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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바라볼까?’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왕상19:3). 18장에서는 엘리야 홀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하여 승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굳세게 붙들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답은 뻔합니다. 혼자서 450명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였기 때문에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세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죄는 세력입니다. 힘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힘으로 450명을 이길 수 없었듯이 신앙인들이 죄의 세력을 이기려 하는 것은 홀로 450명을 이기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만일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 혼자의 무술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해치울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말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라. 너 혼자 한 번 해봐라.” 신앙인들이 자기 힘으로 죄와 싸우려 하는 것은 거대한 군대와 홀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술이나 담배 게임 등에 빠진 사람이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술, 이것 내가 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어” “담배,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야.” 그 말은 곧 “나는 홀로 18만 5.000명의 군대를 이길 수 있어.”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길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 년 전에도 패하고, 한 달 전에도 패하고, 어제도 패했으면 자신은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셨습니다(왕상18:30-38). 그 후에 그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해치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와 싸우고 습관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처럼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롬6:13).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십니다. 그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성령의 불을 받는 것 사이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비교적 빨리 응답을 받았지만 우리는 늦게 내릴 수도 있습니다. 불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태우는 불입니다. 자신을 모두 태우는 불, 자기가 조금도 남지 않고 오로지 구속한 주만 보이게 하는 불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도드리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왕상18:36-38). 그 때 비로소 불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능력을 받아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용감했던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통보를 받은 후에는 마음이 물처럼 녹았습니다. 그 형편을 보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그가 형편을 보자, 환경을 보자, 상황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없이 나약해졌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을 바라보면, 형편을 바라보면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지금 환경을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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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3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두려움은 금물’(시 27:1-2)
    성도라고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살이가 너무나 힘들고 고달플 때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늘 있습니다. 건강한데도 몸에 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세상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성공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염려하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는 두려움이나 고통,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이상,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오, 구원이시오, 능력이시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두려움 중에서도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담대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지키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 중에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것이 시 27편의 내용의 흐름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찬양처럼 향기로운 찬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의 산성이시며,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모든 고난을 극복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성도라면 슬픔의 밤이 아주 깊을 수 없고, 죄악의 세력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곧 아주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방안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방안이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딤후 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 때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험한 세상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할지라도 내가 너의 구원이요, 능력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업실패의 문제를 다 물러가게 하시므로, 새로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시련과 환란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하나님 한분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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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1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교회의 본질과 복음 진리’(딤전 3:14-16)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떠난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배가 아무 쓸모가 없듯이 진리를 떠난 교회 역시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진정한 교회의 으뜸가는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바르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전파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진리를 수호하는 귀중한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말세라고 합니다. 혼돈의 시대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거짓되고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4). 진리에 이탈하는 배도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고. 거짓 선지자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진리는 생명력에 있어서 영원하고 그 효력에 있어서는 보편적이며 무한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를 떠받치는 토대이고, 진리를 세우는 기둥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짓의 광기로 피폐해진 그 누군가가 와도 진리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끗하게 정화되고, 진리의 안전한 갑옷으로 무장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라는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고, 아무런 죄가 없으셨으나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성령으로 부활하셔서 무죄하심을 증거하셨고,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기관으로 근본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역의 중심이 되는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모여 진리의 기둥과 터를 이룬 모든 성도는 온 우주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장엄하고 거룩한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전함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광이 해와 같이 빛나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의 기둥으로 역할을 다한 자에 대한 영광을 계3:12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기둥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되어질 새이름이 기록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고 진리만을 외치며, 진리를 고집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나라가 크게 확장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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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그 통’과 ‘통’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4). 아합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보내어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에 보내실 때, 사르밧의 어느 지역이나 사르밧 과부의 용모나 그가 어느 때에 외출할 것이라는 말씀 등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따를 뿐이었습니다. 