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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살과 평화
    자살을 사전적 의미로 보면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민족적인 문제나 역사적 문제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하거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결이라 한다. 자살이나 자결이나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는 같다 다만 자결은 민족이나 역사적인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스스로 단절 시킨다는 것은 장려될 일은 아니다. 자결은 민족이나 역사, 인간의 삶을 바로 세우는 일 등에 대하여 진정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은 장려될 사항이 아니고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일등 과 같은 시대와 역사 바로 세우는 일과,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충신과 순교적 죽음들은 신중한 평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식민 치하에서 뿐 아니라 불의가 팽배하고 역사가 돌이킬 수 없도록 왜곡 된 현실 속에서는 그 시대적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의인들의 고난과 죽음들의 결단을 볼 수가 있다. 자신과 자기의 혈연 등을 위해서 민족공동체와 민중들을 속이고 비굴한 부귀영화를 위해서 권력과 자본에 아부 아첨하는 사람들의 반역사적, 반생명적, 반 평화적, 반통일적 삶을 산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은 분명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역사적 현실이 반성서적이고 반생명적인 정화에서 미친 운전사에 의해서 승객들을 살리기 위한 의인들의 죽음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 해도 생명을 끊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생각하고 생각할 일이다. 사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들의 죽음은 계속 된다. 이러한 의인들의 생명 단절 외에 오늘날 우리 사회는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에 대한 나라들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오랫동안 지켜 오고 있다. 이것의 근본 원인은 분단에 있고 그리고 남남 갈등에 있으며,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에 있다고 본다. 소수의 재벌경제 구조악이 자살률을 높인다. 경제적 양극화는 상대적 박탈감 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들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사회적 요인이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하여 분단의 현실을 악용한다. 여기에서 희생의 주체들은 민중들이고 서민대중들이다. 어용 지식인들조차 민중들과 서민들을 속이며 자신들의 삶의 보호를 위하여 합리화 정당화를 꾀하며 자본과 권력의 눈치를 본다. 자본과 권력의 양극화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직장의 양극화의 골을 깊게 하고,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을 지어 가지만 한 평이 쪽방촌의 서러움을 해결 할 수 없는 주거 양극화와 생활 경제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권력과 비굴한 재벌 중심의 간교함이 춤추고 있다. 세계적 남북의 양극화(지도의 북쪽과 남쪽의)는 동시대의 비극을 줄이거나 중단 시키지 못한다. 서구의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자원의 착취를 통해서 오늘도 그러한 결과로써의 가난과 불행의 구조를 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위 기독교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큰 몫을 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갖고 있다. 청소년들이 매년 13092명, 40분당 1명이 자살을 하고 있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이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라는 것이다 1년에 수만 명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끊는다. 7-8-90 년대까지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수적 성장을 자랑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자살 통계에 의하면 소위 교인들, 기독교인들의 자살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성서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단절은 물론, 생명의 왜곡, 생명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나 압박, 그리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공권력들에 대한 타살들의 절대 반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자살이 늘어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생명의 소중함과 경외를 상실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들을 이원화 시키는 잘못 된 복음 선포와 성서적 이해에 근거 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이 세상은 육적이고 저 세상은 영적인 것처럼 이분법적 설교와 성서의 이해가 그렇다는 것이다. 영과 육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한 것처럼 쏘마, 즉 하나의 몸을 이루는 온전한 인격체의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성서는 플라톤이 죽음을 친구요 해방자로 노래한 것처럼 죽음을 예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죽음은 단순히 자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분과 국가권력, 즉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존재한다. 기업들의 이윤 추구에 희생 되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전쟁과 국가의 양극화 정책에 희생되는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죽음들이 널려 있다. 살고 죽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추상적이고 무책임한 변명을 늘어놓는 교회나 기독교는 깊은 회개와 반성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살리는 일로 이 땅에 오셨다. 선교와 복음의 궁극적 목적은 생명 살리는 일이다. 바로 내 곁에 있는 병들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고 진정한 복음의 성육신화이다. 평화운동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분단의 극복도 온전한 생명을 살리는 일로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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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1
