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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6
    그렇다면 시편 본문으로 돌아와서 다윗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고, 심지어 그의 후손을 아들로 삼아 영원토록 그의 왕위가 견고하게 세우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신 것같이 다윗도 버리실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다윗의 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스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군사 동맹을 맺고 아하스를 침공하여 그를 다윗의 왕좌에서 폐위시키고, 이름도 잘 모르는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삼겠다고 작전을 세웠다. 이 정보를 들은 아하스와 유대 백성들은 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무릎이 떨렸다고 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이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들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징조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임을 알려 주신다. 다윗보다 200년 후의 일이다.이것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버릴 생각은 없으시고, 다윗과의 약속을 변개하실 마음도 없으시다. 그렇다면 다윗이 염려하는 점은 무엇일까?그것은 관계성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의 아들로 삼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의 유업으로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400년이나 노예생활을 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노예에 관한 것 뿐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 살아가려면 교육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바로 노예 근성을 고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신과 철학과 생활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매도 맞고 채찍도 맞았다. 다윗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의 죄를 은닉하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암살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 가정에 감내하기 힘든 벌을 내리셨다. 그의 아들 암살롬의 반역으로 왕자들이 몰살 당하고, 그의 아내들은 그의 아들에게 짓밟혔다. 그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집안이 하루 아침에 다 풍지박산이 되 버렸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기 힘든 아픔과 모욕과 환난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처럼 정상적일 수는 없었다. 다윗은 침상이 썩도록 눈물을 흘렸고, 그의 뼈마디가 흔들리도록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를 받으시고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임마누엘” 메시야를 보내셨다(시편 32, 51).우리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인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이 되었다. 아담의 나라에서 새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시민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예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흰 옷을 입으신 예수님과 높은 보좌에 앉아서 거룩하다고 찬송하는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그 스스로가 자신을 심판할 것이다. 사실 신자들이 죄를 짓는 것은 고의적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행자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가슴 속에 양심이라는 센서를 부착해 놓으셨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그 센서가 작동하여 경보음을 울리게 되어 있다. 당연히 그때 즉각 범죄 행위를 그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계속하여 짓고, 죄를 즐긴다면 그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하여 대항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비뚜러지고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져 있을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져 있을 것이다.”(마 18:18)라고 가르치셨다.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과 그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불편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바를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받기 전에, 그 자신에게 심판을 받은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그를 연단 시키고, 훈련시켜 바른 신자가 되도록 만드실 것이다신자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하고, 행실을 고쳐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요일 1:6-7). 죄지은 신자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고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훈련과 권징을 시행하신다. 사람들을 통해서 훈련시키고, 교회를 통해서 훈련을 시키시고, 때로는 직접 채찍을 드신다. 하나님의 채찍은 다윗의 경우처럼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이 땅의 신자들에게 사는 날 동안 필요한 것이고,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훈련과 채찍이 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5-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5
    요한은 본문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라고 명시하고 있다(14).이 사건 이전에 예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20:19). 8일 후 예수께서는 두 번째 도마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못자국난 손과 구멍 뚫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그가 확실히 죽은 후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 시켜 주셨다. 8일 후에 다시 나타나신 것은 안식 후 첫 날에 나타나심이 결코 예수께서 잠간 기절했다거나 잠간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20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내보신 것처럼 제자들을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세상에 내보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21절에서는 이들에게 숨을 내쉰 후,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숨을 제자들을 향하여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동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리고 그는 이것을 말씀하시며 숨을 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라.’”숨을 쉬셨다는 뜻의 “에네푸세센”(ε’νεφυ、σησεν)은 과거부정형(Aorist) 형이다. 이미 숨 쉬는 동작이 끝났다. 분사형으로 “(성령을) 받으라”(람배태, λα、βετε)는 말을 수식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씀하시며”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앞 절의 사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내보낸다는 것을 이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때는 “말씀하신다”(λε、γει)라는 말은 현재형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마치 숨을 내 쉬신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일로 번역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대부분의 역본이나 한글 역본들은 숨을 내시며 동시에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는 주의깊지 못한 번역들이다.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마태복음(28:16-20)과 사도행전(1:1-2:4)에서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첫 번째 성령세례이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두 번째 성령 세례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 저자들은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시각과 강조점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이 기록을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염두에 둔 예비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공관 복음이나 요한복음이 다같이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기원하고, 이들을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내 보내시며, 이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임을 확증하고 인치는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이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고 있다. 요한의 강조점은 낙향한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아침밥을 먹이는 사건에 두고 있는 것 같다.이제 21장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부탁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낙향하여 옛 사람, 어부들이 되어 버렸다. 이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소망이 있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그때에는 자기들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그들의 인생을 올인한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마치 왕이 대관식을 하기 위하여 입성하는 걸로 생각하고 그들의 옷을 벗어 양탄자를 대신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어 버렸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모든 꿈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들에게 부할하신 예수께서 주신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는 선지자적 사명은 그들의 낙향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실망과 좌절을 안고 이제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다.