무작정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갔는데 마침 사르밧에 나무를 줍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과부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녀를 만나 떡을 좀 달라고 하자, 그녀는 떡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통에 가루가 조금 있고, 병에 기름이 조금 있는데 그것으로 자신과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은 후에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그녀 말대로 하려니와 그것으로 먼저 그를 위하여 떡을 만들고 후에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말씀 ‘그 통’과 ‘그 병’을 말한 것입니다. ‘그 통’과 ‘그 병’은 먼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위한 통과 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지시대로 그 가뭄 때에 먼저 엘리야를 위하여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다 소비되었다고 하는 순간 그 통과 그 병의 바닥을 보면 또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뭄 기간에도 세 명의 사람들은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자,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말할 수 없이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자신에게까지 이런 은혜가 임함을 알고 하루하루가 기뻤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도 매일 반복 되면 자연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때에 하늘에서 만나가 매일 내리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지 못하고 좀 더 자극적인 음식 타령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4-5).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일상적인 통과 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왕상17:16). 그 결과 그 집에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처음에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감사 감격하게 되지만 그 마음을 계속 쓰지 못하면 감각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우연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타락의 길을 가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바치라는 환경이었고, 사르밧 과부에는 아들이 죽는 환경이었습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만 아닙니다. 자녀들의 타락과 방탕한 생활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이 때 영적으로 민감한 성도들은 ‘하나님이 나를 재촉하시는 구나. 다시 힘을 쓰자.’하며 떨어진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가 예민해진 반면 영적으로 둔해진 성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일은 세상일이며, 육적인 일이며, 당장 잘 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사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얼마나 본받아 가는 것인가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임할 때 첫사랑과 첫 은혜를 되새기며 믿음으로 돌아와서 다시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때로는 재앙 같은 복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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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4
  • [국독연 기고] 김미혜 사모의 ‘물 위에 떠 있는 방주’
    본고는 지난 5월 23일 국민일보가 주관한 ‘국민미션어워드’에서 제1회 존경받는 원로목회자 대상을 받은 박조준 목사의 수상소감에 대한 김미혜 사모의 감상이다. <편집자 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국민일보가 주최하는 ‘국민 미션 어워드 시상식’이 올해로 2회를 맞이하면서 제1회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 대상을 박조준 목사님께서 수상하시게 되어 수상소감을 말씀하셨는데 그 짧은 수상소감이 내 마음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박혀버렸다. 목사님은 60여년을 목사로 지내시고, 40여년을 목회를 하신 분인지라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에 대한 언급하시면서 후임목사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과 목회 하실 때는 교회에 마음을 쏟으시고, 내려놓고 보니 한국교회가 보이시고 많은 목회자들이 보이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퇴임식 이후 한 번도 갈보리교회를 가신 적이 없으시며, 도미하셔서 10여년을 그곳 목회자들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신 것을 말씀해 주셨다. 나도 곧 대학교수로써 현직에서 물러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퇴임 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신 것 같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마틴루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어야한다는 말씀과 함께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의 표현으로 명확하고 간결하게 알려주셨다. 영혼의 방주인 교회가 물 위에 떠 있는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그 물이 방주로 침범하여 방주는 가라앉게 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목회자도 결코 예외일수 없음을 아주 강조하셨는데, 그냥 예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외” 라는 두 글자를 각각 힘주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고자 하시는 간절한 마음을 잘 전달해 주신 것 같았다. 상(賞)의 이름처럼 존경받는 원로목회자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간절함을 보면서 나는 내 노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고, 60여년 목사로 살아오신 삶에서 진하게 베어 나오는 간절함이 보여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목사님과 인사를 하면서 나는 “물 위에 떠 있는 방주, 잊지않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내 뜻이 앞서고, 내 생각이 앞서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 때문에 많은 것에 속고 사는 인생은 아닌지 내 삶을 돌아다보며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했던 말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을 떠올리며 다시금 내 신앙의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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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4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은혜의 말씀’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17:1).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요일1:5).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런 경고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이 말을 한 것은 아합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은 까닭은 첫째, 시돈 여인 이세벨이 끌고 들어온 바알 우상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바알은 곡물들을 생산하게 한다는 우상으로서, 당시 그를 믿는 사람들은 풍작이나 흉작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은 되고 안 되고, 번성하고 망하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아합은 엘리야를 무시했습니다. 엘리야의 외모는 초라했습니다. 그는 길르앗 사람으로서 므낫세 지파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왕하1:8).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으로 온 사람이었는데 세례요한의 행동에서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3:4). 약대 털옷, 가죽 띠, 메뚜기와 석청이 주는 공통점은 가공되거나 꾸밈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아합이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자녀라고 소개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는데 엘리야는 그러한 소개마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력한 가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합으로 하여금 엘리야를 무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붙들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분명 모세의 말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6-17).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길 때 그렇게 됩니다. 아합은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을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기갈은 환경의 기갈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가지고 있어도 타락하지 않을 정도는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입니다. 신앙인들이 오늘날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처럼 불상이나 큰 바위 큰 나무를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온종일 묶거나 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고전12:2).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멈추게 됩니다. 아합 시대에 가뭄이 들기 전 전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 이 일이 일어나기 500여 년 전,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6:26).