  • 통일은 꼭 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 74년과 민족세계전쟁(6.25) 그 속에서 있었던 숱한 아픔과 죽음, 악한 힘의 폭력과 이별, 슬픔과 눈물, 억울한 피 흘림이 강과 바다를 이루었다. 1948년의 소위 해방과 광복은 새로운 식민지의 시작이었고 민족이 두 동강 나는 시간이었다. 일제가 물러가는 자리에 북에는 소련의 점령군이 남쪽은 맥아더 아래 있던 하지의 미국 점령군이 한반도를 채워갔다. 2차 대전 전후의 구 강대국 미소의 냉전 이념과 자국의 세계 패권 싸움은 패전국 동서독 뿐 아니라 조선 땅 한국을 두 국가로 갈라놓은 것이다. 그나마 북은 일제 청산을 하고 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남한은 미국을 등에 업고 이승만의 권력 야욕에 의한 대한민국이란 반쪽의 나라가 이루어졌다. 북조선은 소련과 중국의 힘을 빌려서 남조선의 해방의 통일을 생각하고 북에 이러한 북에 대하여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은 북에 대한 북진 통일을 주장하여 왔다. 해방 공간 3년에서 찬탁과 반탁을 외치며 한반도의 분열은 영구 고착화 되었고 마침내 동족과 동족, 가족과 형제자매들끼리의 민족상잔의 피로 강과 바다를 이루는 민족상잔의 세계 전쟁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16개국을 비롯하여 후방지원 국까지를 포함하면 53개국이 이 전쟁에 참여한 참혹한 일이 이 땅에서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구한말의 조선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국력이 쇠약하여 당시 강대국들, 영미이러프일러독 등에 의해서 한 입 요리감으로 전락 했었다는 비운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개방을 요구하는 강대국들과 이를 막으려는 쇄국정책의 두 싸움으로 인하여 분열된 자국은 이미 자체적인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식민사관의 역사를 되뇌여 왔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의 힘보다는 내부의 분열에 있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왔다. 악한 힘은 좋은 관계를 갈라 놓고 분열시키며 이간질 시킨다. 악한 존재는 누군가 행복을 꾸려가는 것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파멸 시키려 든다. 조선말이나 그 이전의 역사 이래로, 태초부터 악한 존재는 생명을 멸절시키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하여 온다. 중동지역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 떡집(병점)에서 태어난 역사의 예수는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라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 하였다. 그 평화를 가로 막고 넘어뜨리는 악한 사탄의 세력들은 우리를 사방에서 우겨 싸고 있다.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악의 씨앗’의 죄와 탐욕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죄로부터 이루어진 역사 속의 각종 구조 악은 우리의 숨통을 옥조이고 있다. 그것이 어떤 체제와 이념들을 형성하고 있든 간에 자본과 권력의 욕망들은 같은 자본과 권력에서 밀려난 역사의 주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보와 지식 사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컴퓨터와 인터넷의 소위 3차 혁명을 넘어서서 이제는 인간이 만든 로봇과 인공지능(AI)의 4차 산업 시대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정보를 독점 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거의 모든 주체들은 생명의 위협과 왜곡을 당하며 움츠려 들 것이다. 이미 이러한 오늘 사는 지구상의 역사를 좌우 하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의 문화는 핵무기와 화학 살상 무기 뿐 아니라 지구의 온난화를 통한 재앙들의 연속이 진행되고 가속화 되며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난민 뿐 아니라 소위 환경난민들이 대량으로 배출하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만들어 온 거짓과 탐욕의 역사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는 나름 예측되고 있다. 체르노빌과 후꾸시마의 원전사건을 보고도 인간들은 반성과 회개는커녕 더욱 더 거짓과 불의한 역사를 조장하고 거짓의 통로를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늘의 한반도 분단 상황은 평화 프로세스의 장애물이 숱하게 많다. 미중의 패권과 무역전쟁,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원천적으로 방해 하고 시기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의 몸부림과 경제, 정치적 보복들, 이러한 분단의 고착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한반도 신식민지를 자행해 온 미국의 검은 속셈은 남북과 남남, 한중과 한미의 갈등을 부추기고 조작하는 고도의 술수를 자행하고 있다. 자본을 통한 압박과 분열정책, 경제적 억압을 통한 영구적 식민통치 전략,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딜레마는 깊어진다. 먹고 사는 문제를 두고 이러한 분열정책은 더 치밀하고 고도화 될 것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고, 중국과 일본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위한 진중하고도 신중한 외교와 국민들의 분열을 최소화 하여 극복의 지혜를 짜 내야 한다. 역사적 용기와 카이로스의 순간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다. 그러나 통일은 꼭 오고야 말 것이다. 아니 오도록 평화의 문과 길을 열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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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9
  • 민주노총과 문재인 정부
    촛불혁명을 앞 세워 들어 선 문정부가 2년이 지나고 평창 동계 올림픽을 거치며 남북의 평화 교류가 시작되었다. 전후 처리 문제로 승전국이면서 강대국 미소에 의해서 이념적 냉전의 세계가 만들어 진 가운데 연합군에 의한 패전국 독일은 동서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몸뚱이가 잘린 채로 73년을 살고 있다.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와 기ㅏ족과 고향을 버리면서도 민족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 독립투사들은 아직도 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들의 자손들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가운데 친일 매국의 자손들은 잘잘 흐리는 기름기 몸과 얼굴을 흩뿌리며 살고 있다. 민족세계전쟁( 6.25)를 통해서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 뿌림은 산천에 아직도 진동을 하고 있고 슬프고 서러운 인산과 분열의 사연들은 깊게도 뿌리 내린 채 있다. 이러한 분단을 극복하고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를 꿈꾸는 시작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4,27 판문점 선언을 기점으로 다시 판문점에서 그리고 2018 평양 3차 회담을 거치면서 평화 통일의 꿈이 현실화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중국의 신 패권 전쟁과 무역 전쟁 중국의 대만과의 분열과 홍콩의 시위 그리고 일본과의 갈등이 복잡하게 한반도의 평화를 주춤거리게 한다. 한반도의 3번의 정상 회담 뿐 아니라 철천지원수로 여겼던 분미 회담이 싱가폴 과 하노이 등 두 번에 걸쳐서 열렸다. 