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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음은 존재의 행위
    믿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근본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 없이 사람들 사이의 교제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교도 없다. 믿음의 본질은 신약에서 처음으로 발전되나 구약에서도 경험의 중요한 단계를 밟아 나타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를 창조주로,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의 구원하시는 자비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온전하신 구주요 인간의 영혼의 절대적인 주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인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맺은 것이다.그리스의 정치철학 고전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존재를 연구하면서 존재의 1차적 의미는 모든 것이 밑바탕에 있는 본질 또는 그 형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행복을 바라는 존재로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신앙적 덕을 실천함으로 가능하다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존재 개념에 단일한 의미를 부여하려 함을 알게 된다. 대표자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 철학은 중세 후반기에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자연과 인간을 조화시킴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스콜라철학이 등장하고 신앙적 덕과 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물 속에 투영시키고 생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하신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 생명은 모채를 통해 잉태하고 낳는 과정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잉태를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근거가 되고 땅은 개체생명의 모체로서 생명의 산실로서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들은 이 땅에서 상호교류하며 소통하며 평등하게 누릴 권한과 성장하는 기회를 4계절을 통해 똑같이 제공받는다. 이렇게 땅은 생명의 생성과정에서 하늘의 창조질서를 따라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작용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명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과학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과학에서 무생명으로 보았던 햇빛, 땅, 물, 공기 등도 본질적으로는 생명력을 보유한 생명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생명작용에 의하여 생명들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에 앞장서서 생태계의 위기를 보며 삶의 환경을 살리는 실천이 여기에 요구됨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 하실 때 그 안에는 질서가 있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생명의 경외(敬畏 )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선했으나 인간들이 그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는 타락과 그 죄로 심판을 받는 점을 자연은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모든 생명관계 안에 일하고 섬기며 책임지는 청지기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여야 하며 생명은 서로 존중하는 상호적인 관계를 갖게 함을 알게 한다. 이 상호적인 관계에서 서로 나누는 사랑의 자리를 알게 한다. 사랑은 서로가 행하는 것으로 서로 이끌리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하나님이 창조 과정에서 모든 의식 체계에 부어 주신 이끌림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실재를 끌어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여기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적 사랑이시고 인간 존재와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의 승리는 강압이 아니라 설득력과 매력 또는 마음을 끄는 힘, 결코 소진되지 않는 무한한 영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명이 차오르는 힘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성장 성숙해 낸다. 꽃이 피는 것은 꽃의 가능성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결핍을 채웠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으로 조건을 능동화시켜 생명을 탄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생명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 다. 그리하여 생명은 우주를 지탱하는 힘이며 그 지탱하는 힘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현대 사회는 행동 기준을 상실한 시대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명확한 답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초고속으로 달려가는 현대문명 앞에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관에 의미를 가졌던 낡은 윤리체계와 행동기준이 무너지고 거기에 대처할 새로운 윤리체계와 행동기준이 아직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대의 윤리적 상황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6-22
  • 성령의 역사와 그 믿음
    오순절 때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 소동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세계 각처의 디아스포라 방문객들을 놀라게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이 사건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설교를 했다(욜 2:28-32). 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 베드로의 강한 메시지로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는 위대한 구원 역사가 일어나 제자들의 수는 날로 늘어났다. ‘성령의 역사’는 삶에서 일구어지며 일구어 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시다. 오순절 때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임하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9-11). “성령의 역사(役事)”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삶에서 일구어지며 일구어 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나타내심이다.