에도, 삶의 마지막 단계와 관련되어 인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모두가 생사학의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홍수 혹은 전염병 등의 천재지변, 전쟁이나 학살 혹은 집단적 자살 등으로 인한 집단사망(megadeath) 현상도 죽음과 더불어 생사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괸다,② 생명의 학문: 실존 혹은 실무적인 관심생사학 혹은 죽음학은 극히 복잡한 현대인들의 죽음 현상과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 영역의 연구와도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서구나 일본과 비교하여, 한국의 생사학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생사학 연구의 길을 개척하고 토착화하여 우리 자신의 사회 실정에 맞는 생사학을 내놓아야 한다,다른 사회와 달리 한국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까닭에 생명을 돌보는 실무적인 방면에서 비교적 구체적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학문이란 생사학의 응용과학적인 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 내지는 죽어감에 대한 실무적 관심의 표현이다. 생명의 학문이란 학제간 결합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의학(정신의학, 정신치료 등), 철학, 종교와 일반과학(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 등과의 관계를 통한 생사학 정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학문 영역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존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실천적 의의를 달성해야한다.5)생명의 학문 혹은 응용생사학은 생사학적 지식으로 삶과 죽음과 관련된 담론에 대해 연구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개념, 방법론 등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방침을 제공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응용생사학자의 첫 번째 임무는 공공정책을 제공함에 있고, 생사학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부차적이기 때문에 이론가나 순수학자로 자임해서는 안 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고문 혹은 기획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마땅하다. 응용생사학자들의 생사학 및 실무에 관한 공헌은 다음과 같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첫째, 호스피스 정책의 수립: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의료, 간호 및 불치병 환자의 수용과 돌봄은 사회복지제도를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반드시 서비스의 대상과 내용을 기획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상담, 의료적 돌봄, 조직의 운용, 규범제도 등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기획과 설계에 관련되는데, 사회 변화의 수요와 문화적 의의 등에 부합하여 진실로 죽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죽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둘째, 장례 관리 제도의 수립: 연구를 통한 각 사회문화에 합당한 죽음 처리 방식의 정립이 필요하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최선의 장례 관리 회사를 기획하여 국가제도의 규범, 죽음에 관한 의식 등에 맞추어 삶과 죽음 모두에서 안락함을 달성하고 있으니 참고하여 배울 가치가 있다.셋째, 생명교육과 죽음교육의 확충: 죽음교육 종사자들은 생명교육과 죽음교육을 효과적으로 확충하기 위해서 애도 상담이나 죽음교육기관을 건립하거나 자살 방지 시스템 등을 건립하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한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넷째, 죽음을 규정하는 유관 법률에 대한 협조: 생전 유서, 낙태, 안락사, 사형, 동물권 등 생명의 권리 혹은 법률과 연관된 실제적인 문제는 탁상공론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가하여 토론하고 기획하여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규범을 제정해야 한다.다섯째, 공공위생 정책의 재건에 대한 협조: 생사학자들은 필요할 경우 반드시 공공정책 입안의 기획에 참여하고 협조해야 한다. 특히 전염병이나 중대한 총기 사고 등 집단적인 죽음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위생 정책의 재건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연구 결과 발견한 문제 등은 위생 정책이나 재건 정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여섯째, 평가: 생사학의 또 다른 취지는 일반 공공정책에 대한 평가와 연구에 있는데 주로 정책의 실시가 원래의 목표에 도달하였는가? 실시 상황, 어려운 점과 문제는 무엇인가? 정책이 지금의 사회, 문화 시스템과 충돌하지는 않는가? 등의 물음을 담고 있다. 평가와 그에 대한 연구 결과, 발견된 문제에 대해서 진일보한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각도에서 생사학을 일반생사학과 응용생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대부분의 생사학자들은 두 영역에서 균형을 이루어 이론과 실무가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을 잘 보여 준다. 생사학의 원리로 죽음과 관련해 드러나는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여 학문의 생명이 성취되고, 문제해결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여 생명으로서의 학문을 창조하여야 할 것이다.2. 죽음학의 태동죽음학(Thanatology)6)이란 철학·종교학·의학·생물학·사회학·심리학·인류학·문학·예술 등 여러 학문들이 다학제적인 방식으로 죽음과 관련된 주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학문 분야를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학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1951년 미국에서 헤르만 파이펠(H. Feifel)이『죽음의 의미』(The Meaning of Death)를 통해 죽음 현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천명하면서부터다. 이후 1963년 로버트 풀턴(R. Fulton)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정규 강좌를 개설하면서 죽음학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파이펠과 풀턴의 강좌에 이어 여러 학자들-칼리시, 카스텐바움, 레비톤, 슈나이드만, 와이즈만 등-이 대학을 중심으로 죽음 관련 교과목을 개설하면서 죽음학은 하나의 정규 과정이 되었다. 또한 풀턴이『죽음과 정체성』(Death and Identity)을, 글레이저와 스트라우스가 『죽어감의 자각』(Awareness of Dying)을, 코어가『죽음, 비관, 애도』(Death, Grief and Mourning)를 각각 출판했는데, 이 세 권의 책은 죽음교육(death deucation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7)3. 죽음학·생사학의 지향점: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죽음학·생사학의 지향점은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 쉽게 말하자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well-living)과 인간답고 행복하게 죽는 죽음(well-dying)이다.8)혹자는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이라 하면 당장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예고 없이 불현 듯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행복하고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잘 해두라는 것이다. 또한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지금 자신이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죽음 준비를 통해 삶을 더욱 유의미하게 변환시킴으로써, 죽음 준비는 곧 삶을 준비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미리 죽음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는 확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오늘날 인간의 평균 수명은 의학과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편승하여 현대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내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단순히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오락과 안락,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할지라도 죽음이라는 현실을 변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의 힘을 변경할 수 없는 죽음을 미리 생각하면서 불필요한 슬픔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즉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의 기쁨과 의욕을 손상할 뿐 현실의 삶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또한 현대인들은 당장 해결해야 할 보다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 아닌 삶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삶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죽음의 문제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도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진지한 사고를 꺼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눈에 보이는 삶의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세속적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는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그러나 비록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사람들은 평소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다가도 불현 듯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가공할 만한 공포감을 느끼는 가운데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죽음에 맞닥뜨릴 때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직간접으로 경험하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울러 평소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후세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면 다양한 종류의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는 등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의 순간에는 두렵고 외로우며 불행한, 곧 준비 안 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려움과 외로움, 당혹스러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실제로 많은 화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한 의사의 말은 우리가 왜 죽음에 앞서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 잘 일깨워준다.