트럼프의 고도의 장사 속 정치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분단을 푸는 단초가 되는 성 싶었다. 그것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이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첨단의 무기들과 강한 핵보유는 인정되나 북한의 핵보유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전제 조건이고 북한의 미국에 대한 비핵화의 전제 조건은 체제 보장과 안전이다. 이러한 북한의 안전이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의 인민을 위한 경제부흥이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의식주 문제가 북한의 요구이며 현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써의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요구에 대하여 미국은 현재의 핵 동결이 아니라 핵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제거하고 빈손 들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경제 발전의 모멘텀을 제공 하고 지금까지의 제재를 풀고 체제보장과 안전을 담보하고 북한의 경제 발전의 지원을 모색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또 하나의 위기는 민노총과 문정부의 갈등 관계의 노정이다. 한겨레신문을 통한 삼성의 제 3세계 노동 현실의 보고는 과히 충격적이다. 삼성의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의 노동 정책은 이러한 제 3세계의 임금착취와 인권의 말살 정책임을 접하게 된다. 우리가 당했던 임금착취와 인권 착취의 비인간화의 노동현실을 접하며 이제 대한민국도 과거의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리고 노동과 인권을 착취하는 기업들의 모습이 제 3세계에서 자행 되고 있다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 성노예 범죄를 베트남 전쟁 시에 저질렀다. 인간 역사의 가장 비열한 행위가 전쟁 중 벌어진 살인과 폭력이며 그중에서도 성폭력이 가장 비열하고 악랄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일제에 의한 노동의 착취 문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강제 노역을 하고 한 푼의 임금도 지불하자 않은 숱한 세월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착취와 폭력의 비열성은 공권력의 폭력이고 그것도 전쟁 중에 행해지는 폭력인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나라 완성은 인간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써의 나라일 것이다. “기도는 노동이다” 노동은 기도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삶의 구체성을 이룰 수가 있다. 노동은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유지와 보전을 위한 유일 한창조적 행위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모두는 노동자이다. 특히 역사와 사회, 나라를 지키는 삶의 일선에서의 노동은 아름답고 찬양될 일인 것이다. 이러한 노동의 권리와 행위들이 억압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노동의 일꾼이여, 민노총에게 바란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한 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지혜를 짜내자.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 민주당의 국화의원들과 정치인들이여, 그대들은 어쩌자는 것인가? 단순히 민주노총의 간부들과 위원장을 구속하는 그 자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법은 만인에게 공평하고 정의로운 저울추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이런 일들이 벌어져야 하나? 민주노총과 현 정부가 대립각을 세워서 누구를 이롭게 할 것인가? 강력한 투쟁과 강력한 억압을 통해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서로가 기 싸움을 하자는 말인가? 민주노총이여 지혜와 슬기를 발하라 역사의 전진을 모색하라. 현 정부 역시 역사의 진정한 진보를 생각하라 서로의 협력을 생각하여 큰 역사의 문을 함께 열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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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4
  • 다브뉴강과 바벨론 강가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브뉴강에서의 슬픈 노래가 들려온다. 72세부터 어린이 66세까지의 목숨을 앗아 간 소식이 매일 주야로 들려온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서 상상할 수 없는 바이킹 시긴호가 이 작은 유람선을 치고 지난 갔는데 7초만에 배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침 비가 많이 내렸고 강물은 몇 미터까지 수위가 올라오고 물이 흐르는 유속이 빨라졌다. 33명의 승객들 중 한국 사람들이 전부이다. 7명만이 구조 되고 나머지 19명이 실종인데 120Km 떨어진 곳에서 시신 한구와 다뉴브강가에서 4구의 주검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이다. 초록이 짙게 물들어 가는 신록의 계절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타국의 강가에서 차가운 물속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주전 8세기에 기록된 구약성서의 시편 137편의 노래를 상기시켜 본다. 나라가 강대국에 파멸되고 많은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유배를 간다. 그 바벨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분단 된 이후에 백성들을 버리고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도망간 이승만을 돌이켜 본다. 박헌영의 친구인 지금은 고인 된 김정구 가수의 두만강과 대동강 푸른 물을 생각해 본다. 강은 인류문명 발상지이다. 이집트의 나일강과 성서의 에덴동산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 초생달 지역의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중국의 황토를 나르는 황허강이 있다.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의 숱한 이야기가 쌓여있다. 한강을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낙동강의 처녀 이야기, 백마강의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이야기 등 강과 인간들의 사연들은 헤아리기조차 많다. 빗물이 흘러서 내를 이루고 그 냇물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며, 강들이 모여서 넓은 바다를 이룬다. 노아의 시절 인간을 만든 하나님이 모든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심판하여 쓸어버리는 창조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그때 40주야의 비를 내려서 물로 세상은 물바다가 되었다. 모든 생명들은 흔적들이 없고 의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노아와 그 방주에 들어 간 생명체들이 살아서 오늘 날 다시 세상에 번식하고 번영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 때의 사람들이 세상보다 지금의 존재들을 사랑하고 깊이 용서하고 싶을 것인가? 주전 8세기 때에 예레미아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기간을 70년으로 잡는다. 