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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 제56회 총회장 정규선(鄭奎善) 목사
    경북 구미 태생정규선(鄭奎善 1918.3.20~1990.11.17)목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上毛洞)에서 정인명 장로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상모에는 1901년에 언더우드(Under-wood)에 의해 세워진 장로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한강 이남에서는 초기 선교사로 경성 신문내(新門內·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가 세운 첫번째 교회였다. 이 마을은 동래 정씨들이 일촌을 이루고 살았던 집성촌이었는데,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규선의 아버지 정인명이 이 교회의 장로였는데, 그 당시로서는 꽤나 살기에 넉넉했던 중농(重農)의 가정이었다. 정 장로는 아들 규선을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성봉중학교(聖峰中學校)로 유학을 보내 공부시켰다. 규선은 5년제 중학교를 일본에서 마치고 동경으로 가서 일본대학을 1943년에 졸업하고 귀국해 경성에 있는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결교신학교인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현 서울신학대학교)로 가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에 졸업하고 경북 김천시 황금동에 있는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첫 목회의 길을 시작하였다.장로교인이었던 정규선이 성결교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나와서 장로교에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엔 평양으로 갈수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있는 서울에서는 장로교에서도 교리적으로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경선신학교를 나온 신학생들이 목회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교역자의 포화상태가 아니어서 희생적인 목회자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교파를 가리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성결교회 교단에서 월간 신앙지 활천(活泉)지를 통해 한국교회 안에 성결교 소속 경성신학교 출신들이 크게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교단적으로서 자연스럽게 용납되었다. 오늘날 예장합동과 통합측의 지도자들의 면모만 보아도 경성신학교 출신 장로교인들이 장로교회 안에서 목회에 성공한 인사들이 많이 있다. 우리교단의 지도자들이 된 사례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정규선 전도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1년 5월 경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북 북부지방에 있는 점촌제일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장기목회를 하였다. 이 기간이 정규선 목사에겐 목회 황금기였다고 보여진다. 1959년 9월 제44회 예장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였는데, 경기노회 총대 문제와 소위 에큐메니칼 지지와 반대의 이슈로 말미암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는 불행한 사태가 야기되자, 이 파급영향이 전국 각 노회로 그대로 이어지게 되어 한국장로교회가 6.25 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이고도 혼란한 사태가 교회 안에 불어닥쳤다. 장로교인으로 성결교 경성신학교 출신1959년 분열 당시 반에큐메니칼 노선 택해유교적 훈육받은 유학자다운 기개 가져대구신학대학 학장 역임교정에도 능해 경서노회장 5회 연임전국 교회와 노회가 에큐메니칼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지게 되자 각 지역의 노회로 이 정치사태가 그대로 어어지게 될 때, 경서노회 안에서 반에큐메니칼 전선의 선두에 서게 된 지도자가 바로 정규선 목사였다. 정규선 목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합방으로 조국의 미래가 암담했던 시기에, 또 아버지 정인영 장로의 선견지명의 기독교신앙의 안목으로 아들 규선을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선진국 일본에 유학을 시켜, 강직하고 철저한 현대문명을 접하게 한 것이 정규선 목사가 교회지도자로써 활동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엔 통합측으로 기울어진 교회들도 많았지만, 정 목사는 한국교회의 보수신학과 개혁주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데 경서노회의 지도자로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데 필요한 교정(敎政)의 경험을 경서노회를 지키므로써 인정받게 된 것이다.이 기간동안 정 목사는 동역자들과 후배들의 인정으로 경서노회 노회장을 5회나 연임하기도 했고, 그가 경서노회 지도자로 있을 때 노회가 설립한 경서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지방의 평신도지도자 양성에도 심혈를 기울였다. 정규선 목사는 점촌제일교회를 사임한 후 잠시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충무교회와 대구 반야월서부교회에서 봉사하기도 하였다.그리고 대구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같은 문중 출신 정규만(鄭奎萬) 장로가 필생의 과업으로 한강이남에서 화강암으로 건축해 세운 대구 서현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기도 하였다.정규선 목사는 유교적인 가문에서 훈육을 받고 일본에서 신식교육을 받아서인지 그의 풍모에는 유학자다운 선비의 모습과 현대교육의 결과인 포용력과 엄격함과 추진력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흉내낼 수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양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목회일선에서 쉬고 있던 그가 총회신학 인준신학교로 있던 대구신학교(大邱神學校·현 대신대학교) 초대학장으로 1981년 8월 취임하게 된다. 그는 대구신학교로 부름받기 전에도 리더쉽을 인정받아 총회임원(부회록서기)을 비롯, 영남협의회 회장(1968), 초대 영남대회장(1969)을 역임한 바 있었고, 대구신학교가 대구신학대학으로 인가 승격이 되자 학장이 되었다.그가 대구신학대학 초대학장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여러가지 어려웠던 학내 사태도 지혜롭게 정리되었고, 1987년엔 교단의 공기인 기독신문 사장이 되어 마지막 교단을 위한 봉사를 하기도 했다.2015년 9월 총회출판부에서 간행한 <역대 총회장 증언>에 실린 그의 육필설교 ‘가장 높은 차원의 은혜’란 설교문을 보면, 그의 신앙관과 목회이념을 엿보게 하는 영성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본문은 고후 12장 7~10절을 기초하여 설교한 것인데, 정 목사는 여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하면, 죄에서 구속받은 것은 너무나 큰 사실이기에 예외로 하고 세속적인 면에서 보통 생각할 때 병들었던 자가 기도로 나았다든가, 가난한 이가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든가, 그 외에 여러가지 자기의 기도하던 바가 하나하나 이루어졌을 때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믿고 진실되게 살아나가는 성도들은 남이 볼 때나 자신이 생각할 때도 분명히 불행스럽게 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간증한 이 은혜를 가장 높은 차원의 은혜로 여겨야 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가시를 주신 것을 큰 은혜로 생각했다. 둘째 기도의 불응답을 오히려 심오한 은혜로 생각했다. 셋째, 남보다 수고 많이 한 것을 은혜로 생각했다고 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것은 정규선 목사의 평시 목회관이었고, 그의 신앙적인 삶의 표현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라 보여지는 것이다.드디어 1971년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그가 총회장 당선 소감을 말했을 때, 그 어느 총회 때보다 더 회한이 컷을 것이다. 왜냐하면 1959년 9월 모였던 교단의 큰 상채기를 내었던 대전중앙교회(제44회) 현장에 그가 섰지 않은가? 그가 재임했던 제5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타교파(고려파, 기성, 예성 제외) 강단 교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② 제주노회를 복구하기로 하다. ③ 총회신학대학의 이사회(재단과 일반(운영))를 재편하기로 하다. ④ 총회센터를 건립하기로 하다. ⑤ 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공동번역성경을 본교단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하다. ⑥ 대만장로교총회와 일본개혁장로회와는 우호관계를 맺기로 하다. 정규선 목사의 자녀로는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정은숙 권사가 있다. 정 목사는 1990년 11월 17일 88세를 향유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딸 정은숙 권사에 의하면, 아버지 정규선 목사는 공적인 일에는 한없이 엄하고 정의로웠고 원칙에 따른 삶을 사셨으나, 가정에서는 그렇게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였다고 증언했다.(2016.12.29 전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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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2
  • 67. 제73회 총회장 이성헌(李聖獻) 목사
    경북 울릉도 출신이성헌(李聖獻 1924.6.1.~ ) 목사는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부친 이종운과 모친 이계연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성헌이란 이름으로 개명(改名)이 되기 전에는 성우로 불렸다. 이 성헌이 태어난 울릉도에는 침례교 신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울릉도 전지역에 세워져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80퍼센트 이상이 침례교회들이다. 이성헌 소년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조선 천지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간지 오래였고, 백성들의 생활상 역시 먹고 살아가기에 급급하였던 때였으니 섬이었던 울릉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섬에서도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에게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컷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컷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당시의 현실이 소년 이성헌의 가슴 속엔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을 통하여 일본 대학방송통신강좌에 중학과정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비록 어려운 집안 사정이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방송통신강좌를 통해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성헌 소년이 18세 되던 해에 온 가족이 정든 고향 울릉도를 떠나 바다 건너 상상만 했던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그에게 육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고 꿈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활동무대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어서 먼저 생활의 기초 터전을 마련해야겠기에 양복점 보조일(시다시)을 시작해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시대적 상황은 그가 또 다시 원치않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감리교 유재헌 목사 영향받아 감리교 신학교 졸업 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 공부명신홍 목사 요청으로 대구 서문교회 맡아대구신학교 교장 등 후학 육성에 헌신 당시 일제는 대동아(大東亞) 경영권 확보를 위한 야욕으로 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내몰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래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찾아 간 곳이 강원도 철원의 일본인 농장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다.