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셔윈 눌랜드(S. B. Nuland)는 50여 년간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반(半)가사 상태나 완전한 혼수상태에서 “무의식적이면서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또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한 의식 속에서도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고, 수천의 사람들이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즉사하거나, 치명적 외상을 입어 마지막 공포에서 해방된 채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감안한다고 해도 다섯 명 중 한 사람보다도 적은, 훨씬 적은 수만이 축복 속에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들조차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순간에만 평온함을 느낄 수 있을 뿐,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는 며칠 혹은 몇 주씩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으로 몸부림을 친다”고 토로한다.9)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심을 품는 사람들도 많지만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평소에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 뒤늦게, 실제로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매우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성공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은 끊임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 죽음의 준비를 전혀 못 한 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죽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은 물질적 부와 사회적 성공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소망하는 것이지만, 그런 죽음은 좀처럼 맞이하기 어려운 행운이 되어 버렸다. 누구나 존엄하고 행복하고 평온한 죽음을 희망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존엄하지도 행복하지도 평온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후회와 슬픔을 가슴에 품고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을 소망하건만 왜 세상에는 존엄하지 못하고 불행한 죽음만 넘쳐나는 것일까?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듯이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듯이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 역시 저절로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학·생사학 전문가들은 죽음이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는 ‘마지막 선물’이자 ‘최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10)일련의 사람들은 죽음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으로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존재라고도 말하기도 한다.11)우리가 죽음의 불가피성을 항상 유념하면서 살아간다면, 무의미한 활동에서 벗어나 유의미한 일로 삶의 시간을 채우면서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의미한 삶, 충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이란 생전의 삶을 유의미하고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존엄하고 행복한 삶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Ⅱ. 영혼 불멸에 관한 논의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이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은 전통적 견해와 다른 교훈을 하고 있지만12) 성경은 죽음이란 죄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6-17에서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죄의 결과인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극복되어야 하며, 또 극복되는 것이며, 또 장차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의 죽음의 극복을 교훈하고 있다. 또 마지막 원수인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복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모두 이룬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전 15:24-26).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보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이며, 죽음의 권세에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비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 라는 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할지를 논의코자 한다.우리는 인간의 죽음 뒤에 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영혼불멸론과 중간상태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이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의 활기띤 사상이다.13)그러나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영혼불멸 사상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고유 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고대 종교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에 철학적 특성이 가미되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14) 영혼불멸론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15) 그러나 영혼의 불멸설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16) 아키발트 A. 핫지(Archibald A. Hodge)는 그의 저서에 영혼불멸론의 논의들을 소개하였고17) 월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18)이에 반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영혼불멸의 교리를 articulus mixtus라고 부르는데, 즉 이 교리의 진리성은 계시(啓示)에 의해서라기보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더 많이 논증되어질 성질이라는 것이다.19) 벌카우워(G.C. Berkouwer)도 바빙크의 이론에 동조하고 있다.20)성경이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영혼불멸론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에 대하여 안토니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21)① 성경은 ‘영혼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 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22)②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 속에는 어떠한 종류의 본래적인 것이 있지 않고, 혹시 인간을 불멸의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 속에서도 본래적인 것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23)③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란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만이 진정한 삶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참된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요 3:36, 5:24, 17:3).24)④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전체성으로 창조하셨고,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다. 부활은 신자들이 영광 속으로 이전된다는 뜻이며, 그 영광 속에서 우리의 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될 것이다(빌 3:21).25)안토니 후쿠마의 이론을 보다 상세히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26)사람들은 종종 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라고 말해 왔다. 이 말은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의 종교적 파트너인 이신론의 세기인 18세기에는 특별히 사실이었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모든 진리의 원천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이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성이 발견할 수 있는 ‘자연신학’의 세 가지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존재, 미덕의 중요성, 영혼불멸이라고 일컬어졌다. 영혼 불멸의 개념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가 이런 논증들을 파괴적인 비판에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이성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칸트조차도 여전히 이 개념을 이른바 실천 이성의 선결 조건으로 고수했다.27)(1) 타 종교와 철학에서의 영혼 불멸의 개념우리는 먼저 영혼 불멸의 개념(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 내지 인간의 비물질적인 측면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그리스 등을 포함한 수많은 민족들이 이런저런 형태로 영혼 불멸을 믿었다. 사실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지도자들이 강력하게 변호한 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교리를 일부로 삼아 형성된 ‘자연 종교’를 기독교와는 구별되고 기독교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영혼의 불멸성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에서 발전되었고 플라톤(주전 427-347년)의 저작에서 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대화록들 중에 특히『파이돈』에서 플라톤은 몸과 영혼은 별개의 두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한다. 사유하는 영혼은 신적인 반면 물질-열등한 실체-로 구성된 몸은 영혼보다 가치가 열등하다. 이성적인 영혼, 즉 ‘누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의 불멸하는 부분이며 하늘에서 영혼은 더없이 행복한 선재(先在)를 향유했다. 영혼은 이 선재 상태에서 그 날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몸속에 들어와 머릿속에 머물렀다. 죽을 때 몸은 단지 분해될 뿐이지만 ‘누스’, 즉 이성적인 영혼은 그 행동 방침이 올바르고 고결했다면 하늘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은 다시 또 다른 인간이나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혼 그 자체는 파괴될 수 없다.28)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영혼의 불멸성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합리적인 것은 실재하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은 무엇이든 열등한 종류의 실체를 갖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래부터 파괴될 수 없고 따라서 불멸하는 우월한 실체로 간주되는 반면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완전히 파괴될 운명에 처한 열등한 실체이다. 따라서 몸은 영혼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영혼은 몸이 없는 편이 실제로 더 낫다. 그러므로 이런 사고 체계에서는 몸의 부활 교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2) 성경은 영혼 불멸을 가르치는가그러나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표현을 과연 사용하는가?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는가?