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잡힌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3년 전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밤과 마찬가지로 빈 그물이었다. 날이 밝아 오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신 예수께서 이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애들아 너희들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고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얘들아!”하고 부르신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부르고, 선생님이 그의 학생들을 부르듯이 정감어린 어투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애들아 좀 고기를 잡았느냐?”하고 부르시지 않고 “애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하고 부정적으로 물으신다. 아마도 “아니요”라는 대답보다는 “예”라는 대답을 더 원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얘들아” 하고 불렀을 때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음즉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내리라고 했을 때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다. 고기를 잡아 돌아와야 할 아침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더구나 조그마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든 왼쪽에 내리든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생각이 있는 어부라면 이 말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하여 한마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체불명의 그 사람의 말대로 그물을 내리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고기 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절실한 문제였지 않나 생각된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리라고는 전혀 그들의 의식 속에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 제자들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살 길을 찾아간 한심스러운 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이미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그의 선생을 모른다고 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 때에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제자 중 제일 먼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발걸음을 갈릴리로 옮긴 사람이었다. 이들은 배신자들이다. 어쩌면 가룟 유다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 오셨다. 이때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예수라는 분이 지워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배신자들을 찾아오시어 추위에 떨고 있을 제자들이 몸을 녹이도록 불을 피우고, 아침 식사를 마련하여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내게 어땋게 이럴 수 있어?”하며 한 마디라도 섭섭한 마음의 표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이런 배은망덕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시고, 아침상을 마련하신 것이다. 책망이나 원망은커녕 오히려 이들의 상실한 마음을 위로하시는 것이다.요한은 성만찬 기사를 기술하며,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 13:1)라고 시작하고, 자기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자기 곁을 떠나는 유다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조각을 떼어 주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예수께서 이제는 자기를 버리고 제 갈 길을 간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다시 밥상을 차리고 제자들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컷 찍은 것이다.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힘든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들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중심적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동물적인 사랑은 세리들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마5:46). 구약성경의 “헤세드”(דסח)는 변함없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랑도 같은 “헤세드”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밥상을 차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선지자적 사명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위하여 조반을 차리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4-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4
    시편 27:4에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내가 여호와께 청한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할 것이니,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성전에서 간구하는 것이다.”이 시를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청하는 한 가지 기도가 바로 여호와의 집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한 가지를 청한다고 했는데 얼핏 보면 세 가지를 구하고 있다. 다윗은 그가 구하는 것은 그가 지금 처음으로 구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구해 왔던 것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본문은 문맥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번역상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경우에는 히브리어 성경을 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브리어 성경과는 번역상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내가 여호와께 청한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할 것이니, 이는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성전에서 간구하기 위함이다.”(One thing have I ask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inquire1 in his temple. (ESV, KJV, NIV, NAS 참조)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여호와께 청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그 한 가지를 구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다. 그 한가지를 구하는 목적이 그가 사는 날 동안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현재 그의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5-8). 그는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나를 버리기 마소서”라고 간구한다. 다윗이 구하는 것, 그 한 가지는 바로 구원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다윗은 누 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도 여호와를 가리켜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며 간구한 기도 제목이 바로 그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로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알고 믿는 자들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믿음과 더불어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입양 관계에 들어간다. 우리는 죄인의 멍에를 벗고, 이제 아들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출 4:22).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크신 구원으로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다시는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 하나님의 창조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대리통치자 (vicegerent)로 세우기 위하여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대왕으로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시 8). 고대 근동의 봉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왕과 왕 (suzerain and vassal) 사이에 볼 수 있는 계(언)약 관계를 맺으신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만물 사이에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되고 생사를 같이 하는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물의 왕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의 대왕,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했지만 사탄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권위와 존엄성을 짓밟아버렸다. 결국 아담은 그와 생사의 연대성을 가진 만물과 함께 언약적 저주를 받아, 가죽 옷을 입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계속 그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놔 둘 수 없어,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다. 그것은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 있는 만물을 정죄하셨던 똑 같은 원리로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아담을 대신하여 새아담을 세우고, 그가 아담이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함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롬 5:14).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의 아들을 새아담으로 보내시고 구원을 완성하셨다. 새아담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왕이 되셨다. 