그리곤 온 땅이 황폐하게 되며 놀램이 될 것이고 이 나라들은 70년 동안을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말한다. 예루살렘이 함락 된 586년 뒤로부터 성전이 재건 된 516년까지의 70년을 의미하는 시간들이다. 137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나라를 강대국 침략자에게 빼앗기고 정든 고향 땅을 떠나서 산천도 다른 곳 객지에서 문화도 언어도 같지 않은 그 강변에 앉아서 슬피 우는 서러움과 기가 막힌 삶의 여정을 생각한다.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가에서 삶에 지친 마음과 몸들을 쉬게 하려고 여행을 왔다가 졸지에 차가운 물속에 삶을 묻어 버린 목숨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들을 듣고 황망한 마음으로 찾아 온 가족들 , 형제들을 생각한다. 기 강가에서 가족들과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며 통곡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본다. 인간의 허망한 그 목메 임을 무엇으로 메꾸어 간단 말인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 긴 민족 구성원들이 세계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아 온지 벌써 한 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그들이 자기가 숨 쉬는 강가에서 슬피 울며 눈물 흘렸던 세월이 그렇게 바람처럼 강물처럼 유유히 흔적도 없이 가 버렸다. 강은 생명의 물을 공급한다. 우리 영혼의 강가에서 생명수가 흐르듯이 생명을 움트게 하고 발아하게 한다. 이제 그 강물이 썩고 오염 되어서 바다로 흘러든 지 오래이다. 한꺼번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한다. 강보를 만든 이후에 4대 강은 초록 라떼로 변해 버렸다. 인간들의 마의 강도 오염되고 썩어 냄새가 펄펄 난다. 순수함을 살고자 했던 청교도들이 가장 더럽고 추악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거짓과 살인을 독려하고 이간질과 평화를 무너뜨리는 전쟁과 싸움을 일삼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강변에 앉아서 새 하늘 새 땅의 강물을 먹고 살기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생명수의 강이 지치고 힘든 모든 사람들의 배를 적시고 몸에 생기를 주는 생명의 역사가 이어야 한다. 썩고 오염되며 버려진 강물이 다시 태어나 생명들이 노닐고 헤엄치며 그물을 마시는 자들마다 삶의 풍성함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다뉴브 강가에 잠든 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형제자매 가족들의 진정한 생명 강가에서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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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0
  • 가정과 평화
    인류가 가져 온 제도 중 가장 소중한 것은 국가도 아니고 어떤 이익공동체도 아니다. 그것은 가족제도 이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제도 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 제도로 일관 된 것은 크게 반성하고 또 회개할 일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 가족제도 하에서는 여성과 아동이 성적차별과 아동학대가 극심하게 이루어져 왔다. 물론 지금의 시각과 인식에서 하는 말이다. 제도가 너무 오래 되고 고착화 되면 인간들은 그것에 순응하고 길들여진다. 아니면 체념을 하고 그것에 굴복하고 만다. 성차별과 인종차별, 아동들의 인권과 노동착취와 억압 등은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악한 잘못된 문화적 제도적 불의이다. 사회적 체제와 제도, 문화적 고착이 오래 되면 될수록 사람들의 생각은 병들고 인간의 권리는 사장된다. 여기에 인간의 권리와 진정한 자유를 향한 저항이 이루어져야한다. 권력의 억압과 횡포, 자본의 착취와 비인간화의 현상들은 정치의 독재와 경제의 독점, 사상의 독단 속에서 이루어져 온다. 더구나 이러한 삼독이 유착되고 여기에 사이비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이 유착되면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억울한 역사와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은 깊어가고 확대되며 재생산 된다. 페미니즘의 근본해결은 인간사회의 모든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약자인 아동들의 학대와 폭력은 새로운 사회의 희망의 척도가 된다. 인간들은 정의와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탐욕과 폭력을 위한 위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정의와 사랑을 말하기 일쑤이다. 온전한 아동과 여성의 인권, 힘없는 자들의 인권이 지켜지려면 국가의 올바른 인권과 정책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연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가정의 평화는 이제는 단순히 개개의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의 근본에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양극화의 해소와 정의의 실현이 이루어질 문제인 것이다. 가부장제 중심의 여성차별과 학대는 물론 아동들의 학대와 억압 착취 등이 존재해 온 것은 지금의 역사적, 문화적 관점과 인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급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인간화, 인종과 성 차별, 문화적 차별과 신분과 계급과 계층의 다양한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해소 되려면 인권에 대한 개인적이고 사회적, 국제적 연대가 절실한 것이다. 지구촌과 세계화를 표방하고 사는 현실에서 국제적 강자들의 권력과 다국적 혹은 초국적 기업들의 유착으로 말미암은 세계 속의 힘없고 가지지 못한 약자들의 고도의 억압과 착취를 방어해야만 한다. 산업사회를 거쳐 컴퓨터와 인터넷 등 지식과 정보 사회의 현실과 이제는 인공지능(AI)과 빅 데이터,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4차 산업 현실은 지식과 정보의 소외 된 민중들이 봇물처럼 늘어날 일이다. 여기에는 디지털 문화에 취약한 고령자들과 교육과 고급기술로부터 소외 될 수 있다. 블록체인을 통한 4차 산업 시대에서 살게 되는 환경은 구조악이 소수의 지배력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오늘에서 기존의 가정은 거의 해체되는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 과거의 행복한 삶을 구가하는 문화와 가치도 그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 기후와 환경문제는 물론 지구의 경제적 양극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경쟁과 탐욕과 욕망의 경쟁과 전쟁들은 지금도 계속된다. 식민지의 확대에 종교(기독교)도 큰 몫을 감당해 왔다. 신과 경전을 앞세워 전쟁과 살인을 행하며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의 이데올로기를 대량 확산한다. 고대국가를 시작으로 현대에 이르러 강하고 강압적인 힘을 가진 국가는 여러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거의가 인간의 욕구충족을 부추기고 탐욕과 소유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한다. 역사의 가장 상류층에 있는 소수의 퍼센티지가 세계를 지배한다. 정보도 조작하고, 지식과 정보도 독점하는 가운데 대다수의 인간들을 주무른다. 여기에 종교는 껍데기를 만들어 주고 이들의 정당성을 보장하거나 보충해 주는 악을 저지른다. 