이성헌은 1945년 8월 17일자로 징병소집을 받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징병 직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성헌은 제대로 병명도 모른체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앓아 눕고 말았다. 어머니는 장로였던 친정 아버지를 따라 신앙생활을 올곧게 하신 분이었다. 거기에다 성품까지 온화하고 인자한 분으로 성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어머니는 마음의 소원을 품고 그를 부흥회가 열려 한창 진행 중인 장흥교회로 그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갔다. 그때 부흥강사로 오신 분이 감리교의 유재헌(兪載憲) 목사였다. 유재헌 목사는 해방 전에는 일본 경찰당국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교파 배경이 없는 독립교회라는 이름으로 목회를 하다가 일경(日警)에 의해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금강산에 연금되어 있다가 해방이 되면서 석방된 후 철원에 있는 장흥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온 것이다. 그 당시 장흥교회는 온 교회가 힘을 모아 한탄강 상류에 ‘대한수도원’을 짓고 있었다. 그 수도원은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기도원이었다. 청년들은 그에게도 함께 수도원 짓는 일을 권유하였다. 수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공사를 하면서 청년들은 찬송도 부르고 때로는 간증을 하며 신앙생활의 체험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때 성헌에게는 저들이 저렇게 절실하게 열정적으로 정성을 기울여 수도원을 짓고 찬송을 부르며 봉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은 생각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저들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겠다는 감동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둡고 캄캄한 강가의 굴속에 자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간절함 속에 기도하던 그날밤 자정이 넘었을 무렵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성우야!(성헌으로 개명하기 전 이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마태 19:24). 그 굴속에서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의 눈이 변하였다. 날마다 보아오던 것들이 새롭게 보였고 새롭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기쁨이 넘쳤고 몸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일주일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그를 보고 유재헌 목사는 그의 이름을 성헌(聖獻)으로 개명해 주었다. 그 때가 1945년 11월 8일이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유재헌 목사의 추천으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서울생활은 궁핍하였으나 학비 마련을 해가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신학교 3년 과정을 마쳤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더하였다. 일본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유재헌 목사로부터 부흥회 인도차 출타하게 되었으니 본 교회 설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 왔다. 잠시 유학의 길을 멈추고 1946년 10월부터 경기도 용인의 용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그후 그는 다양한 교단 가운데 전통적인 장로교회 신학을 공부해볼 마음이 생겨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현 총신대학교 전신)에 편입하였다. 당시 해방 이후에 장로교신학교가 재편되면서 편입생으로 입학해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2월 12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서문교회 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서문교회 명신홍(明信弘) 목사로부터 그가 서울 장로회신학교에 강의 차 출타 중일 때 설교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이 때가 1949년 11월 추수감사주일이었다. 그는 이때로부터 1995년 11월 17일 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아들 이상민 목사에게 물려주고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한생을 서문교회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한 목회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성헌 목사는 그의 신앙의 멘토가 되어 준 유재헌 목사의 딸 유인애와 결혼하였으며, 1969년 9월부터 총신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하였다. 1971년 9월엔 대구신학교 교장(현 대신대학교 전신)으로 취임하였고,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세계복음화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1976년 7월 미국 페이스신학교로부터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88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자기가 시무하고 있는 서문교회에서 개회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3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성헌 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됨으로 대구 서문교회는 염봉남 목사와 명신홍 목사에 이어 세 분의 총회장을 배출하는 역사적인 교회로 발돋움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성헌 목사가 서문교회 재직시에 특기할 만한 일 가운데 중요한 사건을 열거해 보면,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으로 남하한 많은 피난민들에게 서문교회가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돌본 사실과, 곤경에 처한 피난민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말씀으로 목회함으로 생활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되어 준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1959년 제44회 총회분열로 WCC측과 NAE측의 갈등으로 빚어진 교회 처신이 어려웠을 때 NAE측에 서서 서문교회를 예장합동측에 남게한 공이라 하겠고, 셋째로는 이런 와중에 교회당 점령세력과 탈취세력 가운데 소위 교회 안에 오물투척사건이 발생했지만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한 일과, 마지막으로 오늘의 대 서문교회로 성장 부흥의 원동력이 되게 한 목회역량과 지도력을 들 수 있다. 더불어 한 가지 첨가할 것은 그의 물흐르는 듯한 설득력이 돋보이는 설교에 있었다.(대구서문교회100년사, 대구서문교회 2016 초판 p.298~345 참조). 이러한 배경이 그를 서문교회의 지도자에서 대구영남지역의 지도자로, 나아가서는 전국적인 지도자로 발돋음하게 한 발판이 되었다. 이성헌 목사가 재직했던 제73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찬송가 261장은 우리교단 교회에서 부르지 않기로 가결하다. ② 해마다 발행하는 신앙월력은 전도부에서 간행하기로 가결하다. ③ 기독신보 이사 선임은 노회별 총대 비례대로 하되 총대로만 이사를 구성하기로 하다. ④ 평동노회를(평동노회와 평양노회) 분리하기로 가결하다. 이성헌 목사는 슬하에 3남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장남 성민 목사가 아버지의 목회사역에 대를 이었다.(제98회 총회결의 및 요람, 김영남 황기철 편, 예장총회 2014, 서울 p.28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1-05
  • 66. 제61회 총회장 황금천(黃金泉) 목사
    황해도 송화 출신황금천(黃金泉, 1913.12.9~1977.2.11) 목사는 황해도 송화군 천동면 신촌리 21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금천이 14세 때에 사망하고, 어머니 최인서 여사는 황 목사가 47세되던 해에 소천하였다. 황금천 목사는 일찌기 기독교인이 되면서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43년 3월 20일 평양신학교에 입학 2년을 수료하고, 만주 봉천신학교(교장 박형룡 박사)에서 평양에서 못다한 1년을 더하고, 1944년 3월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 4월 25일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시작할 무렵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이념논쟁으로 북한의 공산당들의 만행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을 대동 월남하였다. 그는 피난지 대구에서 대구대학(大邱大學·현 영남대학교 전신)에 진학, 법문학부에 소속된 철학과를 마쳤다. 그의 경력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목사가 되기전 1938년 10월 황해도 풍천읍교회에서 전도사로 시작해 1945년 4월 25일 풍천읍교회 위임목사, 1946년 9월 15일 마포교회로 전임 사역했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군목 제1기로 훈련을 받고 군목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육군본부를 비롯 제1사단, 제1군단 군종목사를 거쳐 제1군 사령부교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휴전이 되자(1953. 7. 17) 제대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 총무로 취임했다. 재직 중 한국선교70주년기념전도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남한내 무교회 지역에 500개 교회 개척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하였다.다시 1961년 1월 1일 시흥장로교회에 부임 위 임목사가 되었으며, 1962년 11월 20일 경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이어 1976년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교 대강당에서 개최된 제61회 예장총회 총회장에 피선됨으로 교단의 수장(首長)에 올랐다. 평양신학교 졸업 목사 안수해방 후 공산당 피해 가족 대동 월남육군 군목으로 군선교 사역에 매진서울 홍제동에 홍성교회 설립강단에서 설교 중 과로로 숨져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당시 예장(합동)총회가 주류와 비주류의 리더십 교체를 두고 극단적인 대치 속에서 총회장소를 얻을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신학교 강당을 빌려 겨우 총회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비주류측에서 민 황금천 목사가 총회장이 되었으니 그의 심적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총회 후견증으로 얻은 지병으로 겨우 1년 임기의 총회장 직무를 마치자 마자 1977년 5월에 소천하였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98. 서울 p.943 참조).황금천 목사의 목회사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는 군종목사로써의 군선교 사역이요, 후반부는 서울 홍제동에 개척하여 교단내 굴지의 교회로 성장시킨 서울홍성교회 목회사역이라 하겠다. 홍제동에 개척한 황금천 목사는 교회 이름을 정하는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홍제교회>로 하려고 했으나, 이미 주위에 감리교회가 홍제라는 이름으로 개척된 교회가 있었고, 은제, 제은교회를 생각했으나 그것도 이미 타교단에서 사용하고 있어 마땅치 않았다. 문화촌교회란 이름을 생각한적도 있었으나 당시만해도 주위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 가난한 피난민들이 많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홍제동(弘濟洞)의 홍(弘)자와 거룩하다는 성(聖)자를 붙여 홍성교회로, 이어 서울홍성교회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도 딱 어울리는 교회 이름으로 교회의 거룩성과 복음사역의 진수를 내포한 것같아 온 교인들이 즐겨 쓰고 있으니 전도자요 개척 목사의 초기 정신이 신앙적으로 잘 베어낸 훌륭한 교회명이라 생각된다.그러나 1961년 1월 24일 경기노회에 정식교회 가입절차를 밟았고, 노회 가입시에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으나 큰 문제없이 노회에 가입하게 되어 교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황금천 목사 재직시 오늘의 서울 홍성교회 새교회 건축역사는 온 교인들과 황 목사의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추진력의 결과로 본다. 