그동안 아담과 연대성을 가졌던 피조물들은 이제 새 왕이 되신 그리스도 앞에 나와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으면 새 아담 그리스도와 함께한 연대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받은 새로운 신분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죄의 굴레를 쓰고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들에게 그가 이루신 새로운 왕국, 새로운 연대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시고, 계속하여 말씀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 15:4).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 가운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 17:21)라고 간구하신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 땅에서 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관계이다.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보면 종말에 우리 성도들이 어린 양 예수님과 혼인식을 갖고 하늘에 있는 궁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늘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임하는 것을 보지만 그 성 안에 성전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내가 그 성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으니, 주 곧 하나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 21:20) 라고 말한다. 구원이나 천국이란 저 세상 어느 곳에 있는 특별한 장소에 들어가는 개념이 아니다.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관계를 갖고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에 사람을 그의 교제의 대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그의 곁을 떠난 죄인들을 다시 예수님의 언약의 울타리 안으로 모아 들이시고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왕과 백성과 같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4-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3
    바울은 예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제 삼일에 살리심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혹은 하나님과의 언약대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고, 언약대로 살아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바울이 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에도 수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한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적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약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이고 언약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한 속죄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다 죄인들이고, 우리는 죄의 삯을 지불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죄 값을 예수께서 그의 죽음으로 대신 치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창조물을 관리하고 다스릴 왕으로 세우셨다(시 8:5-6).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 생명을 담보한 위계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고대 근동 세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계약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과 언약적 관계를 맺으신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언약적 연대성을 가졌고, 아담은 이 언약적 연대성의 대표자가 된 것이다. 아담은 언약적 연대성의 대표자가 됨으로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말하자면 아담의 범죄는 모든 피조물의 범죄가 되고, 아담에게 내린 죄와 형벌은 모든 피조물에게도 함께 적용되는 죄벌이 된 것이다(창 3:17; 롬 5:12). 우리 모든 인간이 아담과 함께 죽음을 선고 받은 받은 것은 바로 이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족해하셨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때 마다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의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창조에 대한 큰 만족감을 표시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언약적 반역으로 언약적 저주가 임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편하실리가 없다. 그래서 롬 3:26에는 하나님께서 “이때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자신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도 의로우시려고” 하신 일이 무엇인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통하여 아담과 아담의 연대성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롬 5:14). 여기서 모형은 “원리”의 모형을 말한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죄인이 되는 언약의 원리를 적용하여 새 아담을 세워 그로 아담을 대신한 속죄를 하게하고, 그를 살려, 그를 새 언약의 대표자로 세우고, 그의 연대성 안에 들어오는 자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살리고, 그들을 통한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연대성의 원리를 모형으로, 한 사람의 속죄와 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고 자유와 생명을 얻는 원리를 적용하여, 모든 죄인들을 살리려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원리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type)이다”라고 말한다. 이때에 실형(antitype)은 물론 새 아담,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바로 언약적이고, 대속적인 것이다.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언약적이고, 필연적이다. 새 아담이 아담의 실형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여야 한다(창 3:15). 또한 그는 뱀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의 발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라야 한다. 그리고 그는 아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죄가 없어야 한다. 이 세상에 이러한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피조물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결국 이 세상에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조건에 맞는 존재를 새롭게 창조하실 수는 있겠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여자의 후손”으로 지목하셨다. 따라서 새 아담을 아담처럼 흙으로 새롭게 창조하실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이 온 우주에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밖애는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새 아담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신 이유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담의 실형으로 인간 세계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은 아담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은 후 부활할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치시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고 설명해 주셨다(막 8:31-38; 마 16:21-28; 눅 9:22-27). 심지어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님의 죽음의 필요성을 말하며 그것이 개인의 범죄에 대한 죄 값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족과 백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예언하고 선포했다(요한 11:49-52).물론 이것은 로마 사람들이 반역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꾸민 음모였다.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아담의 죄 값을 치렀다면 이제 죄와 죽음은 더 이상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세력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새 아담, 예수님부터 살려야 하고, 이어서 새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따라서 새 아담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인것이다. 만일에 예수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우리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그 죄 값으로 죽게 되었다는 원죄의 원리가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원죄도 없고, 우리 죄인들의 부활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핑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예수님을 살려 내시어 사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심으로 아담과 더불어 그의 새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려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왕이 되셨듯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아담이 되셨다(골 1:15), 그리고 만물의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가 되셨다. 우리 성도들은 이 새 아담, 새로운 왕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왕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충성 맹세를 함으로 예수님의 새 왕국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은 새 백성이 되는 것이다(골 3:10).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속죄의 피를 흘리신 새 아담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 새로운 왕이 되어, 옛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 새 언약을 세우고, 우리 신자들을 새 언약의 연대성 안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들이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언약적이다. 