영어 성경에서는 ‘아타나시아’와 ‘아프타르시아’라는 두 헬라어 단어가 일반적으로 ‘불멸’로 번역된다. ‘아타나시아’는 신약에서 세 번밖에 발견되지 않는데 한번은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두 번은 고리도전서 15장 53-54절에서 발견된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이 단어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불멸성은 명백히 단순한 끝없는 존재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여받은 불멸성과는 구별되는 원래적인 불멸성을 뜻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다른 모든 불멸성의 원천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에게만 불멸성이 있다. 다른 존재들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서만 불멸성을 얻으며 소유한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이 있으신 것처럼(요 5:26) 자신 안에 불멸성이 있다.‘아타나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다른 두 곳은 서로 연이어 등장한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다”(고전 16:53-54).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52절을 보라). 앞에서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아직 살아 있는 신자들의 변화와 그때 발생할 죽은 자들의 부활 둘 다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50절) 이런 종류의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이제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불멸성에 관한 다음 세 가지 점을 주목해보라. (1) 여기서 말하는 불멸성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2) 이 불멸성은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종류의 불멸성은 모든 사람, 심지어 모든 신자의 현재적 소유가 아니라 재림 때 발생할 증여물이다. (3) 이 구절에서 묘사하는 불멸성은 영혼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인의 특징이다. 어딘가에 강조점이 있다면 그 강조점은 몸에 있다. 이 본문은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혼 불멸의 개념에 대한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불멸’로 번역되는 또 다른 단어인 ‘아프타르시아’는 신약에 일곱 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로마서 2장 7절에서는 참된 신자들이 추구하는 목표,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내신 것을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또 이 단어는 바울 서신의 부활에 관한 위대한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네 번 사용된다. 50절에서 이 단어는 썩거나 부패할 수 있는 것이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42절에서 이 단어는 몸이 썩을 것으로 심겨지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53절과 54절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 썩을 것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몸이 부활 때 덧입어야 할 부패하지 않는 불멸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단어는 이런 본문들 가운데 어느 본문에서도 “영혼”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이와 관련된 형용사인 ‘아프타르토스’도 신약에서 일곱 번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나님(롬 1:23; 딤전 1:17), 부활한 몸(“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고전 15:52), 바울이 얻으려 애쓰는 면류관(고전 9:25),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보석(벧전 3:4), 우리가 그로부터 거듭나게 된 썩지 않을 씨(벧전 1:23),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아니할 유업(벧전 1:4) 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어느 경우에도 이 단어는 ‘영혼’을 묘사하는 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는 ‘영혼의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3) 영혼 불멸에 대한 개혁신학자들 간의 불일치한 해석일부 개혁신학자들은 ‘영혼의 불멸’이라는 표현을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고 변호해 왔다. 예컨대 칼빈은 아담에게는 불멸하는 영혼이 있었다고 가르치며29) 영혼의 불멸성을 받아들일 만한 교리라고 말한다.30) 그러나 그와 동시에 칼빈은 불멸성은 영혼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에 나누어 주신 것임을 인정한다.31)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는 1878년에 처음 출판된 한 책에서 영혼의 불멸성 교리를 변호하는 여러 논증을 제시한다.32) 월리엄 셰드는 1889년에 처음 출판된 한 저작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의 불멸성과 죽은 뒤에 몸에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신약의 경륜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구약의 경륜의 특징이기도 했다.”33) 이와 비슷하게 루이스 벌코프도 이렇게 말한다. “이 영혼 불멸의 개념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 .”34)ej 나아가 벌코프는 이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반 계시와 성경을 근거로 여러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그러나 이 점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휠씬 더 신중하다. 바빙크는 영혼 불멸 교리를 그 진실성이 계시보다는 이성으로 입증되는 “혼합된 신조”(articulus mixtus)라고 부르면서 이에 덧붙여 신학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보다도 영혼의 불멸성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논평한다.35)바빙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영혼의 불멸성을 그렇게 많은 말로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결코 이 개념을 신적 계시로 선포하지 않으며 어디서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개념의 진위를 논하거나 논적에 맞서 이 개념을 주장하려는 시도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36)G. C. 베르카우어도 바빙크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영혼불멸의 개년이 기독교 특유의 교리임을 부정하며 이렇게 단언한다.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에도 살아남으며 우리가 인간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고찰할 수 있는 인간의 한 일부의 불멸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와 같은 불멸성에 대한 독립적인 관심과도 결코 관련이 없다.”37)(4)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결론개혁신학자들의 이와 같이 명백히 상충되는 반응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영혼 불멸의 개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데 동의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①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멸’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부활 때의 인간의 전 존재, 썩지 않을 면류관이나 썩지 않을 말씀의 씨 같은 것에는 적용되지만 인간의 영혼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② 성경은 영혼의 본래적인 파괴 불가능성으로 인해 영혼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이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주된 철학적 논증 가운데 하나다-가르치지 않는다.38) 이 논증은 특정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 관련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영혼은 몸보다 더 고상한 형이상학적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영혼은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실체이며 따라서 신적인 실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에 대한 그와 같은 관점을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하나님께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나 인간의 어떤 측면에 있어서 인간을 파괴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어떤 본질적인 성질도 지적할 수 없다.③ 성경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인간의 가장 큰 선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영혼 불멸의 개념은 죽음 이후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개념은 단지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단언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과 동떨어져 사는 것이 곧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가 곧 참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와 같은 참된 삶을 이미 누리고 있다(요 3:36, 5:24, 17:3).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1-25절과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가르쳐 주듯이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누릴 것이다.39) 성경이 우리 앞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죽음 이후의 실존이다. 성경은 또한 이 참된 영적 생명이 없는 이들도 죽은 뒤에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속되는 그들의 존재는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존재일 것이다(벧후 2:9, 눅 16:23, 25도 보라).그러므로 성경은 미래의 삶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한다.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로 나오고 그로 인해 다가올 진노에서 피하라고 촉구한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빠지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발한다. 성경은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가리거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할 만한 ‘영혼 불멸’에 대한 어떤 개념에 대해서도 경고한다.40)④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몸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에서 일반적인 인간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몸의 부활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몸은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은 같힌 상태에서의 해방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과 매우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몸은 영혼 못지않게 실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몸과 영혼으로 창조하셨다. 