교인수가 점점 늘어나자 현재의 교회공간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새 예배당 건축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1968년에 처음으로 신축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해 3월 17일 건축위원회 주관으로 첫 헌신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하였다. 1972년을 건축의 해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3월 21일에 기공예배를 드리고 22일에 착공식을 하였으나 교회대지와 물려있는 시소유 하천부지 불하가 늦어져 새교회 건축이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통끝에 하천부지 문제가 당국으로부터 해결되어 1976년 3월 29일에 재건축허가를 받고 교회가 완공되기에 이르렀고, 박영화 장로의 거금 헌금과 유이근 장로의 사택을 헌납한 계기로 성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이러한 중에도 담임목사는 성도들의 자녀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선교를 목적한 유치원을 개설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 지하 교육관 건축을 계획하기에 이른다.지난 10여년 동안 교회 안의 교육부서가 확대됨으로 교육을 위한 시설문제가 자연히 대두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주변 대지를 매입해 근복적으로 완전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나 교회 형편이 여의치 못해 현재의 교회 건물 지하를 리모델링해 교육관 문제를 해결하기로 중의를 모아 교육관 단독 건물은 후일로 미루고 현재의 상태로 매듭을 지은 것이다.황금천 목사는 군목사역과 총회 전도부 총무사역을 마치고 나머지 여생을 오로지 서울 홍성교회에서 자신의 사역의 종착점을 찍었다. 홍성교회에서 황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어갔던 당회원 홍병수 장로는 황금천 목사의 목회철학의 한 단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황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늘 감사를 강조하셨는데 하나님 자녀의 특성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니(살전 5:18), 감사의 덕이야 말로 모든 덕 중에 가장 으뜸되는 덕이라”하셨다. 황 장로는 또 “황 목사님은 남 보기에는 장대한 어른이요, 건장해 보였으나 건강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총회장직을 맡으신 후 늘상 피곤해 하시기에 적절한 휴식을 권하였으나 일하라고 총회장을 시켜주셨으니 하나님의 일이라면 죽도록 충성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과로한 탓인지 강단에서 설교하시다가 단에서 넘어져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이러한 죽음이 본인에겐 영광이요 명예일지 모르나 우리 모두에게는 두고두고 애석한 일로 남아있다고 토로하고 있다(서울홍성교회 30년사, 같은책 p.77 참조).여기에 황금천 목사가 남긴 설교 가운데, 성경 요한복음 4:13-26, 7:37-39절을 본문으로 ‘인간사막의 생수’란 제목의 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첫째, 이 세상에는 심령에 만족을 주는 생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한다. 둘째, 이 세상에서는 참길을 찾기가 어려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생수를 찾아야 한다. 셋째, 사막에는 여관이 없다. 그래서 생수가 되시는 예수라는 여관(교회와 성경)서 머물러야 생수도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구원역사를 얻을 수 있다. 이어서 생수를 얻어 마신 결과는 그는 이렇게 강론한다. 첫째, 예수의 생수야 말로 솟아나는 샘물이다. 둘째, 생수는 뱃속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오른다. 셋째, 생수를 마시면 강물같이 흘러내린다. 그는 또 생수 마시는 법을 결론적으로 말하면서 첫째, 생수가 필요한 자에게 마실 준비가 필요하다. 둘째, 생수 얻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셋째,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업디어야 얻을 수 있다. 황금천 목사는 총회 전도부 총무일을 사직 한 후 그가 숨지는 순간까지 오직 서울홍성교회만을 위한 삶이였다. 그가 떠난지 20년이 넘었으나 지금까지 홍성교회 성도들의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 그를 기리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가 재임 중에 결의한 제61회 총회 결의안 중요사안 가운데 몇 가지를 적어보면, ① ICCC(국제기독교협의회)와는 우호단절을 재확인한다. ② 청주신학교와 수원신학교를 총회에서 인준하다. ③ 서울신학교와 한성신학교를 그 명칭을 ‘서울신학교로 해 통합키로 하다. ④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⑤ 찬송가 합동위원회를 조직 운영하기로 하다. 황금천 목사 슬하에는 아들 신엽(信燁)군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2-22
  • 65. 제58회 총회장 박요한(朴堯翰) 목사
    전남 신안군 태생박요한(朴堯翰 1918.5.6.~2016.10.30) 목사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진리라는 전형적인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1918년 조선이 이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 미래가 내다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고,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 경찰들이 장악해 조선총독부의 약탈과 천대만이 조선 전체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그는 1936년 18세 때 선교사들이 세운 순담청년성경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교육다운 신식교육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당시 호남지방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목포 광주를 비롯 순천에 이르기까지 선교사역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지역에 개척되는 교회마다 병설하거나 아니면 독립적인 기독교계통의 학교가 세워졌다. 공식적인 학교라는 기구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서는 교회 안에서 비형식적인 형태로 주일학교를 비롯 주간학교(週間學校)도 간혹 운영되었고, 때로는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와 같은 일정기간 안에 단기적으로 성경과목을 비롯 일반교과목을 편성하여 교인들의 자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불신자들의 자녀들까지 가르쳐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고, 또 간접전도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요한 소년도 청소년기가 되기까지 제대로된 초등교육(初等敎育)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부모들의 일손을 도우며 성장해 오다가 드디어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온 것이다. 1936년 3월 순담에 있는 청년성경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고, 졸업한 후 1943년 12월부터 함평군 손불면에 있는 궁산교회(宮山敎會)에 전도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로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 치하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군으로 출발하게 되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었고, 이 젊은 청년지도자에겐 구원의 진리를 전하며 가르치는 목회자의 길목에서 온 정성을 다해 복음을 위해 젊음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고, 그것이 청년 요한 전도사에겐 큰 보람이었고 사명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박 전도사는 그해 11월 당시 남한 유일의 총회에서 인준한 경성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문을 두드렸다. 지방 성경학교 출신으로 조선신학교 입학함평군 궁산교회 전도사로 목회 시작신앙의 절개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대전남부교회 총력 전도로 부흥 “성전은 예배 행위 이외엔 어떤 행사에도 사용불가” 입학 후 3년 만에 1947년 12월 본과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당시 조선신학교 교장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박요한은 1948년 7월에 보수주의와 개혁보수를 지향하고 새로이 출발한 박형룡 박사가 이끌고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본과로 진학, 졸업 후 1949년 5월 10일 목포노회(木浦老會)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스스로 세운 목회철학(牧會哲學)이 있었다. 그것은 청렴과 절제 그리고 교회와 신학의 세속화로부터 보수개혁 신학 과 칼빈의 하나님 절대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철저한 청교도적인 실천신앙에 역점을 두었고, 자신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며 지도해 나갔다. 박요한 목사는 1967년 10월 13일 한국의 중심지에 있는 대전남부교회(大田南部敎會)의 청빙을 받았다. 박목사는 일제의 핍박 아래서와 6.25 당시 공산당의 위협 아래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은 대쪽같은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였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 역사속에 길이 남아있는 <조선신학교 51인 진정서 사건>의 일원이었고 주인공이었다. 1947년 김 교수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반대하는 51인의 신학생들이 연명한 진성서를 1947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에 제출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 진정서에 서명한 당시 대표적인 교계 인사들로는 박요한, 김준곤, 신복윤, 조동진, 차남진, 한완석, 박창환, 황규석, 임병길, 김상대 등이었다. 이들 중에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크게 헌신하고 봉사한 분들이 많았다.박 목사는 1967년 10월 대전남부교회에 부임하여 1987년 은퇴할 때까지 20여년을 치밀한 목회계획을 세워 교회를 섬기며 성공적인 목회의 길을 걸었다. (대전남부교회50년사, 임해순편 2005, p.80~81 참조).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나서면서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교인들이 9.28 수도서울수복으로 하나 둘 대전으로 돌아와 교회로 모여들었고, 외지에서 피난 와 대전에 정착한 피난민들도 합세하다보니 교회는 점점 안정기로 접어 들게 된 것이다. 이 무렵에 박요한 목사가 남부교회에 부임, 목회현장을 지키게 된 것이다.교회성장이란 목표달성을 위하여 박목사는 전도전략의 일환으로 교구 확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1971년가지 4년 동안은 교인 배가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72년부터 매월 마지막 주일을 전도주일로 선포하고 상시 전도활동을 해 나섰다. 이 전도운동은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고 청년교인들에겐 어깨에 교회명의 성구가 새긴 띠를 띄고 적극적인 전도운동에 힘을 기울이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총력 전도운동에는 대전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도움도 컸다. 미국 장로교(P.C.A.) 소속 신내리(Rev. Sneler Alvin Roy, 1959 래한) 선교사와 현요한(Rev. Hunt John K, 1958 래한) 선교사 등이 차량을 지원하여 주었고, 당시 전도운동에 조직적이고 기동성이 있게 하였다. 이 전도운동은 교회주변 뿐만 아니라 변두리 지역이었던 가수원 지역에는 의료팀이 나가 진료함으로 큰 성과를 가져왔다. 당시의 의료선교는 의료품 지원이 이루어져 전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전도운동에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에 전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전도운동에 큰 기초가 되었다. 1972년 부터는 주일 낮예배시간 참석 인원이 300명을 넘어서면서 1968년도의 10개 교구에서 1978년에는 14개 교구로 증가했고, 1987년에 이르러는 25개 교구로 크게 성장 확대되었다. 