여기에 파스칼은 모든 사람들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 믿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져서 믿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기를 간구한다.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 팡세(Pense'es)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매료된 믿음의 삶을 구상했기에 '팡세'라는 미완성의 유작인 '팡세'를 유작으로 남겼기에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피력하여 당시 세계전쟁에 나간 프랑스 군인들의 배낭에는 항상 성서와 함께 팡세가 들어 있었다고 후에 사람들은 간증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증언으로 성령의 능력에 간증함을 알게 한다. 세계대전 때 젊은 프랑스 젊은이들은 포성이 들리고 포연이 자욱한 참호 속에서도 ‘팡세’ 열독은 대단함을 알게 한다. 그는 과학자요 수학자로 천재였다. 그가 남기는 믿음의 절규는 인간의 육체를 기계 또는 이성으로 비유하면서 “기계를 굽혀라” ‘그리고 교회에 나가 육체의 습관이 영혼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영혼을 하나님의 방향으로 기울게 하여 바보가 되라’고 그의 명상록에 기록했다. 그는 ‘팡세’에서 이성의 판단이 그칠 때 하나님의 은총은 마음을 비추리라'고 한다. 이는 “성령을 받은 삶”으로 사는 믿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 계시하듯이 인간의 정신 속에 성령이 계시함을 알게 하고 또한 몸속에 있다고 한 말은 정신이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고, 이 정신의 에너지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살아 있는 에너지 성령이다”라고 한 말에서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한 ‘삶의 의미’를 새겨 본다. 그리하여 성령 강림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잊어버린 진실을 증언하게 한다. 그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우리들이 변화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좁은 생각의 반경이 넓어지고 우리의 닫혔던 마음이 열려 갈등과 분열, 폭력과 미움 그리고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긍휼로서 감싸 안았던 사마리아인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오순절 때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소동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세계 각처의 디아스포라 방문객들을 놀라게 했다. 오순절 때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임하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역사(役事)”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삶에서 일구어지며 일구어 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나타내심이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모든 사람들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 믿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져서 믿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주어진 삶을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파스칼은 그의 명상록(Pense'es)에서 인간의 육체를 기계 또는 이성으로 비유하면서 “기계를 굽혀라” ‘그리고 교회에 나가 육체의 습관이 영혼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은총이 영혼을 하나님의 방향으로 기울게 하여 바보가 되라’고 그의 명상록에 기록함에 삶을 깨우치게 한다. 이성의 판단이 그칠 때 하나님의 은총은 마음을 비추리라고 한다. “성령의 역사와 그 믿음”으로 삶을 사는 믿음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6-09
  • 예수 승천과 파루시아
    금주 5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지 40일이 되는 날로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승천일’을 기념해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갖게 해야 한다. 신약 성서에서 보면 사도행전1: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뒤 40일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그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 되어 졌고 요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도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승천의 의미는 예수의 죽음과 그가 부활한 뒤 승천했고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그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 승천 축제는 4세기 이래로 동서양이 모두 부활절 후 40일이 되는 날에 베풀어진다. 승천의 신학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모든 이들에게 내려지는 최종적인 구속의 행위, 즉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려짐으로 그가 우리를 하느님과 고난과 기쁨을 함께하는 자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다”라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렇게 ‘예수의 승천’은 초대 교회에서 세례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언급되어 있다. 승천 축제는 그리스도교도 사이에서 크리스마스. 부활절. 오순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 왔으나 4세기 이래로 동서양이 모두 부활절 후 40일 되는 날에 베풀어 행사 되어 왔다. 그러다가 중세기에 와서는 승천 축제는 보다 적극적이고 시각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행사 진행은 축제와 그림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와 함께 감람산에 올라갔던 것을 흉내 낸 행렬, 십자가를 세우는 것, 교회 지붕을 통해 부활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올리는 것 등이 포함되어 진행되었다. 서양에서는 승천을 다룬 최초의 작품은 예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구름으로 부터 나타난 하느님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리스도를 옆면에서 그림 그리는 것으로 11세기 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예수의 승천”은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 미술의 주요한 주제였고 두 시대 미술 모두 그리스도가 그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는 성상화를 담고 있음을 보고 오늘의 교회의 행사에서는 승천의 의미와 그 행사가 아예 없이 “예수 승천”의 의미부연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음에서 본래의 신앙의 특색을 드러내지 못함에 유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오늘의 교회예배갱신으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지적 한다면 교회의 예배는 교회의 전통 예배로 부터 출발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오늘의 교회예배가 그 전통을 살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전통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바탕에서 그 의미를 갖게 하기 때문이며 예배의 질은 세계교회의 공동의 예배 유산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폐쇄적인 교파주의 예배전통을 지양하고 전통의 유산을 확인해 가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과 승천을 달리해 왔다. 