몸은 영혼에 비해 열등하지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은 참된 인간의 몸을 지닌 참된 인간 본성을 결코 취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적 사고에 따르면 몸은 영혼의 무덤이 아니라 성령의 전이다. 인간은 몸을 떠나서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신자가 미래에 누릴 복은 단순히 영혼의 지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가장 부요한 측면으로 몸의 부활을 포함한다. 그러한 부활은 신자에게는 영광에 이르는 변화가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빌 3:21).우리는 영혼 불멸의 개념이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오히려 성경적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몸의 부활 교리이다. ‘불멸성’이라는 단어를 인간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싶다면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이 불멸한다고 말하도록 하자. 그러나 인간이 그런 불멸성을 완전하게 누릴 수 있으려면 그전에 인간의 몸이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41)Ⅲ. 죽음을 이기는 죽음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극복이란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이것은 죄의 정복과 연관되어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과 병행된다. 죽음의 극복은 죄의 정복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바울의 표현처럼 아담의 범죄로 이 땅에 사망이 왔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왔다(롬 5:17).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며(막 10:45, 14:24), 그의 부활을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42)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 당하신 것이며(고후 5:21, 롬 8:3, 갈 3:13), 우리 죄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우리의 의를 위한 것이며(롬 4:24),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에게 부활을 보증해 주는 첫 열매이다(고전 15:20-22).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며(마 28:18),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는 자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엡 1:20, 빌 2:10).43)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과 죽지 아니할 것을 확보하셨다. 그리스도는 마귀 권세를 멸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며, 죽음 자체의 정복이며(고전 15:26), 흑암의 권세잡은 자 마귀의 정복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다 통일하는 것이며(엡 1:10),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44)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롬 6:5, 8, 골 2:10, 딤후 2: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롬 8:23)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전 15:49).45)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또는 동물적 생명의 종결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죽음관은 점진적 발전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구약 성경 초기 사상은 죽음을 육체적 생명의 종국으로 이해했으나 인간 존재의 완전한 소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은 자는 음부에서 그림자 같이 존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후기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제기되고 영혼과 육체의 분리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약성경은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의한 생명 중단 또는 새 삶의 영역으로의 전환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대립적으로 취급하는 헬라 사상의 이원론을 거부했다.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요, 적대적인 것이다.46) 일종의 원수이다(고전 15:26). 그것은 죄의 결과이며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 항목이었다.그럼에도 죽음의 원인에 대한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죽음을 자연적인 것, 인간의 본래의 조건으로 보는 견해이다. 펠라기우스, 소시누스, 바르트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펠라기우스와 소시누스는 도덕주의자요, 합리주의자였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원죄 교리를 부정하고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생명의 자연적 결과로 간주했다. 바르트는 말년의 저서인 「교회 교의학」에서 죽음의 원인을 죄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요, 생명의 자연적 종료로 취급했다.47)죽음을 인간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와 관계없이 죽도록 운명 지어졌다면, 왜 성경은 죄와 죽음을 철저히 연결시키고 있는가? 펠라기우스와 소시니우스주의의 주장은 성경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적 추론에 근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바르트는 성경의 증거 대부분이 죽음을 저주로, 인간의 원수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적 증거가 좁고 가는 선에 매달려 죽음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로, 또는 인간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것으로 주장했다.48)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한계이며 약점이다.죽음이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죽음’을 체험하게 되며,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게 된다.그러면 죽음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죽음은 단절인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이전이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하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소유하였기에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승리의 기록이어야 한다.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다(고후 5:1). 그러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고백한다(빌 3:20).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로 가득하였을지라도 ‘이미’ 받은 구원의 감격을 안고 ‘아직’ 성취되지 못한 완성을 향해 달음질하며 나아간다.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고 고백한 것처럼 죽음의 깊은 수렁에서도 죽음을 극복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영원한 삶으로서의 죽음을 준비한다.49) 2. 바른 죽음을 위한 바른 삶의 연습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이 죽음을 맞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의 말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50)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 즉 영원한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첫 번째 준비단계는 중요한 일들을 처리, 정돈하는 일이다. 자신에 관계된 모든 일들을 정리하여야 한다(왕하 20:1).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딛 2:1).진정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살 준비를 갖춘 사람이다. 우리는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사는 법을 배우기를 원한다. 언제 우리 앞에 마지막 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51)우리에게 죽음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망과 완전에의 미학(美學)”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한다.결론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원천이시다(시 36:9, 민 27:16). 인간의 생명은 원천이신 하나님의 최상의 은사이므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자산이다(욥 2:4). 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현세의 생명(삶)을 강하게 긍정하고 유복한 삶,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삶을 강렬하게 희구함으로써(신 5:33; cf. 출 23:25-26; 신 4:40) 현세 중심적인 삶과 신앙을 견지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향한 영육 합일적 이해와 이에 근거한 인생관 및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생관과 가치관, 죽음관의 향방을 결정한다.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과 함께 현세 중심적인 신앙관 혹은 인생관 때문에 성경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모든 개념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유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가 늙어서 맞이하는 죽음을 삶의 자연적 끝이자 종결로 이해한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죽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창 25:8). 이삭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9). 욥도 마찬가지로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 43:17). 다윗도 “백발이 되도록 부와 영화를 누리다가 수명이 다하여” 죽었다(대상 29:28).이러한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순리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즉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유복한 삶을 향유하다가 천수(天壽)를 누린 죽음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죽음(자연사)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전 3:1-2; 시 49:10-12; 시 90:1-6). 이러한 자연적 죽음은 피조물의 유한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죽음이기도 하다. 하나님 한분만이 불멸하는 영원한 존재이시고,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물은 사멸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생사(生死)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삼상 2:6; 시 31:15; 잠 4:27; 10:27).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서의 죽음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3:1-2).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께 이반되는 반신적(反神的) 존재, 생명에 적대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특별히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비명횡사하는 비자연적 죽음(비자연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는 형벌로 간주되기도 한다. “내가 네 딸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삼상 2:31-33). 그러므로 성경은 죽음의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을 견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5-16, 19 개역개정판, 참조 시 90:7-9, 겔 18:21, 28).52)죽음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에 도래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삶 속에 존재하는 현실,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한 구성요소로서 이해된다. 특히 질병과 노화와 극심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슬픔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6-12