중형교회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교회는 전도운동을 통해 내실을 기함과 함께 대외적인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교회 안에 있는 베드로전도회는 공주군 반포면에 있는 경천교회를 후원하게 했고, 요한전도회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영산도교회를, 마리아전도회는 금산군 복수면 염정교회를, 수산나전도회는 신안군 흑산면 오리교회를, 청년회는 신안군 흑산면 하태도교회를 지원하도록 자매결연을 맺게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한편 교인들을 향하여서도 지속적인 신앙성장을 위하여 주일성수와 십일조로 헌신적인 삶을 강조함과 동시에 경건생활의 장려를 위해 새벽기도회 강조, 단기성경학교를 설립, 때로는 달(月)성경학교를 개설 교인들에게 건전한 개혁주의 신앙생활의 지속을 위해 말씀과 신앙, 기도생활의 조화를 강조하는데 주력하였다.박 목사는 교정(敎政)에도 자신의 능력을 활용, 교단을 위하여 여러 방면에 헌신하였다. 남부교회가 속한 대전노회와 충남노회장을 위시하여 1986년 10월 교단지 기독신보 이사장, 1987년 5월 제6대 대전신학교(총회인준)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에 앞서 1973년 9월 20일~24일까지 인천제2교회에서 모인 예장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됨으로써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그가 재임했던 총회의 중요한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타교단과 연합사업을 하거나 강단 교류에 대해서 총회결의 위반했을 때는 해당노회로 하여금 시벌키로 하다. ② 타교단 인사들과 초교파적으로 연합(관계)하고 있는 자는 노회가 시벌하도록 하다. ③ 정치문답조례는 본 총회가 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고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수정할 수는 없다. ④ 앞으로 개척하는 교회는 무지역노회 가입을 억제하기로 하다. ⑤ 국가 행사시 국기경례 후 맹세하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각 교회에 지시하기로 하다. ⑥ 성전(예배당 및 부설시설물 포함)은 예배행위 이외엔 어떤 행사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일임을 결의하다. 박요한 목사는 1987년 7월 30일 대전남부교회의 원로목사로, 명예로운 복음사역을 마치고 퇴임해 있다가 2016년 10월 30일 88세를 일기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11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모셨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2-15
  • 64. 제83회 총회장 길자연(吉自然) 목사
    평남 신안주 태생길자연(吉自然 1941.4.19~ ) 목사는 평안남도 신안주(新安州)에서 믿음 좋은 장로 아버지와 권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년 길자연의 부모는 평소 장로와 권사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이래야 한다는 것을 실천적인 삶으로 보여주신 삶이었다. 당시 신안주교회(1905.11.3 설립)에는 한국교회 순교자 명단에도 들어있는 최원초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고, 최 목사의 영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광복 직전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가족들과 함께 월남한 길자연은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동도교회(東都敎會)에서 최훈 목사를 만났고, 그로부터 많은 영적감화를 받았다. 최훈 목사 역시 기도의 사람이요 성경을 손에서 떼는 법이 없는 성실하고 근면한 목회자였다. 이 분을 통해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구나’하는 것을 배웠다.길자연은 기독교계통의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 한의학과로 진학해 한의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선친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부원장으로 수련을 쌓기 시작했고, 졸업하던 그 해 10월에 대학생 시절에 만난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잠시 지금의 고양 땅이 된 금촌으로 분가 해 나가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손님이 오지 않았고, 금촌 용주골에 정착 10개월만에 옆동네인 주내로 병원을 옮겨 재개업을 했으나 운영의 어려움은 여전하였다. 이러한 때 파주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그 동네의 작은 교회를 섬기게 되었는데 주일학교엔 부장도 교사도 없었다.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일학교 부장과 전도사 역할도 하며 인근교회에 교사를 파송해 돕기에 이르자 주위에 있는 기존 교회들이 오히려 의아해 하였다.이곳에서 길자연 청년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발견하게 되었고 느슨했던 자신의 신앙을 회복하게 된다. 이 무렵 성령충만을 다시 체험하게 되어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여기 이대로 있어서 안되겠다 싶어 신학공부를 해야겠다고 결단했다. 만 29세가 되던 해 칼빈신학교(현 칼빈대학교 전신) 야간부에 학사편입을 했다. 낮에는 아버지를 도우며 한의사 생활을 하며 야간이면 학교로 달려가 장차 전도자의 훈련을 받았다. 한의사 개업 중 소명의식 느껴 신학공부동도교회서 최훈 목사 지도받아 기도에 열중신림동에 교회 세워 오늘의 왕성교회로왕성교회 부흥 요소는 ‘금요철야기도회’한기총 대표회장 등 교계연합과 일치에도 기여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신·구약 성경을 마음 먹고 정독을 하였는데, 졸업할 때쯤 되니까 머리에 꽝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때부터 성경읽을 때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신약성서 내용이 보이고, 신약을 읽으면 구약의 메세지가 보였다. 어느날 동도교회 최훈 목사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줄태니 7,8년 공부해 학위를 받아 와서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나…” 이 제의를 받고서 신바람이 나 열심히 공부했고 고등부 교사로 사역에 전념했다.드디어 1973년 2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3월 2일부터 지금의 워커힐 뒷동산에 조그만한 기도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6개월동안 기도했다. 그때 그 기도원에서 한국신학의 태두(泰斗)인 정암 박윤선 목사가 함께 있었다.서울 관악구 봉신교회 교역자로 신개척이나 다름없는 작은 교회에 부임, 전도자로 출발했다. 성도라야 40여명이었는데 남자 성도 겨우 4명, 그것도 모두 무직자였으니 교회 형편을 알만하지 않은가? 봉신교회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어린 딸을 하늘 나라로 보내는 아픔이 있었고, 교회는 어려워 기도하며 말씀을 전했으나 부흥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즈음 신림동과 봉천동이 분동(分洞)되어 교회 이름이 어울리지 않아 한가람교회라고 바꾸었는데, 사람들이 또 이단교회라고 비아냥거려 신림동교회라고 다시 교회명을 바꾸었다. 신림동교회가 오늘의 왕성교회(旺成敎會)가 된 것이다.왕성(旺成)이란 이름도 사도행전(6장7절)에 말씀이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말씀에 근거해 작명(作名)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세는 여전히 어려워 자립은 요원해 보였다. 이때 12시간 비상기도를 하게 된다. 전체 성도 40명 중 29명의 제직(집사)을 세웠으나 교회봉사에 희생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직분이라도 맡으면 열심히 봉사하기를 기대했으나 그것은 허상이었던 것이다. 왕성교회에 부임하면서 마음에 결심한 목회비젼과 목회철학 3가지를 결심하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당시 교회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는 절간(사실은 굿집이었다)이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노력한다. 둘째 당시 동숭동의 서울대학교가 신림동으로 이전하며 교회 앞으로 대로가 나는데 여기에 한국 최고의 지성들을 움직이는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교회로 부흥시킨다. 셋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는 목회를 하기로 결심하고 교인들 앞에 함께 기도하고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길자연 목사 기도목회 이야기, 길자연 저, 생명의말씀사 2004 서울초판 p.1~31 참조).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는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 교회가 안정되어 가며 부흥과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자 본격적인 목회사역의 불길이 붙었다. 왕성교회 부흥 요소 가운데 하나는 길 목사가 계획하고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금요철야기도회’라 여겨진다. 길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다보니 기도에 불이 붙게 되고 불이 붙다보니 습관이 생기게 됐다. 그래서인지 그때 생긴 철야기도는 30년이 넘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이는 곧 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다섯 사람 정도 예배당에 나와 금식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금식기도팀까지 생기기도 하였다. 왕성교회는 교회 뒤에 있는 절간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가 왕성교회가 힘을 합쳐 기도한지 6년 2개월만에 절간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까지 왕성교회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도의 결과였다. 길 목사가 왕성교회에 부임한 후 예배당 건물을 두 차례 건축하였다. 처음 28평짜리 교회를 헐고 132평 짜리 교회로 지었고, 부임 후 8년만에 600평의 대지 위에 오늘의 왕성교회로 발돋음했다. 왕성교회는 예장 전국총회가 모일 수 있을 정도로 큰 교회로 성장 발전하였고, 길자연 목사는 교정(敎政)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자기교회만 아니라 왕성교회가 속한 평양교회 노회장과 기독교문화선교회 이사장(1984.12)을 비롯, 총신대학교 이사(1995.10~1000.11),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3회 총회장(1998.9), 1999년 10월엔 한국교회를 위한 영성목회연구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하였고, 2000년 1월에는 한기총 부설 통일선교대학장, 같은 해 3월 한국항공선교회 이사장, 같은 해 9월엔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장이 되었고, 2003년 1월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에 피선(12대,17대 2회 역임)되어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하여서 그의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2006년 12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이사장, 2007년 1월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이사장으로 2007년 12월 칼빈대학교 총장, 2013년 12월엔 교단인재양성의 산실인 총신대학교 제5대 총장에 취임해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재임했던 제83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지금까지 시행해왔던 총회주일헌금을 세례교인 의무금으로 변경하다. ② 은급기금 미가입교회는 총회에서 발행하는 제증명 발급을 중지하기로 하다. ③ 총회 산하 선교부를 폐지하고 ‘총회세계선교회’로 개편하기로 하다. ④ 교계에 문제되고 있는 ‘말씀보존학회 대표 이송오’를 이단으로 규정하다. ⑤ 외국인근로자선교협의회에서 봉사하는 목사를 선교사로 인정하기로 하다. ⑥ 총신대학교 대학원 안에 교회전문사역과정을 신설하기로 하다. ⑦ 여성안수(목사직과 장로직)는 불가하며, 단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며 지도력을 적극 개발하기로 하다. ⑧ 사순절을 성경적 절기로 지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더 연구키로 하다.길자연 목사는 왕성교회 원로목사(2012.12.27 추대)를 끝으로 목회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한국교회의 질적인 성장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용인시에 한국교회 영성훈련원을 설립 한국교회 미래를 위한 지도자 훈련에 매진하며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가 섬기던 왕성교회는 그이 아들 길요나 목사가 대를 이어 목회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2-08
  • 63. 제91회 총회장 장차남(張次男) 목사