언약적 틀 안에서 이해하고 설명하고, 믿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3-3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이 대답을 만족하게 여기시고 이때부터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것과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과 제삼 일에 살리심을 받을 것을 밝히기 시작하셨다(마 16:21).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그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옮기시는 것을 보면 교회력의 사순절은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하여 이 기간 동안이라도 금욕, 금주, 금식, 참회, 희생, 봉사를 하며 고난을 체험하고 부활절을 기다리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고 사순절이나 고난절이나 부활절을 맞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을 왜 만족하게 여기셨을까?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의미를 성경 신학적으로 고찰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물의 왕으로 삼으시고, 아담에게 그의 창조 세계와 그가 만든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왕권을 부여하시고 그의 왕국을 관리 감독하게 하셨다(시 8편). 그러나 아담은 그의 왕이신 대왕,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그리하여 언약적 원리에 입각하여 아담과 그의 범죄에 가담한, 말하자면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가운데 있는 모는 그의 피조물에게 죽음이라는 심판을 선언하셨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고 기뻐하셨던 하나님께 이제는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비뚤어지고 타락한 세상을 구출하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것은 아담을 모형으로 새아담을 세우시는 것이다(롬 5:14). 아담을 정죄하신 그 언약적 원리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아담을 세워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아담 대신에 새 아담을 세우시고,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새아담 안에서 새롭게 살리려 하시는 것이었다(계 21:5). 그 새 아담은 어떤 분이어야 하는가? 새 아담은 첫째로 하와에게서 낳은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을 문책하시며, 하나님을 불순종하도록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실 때에 “그는(여자의 후손)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죄와 죽음의 사슬을 풀 수 있는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은 여자의 후손, 곧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로 새 아담은 신적 존재(Spiritual Being)여야 한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뱀은 사탄이 사주하고 사용하는 대리자, 사용자이기 때문에 그는 영적 존재이다. 그 영적 존재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여자의 후손은 영적인 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사탄보다 더 힘센 영적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새 아담은 여자의 아들로서 인간이자, 영적 존재여야 한다. 신성과 인성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존재는 아담의 연대성 안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존재를 새롭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아담으로 뱀의 머리를 짓밟을 자로 여자의 후손을 지목하셨다. 따라서 새아담으로서 자격을 갖춘 존재는 만세 전부터 존재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는 것 만이 새 아담의 자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그렇다면 이 새 아담이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죄로 말미암은 죽음을 선고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창 2:17; 롬 6:23). 아담의 범죄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값을 치러야만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새 아담이 아담을 대신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려면 그는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새 아담은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모든 피조물들의 죄를 속죄하는 속죄물로 죽어야 하고, 그 속죄의 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새 아담의 죽음으로 죄 값이 완전하게 치러졌다면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사람들과 만물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고, 붙잡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담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죄와 죽음의 사슬이 풀리고 해방된다. 새 아담 그 자신도 살아나고, 새 아담의 연대성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살게 될 것이다.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의 왕국은 새 아담의 죽음과 부활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새 아담의 부활이 없다면 그의 죽음은 무용한 것이고, 아담의 속죄도 없다. 그러나 새 아담이 죽고 부활한 후에, 그 때에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위에 왕 노릇했던 것과 같이, 새 아담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새 아담을 통하여 새롭게 하신 새 왕국의 왕으로 세움을 받을 것이다. 곧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분명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비밀을 스스로 깨닫고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 16:17)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이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새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연대성 안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새 아담의 새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새로운 왕에게 나아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왕, 곧 그리스도라고 인정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당신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새 왕이 그를 그의 새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절차는 필연적이다. 새 왕국의 시민은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시작되고, 이 고백을 한 신민들을 통해 이제 새 왕국이 시작될 것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은 앞으로 새 왕국 신민이 되기 위한 자들이 반드시 고백해야 할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이것을 “반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새 왕국은 교회이며, 그 왕국의 머리인 왕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고, 그 왕국의 신민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새 왕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로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다. 우리 죄인들은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함으로 이제 새 아담, 새로운 왕과 새로운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으라는 뜻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의 연대성을 맺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새로운 존재임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세례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예식이다(롬 6:4-5). 우리 죄인들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이며, 새 왕국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언약적 연대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3-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81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인이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라는 직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천명하였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나 인간 영혼의 어떤 부분을 두고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인간, 곧 자신을 선지자같이 생각하고, 제사장 같이 느끼고, 왕같이 행하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처럼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왕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제사장이라는 역할은 카톨릭 사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바로 이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다 선지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다 선지자라는 것의 의미를 더 정교하게 파악하고, 강조했더라면 아마 기독교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선지자는 단순히 장차 있을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다. 그 근본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이다. 그는 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몸짓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대언하라고 하신 말씀이 장차 이루어질 예언일 수도 있지만 과거나 현재의 일을 깨우쳐 주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선지자를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입”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죄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새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회복의 계획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회복은 말씀을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세상, 그리하여 적대감과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사 2:1-4; 11:1-9; 렘 31:31-34; 겔 47등).