  • 기독언론포럼/ 김노아 박사(세광중앙교회, 한기총 공동회장)
    <영혼수면설(靈魂睡眠說)>※ 영혼수면설(psychopannychy)이란? 죽은 자들의 영혼(靈魂)이 부활(復活)때까지 무의식적(無意識的) 수면(睡眠)상태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설(說)은 성경이 죽음을 잔다고 표현한 말이다.1. 예수의 운명(殞命)과 수면(睡眠)1) 예수의 운명막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기록된 말씀과 같이 개역성경은 예수의 죽음을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이라고 표현하였다.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기록된 말씀은 예수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영혼이 떠난 죽음을 운명(殞命)이라고 하였고, 영혼이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예수의 수면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기록된 말씀에서 죽은 자들(잠자는 자들) 가운데서(예수뿐만이 아니라 신구약시대 많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 예수라고 하였다. 사람창조(창1:27) 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復活)하셨으므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3) 예수의 수면기간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운명(殞命)하신 후 제 3일에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수면기간은 3일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께서 운명하시고 3일 후에 부활하실 것을 나타낸 말씀: 마16:21, 마20:19, 마27:63, 막8:31, 막9:31, 막10:34, 눅9:22, 눅18:33, 요2:19~21, 요2:20~22).2. 순교자들의 수면기간순교자들의 수면기간은 일반인의 수면기간과 다르다.1) 순교자들의 수면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기록된 말씀은 신약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운명과 수면에 관하여 잘 기록된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에서 순교자 스데반은 죽은 즉시 낙원이나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운명한 즉시 수면상태에 들어간 것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2) 순교자들의 수면기간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기록된 말씀에서 ‘예수의 증거(證據)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순교자)의 영혼들’(계20:4)의 수면기간은 그리스도께서 강림 하실 때에 첫째 부활 때까지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순교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하였다(계20:6).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수면기간은 첫째 부활 때에 부활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갈 때까지다.3) 순교자들의 영혼 구원의 때순교자들의 수면기간이 끝나는 날(계20:4)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 목 베임을 받은 순교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므로 순교자들의 부활 그 자체가 곧 구원이다.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3. 순교자 외에 나머지 죽은 자들의 수면기간◉순교자들보다 천 년 더 수면하여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순교자) 영혼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고 이들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 하였다(계20:4~5).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되고, 순교자 외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예수 믿고 죽은 자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순교자 외에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 후에 부활하여 살아나므로 순교자들보다 천 년을 더 수면상태에서 잠자게 된다.그러므로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이 천국이나 낙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요, 현재 수면(睡眠: 잠을 잠)상태에 있다. 순교자들은 첫째 부활(계20:4~6),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까지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고, 순교자 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첫째 부활 후 천 년을 더 수면상태에 있으므로 현재는 죽은 자들 모두가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다.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예수님도 많은 죽은 자들과 함께 수면상태에 있다가 잠자는 자들 중에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 모두가 잠자는 수면상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살전4:13~18). 예수 십자가의 우편 강도가 낙원에 가지 않았는가?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우편 강도에게‘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였다. ‘있으리라’하신 것은 예언의 말씀이다. 우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그날(오늘)’ 낙원에 가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운명하신 후 무덤 속에 3일 동안 계셨고(눅24:7), 부활 후에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으며(행1:3), 부활 후 40일이 되던 날 승천하셨으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후 43일 만에 승천하셨다(행1:9~11).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말씀은 거짓말이었는가?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늘’이란 먼 훗날을 가리켜 오늘이라 미리(사전에, 앞서) 말씀하신 것으로(히4: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늘’은 24시간 하루인 땅의 날이 아닌 하늘의 날(시89:29)의 하루를 오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고(벧후3:8),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 시간의 점) 같다고 하였다(시90:4).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오늘’은 천 년 같기도 하고 밤의 한 경점 같기도 한 하늘의 날수를 ‘오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예측된다.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위 증거 한 말씀과 같이 모든 죽은 자들이 현재 수면(睡眠)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살전4:13~14).4. 천 년 후에 죽은 영혼들의 심판과 구원의 때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기록된 말씀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기록된 말씀과 같이 순교자들 외에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 때에는 모든 자들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요5:25~29). 사망과 음부는 불 못에 던진다고 하였으므로 음부에 있던 자 곧 불순종 한 자들은 옥(獄)에 있는 자들로서(벧전3:18~20)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 사망과 음부가 불 못에 들어가게 될 때에 옥(獄: 음부)에 있는 자들(벧전3:19)도 영벌의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25:46).5. 죽음의 잠이 아닌 신앙이 잠자는 자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 근신(謹愼):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 잘못에 대하여 반성함.살전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기록된 말씀은 낮에 속한 자와 밤에 속한 자로 구분한다. 밤에 속한 자(어둠에 생활하는 자)를 잔다고 하였다.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기록된 말씀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은 육신에 속한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어둠 생활(잠자는 자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생활), 밤에 속한 자가 되지 말고 낮에 속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기록된 말씀은 죽음의 잠이 아닌 신앙이 잠자는 자, 어둠의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잠자는 자들이라고 하였다.<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1. 영혼(靈魂)이란인생이 태어날 때에 뇌신경에 의한 정신의 파장에 의해서 사람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탄생된다고 믿는다. 세상에서 영혼에 대한 정의는 정립(定立) 되어 있지 않다.영혼(靈魂)은 무형실존체(無形實存體)로서 인간의 심적작용(心的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정신(精神)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 안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나(육체) 아닌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육체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영혼(靈魂)을 혼령(魂靈)이라고도 하는데 육체에 머물러 육체의 모든 것을 지배(支配)하는 정신현상(精神現象)의 근원(根源)이 되며 육체가 없어져도 독립(獨立)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예수께서 운명(殞命)하실 때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신약시대 첫 순교자 스데반은 운명(殞命)할 때에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하였다.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존재(存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2.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멸할 수도 있다.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기록된 말씀에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멸하여 질 수 있고 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다(마10:28).