이는 사실이다. 예컨대 승천절을 부활절과 성령강림절 중간에 위치하게 되면서 현존 하시는 그리스도를 지시하기도 하고 성령 강림이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건임을 시사해 오기도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아는 것은 영원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신학적 인식을 가지고 이를 실행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사실로 이는 승천이 현대신학에서 무시 받았던 것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신앙의 실천에 무관하게 이해하는 그런 점에 기인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성찬 및 예전의 의미를 현존 하시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조명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행위를 일상의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 행위를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신앙” 만이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이 될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님의 승천을 그린 대부분의 성화들의 전통적인 특징은 그 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특징은 오른 손을 들어 땅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축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인데 이는 세상의 모든 교회들을 위한 축복을 뜻한다. 승천의 목적 중의 하나가 우리가 거할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요한14:2)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승천은 성서적이고 사도적인 사건이기에 반드시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제2 스위스의 신앙고백서에도 승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인성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에 없음을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부재를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성찬의 떠과 포도주를 통한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아가 승천하신 모습그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된다는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6-01
  • 시간과 공간에 붙들린 삶
    금번 우리는 대통령 선거 풍토에서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면에서 삶의 자세를 많이 보게 되었다. 그동안 산업사회를 살아 온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정치와 경제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관계를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사회 제도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의 현실에 시달려 왔다. 가치가 혼돈된 시대에 방황하는 국민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인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개혁의 방향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정치인의 의식 개혁이 먼저 더 중요한 정치 현실임을 주지한다. 오늘의 정치의 위기는 잘못된 가치의식과 그 규범에서 유래된다고 본다.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은 ‘정의 보다는 불의, 신뢰 보다는 불신, 질서 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처절한 사회현실’을 보게 한다. 삶의 가치는 반드시 정로(正路)를 걸어가야 얻어진다. 정치가 진실과 정의와 인권과 박애를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이권을 중심으로 음모를 일삼는다든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의 기회로 국민을 기만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몰락 일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자기의 양심과 신념, 신조를 속이지 않고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범한 아량을 보여주며 진실을 말해 주는 자세는 존경받는 생활 자세이며 영향력을 가진 몸가짐이라 할 수 있다. 인사권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합리적 판단과 소신에 따라 결정 하려고 하는데 이에 다른 결정을 내려 주도록 자기와 친한 동기 동창생이 혹은 친척이 혹은 고향 친지가 부탁해 오는 경우에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힘든 유혹(뇌물)과 함께 요청이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무엇이 그 잣대 노릇을 할까? 생각하게 한다.여기에 오늘의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하나님과 우주 만물을 이분법적인 대립관게로 보지 않고 통전적이며 유기체적인 생명관계로 이해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A.N.Whitehead,1861-1947)는 “과정신학”을 신학에 적용하여 보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살아가는 것을 제시함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과 공간의 삶의 관계가 내면적이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으로 공간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인간의 생활 속에서 사실과 의미를 갖게 되고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공간, 자연공간,인간적 공간으로 그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공간에 있어 인간은 신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일상의 우리의 모습에서 보면, 전화를 할 때 첫 번째 대화는 “지금 어디야?” 한다. 이는 상대방의 위치에 있는 장소부터 확인하는 것에서 이를 알게 한다. 이를 확인하는 것은 그 공간을 앎으로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삶의 형편인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장소가 없으면 되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은 시간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보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여기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살아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했다’는 것과 그 공간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한다. 지금에 와서는 여기에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창조 우주 세계를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보게 하는 통찰력으로 그 신앙을 갖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여기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원점을 태초에 시작함으로 세계의 차원과 우주의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공간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유도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5-18