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물론 노아, 아브라함,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이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 주셔서 그것을 전하고, 해석해주시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게 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직접 언급하신다(창 20:7). 말씀을 통한 구속 역사는 모세에게 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시고 그의 말씀을 그의 입에 두겠다는 약속, 곧 대선지자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약속(신 18:18) 을 통해서 그 윤곽이 분명해진다. 모세는 70인의 장로들이 그에게 임하신 성령과 같은 성령을 받은 장로들이 예언을 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민 11:29)는 희망을 토로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그들의 입에 주시고,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을 실현해 가신다. 그리고 때가 되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예수께서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사장적 직분을 감당하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 곧 새로운 왕으로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수행하게 된 것이라면, 그의 생전에 온 유다 땅을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신 일은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명을 마치신 후, 그의 부활 승천 직전 제자들을 불러 선지자 임명식을 가지셨다.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make a disciple maker)는 명령을 주시는 데 이 명령이 선지자 임명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이 대사명을 기록한 마 18:16-20이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 기사의 양식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예수께서 이들에게 주신 사명은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위로부터 말씀을 받아 가르치는 일은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을까?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당시의 제자들에게 그가 명한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선지자적 사명을 주시고, 새 언약의 선지자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선지자는 위로는 하나님의 인증이 필요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인정이 있어야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는 일꾼들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불과 같이 갈라진 혀 모양으로 임하셔서 사도들과 제자들의 입을 터치하셨다. 이와 동시에 제자들은 각 나라 말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입에 손을 대심으로 “너는 내 입이다”라고 인을 치신 것과 같이 제자들의 입을 터치하시고 선지자로 세우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이들을 인치신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는 위임식이라고 할 수 있다(주: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47-61)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신 선지자적 대 사명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초월한 명령이다. “모든 민족에게” “세상 끝날까지”라는 말씀은 이 명령이 단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나가서 앞으로 계속 이 일을 이어갈 “제자를 양성하는 제자들”(disciples making disciples) 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적 사명을 위임 받았다. 그러면 오순절 이후의 제자들은 언제 새언약의 선지자로 위임을 받는 것인가? 물세례를 받을 때이다. 우리 죄인들은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천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함께 받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예수님도 대선지자로의 사명을 개시하실 때 물세례를 받으셨고, 바로 이 때에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셨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을 때에 함께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상징이 바로 물세례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위임을 받는 것이다. 세례는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위임식이다. 세례를 받은 자는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자는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일을 계속해야 할 제자를 양성해야 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모두가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가르치고 천명한대로 모두가 선지자 노릇을 해야 한다. 목사가 세례를 줄 때에 세례 받는 성도에게 반드시 그가 선지자가 되었음을 공포하고, 그의 일생이 선지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세례교인의 교회에서 할 일은 십일조 내고, 주일성수하고, 공동회의에 참석하는 일 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전도하고 말씀 가르치는 일이 세례 받은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 임을 강조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적 사명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선지자들과 시도들을 통하여 주어진 정경적 계시, 즉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개신교회는 카톨릭 교회와 대항하여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 됨을 많이 강조하고, 우리 성도들의 만인 선지자 됨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아가서 만인의 왕 됨에 대해서도 목회자와 장로들의 왕 됨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평신도들의 왕 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우리 개신교는 이제 만인이 선지자 됨을 강조하고, 선지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에 비로서 모세의 소망(민 11:29)이나 하나님의 종말적인 비전(사 11)이 성취되며 새로운 부흥의 역사 일어날 것이다. 개신교는 이제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을 강조하는 것 보다 만인 선지자직을 더 강조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3-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0
    예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아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여 하늘로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린 것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때, 이는 분명 시편 2:7의 말씀과 연관된 구절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삼하 7:14; 시 89:26-27). 또한 그는 분명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새아담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다(사 7:14; 9:5-7; 11:1-3; 6-10). 따라서 예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위로부터 예수님을 가리켜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 3:17)라고 말한 것은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에게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정말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새아담이라면 그는 당연히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자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 곧 메시야 되심의 자격을 검정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복음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릇 모든 지도자들은 그가 위로부터 수여받는 직분을 시행하려고 할 때 인사말로 앞으로 자기가 할 일에 대한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천명하는 것은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이 해야 할 마땅한 순서이다. 예수님은 그가 받은 세 가지 시험을 통하여 앞으로 그가 메시야로서의 해야 할 일과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방법을 제시하는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첫번째 시험은 식욕을 시험하는 것이다,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께 이 보다 더 달콤한 유혹은 없을 것이다. 이 시험을 물론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 시험이다. 뱀도 아담에게 바로 식욕을 유혹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그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음직 했다”(3:6)고 했다.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먹고 싶은 유혹을 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옛 속담에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이웃집 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배고픔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요한 1서에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육신의 정역, 눈의 욕망, 이생의 자랑”(요일 2:15)을 들고 있는데,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라고 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탐하는 목록이고, 창세기나 요한1서에서 서로 병행되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식욕을 얼마나 조절하고 억제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의 필요성을 정제하시고 영의 양식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40일을 금식한 극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영의 양식을 먼저 찾고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의 복음 사역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서 헐벗고 굶주린 그의 동족들에게 아무리 현실이 비참 할지라도 먼저 살기가 힘들어도 육신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하고, 돌들로 빵을 만들겠다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땀 흘려 일하여 먹고 살려고 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첫번째 시험에서 승리하셨다.