    경북 상주 태생장차남(張次男 1940.9.10~ ) 목사는 경상북도 상주시 복룡동에서 부친 장수만(張守萬)과 모친 김봉필(金鳳弼)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여섯살 때 해방(解放)을 맞이했고, 이듬해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미 국경선엔 소련군이 지키고 있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3.8선을 넘을때는 돈을 주고 고용한 안내원을 따라 한밤중에 고향을 향해 움직여야 했다. 그는 말한다. 만약 그때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했다면 지금 저희 가족은 만주에 살면서 조선족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독교 복음에 접할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중국에서의 종교개방이 이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으니까.…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한다. 열한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나서 피난길에 나섰는데 나룻터에 와 보니 배 한 척이 있는데 서로 타고 건너겠다고 아귀다툼이었다. 이미 형은 강을 건너갔고 남은 가족들은 얕은 강쪽으로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다. 어릴 때는 몸이 약해 병치레를 많이 해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부친의 말씀에 할아버지께서는 갈 때는 못 가더라도 시험은 쳐보라고 하셨다. 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학비가 걱정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시기 중학교 때 중병을 앓고 있을 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신앙적인 계기가 되었고, 19살 되던 1958년 당시 김천(金泉)에 있는 경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엔 모두 어려운 시가라 정식 고등학교에 못가서 성경학교를 통해 신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으로 1959년 김천시 무안동의 천막교회의 개척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자전거로 가서 수요기도회를 인도하고 토요일이면 그곳에서 자고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해 9월 제44회 대전총회에서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는 아픔을 겪었다. 상주의 모(母)교회는 통합측이었지만, 장 전도사는 다음 해에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합동측 목사의 길을 걷게 된다. 경서성경학교 거쳐 총회신학교 졸업부산지역서 40여년 간 목회“삼손의 손에 잡힌 나귀턱뼈처럼”교계의 화합과 연합일치에 열심일본어로 기록된 총회록 번역사업 결의1960년 동대문에 있는 서울창신교회(권연호 목사)에 출석했는데, 그해 연말부터 교육전도사로, 1966년말까지 강도사가 되기까지 섬겼고, 그후 대구로 내려가 삼덕동에 있는 성덕교회(聖德敎會)에서 강도사로 1967년 11월 목사로 장립 받고 부목사로 섬기고 있던 중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중앙교회(노진현 목사)의 부름을 받고 내려가 6년 반을 섬기다가, 1975년 2월 해운대교회로 와서 2년간 시무하던 중, 같은 지역 내에 있는 온천제일교회에 1977년부터 32년간 위임목사로 봉직하고, 교단이 정한 70세 정년보다 1년반 앞당겨 조기은퇴함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말한다. 지금 돌아보아도 목회의 길이 저에겐 참 순탄했어요. 누구에게 삿대질 한번 안 받아보고, 멱살 안잡혀 보고… 물론 교회라는 곳이 온갖 애환과 빈부귀천 팔도강산 사람이 다 섞여있는 곳이라,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그는 또 자신을 삼손의 손에 들린 나귀턱뼈같은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늘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혀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생각할 때, 지난 58년의 목회사역에 고단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나의 목회 회고록 ‘소명과 순명’, 쿰란출판사 2015, p.48 이하 참조.) 그는 교정(敎政)에도 남다른 면이 있다. 장차남 목사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지닌 한국교회 대표적인 보수 교계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경서고등성경학교를 마치고 총회신학교 대학부와 대학원에 진학(구 총신예과 및 본과), 박형률 박사 지도로 조직신학관계 논문지도를 받고 졸업하였다(Th.M 과정). 부산에서 사역의 3분의 2가 넘는 목회를 하면서 노회를 이끌어가는 부산노회장으로 부산신학교(교단 인준) 교수와 교장, 영·호남 기독교지도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대회 상임공동대회장,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장, 기독교 C.T.S-TV 공동대표, 북한교회세우기연합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은퇴 후에는 부산에서 서울로 거쳐를 옮겨 온천제일교회의 후임목회자가 마음놓고 편히 소신을 가지고 목회하도록 배려하는 형으로 교계에서 몇 안되는 존경받는 지도자이다.그는 자신의 목회철학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평생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께 평생 인고(忍苦)의 목회, 중용(中庸)의 목회, 섬김(奉仕)의 목회를 모토(Motto)로 최선의 목회를 하려고 미력을 다했노라고… (신앙계 2016년 8월호, 최선미 기자와의 대담 p.10~16참조).장차남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인 <소명과 순명> 머릿글에서 자신의 한평생 삶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나의 일생을 소명(召命)과 순명(順命)으로 인식한다. 내가 성도가 되고 목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召命)이다. 그후 나의 사역 일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순명(順命)이었다. 더블어 내 생애 전체가 소명과 순명이로되 결코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회고록 같은 책 프로로그 참조).나는 장로교 목사로 칼빈주의 정통신학 노선이자 수구적이면서 보수적의 입장이다. 하지만 진부하고 화석화 된 수구적인 보수주의가 아니라 참으로 보수의 가치를 존중하되 지키면서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보수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장차남 목사의 회고록 소명과 순명을 내면서 앞장서서 추진했던 김승동 목사(구미상모교회)는 간행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연극의 제목이 아무리 멋이 있어도 주인공이 마지막 무대에서 많은 관중으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내려와야 제목다운 연극이 되고 조연이나 관련자들까지 피곤이 물러가고 주인공과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으로 가슴에 밀려 올 것이다. 남편이 남편다워야 아내가 행복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다워야 자녀가 행복하다. 어떤 자리에 앉았다가 내려올 때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 로마교황 프란시스코(Francisco)가 뒷담화(남의 뒤에서 험담하는 것)만 아니해도 성자(聖者)라고 했듯이, 장차남 목사가 그런 분이 아닐까 여겨질 때가 많다. 타인을 질타하는 것보다 그럴 마음의 이유가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하면서 언제나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장차남 목사는 2006년 9월 19일에서 22일까지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부산 온천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9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교단의 수장이 되는 자리에 올랐다가 2009년 5월 5일 온천제일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받은 후 현재까지 총회장 재임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은퇴 후에도 지금까지 교계의 화합과 연합일치를 위해 타교단장들과 교류를 하면서 교계 지도자로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신앙인격과 포용력을 나타내주는 지도자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에게는 문필력이 있어 2015년 3월 20일에 간행된 회고록 <소명과 순명> 외에도 ① 목회 40년 그 현장을 말한다. ② 한국교회 목회 현장을 말한다. ③ 사랑하고 축복합니다가 있고, 또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집 ① 한 생명의 가치 ② 승리자 예수 ③ 위대한 터전 ④ 새벽을 깨우는 신앙 ⑤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한 일 ⑥ 우리는 한 골육이다 ⑦ 나는 기도할 뿐이다. 등 17권에 이르는 저서들이 있다. 그가 재임했던 91회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안건들을 보면, ①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예배를 장감성 연합예배로 드리기로 결의하고, 7월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신앙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다. ② 21세기 찬송가를 본교단 산하 개교회 예배용으로 사용하기로 하다. ③ 4월 마지막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허락하다. ④ 총회 안에 긴급구호단 설립을 허락하기로 하다. ⑤ 이단연구조사위원회를 상설키로 하다. ⑥ 총회차원의 전국교회 인재 데이터 구축하기로 하다. ⑦ 일본어로 기록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을 임원회에 맡겨 한국어로 번역하도록 하다. ⑧ 예장출판사는 현행대로 운영하되 총회에서 파송된 이사들의 법적 권한은 총회의 권익확보를 위한 임무수행 범위를 제한하기로 하다. 장차남 목사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우리교단 지도자들이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장 목사는 슬하에 1남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모두들 부모님들의 신앙의 대를 이어 가며 교회와 사회의 일원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1-24
  • 62. 제47회 총회장 이환수(李煥秀) 목사
    황해도 안악 출신이환수(李煥秀 1909.2.8~1985.6.30)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안곡면 복삼리에서 이기범과 김의성 사이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먼저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가 태어난 안악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역이어서 그들이 세운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를 다니며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받게 되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에 입문하였다. 이 때가 1924년의 일이었고, 1932년 부터는 광흥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다. 이환수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대원면에서 쌀을 배에 싣고 진남포까지 왕래하며 사업을 하였다. 후에 안악군 안동면 장월리에 월산소학교(月山小學校)를 설립하고 친히 그 학교에서 몸을 담아 봉사하였다. 이때 성경과 쪽복음을 팔러 다니며 전도하던 어느 권서의 중매로 김익성을 만나 결혼하였으며, 아내와 함께 재령교회 부흥강사로 온 성결교회 이성봉(李聖鳳) 목사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다. 이듬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이환수는 주중에는 신학교에서 신학훈련을 받고 주말에는 안악군 대원면에 위치한 원동교회(元洞敎會, 1918.3.3 설립) 전도사로 시무하며 주의 종의 길을 걷고 있었다.1942년 5월 20일 황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46년 6월 공산당의 박해로 월남하기 전까지 황해도 황주군 흑교면 용현리 용연교회(龍淵敎會 1896 설립)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이환수 목사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성품은 그의 목회 형태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하에서 일경의 요시찰인물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고, 그는 기독교 사상가로, 신사참배 거부로 그들의 눈을 피해 피신하기도 했다. 월남 후에는 서울 원효로에서 피난온 북한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친히 덕영학사(德英學舍)를 설립 운영하며 조봉화 목사, 황금천 목사, 박찬목 목사, 허간 장로 등이 동우회 회원으로 함께 운영하였고, 당시 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덕영학사에 몸담고 있던 100여명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구호물자를 지원받았다. 