이런 가운데 모순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신뢰와 믿음 공동체인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삶의 터전과 관계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와 문화적 변화에 따라 가정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화한다. 가정의 갈등과 해체,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따라서 혼자 사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이혼과 재혼 등을 통해서 어쩔 수 없는 상태의 새로운 가정들이 형성되는 추세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가정과 가족의 변화와 함께 다문화 가적과 가족형태가 세계적인 현상이다. 특히 빈곤 가정은 양극화의 심각한 결과이다. 평등한 사회는 능력의 척도로 가늠한다. 이것이 잘못된 평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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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7
  • 유동운 열사를 추념한다
    유동운 그는 39년 전 잔인한 오월 광주 학살에 저항하며 시민군의 모습을 하며 전두환과 악한 일당들의 총에 맞아 순화 했다. 필자가 아는 그의 이력은 아버지 성결교회 목사님의 아들로써 한신대학 79학번이다. 나는 나이는 그보다 많지만 막내들과 80년대 한신에 입학하였으니 학번으로는 그가 선배가 분명하고, 그리고 역사에 남긴 그의업적 역시 선배가 분명하다. 필자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를 거쳐 평생을 기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다. 불가항력적인 일로 도미하여 미국장로교(PCUSA)에서 잠간 목회를 한 것을 빼고는 기장을 떠난 일은 지금까지 거의 없다. 농촌에서, 산골에서 그리고 강남의 어는 교회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그리고 다시 조국 한반도에서 소위 한국기독교장로교회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도 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살고 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산 한신대에 학생들 강의를 하기도 한다. 필자는 매순 간 자신에 대하여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분단 된 한반도에서 민족세계전쟁(필자 명명/ 6.25)이 휴전 된 몇 년 이후, 아직도 보릿고개가 있는 농촌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 고향은 논들이 끝없이 펼쳐진 김제 만경 평야지대이고, 내가 자란 마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꽉 들어 서 있는 흙과 자연 그대로의 터였다. 그런 내가 어찌어찌하여 70년대 산업현장의 열악한 곳에서 일하게 되고 어찌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20대 후반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것이다. 목사가 되기 전에는 잠시 노동운동에 몸을 단기도 하고, 70년대 유일한 인권단체에 속하기도 하며, 소위 진보계의 선생님들을 상당수 만나게 되었다. 소위 진보적 한신대에 입학하게 된 것은 시골 모교회가 기장교단이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7-80년대 기청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이어지기도 한 것이다. 그 당시 박정희의 유신 독재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의 불의한 권력에 맞서 수많은 민주화의 투쟁과 저항을 하던 선배 동료들이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살인적 고문들과 투옥, 죽음을 겪으면서 그 세월들이 한 세대를 훌쩍 지나고 있다. 민족분단의 현실은 여전하고, 민주의 열사들이 몸 바친, 민주화는 여전히 굴곡된 모습으로 진행되며, 미국을 비롯한 일본의 외세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노동자, 농민들은,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시달리고, 삶이 유린 되며, 자가된 학생과 지식인들, 불의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은 변절되거나 자본과 권력에 기생하며, 종교인들은 그러한 권력과 자본에 기대어 공생을 살고 있다. 어용종교와 어용지식인들은 여전하다. 각자의 실존의 삶에 굴복하고 진정한 정의는 실종 된지 아득하다. 신의 이름을 상품화 하여 허위의식으로 아편을 주사하는 행위는 기성종교 단체나 이단 사이비 족속들과 유사성이 많다. 물론 진짜 사이비와 이단들이 기성종교의 허구와 허점들의 파고들어 우글거리고 우매한 민주들을 착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인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그들의 허약하고 병든 영혼들의 약점들을 파고드는 이단과 사이비들의 책임은 자신들과 정통을 주장하는 기성 종교인들과 특히 종교귀족들에게 있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다. 강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나약한 존재가 인간임을 다 아는 터다. 인간의 이러한 나약한 종교적 현실을 해결해 보려는 종교들은 수 없이 만들어지고 소멸하는 반복을 거듭해 왔다. 인간들의 가장 큰 착각들은 자신들의 명줄의 마지막을 계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박해의 시대를 지나서 5-15세기 중세 천년을 지나고, 16세기 소위 종교개혁 오백년을 지나는 오늘의 기독교는 사실상 식민시대의 확장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인간들의 탐욕과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서를 도구화 해 온 것이다. 물론 기독교와 교회의 전 역사를 부정적인 비관적 해석과 이해로만 이야기 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의 기독교와 교회는 지금 자기 밥벌이와 교권과 교인 뺏기 싸움의 찌꺼기 수준을 넘어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신학생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잡고 진정한 정의와 사랑의 마음으로 영원한 삶을 살다 간 고 유동운 열사 선배의 삶을 묵상한다. 한 몸을 던져 인간이 사는 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유동운 열사의 삶에 머리를 숙여 잠시나마 추악한 우리들의 거짓 된 삶을 반추해 본다. 그가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와 진정한 민주화, 진정한 인간화, 진정한 평화와 통일의 외침을 가슴에 새겨 보는 것이다. 비굴하고 비겁한 우리들의 삶의 연속이 당당한 정의와 생명의 사랑을 실천 하는 길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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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4
  • 성 금요일의 평화