  • 시민사회의 시대정신은 궁극적인 관심
    창세기의 맨 먼저 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기로 결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상응하는 피조물, 그분이 말씀하실 수 있는 피조물, 말씀에 귀 기울이는 피조물을 창조하셨으며, 이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관계를 맺어 창조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의 관계’를 말함에 유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정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창조자의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 했다. 어디에서 어디로 던져졌을까? 인간은 그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 한계로 인해 우리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가 바로 나와 관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할 수 있는 지점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 관심이어야 무엇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신학자 틸리히(Tillich)에 의하면 신학의 일차적인 기준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을 깆도록 하는 데 있다. 신학은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을 취급하고 이러한 대상을 취급하는 명제만이 신학적이라 한다. 그 궁극적인 관심이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위대한 계명은 인간 정신의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정신생활의 궁극적이고 정신생활 모든 기능이 이 안에 있는 ‘깊이’(depth)의 차원으로 삶의 가치이라 한다. 여기서 말한 ‘깊이’란 인간 정신생활의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것을 나타내는 공간적 은유이다. 이 궁극적 관심으로 한 사람의 행위는 신앙의 궁극적이고 무제약적인 관심이며 전 인격적이고 인간 정신의 가장 구심적인 삶의 행위라고 한다면 또한 민족이나 국가나 물질이나, 명예 같은 궁극적이지 않는 데에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이며, 유한한 신앙적 표현들을 절대시하는 것은 “종교의 악마화”(demonization of religion)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일상생활의 상대적이고 무상한 경험의 흐름을 초월해서 그 궁극자 하나님을 열어 보이신다. 이렇게 궁극자를 열어 보이시는 신앙, 즉 궁극적 관심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요 삶의 가치이다. 궁극적인 관심, 즉 깊이의 차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가장 신앙적인 모습이며 인간 정신생활의 기반이며 삶의 근원인 가치가 된다. 그럼으로 삶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한 인간존재의 근원을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인간은 삶의 진가인 신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의 삶을 보면 인간은 실존적으로는 존재의 깊이에서 단절되고 분리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인간이 죄인이요 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병원이 잇다는 것은 환자가 있음을 전제 하듯이 신앙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존재의 근원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신앙은 소외된 인간실존에 존재의 깊이를 열어 주고 일상의 소음을 넘어 초월자를 계시해 준다. 동시에 그렇게 게시된 것이 바로 신앙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궁극적 대상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존재자체(being-itself)를 하나님을 존재의 창조적 기초이며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성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 주었고 그 제자들은 죽음을 불사한 예수의 인격적 삶 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힘을 느끼게 한다. 당신은 ‘궁극적인 관심’으로 삶을 보여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5-04
  • 죽어야 사는 신앙
    새 봄이 되면 땅 속에 묻혀 있던 식물들에 싹이 나오고 죽은 나무 같았던 고목에서 새 싹이 움트며 메말랐던 잔디에서 푸른 새움이 솟아나는 신비함을 볼 수 있게 된다. 작은 벌레인 유충에서 나비, 매미들이 나오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달걀 속에서 병아리의 부화는 많은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는 약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생명의 약동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사는 이러한 생명의 약동에서 생명은 죽음의 바탕에서 열매를 맺는 씨로 태어남을 알게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본문의 말씀으로 생명을 가진 인류 앞에 선언하시며 “죽어야 사는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알게 한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시체를 떠난 영이 3일간 무덤 주변을 떠돌아다니다가 4일이 되면 시체가 썩기 시작하고 영은 무덤을 떠난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본문에 나타난 죽음의 늪을 헤매는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죽음 권세를 제압하고 부활하실 것을 암시하는 예고이다. 고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을 위대한 희망의 상황으로 즉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은 ‘구원의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즉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뜻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 이후에도 오는 영생을 믿게 한다. 