한편 이환수 목사는 서울 도화동에 청소년교육을 위한 소년관(少年館)을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다. 평양신학교 졸업청파동에 청암교회 설립정통신앙과 개혁주의 신앙 보수6.25 전쟁으로 제주도서 피난민교회 세워장로교 분열 당시 NAE 보수진영 사수이환수 목사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여 오늘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97-32에 청암교회(靑岩敎會)를 설립, 한평생을 한 교회에서 성역을 감당하였다. 광복 후 혼란기에 처해 정국이 어수선하던 1948년 9월 19일 청파동에 한국교회 보수신학의 이정표이자 보수신앙의 산실 역할을 할 청암교회가 이환수 목사에 의해 주춧돌을 놓았다. 청암교회가 설립되게 된 계기는 그 해 6월 3일 서울 남산 마루턱에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고, 이환수 목사가 상무이사로 있다가 김창복 목사의 주도로 천막을 치고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청암교회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다음해에 같은 청파동 1가 97번지 32호 위치에 예배당 건물을 짓고 비로소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청암교회가 정식 인정된 것은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경기노회 제6회 정기회에 교회설립 청원서를 내고 허락을 받음으로 정식교회로 등록되었다. 청암교회의 설립 취지를 청암교회5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p.27~28참조). 첫째 이 교회 저 교회로 방황하는 월남한 교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며, 둘째 당시 청파동엔 교회가 없었음으로 복음전파를 위하여서였고 셋째는 당시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 등을 위시해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몰려와 신앙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통보수신앙 수립의 필요성이 대두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청암교회가 설립되는 동인이 되었다. 당시 교계 분위기와 청암교회 설립 목적을 더하고자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고 했다. ① 성경의 유오성을 주장하거나 모세5경을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하는 신자는 본 교회 강단에 세우지 않을 것. ② 여사(如斯)한 신학교와 신학사조와 유사한 단체와 개인에게는 원조를 하지 않기로 하다. ③ 여사(如斯)한 신학지원자에도 본 당회로서는 추천을 하지 않기로 하다. 이렇게 처음부터 청암교회는 정통신앙과 개혁주의신앙을 고수하면서 진리를 보수하는 교회로서 예배와 신앙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초창기부터 갖은 어려움을 감수할 각오로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와같은 최전선에 북한에서 월남한 이환수 목사가 선두에 서 있었고 배후에는 당시 장로회신학교를 이끌어 가고 있던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청암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형룡 박사와 이환수 목사는 동향이기도 하였다. 어렵게 자리를 잡아가던 청암교회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본의 아니게 문을 닫고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환수 목사도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난민들은 처음엔 서북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제주의 삼도리에 피난민교회를 세워 대한예수교장로회 피난민제주읍교회라 이름을 정했다.한편 피난민 가족들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성경구락부(Bible Class)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엔 성경구락부를 개편하여 제주피난민국민학교를 설립했다. 1953년 9.28 수복으로 서울로 귀향하게 되어 허물어진 교회를 복구하고 흩어졌던 교인들로 한 둘 모이게 되고 수도탈환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되자 이환수 목사는 서울과 제주를 오르내리며 두 곳의 청암교회를 이끌어 가느라 수고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환수 목사의 청암교회 설교는 주일설교 때마다 눈물로 표현되는 메세지가 늘 감동적으로 교인들 가슴을 움직였다. 이는 마치 1930년대 눈물의 사자로 통했던 감리교회의 이용도(李龍道)가 겨레의 비운과 참담한 시련 속에 가슴이 메이면서 요양차 갔던 고향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고 말없이 흐느끼고 눈물로 설교를 대신했던 심정과도 같이, 달리 언어의 분석이 없어도 통할 수 있었던 백의민족의 설음을 눈물의 통로로써 가능케 했던 것처럼, 이환수 목사의 메세지가 그래서 감동적이므로 청암교회 교인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교향산천과 가족들을 북에 두고 온 이산의 슬픔을 안고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피난민들의 서글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위로와 치유의 역할을 그의 설교가 큰 감동을 준 것이었고, 또 한 가지 이환수 목사의 목회철학 가운데 하나는 복음전도자 그 중에도 교회안의 여성지도자 양성이었다. 그는 월남직후부터 청암교회 안에 한국여자신학교를 설립해 여성지도자를 계속 양성한 것이다. 1959년 5월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에서 분열의 고통 속에서도 이환수 목사는 W.C.C 에큐메니칼 진영에 서지 아니하고 박형룡 박사와 함께 N.A.E 보수진영쪽에서 교회를 지켜냈다. 이환수 목사는 1948년 9월 교회설립에서 부터 1982년 8월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오직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숨가쁜 목회자의 길을 달려 왔다. 청암교회가 경기노회와 총회 안에서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기까지는 청암교회 역사의 뒤안길에 이환수 목사라는 거목이 버팀목이 되어 왔음을 청암교회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교정(敎政)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7년 황해노회 교직자회 회장을 비롯해, 1958년 3월 경기노회장, 1959년 한국 복음주의연합회 회장, 1948년 3월 총회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1961년 9월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에 피선되고, 이듬해 1962년 9월 20일~24일 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7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어 교단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 이환수 목사가 재임했던 총회 중요 결의사항을 살펴보면, ① 총회 설립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다. ② 경북노회를 분립하기로 하다(경북노회와 경청노회). ③ 파숫군 잡지를 신학교 기관지로 하여 간행하기로 하다. ④ 신학교 교장은 1년씩 윤번제로 행하기로 가결하다. ⑤ 미조직 교회에서 강도사를 임시목사로 청빙할 때 안수하여 허락할 수 있다. ⑥ 1962년 10월 말경 고신측이 환원해 나가다. ⑦ 예배시간 중 기도와 설교시 사진촬영과 강단에 등단하여 촬영하는 것은 금하기로 가결하다.이환수 목사는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노년에 이러르러서는 자녀들 가정에서 기거하다가 1985년 6월 30일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그의 장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치루어졌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1-10
  • 61. 제80회 총회장 정석홍(鄭錫弘) 목사
    평북 철산 출신정석홍(鄭錫弘 1926. 1. 10~2000. 5. 12)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본인이 남긴 회고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그가 태어났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는 일제의 감시와 조선수탈 작업이 한창이던 이 땅의 유소년들과 청년들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암흑의 시기였다. 제대로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 시설이 없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계통의 학교나 한문교육을 받았던 식자(識者)들이 운영하는 사숙(私塾), 유림(儒林)에서 운영하던 서원(書院) 교육이 고작이었을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나마 석홍이 태어난 지역은 일찌기 미국 북장로회 평양선교부의 관할지역이라 철산지역에 세워진 장로교계통의 교회에 부속된 학교와 주일에만 열리는 교회교육을 접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정석홍은 1948년 4월 광복을 맞이했으나 남쪽과 북쪽 지도자들 사이 이념 대결로 혼란에 혼란을 겪던 와중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월남)하게 되었다.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면서도 공부하겠다는 의욕이 강해 1956년 서울 남산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한 후, 1957년 경북 상주읍에 있는 부원교회(상주시 부원동 273)에 부임, 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해 가을 경북노회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장립받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13권 p.1534엔 경서노회에서 안수받았다고 기록했으나, 당시엔 경북노회로 부터 경서노회로 분리되기 전이었다). 해방 후 남산 장로회신학교 졸업경북과 대구지역에서 목회서울 대현동 신현교회 두 번 부임전교인 말씀 훈련에 중점 목회 무료신학교(신천지) “신앙적 가치없는 집단” 규정1960년에 대구시 범어동에 있는 대동교회의 부름을 받아 상주에서 대구로 임지를 옮겼다. 다시 1963년에는 대구시 중구에 있는 대구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대구 중앙교회는 1959년 교단분열 파동에 휩싸여 중립을 선언해 교역자가 바뀔 때마다 한번은 예장합동에 소속, 다음 교역자는 또 예장통합 소속 목사를 모시는 것이 관례화 되어 내려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분립 당시 당회원들이 은퇴하게 되자 젊은세대 장로들이 예장통합으로 귀속하였다. 젊은 목사 정석홍은 그동안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여의치 못해 못다했던 공부를 하기로 결심, 대구시내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당시 미국 북장로교 재단에서 세운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 문과대학) 지리역사 학과에 학사편입하여 사학(史學)을 전공하고 문학사(文學士)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중국국제신학원(中國國際神學院)과 미국 아칸사시에 소재한 리틀 록라이트하우스 재단에서 운영하는 크리스챤칼리지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도 받았다.정석홍 목사는 단신으로 월남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남한의 예루살렘 대구에서 10여년의 목회사역을 접고, 1966년 3월 수도 서울 대현동 한국의 명문 여성교육의 요람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가까이에 있는 신현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동안 대구지방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과묵하고 성실하고 파워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고, 국내외 초교파 부흥사로서도 꽤 유명한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 목사는 신현교회에서 두 차례나 담임목사로 부름받은 행운의 목회자이기도 하다. 첫번째는 1966년 3월에 부름을 받아 사역한 15년 간의 기간이고, 두번째는 미국에서의 이민목회를 하던 중 다시 청빙을 받은 1981년부터 그가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은퇴한 1996년 12월까지 후반 16년, 도합 31년간 목회한 것이다.그가 신현교회에 두번째 부임하게 된 배경은 정 목사가 미국으로 떠난동안 몇분의 실력있는 당회원들이 이민으로 교회를 떠나고, 또 교인들 일부가 교회에 불만을 품고 교회 분립을 선언하고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져, 교회가 수습이 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진 가운데 다시 자기가 시무했던 교회로부터 재청빙을 받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신현교회에서 정 목사의 전반부 사역은 교회신축이었고, 후반부 사역 역시 교육관 건립을 위한 대지확장과 건축비 모금으로 또 한번의 큰 역사를 이루었다. 