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기록된 말씀에서 ‘내 영혼을 소생(蘇生)시키시고’라고 하였는데 소생(蘇生)이란 다시 살린다는 뜻이다.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는 육체가 살아 있는 자의 영혼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육체가 살아있는 자의 영혼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욥 21:17,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기록된 말씀에서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고 악인의 등불이 꺼진다고 하는 말씀은 악인의 영혼이 등불이 꺼짐과 같이 멸절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기록된 말씀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은 염소로 비유된 자들이다(마25:33). 이 사람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영영한 불은 마귀와 마귀의 사자들이 들어가는 곳인데 인자되신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마25:31) 이웃을 돌보지 아니한 악한 자들은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죽은 영혼들의 심판이 아니요, 육체를 가진 악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을 멸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시 40:14,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시 63: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겔 13:18,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하느냐. 19, 너희가 두어웅큼 보리와 두어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사람의 영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인데(렘38:16)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방석(직분의 자리)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영혼을 사냥하면서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인다고 하였다(겔13:18~19).기록된 말씀을 종합하면 영혼은 죽을 수 있으며, 그 죽었던 영혼이 살아날 수 있는 자(者: 사람)는 육체가 살아있는 사람이다.3. 육체가 없는 죽은 자들의 영혼은 불멸한다.◉죽은 영혼들의 부활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기록된 말씀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어떻게 부활(復活)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였다.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계 14: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기록된 말씀에서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은 영벌을 받을 자들로서‘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고 한 말씀을 영벌을 받을 것을 의미한다.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였다(벧전1:9). 영혼이 죽으면 영생을 할 수 없고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죽은 자들의 영혼은 불멸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4. 결론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시 141:8,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이 괴로움을 받으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욥7:11), 죽은 영혼을 소생(다시 살림)시킬 수도 있으며(시23:3), 음부에 빠진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살릴 수도 있다(시30:3~4). 영혼도 빈궁하여 가난할 수도 있으며(시141:8),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도 하신다(시107:9).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인 것을 알아야 한다(벧전1:9).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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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9-06-12
  • 기독언론포럼/ 김대성 박사(사)휴먼니커버리 대표)
    서론사람의 몸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당장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재림시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한다는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상당히 무리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받은 영혼들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데, 그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 어떻게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과 설명이 매우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어떤 면에서는 설명 자체가 매우 무리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사상과는 조화가 되지 않는 이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이 어떻게 기독교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떤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영혼불멸 사상은 왜 부활의 신앙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1.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가?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에서 발행(1994년)한 교리교육 지침서 352, 359페이지에는 영혼 불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우리는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의 물음에 직면한다. 육체의 생명과 함께 영혼도 끝나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등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관하여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속함을 주장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 불멸이라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날을 기다린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저져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탄다고 생각한다. 일평생 죄를 지어 보아야 100년 이내의 기간 동안 지은 죄 때문에 그 영혼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타고 있다면, 그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왜 어떻게 유래되어 기독교의 교리가 되었는지 그 근원을 우선 살펴 보려고 한다. 동시에 영혼 불멸 사상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경에 맞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 혹은 철학적 추측에 불과한 것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중요한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2. 인간의 본질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이다. 인간의 창조 과정에서 영혼은 어디에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 과정에 대하여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인간은 ‘땅 표면의 먼지(아파르 민 하아다마)’ 속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형성된 ‘생명체(네페쉬 하야)’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분명하게 규정되고 정의내려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 사상은 영혼을 육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거나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이분법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 성서의 구원사적(救援史的) 문맥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고, 영혼은 육체보다 가치 있는 ‘신과 유사한 영적인 것(호모이오시스)’이며, 죽을 때 그 둘은 비로소 분리되어 육체는 썩어지고 영혼은 불멸을 누린다는 희랍적 사고는 창세기 2장 7절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사멸적인 육체 속에 불멸적인 영혼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유형의 논조는 여기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귀속되었다는 그 귀속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 이상을 도출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7>.3. 영혼 불멸설의 유래와 역사(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들이 거하는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따먹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그 과일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유혹할 때에 그 과일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말 중의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과일을 먹었고 결국 그들은 죽었다. 사탄의 말이 거짓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게 되었다. 몸은 죽었지만 ‘혼’은 죽지 않았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한 매개자들이 성경에 나온다.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을 하는 자, 무당 등(신 18:10)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울 왕이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사무엘을 불렀고 사무엘이 나왔다(삼상 28장). 그가 과연 사무엘의 영혼인가? 사무엘이 무당에게 불려다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몸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인간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사탄의 속임수임에 틀림없다.(2) 이집트의 영혼 불멸 사상과 헬라 철학이와 같은 사탄의 거대한 속임수로 인해 영혼의 불멸 사상은 인간 사회와 인류 역사에 매우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 불멸 사상을 대단히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리된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무수한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으나 지금까지 떠나간 영혼이 되돌아와 다시 살아난 미이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영혼 불멸에 기초하여 윤회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였다. 기원전 5세기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집트를 방문하며 영혼 불멸 사상을 더욱 깊이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보았다”(그리스도교 대사전, 대한 기독교 서회, 1118면). 