두번째 시험은 명예욕이다. 자기 과시욕이다. 아담은 유혹의 열매가 보암직했다고 했다. 요한은 안목의 정욕이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사람의 눈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전시욕에 사로잡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마귀는 예수께서 말씀으로 지혜롭게 대답하시기 때문에 자기도 말씀으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 예수께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한다. 그러면 시편 91편 11-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천사들이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떠받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성전은 요사이 웬만한 빌딩 10여층 정도 높이였다. 여기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그를 받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전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쳐다보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메시야를 향하여 경배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쉽게 메시야로 인정받고, 온갖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을 것이다. 구태여 고생하며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없이 아주 쉽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신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과 자신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믿기를 원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자신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정체를 스스로 밝히셨다. 우리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나치게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쉽게 성공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누릴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귀 권세나 명예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나를 지켜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세 번째는 소유욕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예수께 주겠다고 유혹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물러가라.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 하셨다.”고 응답한다. 허리를 굽혀 절 한 번만 하여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이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쿠네요”(προσυνε、ω) 라는 말은 사람 앞에 엎드려 발이나 옷에 입을 맞추거나, 상대방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땅에 입맞추는 것을 의미하나, 보통 신적 존재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자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세는 단호하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신 것이다. 마귀와의 대화나 협상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불의한 세력을 대항하고 그들의 악을 지적하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고개 숙이고 악수 한번만 하셨더라도 좀 편한 복음사역을 하실 구 있었을 텐데, 계속 이들의 위선을 들추어내고, 헤롯대왕을 향하여 여우같은 간교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질타하셨다. 세상 나라를 얻기 위해 불의한 세력들과 손을 잡지 않으신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불의의 세력과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손을 잡는 것은 정도가 아니고 결국은 그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 넣는 것이다.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마귀의 유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끝내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 분에게서 떠나갔다.”(눅 4:13)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또 다시 예수님을 찾아 올 것이다.마귀의 시험은 새아담으로서 자격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이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시험은 앞으로 예수께서 하실 복음사역의 성격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도 식욕, 명예욕, 소유욕 등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고 그 욕심을 불의한 쉬운 방법으로 채우도록 부채질한다. 그러나 땀을 흘리지 않고 얻는 빵, 수고와 고난이 없이 얻어진 명예,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여 얻어진 재물은 그에게 영광을 안겨 주기는 커녕 오히려 뼈아픈 수치와 비참한 종말을 가져다 줄 뿐이다. 마귀의 유혹은 한번 이겼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 대문 곁에서 올가미를 가지고 우리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식욕과 명예욕과 소유욕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을 배우려고 힘을 쓰는 것 보다는, 우리들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마귀들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시는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려고 힘써야 한다.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2-2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9
    잠언 1:7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고 가르친다. 물론 여기서 시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시트”()를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머리”라는 뜻의 연계형이. 우두머리, 첫 걸음,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모든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특히 성경에서 선과 악에 대한 메리즘으로서 지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따먹은 과일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나온 열매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 나무를 가리켜 2:17에 보면 “선과악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한글 번역은 “지식”이라는 히브리어 명사형 “다아트”를 동사형 “알다”로 번역하고 있어서 그 의미를 추측하는 데 도움은 되나 지식이라는 말이 선과 악의 합성어로서 “모는” 혹은 “전체”를 의미하는 메리즘(merism)을 이루어 “지식”이라는 뜻을 가진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금하신 것은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지식의 나무 열매이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선과 악에 관한 모든 지식을 아는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경외하다는 말은“이르아”()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fear)는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 모든 피조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심판자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뿐 아니라 반대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고. 그 앞에서 조심스럽고 그의 뜻을 거스릴 수 없는 마음 가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어려워하고 예의를 지키고, 한 마디 말이라도 더 귀담아 듣고, 빠뜨리지 않고 순종하려고 하며,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마음을 쓰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afraid 라는 말과는 구별하여 사용한다. 흔히 성경에서는 경외한다는 말과 반대되는 의미로 “오만하다”(scoffer), “경멸하다”(scorn)는 말을 사용한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자를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오만하다는 말로 히브리어 “레츠”() 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고,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들이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오만한 자들이다. 그들은 다 망했다(창 11장)예레미야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지런히 가르쳤으나 그들은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바빌로니아에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33).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한 오만한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그들의 언약의 주,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고 경홀히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리의 도를 버리고 시류를 따라 떠 다니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들이나 나라들은 절대로 그 생명이 길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혹독한 벌을 내리렸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그들의 땅으로 불러 들여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36). 