그의 후반부 목회활동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것을 정리해 보면, 교회성장을 위한 총동원주일 실시와 40일 다락방 새벽기도회와 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한 금요철야기도회, 해체되고 없어진 여전도회 재건과 기드온 신앙운동과 매년 개최한 전교인 여름수련회, 교회의 다음세대 육성을 위한 신현유치원을 설립(1985년 3월 11일 개원)하여 교인들 자녀들뿐 아니라,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선교적 차원에서 지역의 어린이들까지 입학할 수 있는 교육봉사 사역을 펼친 것이다.재부임한 후 교회는 안정을 되찾아 갔고 교인수도 늘어 2부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발 맞추어 교회의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겠다는 목회철학을, 정 목사는 교인들에게 말씀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월간 목회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크로스성서대학(Cross Bible College)과 한국루터교회 총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신·구약성경을 구속사론적인 입장에서 가르치는 벧엘 성서대학(Bible College) 과정을 교회에 도입, 전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먼저 교역자들이 해 기관에서 진행하는 지도자 과정에 등록연수를 받은 후, 1987년 2월부터 전 교인들 대상으로 개강하였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기 실시했던 부흥사경회의 재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막연한 심령부흥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라는 말씀처럼, 정 목사는 모든 성도들 마음 속에 성경말씀을 아로새기는 작업을 진행했다.말씀을 귀로만 듣고 잠시 후엔 잊어버리는 바람같은 부흥이 아니라, 음식물을 음미하며 꼭꼭씹는 것처럼 성경말씀을 가슴깊이 생기는 사경(査經)에 촛점을 둔 교육과정으로 벧엘 성서대학과 크로스 성서대학 과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 과정을 전 교인들에게 단계별로 실시한 결과 온 교인들의 삶과 봉사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이같은 결단과 실천계획은 아마 자신의 목회와 부흥사로서 겪고 얻은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였다고 본다. 당시 신현교회는 두 번의 교회분열이라는 아픔에서 벗어나는 계기이기도 하였고, 정 목사의 성역 4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이기도(1988년 9월 28일) 했다. 1999년 11월 11일 정 목사는 은퇴를 앞두고 신현교회 원로로 추대되었다. 그는 교정(敎政)에도 신현교회 부임 이후 서울노회 노회장,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회장, 교단지 기독신문 실행이사,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기독교TV 이사(CTS),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4년 9월 27일 대구 동부교회에서 모인 제79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95년 9월 19일에서 22일까지 서울 논현동 충현교회(당시 김창인 목사 시무)에서 개최된 제8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인 총회장에 피선되었다.그가 재직했던 제80회 총회의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21세기 교단부흥발전기획단을 구성하기로 하다. ② 당시 유행했던 소위 무료신학교(대표 이만희)를 일고의 신학적, 신앙적으로 가치없는 집단으로 밝히기로 하다. ③ 각종 주일실시를 폐지하고 연1회(5월 첫 주일)을 총회주일로 실시키로 하다. ④ 미주총회와는 우호관계를 증진토록 하다. ⑤ 미조직교회도 안수집사를 세울 수 있는 것으로 가결하다. ⑥ 선교사의 이중 교적(소속노회와 현지노회)은 불가하지만 선교후원금은 계속 지원하기로 하다. ⑦ 어린이 찬송가 증보판 발간은 허락하기로 하다. 정석홍 목사는 슬하에 1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들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돈독한 신앙인으로 국·내외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 목사는 신현교회를 마지막으로 사역을 마치고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L.A로 가서 자녀들과 함께 노년을 보내던 중 2000년 5월 12일 74세의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주관으로 총회장(總會葬)으로 마지막 예를 갖추었다.※본란 제1057호(2016.10.2) “제88회 총회장 손계웅 목사”는 제53회 총회장으로 바로 잡습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1-02
  • 60. 제30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
    평북 안주 출생최지화(崔志化 1884-1950) 목사는 1884년 평안북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최지화가 기독교에 입신(入信)한 후 출석한 교회가 성내교회(城內敎會)였다. 당시 성내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의 권유로 교인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김정선 장로가 세운 유신학교(唯信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신식교육 기관이어서 최지화도 부모들의 권유로 이 학교에 입학하여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였고, 1911년 선교사들이 경영하고 있던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엔 숭실대학(당시는 전문학교)을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숭실대학을 거친 후, 1917년 1월 평양노회의 입학허락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학업을 진행 중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 일제당국의 요시찰인물이 되어 신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진학하여 1923년 7월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로 장립 받기 전, 1919년 안주읍교회(성내교회의 전신)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장로로 시무하면서 안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장래 복음전도자가 되기로 준비하던 중 3.1독립만세 사건에 연류되어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갔던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중퇴하고 금릉대학 신학과를 마친 최지화는 안주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자마자 1924년 안주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후에 평양노회 소속 연화동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평양노회로 이명했다. 이후 그는 평양노회(平壤老會)소속으로 총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여타 다른 목사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생활고를 모르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보통학교 교육으로부터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성직자가 되었기에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안에서는 실력 있는 엘리트 목사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옥에 티라 했던가. 그에게도 씻을 수 없는 당시 식자(識者)들이면 모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친일사건이 늘 그에게 그늘처럼 따라다녔다. 그의 친일행적을 일견해 보면, 1919년 1월 제15회 평남노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았는데, 같은해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열린 조선독립 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윤원삼(尹愿三), 김선두(金善斗), 강규찬(姜奎燦), 도인권(都仁權) 등과 함께 참가했었고,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 김구(金九), 도인권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는 호소문과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12월 중국 안동현(安東懸)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안병찬(安秉燦)을 총재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할 때 교육부장을 맡았다. 이듬해 1920년 4월 제2회 총회에서는 신설된 서무부장을 맡았다. 같은 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참사(軍務部 參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숭실대·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한 엘리트한때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 활동주기철 목사 면직 처분 결의 당사자일본제국군 위해 전투기·교회종 헌납일제에 항거하지 못한 지식인의 나약한 면모 보여1921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화동유학생연합회(高麗華東留學生聯合會)를 조직할 때, 주요한(朱堯翰)과 함께 금릉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써 의사부(議事部)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 금릉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평양에서 교육강연(敎育講演)을 하였다. 1924년 6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로 있다가 안주노회(安州老會)로 옮겨 그해 12월 안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안주서교회(安州西敎會)를 거쳐 안주중앙교회와 평양연화동교회를 담임하며 목양하기 시작하였다.1939년 9월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評議員)을 맡았고, 동년 12월엔 평양노회장으로써 임시노회를 소집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朱基澈) 목사의 목사면직처분을 결의했다. 1940년 3월 20일엔 자신이 시무하던 연화동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양노회지맹을 결성하고 이사장 겸 평의원까지 맡았다. 1940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88-789참조). 1941년 11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제30회 총회가 평양 창동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목사회원 104명, 장로회원 104명(미참 1명) 207명의 총대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총회에서 선교사 대표는 한 사람도 참석치 않았다. 일제 당국이 적성국가로부터 와 있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막았기 때문이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곽진근 목사는 국가의례를 먼저 거행한 후 부회장이던 최지화 목사는 성경 딤후 2장 5절을 봉독하고 현시국에 기독교인의 생활표준 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서기의 회원 점명이 끝나자 절차 위원장인 이인식목사가 총회 회의순을 보고 하였다. 그 회의순서에 따라 제30회 총회 기념식 현장에서 시난극복(時難克服)이란 결의문을 발표하고 지나주둔황군사령관(支那駐屯皇軍司令官)에게 전보(電報)를 보내기로 가결한 후 임원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총회장에 최지화 목사, 부회장에 전필순(全弼淳) 목사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튿날 11월 22일 오전에는 총회 총대 전원이 총회장 인솔하에 처음으로 평양신사(平壤神社)를 참배하고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총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총회장의 사회로 진행하였다. 예배 후 다시 회의장인 창동교회(倉洞敎會, 1905. 1. 22 설립)로 이동하여 평안남도 후까이 고등과장의 강연을 들을 후, 다시 총회장의 인도로 ① 국기경례 ② 개회사 ③ 궁성요배 ④ 국가봉창 ⑤ 묵도 ⑥ 서사제창 ⑦ 찬송가(제7장) ⑧ 기도 ⑨ 성경 ⑩ 총회년혁보고 ⑪ 기념사 ⑫ 선언 ⑬ 고사(告祀) ⑭ 축사 ⑮ 찬송가(3장) ⑯ 축도 순으로 진행되었다.