죽음 직전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침착성은 영혼 불멸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 불멸 사상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論集)인 ‘파에돈’은 영혼 불멸 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나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서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짓는다”(상동).(3) 영혼 불멸 사상이 교리로 만들어지기까지① 플라톤(Plato, 427˜347 BC) - 영혼 불멸 사상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해 놓았다. 최대의 헬라 문화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대 이집트 종교를 흡수한 플라톤의 철학에 동양의 신비 사상을 혼합한 신플라톤 철학(Neoplatonism)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② 필론(Philo, 20 BC~AD 47) -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로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플라톤의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유대교에 끌어들이는 데 앞장 섰다. 1세기 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③ 오리게네스(Origen, c.185~254) -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3세기 초의 천재적인 교사로서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리스도교계에 소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자처하였다. ④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m, c.160~240) - 플라톤과 같은 영혼 불멸을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의 영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고 하는 영원지옥(永遠地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 - 북아프리카 히포 출신으로 당대의 최대 신학 교부였다. 그의 가르침은 중세 가톨릭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플라톤의 철학 개념을 빌려 연옥설을 만들어 냈으며, 대교황 그레고리는 서기 528년 그것을 교리로 인정하여 드디어 성경에도 없는 연옥 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확인된 영혼불멸 사상과 영원지옥, 그리고 연옥의 신앙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중세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집대성 되었다. ⑦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영혼 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을 민속신앙으로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이 이교 철학 사상으로 전해지던 영혼 불멸 신앙이 그리스도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자,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어떤 사람들이 이성적인 영혼의 속성에 관하여 그것이 죽음과 더블어 죽게 된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공회의 동의로써, 영혼은…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종규에 따라, 지성적인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이와 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을 멀리 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 1937, 483,487).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 위와 같은 배경과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영혼 불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성서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4) 칼빈의 「혼수론」과 개신교의 영혼 불멸 사상이렇게 이교적인 영혼 불멸 사상이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된지(1513년) 얼마 되지 않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1517년).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자 칼뱅이 1532년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개종한 지 2년만인 1534년, 25세의 나이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히 비평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최초의 신학 논문인 「혼수론」(魂睡論)을 써서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의 영혼 불멸 신앙을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칼뱅에 앞서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 틴덜, 독일의 루터 등이 이미 중세교회의 영혼 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4.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영혼 불멸 신앙이란 이렇게도 비성서적인 이교의 철학 사상에서 시작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어 굳어진 교리이지만 성경을 보면 마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성경절들이 도처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인 문제는 히브리 사상을 헬라 사상으로 변형하려고 많은 시도를 한 「70인역」(희랍어 역본) 성경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다시 한신대 김이곤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하나님의 ‘모양’(데무트)을 단순히 동의적 평행법으로 반복 병렬시키면서 그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역본은 오히려 ‘에이콘’(형상)과 ‘호모이오이스’(모양) 사이의 엄격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희랍어 역본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호모이오시스’ 즉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과 ‘비슷한 것’(호모이오시스)은 소실되고, 단지 인간적인 것, 즉 ‘에이콘’만 남게 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 이후에 나오는 ‘호모이오시스’(모습)라는 표현은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 대신 ‘에이콘’(창 5:1) 또는 ‘이데아’(창 5:3)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역본은 구약성서가 인간을 플라톤주의적으로(플라톤의 파에돈처럼) 이해하여 인간이 죽을 때는 마치 영혼과 육체가 나누이는 것처럼, 또는 영혼은 육체보다 더 우수한 신적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으로 오도(誤導)하였던 것입니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6, 157).히브리적 인간 개념을 헬라적 인간 개념으로 변형시켜 번역된 「인역」 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각종 번역본에서 ‘영혼’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 하야’(살아있는 영, 생령)로 되어 있지 않고 ‘네페쉬 하야’(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Living being)로 되어 있으나 우리말 번역에는 ‘생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김이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본다. “문제는, 희랍적 영향 때문인지(?), 이 ‘네페쉬’라는 말이 우리말 성서(개역)를 포함하여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성서에서, 희랍역도 그렇게 하지 않은(‘프쉬케’라고 번역하고 ‘프뉴마’로 번역치 아니한) 번역인 ‘영혼(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시적 은유로 사용한 것이나 출애굽기 23장 9절, 욥기 19장 2절 등의 어떤 특수 문맥 이외에서 ‘영혼’이라는 말로 ‘네페쉬’를 번역한 것은 명백한-혹은 의도적(?)-오역(誤譯)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상동, 158).이와 같은 오역으로 인해, 많은 성경 독자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천당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성경절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표적인 몇 성경절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헬라어로 ‘푸쉬케’이다. ‘푸쉬케’라는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 마음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상 가장 적절한 낱말을 선택하려면 문장의 전후 문맥을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들이다. 전도하면서 당할 여러 가지 시련과 핍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하여 사람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하는 핍박은 최악의 경우 몸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 선교하는 정신은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푸쉬케’라는 말은 다른 여러 경우(행 15:24; 엡 6:6; 골 3:23 등)에서처럼 ‘마음’으로 번역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이나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생물” “마음”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솨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영혼”이라는 말은 마음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마치 강도가 그날 당장 낙원에 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위 성경절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부사는 원래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라고 했어야 할 부분인데,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본래의 헬라어 원문에는 있지도 않는 쉼표( , )를 ‘오늘’ 앞에 찍어 넣음으로 문장을 이해하는 데 혼란이 온 것이다.우선 강도의 요청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공동번역 성경은 이 성경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강도의 요청은 당장 영혼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구원을 그날 바로 약속하신 것이지 그날 그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다. 강도의 실제적인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다음의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면, 강도가 그 날 그 영혼이 분리되어 하늘에 갔다는 것은 도무지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이 분명하다.(3)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로 생각한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실화로 생각할 경우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실상을 살펴보자.① 아브라함의 품 - 구원받은 의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고통받는 악인들이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해야 하는가?