    오늘은 기독교의 교회들이 지켜오는 성 금요일이다. 성서 66권의 복음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죽음 사건이고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산 부활로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하였고 고린도전서 15 장 부활 장을 통해서는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헛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기독교는 부활로 서고 넘어진다 하였다. 초대교회 1-3세기까지의 박해의 시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박해의 시대가 중단 된 이후로 급속도로 세속화 된 기독교는 양적인 확대 재생산은 이루어져 갔지만 그 생명력은 쇠퇴해 갔다. 이때에 소위 사막교부들은 진정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사막으로 달려가 단독자로써 믿음의 부활을 기도했었다. 초대교회가 동서 교회로 나누어지고 급기야 11세기 들어 십자군 전쟁을 야기 시키고 전쟁을 합리화 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생명을 살리려 하는 것이 목적이고 화목제물로 오신 것이다. 물론 불의에 대하여서는 타협을 하지 않고 정의를 통한 사랑의 완성을 온 몸으로 말하였다. 예와 아니오.를 명백히 하신 것이다. 추악한 세속 정치보다 더 타락한 교회들의 교권정치는 성서와 예수의 삶과는 무관하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품화 하는 교권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는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 교회 세습보다 교회를 타락의 일로로 만든 것은 교권의 세습이다. 신의 이름을 앞 세워 역사를 피로 물들이고 시궁창을 만드는 것이 오늘의 교회인 것이다. 이것을 비판하며 사이비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민중들을 현혹하고 종교적 착취를 심화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예수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다. 평화는 진정한 복지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복지의 틀 속에서 허구적인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자의 삶이 고착화 되고 양극화의 골은 건널 수 없는 계곡이 되어간다. 여야 정치인들 모두 민중들의 복지를 내 세우고 사실은 자신들의 배를 채워가며 민중들, 서민들, 국민들을 조롱하고 있다. 박정희 이후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악은 갈수록 심화 된다. 부익부 빈익빈은 이제는 체질화 되어 있고 상위 1%가 모든 것의 컨트롤 타워가 되고 상위 10% 만이 중 상류층의 삶을 살고 90%는 하위 계층의 삶을 산다. 이것은 세계화를 부르짖는 팍스 아메리카와 신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세계적 현상이며 한반도의 남북과 남한정권하에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재벌과 다국적 초국적 기업들의 탐욕은 역사적 평화를 무너뜨리고 이미 무너진 평화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 권력과 정치권력은 유착관계를 끊을 수 없는 구조악을 이루고 있다. 기독교나 기타의 종교 세력들은 이러한 자본과 정치세력들과 직간접으로 유착되어 공생과 기생하고 있다. 민중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진정한 복음은 제처 두고 종교적 마약을 투여하고 있다. 종교귀족들은 여전히 종교적 아편들을 통해서 그들의 배를 채워가고 있다. 소위 현재 사회의 삼권의 세력들 (입법, 사법. 행정)들은 서로가 견제와 균형을 말하고 있지만 적당한 타협과 공조를 통해서 자신들의 공고한 자리 보존을 위해서 협력과 타협을 하고 있다. 사법부는 법이라는 강제력을 통해서, 행정부는 국가와 정부라는 강제 힘을 통해서, 입법부는 이 둘 권력의 입맛을 채워가며 공존공생을 모색해 간다. 성 금요일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고통과 아픔, 그리고 고난을 묵상한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 없이는 부활은 결코 없다. 중세( 5-15세기) 천 년을 지나는 동안 교회는 엄청난 특권과 부귀영화를 누렸다. 거기에는 흑암과 명암이 교차된다. 소위 16세기 종교개혁(혹은 미완의 혁명) 이후 개신교는 500년을 지나고 있고 21세기 과학의 첨단을 살고 있다. 기독교화 된 유럽 국가들은 십자가를 앞 세워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를 식민지화 하는데 열을 올리고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닉네임을 갖기도 하였다. 팍스 로마나를 알고 있는 소위 퓨리탄 청교도의 후예인 팍스 아메리카의 미국은 성 금요일을 저신들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보내고 있을까? 며칠 전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이 불타 하늘을 향하던 첨탑이 주저앉았다. 프랑스의 심장이 탔다는 탄식 아래 짧은 시간에 1조 이상의 복구비가 국내에서 거쳤다. 파리의 심장, 세계 유네스코의 유산 등 안타까운 말들이 홍수를 이룬다. 마침 세월호 5주기를 지나는 2019년 4.16일 이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화의 최고봉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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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0
  • 최초의 복지가 예수
    2000년 정통교리와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구원할 구주요 구세주이시며 생명과 진리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그 길을 가양 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통교리와 신학은 역사적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으며 때가 되면 다시 오실 주님이라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직간접으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과 살인 방화와 성폭력 등의 사실을 인지하고는 얼마나 인간들이 포악하고 타락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배신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이며 마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거짓말쟁이가 인간이며 각종 살인을 행하는 자가 인간이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변명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비겁하고 비굴한 자가 인간임을 익히 알게 된다. 이렇게만 말하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것만을 말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러한 악과 전쟁을 막아 보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과 봉사를 한 인간들 아니 사람들도 많다. 관계의 아픔과 상처들을 치유하며 배신을 용서하고자 몸부림 하고 좌와 우를 통합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성서는 아니 성경은 말하기를 용서와 사랑을 말하고 실천한 분은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뿐임을 안다. 누군가? 별세를 말한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거듭난 존재의 세상과 삶을 말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삶과 사역을 닮아 가고 실천과 행동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소위 민족과 지역민들을 위한 정치가들이나 나라의 경제를 도맡아 하는 것처럼 오만한 기업가들이나 마치 자신들이 죽어가는 역사와 민중들을 구원하는 것처럼 교주 노릇 하는 사이비 이단들(여기에는 기성교회나 종교인들도 포함)이 득실거린다. 그들은 모두가 남을 위하는 것을 입에 달고 산다. 이웃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고 거들먹거린다. 