이미 중일전쟁(일명 支那事變)으로 일본 황군(皇軍)들은 동남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러한 운의 시기를 맞이한 총회는 산하 각 노회로 하여금 조선장로교애국기상당수(朝鮮長老敎愛國機相當數 일본제국군전투기구입모금)를 헌납하기로 작정하고 그 헌금은 유아세례자와 실종자를 제외하고 교인수 비례로 1인당 1엔씩 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일로 최지화 목사는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는 친일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숙청대상자가 되었다. 이 당시 애국기(愛國機) 헌납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각 노회마다 기성회(基成會)를 조직해 그 기구를 발족한즉 실무자로 위원장에 정인과(鄭仁果 제24회 총회장 역임) 목사, 서기에 장홍범(張鴻範 제22회 총회장 역임) 목사를 각각 선임하였다. 특별히 충남 부여 신궁 건설에 전국노회 대표 72명이 1941년 10월 31일 봉사했음을 보고 받았다. 한편 최지화 총회장은 1942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이 주최하는 지방 시국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었다. 같은 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 위원을 겸했고,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이사장으로 각 노회 연맹 이사장들에게 교회종을 헌납한 상황을 급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백남준, 이상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육군 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만3221원 28전을 헌납했다.1942년 9월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간담회 감리회 박연서, 이동욱, 장로교 전필순, 정인과, 성결교 이명직 등과 함께 참석해 일본기독교단 통리 토미타(富田滿)로부터 기독교 각 파의 통합을 권고받고 교파통합을 논의하게 되었다(친일인명사전(제3권) 같은 책 p.789 참조).해방후엔 더 이상 교회에서 목회 할 수가 없어 사임하고 모교였던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0년 6.25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최지화 목사가 재임했던 재30회 총회결의 안건 중 중요사항을 살펴보면, ① 1941년 11월 22일 총회 총대 일동이 개회 이튿날 아침 평양신사에 총회원 전원이 신사참배하다. ② 부여신궁 건설에 전국 각 노회 대표들 72명이 자진 근로봉사 하다. ③ 1941년 6월 30일 금강산 기슭에 있는 교단 총회 수양관을 철거하기로 하다. ④ 총회설립 30주년기념예배를 장대현교회에서 드리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법도 없지만 좋지않은 역사의 반복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신전의식(神前意識)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0-21
  • 59. 제79회 총회장 김덕신(金德信) 목사
    경남 부산 출신김덕신(金德信 1929. 8. 20~2009. 11. 18) 목사는 고향이 경상남도 부산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난 1930년대는 조선의 국권이 이미 상실된지 오래되었고, 민생들의 생활고는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피폐될 대로 피폐되어 어린 덕신에게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다. 교육다운 교육의 기회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어나 성장한 항구도시 부산만해도 늘 외침의 전초기지로 지역이 낙후한 가난과 혼란의 도시였다. 물려받은 재화(財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특별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지만 어릴적 가까운 이웃에 있는 교회에서 듣고 배운 어슴프레한 예수님에 대해 들은 성경 이야기가 늘 덕신 소년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이 읽다가 버린 책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베였다. 어떤 때는 밤새껏 호롱불을 밝혀놓고 신문이나 잡지로부터 쪽복음성경 등을 밤새워 읽었고, 때로는 당시에 향학열에 불타고 있던 조선 청소년들을 위한 일본의 유수한 대학들이 펴낸 통신강좌 교재가 눈에 들어왔다.그가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날 당시로서는 대구 유일의 정부(문교부)인가 신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평동(중구)에 있는 최정원(催正元)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대구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이 학교는 후에 대한장로회신학교(합동측)와 재단이 합해져 대신대학교(경산 소재)로 병합되었지만, 6.25 전쟁이 막 끝나고 혼란한 와중에서도 대구와 경남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로는 호남지방에서까지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최정원 목사(기독교성결교 소속)의 소문을 듣고 젊은 기독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최정원 목사는 명성 그대로 전국에서 청함을 받고 있는 유명한 부흥강사였고 신학교수였다. 친히 개척해 세운 공평동교회는 성경박사로 통하는 최 목사가 세운 신학교와 함께 소문난 교회라 전쟁과 가난으로 찌든 소망없는 서민들에겐 큰 위로와 소망이 있는 복음의 현장이었다. 그가 세운 신학교는 3년제였지만 교파를 초월해 전국에서 영혼이 갈급하고 전쟁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시내에 있는 큰 장로교회에 나가는 현직 집사와 장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을 이루고 있는 공장장들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해 청년들이 모여들었다.최 목사는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오늘날 겟세마네 동산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였다. 한번은 새벽기도회 때 당시 신학교 학생들이 최 목사를 시험하기 위해 어느 간 큰 학생(김종규 목사 증언, 현 예장통합 은퇴목사)이 살금살금 기어나가 그가 기도하는 얼굴 앞에 오른손을 들고 슬쩍 지나쳤는데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 신학생들 사이에는 진짜목사라는 별명이 나돌았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김덕신 청년이 바로 이 최정원 목사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 6.25 전쟁 직후 혼란했던 대구에 생활터전을 잡고 있을 때 생긴 생애의 전환기가 될 줄이야… 임마누엘파 대구신학교 졸업신정교회(서문교회)서 정재순 목사에 영향 받아북일·서부·동부교회 시무대신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활동동부교회서 손계웅 목사 이어 2대 총회장김덕신이 대구에 왔을 때 출석한 교회는 대신동 서문시장 가까이에 있는 신정교회(新町敎會, 현 서문교회)였다. 그는 당시 대구 경북지역의 기라성 같았던 정재순(鄭在淳) 목사가 신정교회를 담임하고 있어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이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28. 제17회)을 역임한 염봉남 목사가 시무했었던 교회였다.이런한 배경에서 신앙이 성장했던지 그가 목회한 목양지도 시내에 있는 북일교회(北一敎會), 서부교회(西部敎會)와 마지막 임지였던 대구 동부교회(東部敎會)이다. 한때 그는 최정원 목사가 운영하는 대구신학교 성결교단에서 운영하는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교리의 오해를 산 적도 있었으나 그의 신앙의 뿌리와 기준은 장로교회였다. 그는 대구신학교 졸업 후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고(1977), 1981년엔 미국 Prince George College에 가서 공부한 적도 있으며, 1982년엔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박사(D.Min) 학위과정을 마치기도 하였다. 김덕신 목사가 이렇게 독학으로 시작하여 정식으로 학교교육을 받기까지 있었던 요인은 그의 강인했던 건강과 뜨거운 향학열의가 일구어낸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사역했던 북일교회(현 서석수 목사 시무)와 서부교회(현 남태섭 목사 시무)와 동부교회(현 김서택 목사 시무) 교인들의 공통된 김 목사에 대한 평가를 참고해 보면, 첫째 독서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 분이다. 둘째 무슨 일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철두철미하다. 셋째 그의 끊임없는 학구열을 든다. 넷째 기도를 하면 성취할 때까지 뿌리를 뽑았다고 한다. 다섯째 당회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는 스타일의 지도자이다. 여섯째 설교 중에는 예화를 사용,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는 장끼가 있었다고 했다.한 번은 같은 지방에서 김 목사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면, 대구 대신동에 있는 기독교서점에서 만났는데, 어떻게 나오셨느나고 인사를 했더니 다음 학기 강의시간이 이단종파연구라고 하면서 두 세권의 중요서적만 구입하면 될 것을 20권이 넘는 이단 관련서적을 몽땅사서 보따리를 꾸리는 것이었다. 목사님 두 세 권 사서 보시면 될터인데 왜 이렇게 많은 양의 책을 구입하시느냐 했더니 요즈음 학생들 가르칠려면 교수가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많은 책을 타고 온 차 트렁크에 싣고 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구 동부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던 정태호 목사 증언에 의하면, 김덕신 목사의 목회의 중점은 주일낮 설교에 있었고 주일 낮 예배가 11시에 시작되면 오후 1시 넘기기를 예사였다고 한다. 한편의 설교준비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고 하면 주일이 지나도 매일 그의 서제엔 새벽 1시 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설교에 나선다는 것이었다.동부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해 일생을 바쳐 30년 3개월의 세월을 마치고 은퇴한 전임자 손계웅 목사의 바톤을 이어 받아 1976년 부임하여 2000년 1월 21일 은퇴, 동부교회 원로로 추대받았으며, 그는 교정(敎政)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지역교회와 지역사회 지도자로서도 큰 몫을 감당하였다.1955년 목사 장립을 받은 후 오늘날 대 교회들로 부흥 성장하고 있는 대구 북일교회와 서부교회를 비롯 대구 동부교회를 마지막 임지로 끝내면서, 가장 오랜기간 동안 목회사역과 함께 힘쓴 일이 있다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여한 1975년부터 시작된 그의 모교이기도 한 대신대학교에서의 실천신학교수 사역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그는 목회학과 설교학 뿐만 아니라 이단종파연구 및 예배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사역에 큰 보람을 느끼며 후배를 양성하였다. 1993년 9월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1994년 9월 27일에서 30일까지 그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9회 총회에서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 교단을 위하여 1년간 혼신의 정력을 다해 교단 수장으로써의 사명을 다하였다. 김덕신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므로 동부교회는 손계웅 목사(1968. 9. 제53회 총회)에 이어 두 사람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김덕신 목사가 재임했던 제7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교단정책위원회를 부활시켜 규칙대로 시행하기로 하다. ② 선거공영제를 도입 실시키로 결의하다. ③ 성경공회를 전면 개편해 재추진하기로 결의하다. ④ 이단조사연구위원회를 조직해 상설기구화 하기로 가결하다. ⑤ 지역노회 경내의 타지역 노회소속 교회는 해당지역 노회로 보내기로 가결하다. 단, (1) 무지역노회는 제외키로 (2) 분리 당시 총회가 인정한 것은 제외하기로 하다. 김덕신 목사는 퇴임 후 미국에 있는 자녀들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2009년 11월 18일 서거하였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이 있다면 그가 총회장을 지낸 후 후배들에게 ‘내가 총회장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언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총회장 되던 해의 개혁측의 분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었고, 생애 마지막엔 주위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매우 미약했다는 후문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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