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2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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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의 헬라어는 세메이온이다 세메이온은 어떤 것을 가르치는 표지판이다.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기사와 표적과 이적은 전부 세메이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귀신을 쫒고, 병을 고치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등등의 모든 기사와 이적과 표적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세메이온이다.

 

히브리어로는 오트. 오트 역시 기호, 증거, , 표식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구원의 표 또는 언약의 징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준 표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언약의 징표인 오트 하베리트. 그러므로 표적인 세메이온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나타내는 십자가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압축하신다. 요나는 구약의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동안 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요나서 1)

 

그리고 물고기가 그를 토해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요나서 2) 그리고 요나서 3장은 큰 성 니느웨에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뜻하는 복음이 전해지자 왕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다 회개를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이 구원을 받는다. 12는 게마트리어로 아들을 상징한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할 때 천은 땅의 수이고 만은 땅에서 완성된 하늘의 수다, 그러므로 십이만 명이라는 뜻은 땅에서 회개하여 하늘에 앉힌바 되는 교회를 상징한다.

 

본문에서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한다. 왜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을까?

 

4;4절은 이렇게 말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은 늘 표적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요구한다. 그 말은 자신을 굴복시킬 만한 증거나 논증을 대보라는 자기기만 일뿐 그가 자기를 설득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한 말이 아니다.

예수는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내안에 찾아와서 나를 설복하실 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과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그 자체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 세대에게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은 요나서1,2,3장을 지식과 정서적 감정으로 이해가 되어졌다고 해서 믿음이나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가 그 목적지를 보라고 하는 싸인보드판이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나? 마태복음9:2절에서 중풍 병을 고쳐주시면서 주님은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죄 사함은 요나의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세메이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셨다.(4:17)

 

오늘 본문41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회개를 천명하신다.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의 십자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도 행2:38절에서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외친다. 요나서 3장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왕부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존재이기에 결단코 회개할 수 없는 죄인이다. 아무리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해도 그것으로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러니 아무리 회개를 하려고 해도 회개가 내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에 우리는 날마다 절망해야 한다. 그것으로 나의 본성적 자아가 얼마나 양심에 화인 맞았는지 깨달아야한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회개의 복음을 듣고 생명가진 모든 존재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이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기적을 보지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4:4절의 말씀대로 나는 지금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삶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나는 세상과 벗이 되어 세상 먼저 그리고 하나님 나중의 시간표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다. 복음에 관한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서부터일까? 그래서 성경을 대하면 울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시킬 자를 불러 회개의 역사가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오늘도 우리는 요나가 되어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렇군요! 주님 내가 악하고 음란한 놈이네요 요나가 하룻밤에 시들어 버린 박넝쿨을 아꼈듯이 나도 그렇게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아꼈나 봅니다. 나도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 배설물로 버렸다고 외침 같이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주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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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한인수 목사의 ‘요나의 표적’(마 12: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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