신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을 앞세워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진정한 생명의 쉼을 쉬게 하려는 것처럼 말한다. 자본주의의 사회악과 모순들을 고쳐 보려는 수장자본주의가 있었고 지금은 높고 낮음의 골을 메꾸어 보려고 복지 사회를 주창한다. 마치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이 자선을 하고 힘없고 불쌍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처럼 떠들고 소음을 발한다. 거짓 된 언론들이 자신들의 밥벌이와 밥통을 채우기 위해서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한다. 천사의 미소를 머금고 실제는 악마의 계산을 하며 야누스의 얼굴과 페르조나를 가지고 많은 자들을 속이는 일을 해 온다. 인류의 지정한 복지가 있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베들레헴 떡집의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그분이 인간의 악을 근본적으로 파헤치고 인간들이 옳다고 주장해 온 모든 기존의 이데올로기와 철학들을 해체시키며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다. 그리고 썩은 인간들의 모든 가치를 향하여서는 회개를 외치시고 지금까지 걸어 온 탐욕과 소유욕 욕망의 길에서 단호히 돌아서기를 말하고 있다. 자신의 권력이나 자본이 자기의 것에서 혈연을 이어 받은 후손에게 되 물림 되거나 세습이 되기를 바라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한다.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자들이 그 권력으로 자신의 부패와 비리를 조장하고 탐욕을 채우는 욕망의 도구로 삼는다. 남을 심판하고 재판하는 재판장이나 수사권과 기소권 종결권을 다 가진 세계 유례가 없는 대한민국의 검찰 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의 3권을 다 주무르는 삼성공회국과 재벌들의 오만함들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한다. 참 알 수 있기도 하고 알 수 없기도 한 소위 밑바닥 계층들 소위 자가되지 못한 민중들이 친일 세력과 독재 학살 세력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무지한 것인지 아니면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의 표시인지 모르고도 짐작은 간다. 권력의 교활함은 이러한 민중들을 약점 무지한 자들의 약점을 깊이 파고들어 찬만 번 권력을 붙잡는 수단으로 악용한다. 사이비 이단들(기성교회 교회나 종교 세력도 포함) 역시 이러한 무지하고 어려운 민중들의 약점을 통해서 밥 그릇을 채운다. 최초의 사회 복지가는 역사적 예수다. 예수는 불의하고 악한 자들에게 이중으로 시달리고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고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 쫓고 악한 세력들을 향하여 채찍을 들어 내치시고 그들의 더러운 상을 엎으셨다. 거룩을 가장한 회칠한 무덤들의 껍질들을 불사르며 진정한 생명의 복지를 십가의 처형당하심과 죽음을 떨치시고 부활하심과 다시 오실 희망을 통하여 가르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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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6
  • 복지사회와 평화
    오늘 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부의 독점에 있다. 분단 상황에서 남북의 경제적 차이는 40배에 달한다. 대한만국 남한의 자본주의 문제는 절대적 빈곤은 지나서 상대적 빈곤을 사는 양극화에 있다. 상대적 박탈감에 사는 것을 나무라는 소리들도 있다. 어차피 자본주의는 능력 위주로 사는 사회이기에 타곤 난 능력은 운명처럼 인정해야만 된다는 숙명론을 펼치는 것이 그것이다. 가계 대대로의 빈곤은 빈곤의 삶을 대대로 물려준다. 빈곤의 악순환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는 일제 치하에서의 민중들에 대한 수탈과 억압 그리고 전후 냉전 사회에서의 분단 구조악의 문제가 본질이다. 조선인민 민주주의공화국은 그나마 친일파를 숙청 청산하고 불법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인들과 민중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물론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오랫동안 사유재산 제도가 성립되지 못하여 땀 흘린 만큼의 노동의 결실과 대가를 얻지 못한 체제 특권층의 억압과 착취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당간부와 핵심 당원들과 민중들 사이의 양극화가 구조적으로 모순을 이루고 살아 온 체제와 제도적 모순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친일 매국노들과 민족적 매판 자본 세력들을 청산하고 숙청하여 민중들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 하였던 점은 깊이 숙고할 일이다. 오늘의 한반도의 남북의 진정한 복지 사회의 구현은 자신들의 체제 고집에서 벗어나서 북한 인민들과 남한의 민중들을 경제적 독점의 특권세력들로부터 해방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방은 권력자와 재벌 세력의 독점 자본 층들에게서 이루어 질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전면에서 생산과 소비를 담당해 온 민중들 자신들이 몫이다. 역사의 잠에서 깬 민중들의 자각 된 운동과 혁명 속에서 만이 이러한 모순의 구조악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득권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특권층으로부터의 복지사회의 진정한 행복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벌중심의 자본가들과 그들의 뒤를 봐주고 그들과의 뿌리 깊은 유착 구조를 만들어 온 권력층으로부터 이러한 것을 기대하기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자본과 권력에 기대어 기생하고 공생하려는 사이비 교회 세력과 소위 성서와는 전혀 상관없는 신을 상품화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밥벌이 교회 혹은 종교 세력들에게서는 이러한 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능력 위주의 복지사회를 주창하는 한에서는 진정한 복지사회의 평화의 문을 열수가 없다. 노인복지 아동복지 가족복지 등을 이들 세력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구걸하는 행위 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야 모든 정당들에게서 장차관 혹은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형성 과정들의 비위 사실을 보면 이러한 복지 사회의 평화가 허구인 것들을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중심에 있는 법조계 혹은 그이 붙어서 아부 아첨하는 종교 교회 세력들 청산되지 못하는 친일 세력들과 반공 세력들 그리고 그러한 반민족적 불의한 분단세력들에게서 진정한 복지사회와 평화의 삶을 기대하난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지사회의 평화의 길은 친일세력과 매판세력 그리고 분단을 고착화 한 모든 세력과 분단이념을 이용하여 자본과 권력을 추구해 온 반 민족적 세력과 반민중적 반 성서적 세력들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역사 전면의 섬기는 리더로 자리 할 때 가능할 것이다. 마귀(사탄)의 아버지 살인자와 거짓의 후예(요한복음 8:44)이 양의 가죽을 쓰고 늑대와 이리들이 되어 판을 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복지사회의 평화는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품화 하여 갖은 기교로 밥벌이를 하는 교회 세력과 각종 사이비 이단 종교 세력들에게서 복과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거짓이다. 