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한 것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알고도 당시 바알 신이 그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터를 쌓았을 때 맏아들이 죽었으면 이스라엘의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쌓아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말째까지 죽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당시 히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러한 기근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적 기갈이 임하고 영적 기갈이 오면 환경의 기갈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졸리거나, 지겹게 느끼거나, 거꾸로 듣는 현상입니다. 거꾸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콕 찍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환경에 기갈이 임합니다.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은혜받을 기회가 적어집니다. 반드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말씀은 영으로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2). 속 사람이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겉 사람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주일에 영적인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 예화나 세상 이야기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안 들리면 겉 사람 따라 살아간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용서해주시고 귀를 열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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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2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성령은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촛대를 옮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촛대에 기름을 부어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부어주지 않는다면 촛불은 꺼지고 말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소멸 되는 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찾아 그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깁니다. 성령이 교회에서나 사람에게서 떠나고 맙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더듬어 찾아 회복해야 합니다(계3:3). 주일성수, 예배, 말씀을 읽고 기도생활, 주님께 드리는 일, 이웃 간의 문제를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첫 사랑 때 어떻게 믿어 섬겼는지 생각하고 행하면 성령의 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시작된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의 터를 잘 닦아 두었습니다. 그 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개종자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말씀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전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까지 혼미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시작 된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고 합니다. 다음은 안병모 목사님의 부인 정귀남 사모님(1997년 소천)의 간증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초월하는 사람같이 살았습니다. 0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열심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한번은 잠자는 가운데 주님께서 로마서 “1장 29절” 하시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그곳을 펴서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세어 보니까 죄가 21가지나 되었습니다. ‘누구더러 하시는 말씀일까?’ ‘왜 나에게 읽어 보라고 하셨을까?’ ‘나는 아니겠지.’ 하며 그날은 그냥 잤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나는 얼마나 열심을 내는 사람인데 이 말씀이 나하고 상관되는 말이야?’ 그러나 그 말씀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평소에 자주 들렀던 계명산 수녀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꽝”하고 포탄 소리가 났습니다. 보통 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떤 빌어먹을 XX가 여기에 포탄을 터뜨려?”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보니 차가 오다가 자신이 머무는 기도실 굴뚝과 부딪혀서 그렇게 난 소리였습니다. 이때가 1970년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차, 내가 욕을 하다니, 내 속에 안 믿던 모든 성질이 가득 들어 있구나. 그래서 욕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참 나쁘다. 남은 다쳐서 죽을지 살지 알지 모르는 지경인데 그 소리에 놀랐다고 죽일 것처럼 욕을 해?’ 물론 밖으로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욕을 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거봐라 너 악하지 않느냐?’ 그 후로 매일 매일 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은 처음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합당하고 성경에 합당한 말씀이면 성령의 음성입니다. 그 말씀을 무시해버리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받았던 은사를 그냥 두지 말고 불일 듯 일으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려고 너로 생각하게 하노라.”(딤후1:6). 받은 은사일지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꺼지고 맙니다. 사용할지라도 자신의 영광을 도모한다면 역시 꺼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성도들을 위하라고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고 성도를 위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금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땅 속에 은사를 파묻어 둔 것과 같습니다. 불 일 듯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은사를 하나님과 성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처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시39:3). 마지막으로 받은 바 말씀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4:14). 말씀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어떻게 됩니까? 히6:6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타락한 성도가 되고 맙니다. 이런 자는 타락했어도 자신이 타락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죄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을 받지 못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탄생 된 이래로 가장 값지고 좋은 선물은 진주와 보석 같은 선물이 아닙니다. 온 천하를 다 소유한들 주님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에게 온 천하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고맙고 감사함으로 끝까지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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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5
  • [국독연 설교] 장금오 목사의 ‘주인에게 맡기는 삶이란’(삼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 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우리가 만약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전문 관광안내자 없이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먼저 여행자 안내소를 찾아 가든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여행 할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고 물어 보는 것이 우선순위 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르게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 혼자의 생각으로 길을 찾아서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동행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서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든지, 전문적인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과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과 같이 주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이시며, 완벽한 인생의 가이드가 되시는 하나님께 조목조목 여쭤보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윗은 양떼들을 지키면서 훈련된 목동으로 여러 가지 위험한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때로는 지혜롭게 양떼들을 공격하는 맹수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양떼들을 잃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반복되는 인생의 절망에 처하게 되었던 다윗의 삶은 비로소 아둘람 굴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23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그일라 처서 타작마당을 탈취한 블레셋 사람을 보고 의분함을 금치 못하고 다윗의 주인 되신 주님께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을 하시며 블레셋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하라고 하셨을 때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다위에 손에 붙이시겠다는 응답을 듣게 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어떤 도전을 받으셨나요? 하나님께 합한 자로서 여쭙고 가는 길이 얼마다 복된 길인지 그때 그때 하나님께 묻고 웅답받는 방법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을 볼 때, 다윗의 삶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녔고, 다윗은 여전히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방법 1) 다윗은 모든 일의 시작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가? 블레셋사람들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명예를 위한 나의 욕심 때문인지? 