그리스 로마의 종교사상에서도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이 있었으나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없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대는 구약성서에서 발견된다. 부활 후 의로운 자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에 참여하고 불의한 자는 그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에스겔서, 다니엘서).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째 되든 날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으며 이렇게 그가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 죽음, 악마를 물리친 그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신앙에 믿음을 두고 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부활을 확인한 다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로 순교했고 의심 많은 도마는 새로운 용기를 갖고 인도(India)에 복음을 전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후서 15: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 된다고” 그 믿음의 신앙을 확인하였다.예수님의 부활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변화를 가지고 삶에 대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던 권력이나 명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삶에서 구현(具現)하는 모습을 삶에서 실천하게 되었고,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더 중요함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박해를 당해도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부활의 사실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을 보는 세상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부활신앙’은 복음의 핵심이요 삶의 대전환점이 되었다.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부활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살아있지 못한 신앙이며 삶에 자기를 내 놓고 회개하며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죽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믿음의 신앙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신앙의 경지”를 깨달을 것이다.본문의 마태복음의 말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찾을 것이다”는 말씀의 자리는 “죽어야 사는 부활신앙”을 알게 한다. 인간들이 흔히 사는 삶에서도 이러한 삶의 태도가 위대한 삶의 역사(歷事)를 알게 된다. 예컨대 중국의 오자병법(吳子兵法)에서도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은 성서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태16:25) “죽어야 사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부활신앙을 가꾸기를 기도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4-20
  •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위하여 공히 예루살렘의 입성을 축하하는 그 행보에 영광을 받으신 날로 그 성덕을 기리기 위해 종려주일을 맞으며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그 행보로 종려 주일로 지키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인간의 짐을 지시고 그 낮아짐을 보이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주간을 지키게 함을 알게 한다. 이는 고난의 의미를 시작하는 주간을 지키기 위한 주간과 종려주일로 지키게 되는 그 믿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종려주일을 첫날로 고난 주간의 의미를 가진다. 16세기 종교 개혁이후고난주간 의식으로 종려주일 행사를 지키는 의미도 상실했으나 오늘날 교회들이 종려주일의 의미를 상기하고 교회의 한 절기로 지키게 됨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님이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때 그들을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그 날을 못 잊어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지킨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기 까지 모든 일들이 이 한 주간 동안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AD30년 니산월 9일(AD 30년 4월2일)은 우리 주님이 입성하시는 주일이며 또한 여기에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한다. 주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자신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환호한 날이어서 “호산나 주일”, “종려 주일”이라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일주일의 행적으로 우리 그리스도교의 ‘구원사’에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님을 정확히 알게 하고 구원의 은총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믿고 그 뜻을 믿음으로 알게하고 이를 이미 믿음으로 깨우친 독일의 교회음악 작곡가이며 세계적인 음악가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17세기 후반에 가장 뛰어 난 음악가로서 2백 년 동안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시킨 진실한 크리스챤으로 종교 음악에 교회의 예배와 직접 관계가 있는 ‘수난곡’ ‘오라토리오’같은 음악을 성서의 말씀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특히 ‘수난곡’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의 이야기를 묘사한 점에 그의 믿음을 따르게 한다. 그 음악의 형태는 ‘오라토리오’와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 반주에 레치타티보를 곁들인 웅장한 것이다. 이렇게 바하는 ‘수난곡’을 다섯 곡이나 작곡했다. 그 다섯 곡은 ‘마태복음’, ‘요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피칸더(picander)의 대사에 곡을 붙인 것 등이다. 이 중 ‘마가복음’과 피칸더에 의한 곡은 분실되어 없고 ‘누가복음’에 붙인 곡은 위작으로 간주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난곡’은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 뿐이다. 독실한 신자인 ‘바하’는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음악성향으로 성서의 말씀을 믿음으로 토해냄을 알게 한다. 그가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는 항상 이렇게 기록해 둔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뜻을 지닌 의미로 그의 믿음의 고백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음미하는 신앙은 고난의 삶속에서도 그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으로 살면서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신앙인의 결의가 무엇인가를 종려주일을 맞으며 일주일간의 예수님의 고난주간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4-14