② 눈, 손가락, 혀 - 영혼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탈 것이 없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도 없다. 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나 손가락이나 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혼이 지옥에서 탄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매우 허망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 - 그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줄수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라면 부모나 배우자나 형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에 불과할 것이다.④ 실화가 아닌 비유 - 이것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파피루스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음이 밝혀져 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잃은 양, 잃은 은전, 탕자,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등의 여러 가지 비유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 - 설화나 우화 속에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흥부와 놀부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에 소설이 실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눅 16:1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당시 부자들의 고정관념, 즉 부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의 결과이므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한 것이다. 5. 지옥과 꺼지지 않는 불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라고 하는 말은 12회 나타난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 48).여기에 기록된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엔나’이다. 히브리어로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되어 ‘게힌놈’이라고 쓰고 있으며,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힌놈의 골짜기”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을까? 이스라엘의 배도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몰렉신에게 자식들을 불살라 제사드리며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였다(대하 28:1-3; 33:1-6; 왕하 23:10).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골짜기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그 쓰레기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당할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을 묘사할 때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있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불타는 시간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7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불이라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곳에 지금도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17:27).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멸망했다. 그 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가?장차 악인을 멸망시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란, 불타는 시간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끌 수 없는 하나님의 불,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의 영원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것이다. 6. 부활 -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영혼불멸을 인정할 경우, 예수 재림시 천지 사방에서 일어나게 될 부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에 있던 구원받은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에 모두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각기 무덤 속으로 들어가 육체와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에는 의인에게 일어날 ‘생명의 부활’과 함께 악인에게도 있게 될 ‘심판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그렇다면 지옥에서 불타고 있던 악인들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성경의 내용 중에는 ‘영혼불멸’ 사상을 대입할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모순을 가리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교묘하게 해 놓은 부분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절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선 이 표현은 어법상 맞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죽은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처럼 되어 있다. “데려오다” 혹은 “데려가다”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원문(아고, αγω)을, 영혼불멸 사상에 맞추기 위해 “데려오다”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문장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해 놓았다. 이 주석의 내용을 보면,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구원을 받아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셔서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죽은 성도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어 번역 성경에는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살전 4:14).다음의 성경절들을 살펴보면 성경에 기록된 부활 사상은 그 상태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5-18).이 성경절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재림시 살아있던 자들이 죽은 자들 보다 먼저 하늘에 가지 않는다. (2)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의인들이 부활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 (3) 재림시 살아있던 의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올리워져서 공중에서 예수를 영접한다. (4) 그 후 천국으로 올라가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영혼불멸을 믿게 되면,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구원의 과정에 매우 혼란스러운 모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나 유수한 성경학자들은 영혼불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론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로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후에 순교당한 틴덜(W. Tyndale, 1490˜1536)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결합시켜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할 수가 없다. … 내게 다시 말해 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이와 같이 부활 신앙과는 모순되는 영혼불멸설과 연계되어 있는 영원 지옥설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시작된지는 이미 오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3년 11월 15일자 타임(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불타는 영원 지옥설을 부정하였다. 영국 성공회도 그간의 지옥 개념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징벌의 불구덩이’로 묘사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지옥은 다만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총체적 부정과 무(無)의 상태’이다. … ‘가학적으로 표현된’ 전통적 지옥관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상흔을 남겼으며, 신을 학대를 즐기는 괴물로 만들었다”(동아일보, 1996. 1.13).현대 신학계의 가장 유명한 신약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랑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1958년에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영혼불멸설을 설명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설의 가르침은 부활의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비성서적인 관념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당시 신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논문이었으며, 논문 발표 후, 그를 향한 비난과 공격은 참으로 맹렬한 것이었다(오스카 쿨만, 전경연 편, 복음주의 신학총서 제5권, 7,8쪽 참조).[공격들] ① “그 논문은 생명의 양식의 주림을 채우려고 죽도록 갈구하는 불란서 사람에게 비록 뱀은 아닐지라도 떡 대신 돌을 주었다.” ② 오스카 쿨만에게, 당신은 “영적 번민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괴물”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③ 어떤 사람은 그 논문에 대하여 “놀라움과 슬픔과 그리고 깊은 번민의 원인”이 되었다고 실토했다. [쿨만의 반응] “어떤 비판자도 본문 주석으로 나를 반론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다.…나의 글에 대하여 가하는 공격들이 주석학적인 논의에 근거되었더라면 이 공격들은 내게 더 큰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는 철학적인, 심리학적인,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막연한 이유로 공격받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혼불멸 사상은 성경에 근거한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철학적 가설과 추측이 종교암흑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영혼불멸설을 인정하고 믿게 될 경우, 사탄이 미혹하는 현대 강신술에 넘어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미 죽었던 자들이 나타나서 천국에 다녀온 이야기, 지옥에 다녀온 이야기, 혹은 성경의 교리를 왜곡시켜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온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깊이 음미하면서 정통적 기독교 성서관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인간의 가르침이나 사상, 혹은 교회의 전통보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따라갈 때에 우리는 안전하게 하늘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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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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