새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3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새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에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는 전혀 다른 새언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두시겠다는 것이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돌 판에 새겨 주셨지만 새 언약을 맺을 때는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 판에 새겨 넣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렘 31:33). 사람이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특단의 장치를 마련하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의 말씀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으시며, 그를 존경하고 그를 가까이 하는 그의 벡성에게 복을 쏟아 부어 주시고 싶은 분이시다(41). 그들 뿐 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기쁘게 복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사람의 마음에 말씀을 새겨 놓아도 마음 속에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두신다는 것이다(40).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 가운데는 말씀이 새겨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약속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한 15:4)라고 말씀하신다. 또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 것이다.”(요한 14:16-17, 20).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며,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우리 인생들과 함께 하셨으며, 또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 일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실 일이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2-15).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머므르시며, 우리 속에 그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순종하며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 있게 하심으로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를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능력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난 자라야 네 씨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고(창 21:12), 메마른 고목과 같은 100 세가 된 자기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반드시 이삭을 도로 살리실 것을 믿었다(창 22:5)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가서 그를 번제단에 올려놓고 그를 잡으려고 했다. 순간 천사가 칼을 잡은 그의 손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말씀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을,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까지 않으니,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았다.”(창 22: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를 향한 경외심을 인정하신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경외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경외심은 다만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 아니다.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고 계신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 주신다는 것은 밥을 차려 주시며 밤을 먹으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밥숟갈로 밥을 떠 먹여 주시는 것과 같다. 사랑하고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배우고 가르쳐야 첫번째 일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하나님께 합당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2-0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8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11 제자를 만나 이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다. 사명의 말씀이다. 이 명령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라는 자기 소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 (Disciple Maker), 제자 삼으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세개의 분사, 즉 가라, 세례를 주라, 그리고 지키도록 가르쳐라,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사명 가운데 주 동사는 “제자 삼으라”이다. 그리고 제자 삼는 방법을 설명하는 세개의 동사 (가라, 세례주라,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모두 분사형으로 제자 삼으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대사명의 핵심은 제자들에게 Disciple Maker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기사”(Call Narrative)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수께서 신 18:18에 약속하신 대선지자로 오셔서, 제자들을 양성하시고, 이제 새언약의 선지자들을 세우시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1. 예수님의 정체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단지 종교 세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의 권위가 미친다는 말씀이다. 내 인생, 내 가정, 내 교회, 내 학교, 직장, 나라, 그리고 온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그의 권위와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시던 예수께서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선포하신다.구약성경의 선지자 소명기사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의 정체를 밝히시듯이 예수께서도 그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것이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신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예, 아니요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 명령임을 인지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순종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명령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거기에는 나의 생사가 달린 명령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신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2. 예수님의 명령 :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예수께서 주신 대사명의 핵심은 제자를 삼는 것이다. 제자 양성하는 자를 양성하는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의 이 대사명의 말씀을 “선교 명령”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전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도 되지만 이 말씀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제자 삼는 것은 전도, 양육, 교육, 훈련 등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새로운 제자를 양성하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라.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딤후 2:2)라고 가르친다. 사실 바울은 디모데를 그렇게 Disciple Maker로 길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사명은 Disciple Maker가 되라는 것이다. 대중 집회 해서, 대중 세례 주면 마치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전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길가에서 예수 천당 외치고, 사람을 교회로 데려 온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다. 제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Disciple Maker가 될 수 있는가?첫째는 가야 한다. 교회에 가만히 앉아서 제자를 양성할 수 없다. 어디든지 가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있는 어장을 찾아가야 하듯이 사람을 낚으려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찾아가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한다. 서로 소통이 되어야 복음 증거가 되고,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킬 수 있다. 둘째는 세례를 주어야 한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했음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의식이다. 우리 신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세상에서 살지만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된, 연대성을 가진 새사람이라는 신분상의 변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받는다. 선지지란 하나님을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해주고, 가르치는 자를 말한다. 세례를 받음으로 Disciple Maker로서의 사명을 받는 것이다.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모든 족속에게”(땅끝까지, 행 1:8) “세상 끝날까지” 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주신 이 대사명은 당시의 열한 제자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께서 그의 열한 제자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시는 말씀이라면 모든 족속이라는 공간적으로 무한대한 대상에게, 무한대한 시간을 두고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세례란 복음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례 받는 자가 없으면 그 교회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셋째는 말씀과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 생활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신자로서, 혹은 제자로서의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의 생활화이다. 