민중들의 약점을 뚫고 들어 와 피폐하고 역사의 중심과 복지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소외 된 그들의 삶의 더 수탈하고 착취하는 구조 악은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 서 심화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복지사회와 평화가 완성된 하나님의 정의사회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즉 진정한 사랑의 물결이 춤추는 사회를 기도 하고 기대한다. 그러한 사회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모두가 복지와 평화를 만들아 갈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이다. 우리가 마구의 올무를 풀어 버리고 거짓 된 것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그 이후에 각종 구조 악으로 묶여 있는 이 사회의 복지와 평화를 이루어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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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7
  • 오늘의 문제들과 평화
    2.28 하노이 선언 불발 이후로 북미의 갈등설과 남북문제의 삐걱 소리가 나는 흐름이 감지되기도 하였다. 개성 연락사무소의 북한 측 철수가 며칠 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국정농단의 결과로 촛불혁명에 의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2018년 평창동계 올림픽을 통해서 73년 분단 현실 속에서 평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였다. 이후로 3차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DMZ의 GP 초소들이 거의 폐쇄 파괴 되었으며 싱가폴 북미 1차 회담을 시작으로 적대 관계를 가진 관계의 화해 2차 하노이 회담이 성사되긴 하였지만 결과는 무효처럼 되었다. 이러한 중단 결과에 대한 남북의 많은 국민들과 민중들은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다시 예전의 냉전부위기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등의 열려와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교계를 중심으로 YMCA는 4.27 손 잇기 평화행진을 기도하고 있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은 3.1혁명을 재조명하며 역사 바로 잡기와 한반도 평화를 넘어서는 동북아 평화와 세계 평화가 종국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평화를 말하는 홍수의 물결이 이루어진다. 한반도에서의 진정한 평화의 완성은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온전한 통일을 이루어 내는 일이다. 평화는 무엇인가? 전쟁과 싸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과 인권의 인간화를 이루어 가는 보편적 복지와 진정한 사회적 분배를 통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불의는 단호히 꾸짖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마침내 믿고 살 신뢰를 유지하고 현재의 염려와 걱정들을 넘어서서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해 가는 평화를 이루어야할 것이다. 이제는 냉전의 이념들을 넘어서 국가와 모든 국민들, 민중들의 이익과 행복을 구가 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는 아주 작은 생명의 가치라고 보일지라도 그것 자체를 존엄하고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며 그것의 꽃피움과 실천을 해 가야 할 것이다. 서로의 인격을 끝까지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며 출발이 되어야 할 것dl다. 근자에 과거사 조사 위원회에서 재조사 되는 김학의 전 차관의 별장의 성범죄 사건은 권력형의 특권층의 범죄인만큼 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시 점으로 삼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젊은 여배우 장자연의 억울한 삶의 실체를 온전히 밝히고 다시는 이러한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평화의 근거를 다져가야 한다. K-Pop문화가 바로 꽃 피우기 위해서라도 버닝썬 클럽의 사건이 제 대로 밝혀지고 깨끗한 연예문화가 재연 되도록 해야 한다. 조양호의 K-R 대한항공의 대표직 이사 상실 사건은 새로운 기업윤리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권력과 자본가들의 힘없는 자들에 대한 폭력과 갑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건 사회주의 건 어떤 체제에서도 가진 자들의 폭력은 근절되어야 한다. 개인적 실존의 평화를 시작으로 가정과 직장 기업 안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인격적 평화를 지향하며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현대 복지 사회 추구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환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만족되고 행복한 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물질과 맘몬의 충족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물질의 만족 추구는 문화의 타락을 조장하고 인간을 비인간화 하며 생명의 존귀함을 위축시키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존재한다. 국민총생산의 상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재벌중심의 독점과 권력의 독재와 사상의 독단이 문제가 된다. 어떤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그 능력의 결실을 모두가 함께 혜택을 보게 하는 나눔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요청과 모든 경제적 정치적 억압과 완전한 제재의 완화가 동시적으로 상응조치가 이루어 져야 한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 강요와 협박성 타협은 있어서는 안 된다. 평화는 대상이 있고 상대가 있다. 온전하고 바른 협상이란 쌍방이 옳다고 인정할 만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일제 치하의 오랜 억압과 압박 분단의 세월들로부터 한반도의 평화의 갈망은 너무도 간절한 시간이다. 분단의 이념과 남남 갈등을 조장하며 불의한 정권을 유지하며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민중들의 탄압 세력은 이제 반성하고 회개하며 성서의 정의와 사랑의 완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서를 왜곡하는 교회와 잘못 된 성서해석과 이해는 이제 중단되고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역사적 사명을 수용해야만 하다. 복잡한 현대 국가에서의 평화의 열매는 단순히 개인만의 기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잘못 딘 정치와 경제적 구조악을 완전히 개벽하여 그 터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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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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