  • 역사(歷史)의 삶
    그 시대마다 삶의 상황은 정치적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든지 그 사회나 국민은 병든 사회였으며 오늘의 삶이 병든 사회의 삶 임을 알게 한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역사의 사실들은 역사가가 그것을 창조할 때 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같다. 역사는 원인에 대한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역사 해석은 언제나 가치 판단과 일정하게 연관되며 여기에 인간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역사에 매여 삶을 살아간다. 문명사회에서의 교육을 하는 방편적 교육을 하는 것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사적 상황에서 역사적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여기에 의미부여가 요청된다. 삶의 의미 부여를 하려 할 때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존재 질문을 하 게 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생명이요 생명으로 충만해짐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삶 은 충만해진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에 활기를 느끼며 삶의 주변에는 모든 것이 살아있음 으로 생존함을 느끼게 한 다. 예컨대 땅이 살아 있고 물과 공기도 살아있으며 물과 빛도 살아 있음을 사실(fact)로 깨닫게 된다. 실제로 생각하는 것은 죽은 것, 죽은 사람이 무엇을 느끼며 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점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죽은 사람이 남에게 할 일이 있겠는 가?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감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삶은 살아 있어야 한다 는 전제를 알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깨달음을 깨우치지 못한다. 우리는 사실로 이를 깨닫지 못하고 걸어 다니는 송장으로 행사하려 한다. 여기서 한 삶이 역사를 지고 다니려면 여기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인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 사는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이는 순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그렇다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익히 아는 것으로 역사의 원 순교자인 예수님 의 삶을 알게 한 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열매를 맺고 한 생명을 움트게 하는 역사적 상황에서의 이루어진 자신의 사명과 그 시대의 삶에서 실천의 사실 로서 자신을 보내신 분에 대한 자기의 고백과 세상을 향한 자기 삶의 증언으로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고 고백하는 자기 증언의 피력 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이러한 순교의 원형에 대한 상황적, 해석학적, 믿음을 토대로 삶의 열매로 죽음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중심에 있게 됨을 믿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그 시대의 생명의 삶 인가?”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자 리하고 삶의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 그리하여 현세의 역사 라는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기준하여 기원전은 예수 탄생전 (BC=Before Christ: 예수 이전)으로 하고 기원후는 예수 탄생 후 (AD=Anno Domini: 하 나 님의 해)로 말함을 알게 한다. 이 역사의 예수 삶을 역사로 인정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이야기라 하여 영어로 역사를 그분의 역사 가 이야기되라는 의미로 역사를 “HISTORY”라 함을 알게 한다. 삶은 감정의 실마리로 살며 여기에 정서는 인간의 본능을 기초로 하여 감정의 실타래를 푼다. 예컨대 내가 만나는 사람, 내 앞에 주어진 일, 내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내가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 에 따라 나의 반응 즉 내 느낌과 생각이 다르고 내 느낌과 생각 여하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의 대응이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같은 상황, 같은 사 실 에 대해서도 사람마다의 인식과 대응이 다르고 그 다름으로 인해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 예컨대 내게 주어진 상황 내가 당면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인 식 하고 대응해 왔는가가 곧 내 삶의 현실로 이어졌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잠재의식 속에 이미 오래 전부터 갖추어진 믿음에서 비롯되며 그 믿음이 변하지 않는 한 내삶은 변화지 않는 법이다. 이 잠재의식 속 내 믿음의 뿌리는 나와 내 조상 뿐만 아니라 먼저 살아 온 삶의 경험이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 온 삶의 경험들이 단 한순간도 놓침이 없이 그 경험들이 당시의 느낌과 감정이 그대로 의식, 무의식에 저장 기록되고 의 식 과 무의식에 저장 기록된 경험 정보들이 쌓여 매 순간 내 가 당면하는 상황 내지는 사 실 들을 인식 대응하는 마음의 기준 잣대가 되 어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4-01
  • 생명의 고난
    생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의미로 보아 살아 움직이는 시작이라는 뜻이며 비로서 그 창조는 창조자의 섭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생명에서 와서 작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세상 만물, 만사, 만상에서 그 사상(事象,events)의 정상적인 경로에서 자연스럽게 쉽게 그 무엇이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두 종류의 대상물을 구별한다. 예컨대 '창조된 대상물과 시간'에서 저절로의 우연 그리고 다양한 자연과정의 결과로 생긴 대상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눈(雪)송이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양 또한 복잡하다. 그러나 그 눈송이 하나하나는 영도C의 상태 하에서 물의 분자가 ‘자연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생긴 결과인 것이다. 눈송이 패턴을 딴 모자이크 타일의 디자인은 눈송이의 그것보다 더 이상의 대단한 디자인을 보여 주지 못함은 물론 모자이크 타일의 복잡성, 또한 눈송이의 복잡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움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자이크 타일에서 창조된 디자인들은 이 같은 패턴은 반드시 어떤 초월적인 외부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눈송이를 자세히 보면 정육각형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눈송이의 모양이 왜 육각형일까? 