말씀이 몸에 베어야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확고한 말씀 중심의 철학이 세워져야 한다. 말하자면 기독교 인생철학이 확립되어야 말씀을 지키고 행할 수 있다. 성경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이 확립되지 않고는 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세속의 파도, 시류를 거슬려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교육과 훈련과 연습이 없으면 시류에 휩쓸려버리고, 파묻혀 버린다. 따라서 전도한답시고 사람을 설득해서 교회에 데려와서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마치 아이를 낳고, 밥을 안 주거나 교육을 안 시키고, 들나귀처럼 버려 두는 것과 같다. 개역성경은 본문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그렇지 않다. “지키도록 가르치라”(teaching them to obey, teaching them to observe(Matt. 28:20 BGT) )라고 되어 있다. 목적어를 인도하는 부정사를 쓰고 있다. 가르치는 것은 방법입니다. 그 목적은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다. 가르치기만 하면 안되고, 가르치는 목적은 지키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교육할 수 있는 Disciple Maker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양을 칠 수 있는 목자로 양성하는 것이다.3. 예수님의 약속 :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세워 보내실 때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이 앞으로 Disciple Maker로서 살고 일하는 데 결코 순탄한 일 만이 있지는 않을 것임을 전제한 말씀이다. 생명에 대한 위험이 없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잘 이루어져 간다면 구태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약속을 주시고, 이들을 안심시키고, 격려하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방치하거나 무관심하게 버려 두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지켜 보시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항상”이라는 말도 중요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해도 좋을 것인데, 여기에 “항상”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순간순간마다 그의 눈을 우리에게서 떼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또한 세상 끝 날 까지라는 말도 중요하다. 세상은 끝이 있다.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내 인생도 끝이 있고, 정권도, 나라도, 세상도 끝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제자 양성 사역은 중도에 그쳐서는 안될 일이고 하나님께서 끝을 맺으시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2-0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7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때가 찾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셨으니,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 4:4-5)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그런데 이 말은 율법 아래서 나게 하셨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둘째는 여자에게서 낳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시고자 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성탄절,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이다.1. 여자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바울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설명하며 그의 어머니를 “마리아”라는 실명사를 쓰지 않고 구태여 꼭 “여자”라는 말을 썼을까? 예수께서는 장성하여 가나안 혼인 잔치 집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그의 첫 기적을 행하실 때도 마리아를 가르켜 “어머니” 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라 고 불렀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려면 창세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불순종한 아담과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내리셨다. 죄의 삯인 사망을 선고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그들에게 사형수의 낙인을 찍으셨다. 그러나 언젠가 메시야가 와서 이 죄수복을 벗기고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실 것이다(갈 4:27). 그래서 이 죄수복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사형수인 것을 나타내는 저주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들에게 사망의 굴레를 벗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게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인간들에게 이 죄수복을 벗겨줄 메시야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저주와 심판을 퍼부으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적대담을 두고,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뱀과 그 후손은 분명 뱀을 배후에서 사주하는 영적 존재, 사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뱀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여자의 후손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사단보다 훨씬 더 우월한 권위와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여야 한다. 동시에 그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여자의 후손이란 영적 존재이자 온전한 사람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존재는 아담의 언약적 통치권 아래에 있는 피조물 가운데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아담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자의 후손”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기에 결국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마리아를 가리켜 “여자”라고 지칭하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경어나 존대어가 아니라 창세기의 원복음에 언급된 그 뱀의 머리를 짓밟을 자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분히 신학적인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여자라고 칭하는 것은 자신이 바로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는 "여자의 후손"임을 암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여자에게서 나실 하나님의 아들은 창세 전에 존재하셨던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여자에게서 낳으셨을 뿐 아니라 율법 아래서 낳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의 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선악과를 따먹을 경우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이 아담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언약적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그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다시 살게 되는 이 원리를 가르켜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롬 5:14)2.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아들바울의 두번째 요점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여자의 몸에서 낳게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한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취부를 가린 아담 부부에게 가죽 옷으로 사형수의 죄수복으로 갈아 입힌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 입힐 계획을 세우신다(갈 4:27). 그러나 죄값은 사망이고, 죄 값은 반드시 치뤄져야 할 일이다. 아담은 스스로 죄 값을 치룰 수 없고, 그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어떤 피조물도 다 죄인이기에 자기 죄 값을 치를 수 없다. 따라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속죄제물로 희생하여 죄 값을 치루고 그의 아들은 물론 그의 아들과 연합하여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오는 자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온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을 통하여 부활과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한 것이다.결국 때가 되어 그리스도는 여자의 몸에서 나시고, 세상의 속죄물로 자신으 생명을 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속죄를 받으시고,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를 받으시고 만족해 하셨다는 것은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을 다 아들로 삼으셨다. 아담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왕이었듯이, 새 아담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진 왕이 되고, 그와 연대성을 가진 모든 인간들도 이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왕이 된 것이다.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이 더 이상 죄인들을 뒷바라지 하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그의 본래적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기를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세상의 회복은 창조시에 세우신 하나님-사람-만물의 위계 질서 가운데 인간을 그의 대리 통치자로 다시 세우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그의 아들,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이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여자의 몸에서 낳게 하신 것이다. 성탄절의 의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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