눈송이의 주요 성분은 물이다. 눈송이의 물분자가 안정적으로 배열해 얼어붙는 것이다. 물 분자는 온도가 내려가면 진동이 느려지는데 진동이 충분히 느려지는 순간 각 물 분자 속에 들어있는 전자들이 다른 분자를 끌어당겨 촘촘한 정육각형 배열을 이룬다. 이렇게 배열된 물을 육각수라 한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인간은 눈(설)을 가지고 그 이치를 따라 동계올림픽도 유도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놀랍게도 모든 것이 다 창조가 된 그 체계는 외부로 부터 오는 조직의 성질이 각 부분에 새로운 성질들을 부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성질은 체계의 부분 부분이 스스로 개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시간, 우연, 그리고 자연과정이 만들어 낸 체계의 질서는 ‘내부에서 온 결정’인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가 곧 ‘외부에서 결정한 질서를 가진 체계’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게하는 것이다. 여기에 빗대어 생명체계가 그 어려운 과정을 겪는 곳에는 반드시 어려운 ‘고난의 과정’이 따른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렇게 우주 전체와 삼라만상의 생명들은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그 원리대로 생명체계에 따라 질서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한 배려가 잘 반영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적 표준인 질서와 조직인 물질의 성질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기원이 특별한 창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바로 이는 “생명의 고난”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생명의 부활의 약동의 과정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바울은 본문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리도 명백하게 피조물은 창조주를 증언하고 있기에 실제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한 것이다. 창조된 질서 그 자체로서도 우리들 속에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다는 바울선생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의 증거들을 우리 주변에서 아무 까닭 없이 탓하고 원망하는 지천(至賤)이 많이 있게 됨을 보게 된다.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부터의 단절, 즉 영적단절 또는 영적 죽음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몸은 ‘고난과 생명의 소유’로 열매(존재)를 거두어야 한다. 이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려 나가는 하나님의 의지를 은혜라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자의 섭리의도는 생명체계가 질서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한 배려가 잘 반영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3-23
  • 청년 주일을 맞아
    청년이라는 성서적 의미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청년을 귀히 여겨 이들을 유혹으로 부터 보호하려 했으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 애썼음을 알게한다. 시편에서 보면 '젊은이가 어떻게 해야 그 인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길, 그 길뿐입니다.'고 하며 잠언에서는 '어수룩한 사람을 슬기롭게 하여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여 주는 것이니'8,에는 아이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하였다. 그리하여 성서에 청년에 관한 기사가 많은 까닭을 알게한다. 말하자면 요셉의 총리 등극, 다윗의 왕위 등극, 이사야의 소명, 예수의 공생에 시작, 젊은 12사도들이 주를 따름, 젊은 바울의 회심 등은 젊은 청년의 때에 일어난 일임을 알게 한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의 약속의 말씀에서 '시간의 때'를 알게 한다.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함에 주목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시간 안에서 "때"란 경우에 그 부분을 말하는 데 여기에 알맞은 '기회'를 적당한 시간으로 성서는 시기, 시대에 연대하는 의미를 알게한다. 한 시대를 바쁘게 살아야 하는 진정한 의미와 참된 가치를 찾도록 도와주는 구도자로서 삶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한다. 이 삶은 처하여진 삶의 현실에서 사회, 정치, 문화, 경제를 시대적 정황에서 하늘나라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전도서3장에서는 '매사에는 때가 있다' 한다. 젊은 예수님의 시대인식은 낡은 시대 유효시간은 끝이 나고 "하님의 나라"고 하는 새 역사를 펼쳐야 한다는 시대인식을 알게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시대적으로 나타난 징후는 경제적 양극화 문제로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으며 무역 수출과 수익은 최고로 늘고 있어 국민소득 또한 높아졌지만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늘어나는 노인인구는 높아지고 여기에 따른 자살현상은 늘고 있으며 지식은 많아지는데 윤리적 무식함은 날로 늘어나 자기 이기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무례함의 그 삶은 오늘의 사회현상으로 무례함의 소용돌이에서 휘말리고 있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젊은 예수는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적, 인간적 문제에 대해 젊음으로 친히 그 삶에 젊고 순수한 기백을 나타내 보이신다. 율법의 규범에 대해서는 그 근본 의미에 뜻을 갖게 하고 유대교예식의 규범에 대하여는 더욱 완화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 가지심에 주목하게 한다. 예수님은 '정결법', '안식일 법', 에 대해서 유대교의율법과 재의 규정을 시행하는 사람들의 냉혈적인 태도와 비인간적인 제도를 분노하였다. 젊은 예수는 압박과 피해를 보는 것에 긍휼한 마음으로 응대해 주신다. 예수님은 비인간적인 굴레에 대하여는 분노했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이 젊은 예수에게서 창조주와 구속주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창조는 무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주이시며 종말론적인 시간은 구원의 시간으로 창조는 시간의 시작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한다.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서 한 생명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을 삶으로 살아간다. 생명나무가 씨알로 땅속에 묻히어 잎과 줄기를 내 보이며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씨알을 남기며 죽음이라는 시간을 따라 가듯이 한 생명의 과정에서 젊음을 가져야 한다. 33세의 예수의 젊음은 십자가로 생명의 씨앗으로 삶의 생명을 알게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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