선택하기 전에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아닌 일을 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물어야 합니다. 매사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진로, 취업, 직장을 구하는 것까지 섬세하게 묻고 응답을 받을 때는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2)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3) 결정권이나 계획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리하면 모든 환경과 조성을 사람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혹시라도 내 뜻을 하나님께 반영하였는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모든 위기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구할 때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모든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께 마음의 초점을 고정할 때 다윗에게 임하는 응답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묻고 맡기고 나아가는 승리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편, 장금오 목사는 아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하고 최근 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 설립자 박조준 목사, 사무총장 임우성 목사)의 제19회 목사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높은뜻숭의교회, 높은뜻광성교회 등에서 스리랑카 및 영어권 이주민 사역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양주진리교회(담임 채하경 목사)에서 캄보디아 이주민 전문 사역자로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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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회복하기 원하는가?’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왕상16:15). 우리는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350여 년간 한 왕조로 이어지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9왕조가 쿠데타에 의하여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새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그들 나름대로 부국강병을 모색하지만, 대부분 4대를 더 채우지 못하고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선왕의 잘못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므리는 바아사 왕의 아들 엘라를 모반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계속 블레셋에 속한 깁브돈을 빼앗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깁브돈은 본래 단 지파에 속한 도피성이었습니다(수19:44, 21:23). 그런데 블레셋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을지라도 지키지 못하면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곳이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새 왕조가 들어서면 왕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기 위하여 싸웠지만, 하나님께 등불을 돌려받기 위하여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등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왕상11:36, 왕하8:19). 등불은 생명의 연속성을 의미하며, 형통을 의미합니다(잠21:4). 하나님께서는 북왕국의 시조 여로보암에게도 그가 만일 다윗처럼 행하기만 하면 그 가족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왕상11:38), 여로보암이 죄악을 행함으로 등불은 바아사 왕조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여로보암과 그의 후손에게 기름을 부어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윗이 어떻게 행하였는지 살펴서 그것을 유지해 나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몽둥이가 되어 여로보암을 친 바아사 역시 다시는 여로보암처럼 행하지 않기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위하여 애를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도 이전 악한 왕들처럼 전략적 요충지만 찾으려 애썼지, 하나님의 등불을 유지하려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 엘라시대에 시므리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맙니다(왕상16:10). 촛대를 옮기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광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찾으면 다른 것도 회복이 됩니다.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등불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나라의 영토가 확장되었고 군인이 130만이나 되었습니다(삼하24:9). 후손들 가운데 선한 왕도 있었지만 대부분 악한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겠다는 등불 약속 때문에 그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이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요사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고 이제 7차 핵실험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방법의 하나이겠지만, 신앙인들은 더욱더 영적인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불이 한국에 머물도록, 옮기지 아니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등불이 머물도록 하겠습니까?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도록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소아시아지역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에 책망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위의 말씀처럼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시절 조선을 뜨겁게 달구었던 회개 운동이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적으로, 각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디서부터 타락했는지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일 지키는 정신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대한 예수교 장로교 헌법 제 7항 예배모범편 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 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대로 그 날을 거룩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히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해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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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3
  • [국독연 칼럼] 임현주 목사의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형통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것이 형통이라 생각 합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형통을 이루기 위한 온갖 수고를 쉬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형통일까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우리들에게 형통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입니다. 팔려온 요셉이 살게 된 곳은 이집트 사람의 집입니다. 네, 열 명이나 되는 형들이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 넘깁니다. 순식간에 노예가 됩니다. 시위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을 주인으로 밤낮 섬기게 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될까요 평생을 노예로 살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요셉에게서의 형통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놓여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떤 기도를 할까요? 하루속히 형들에게 속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예가 될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이 아버지가 집이 있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의 이런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잘됨이 못됨이 형통이 아닙니다. 이런 요셉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거리가 먼 일입니다. 요셉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이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3) 이 노예청년 요셉이 계속 형통하여 일어난 다음 일입니다. 이번에는 감옥에 갇힙니다. 주인마님을 성희롱한 죄입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오히려 유혹하는 마님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겠으며 하나님께 득죄할 수는 없다’며 단연코 거절한 요셉입니다.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누구하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하나 나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나서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결백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만 땅만 알겠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요셉은 밤낮없이 또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억울함이 밝혀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시고 아신다면 반드시 이 누명은 밝혀 주어야합니다. 이 감옥에서 풀려 나가야 형통입니다. 그래야 형통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잘되고 저것이 잘되는 형통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잘 달려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형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언제나 이미 형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내 삶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모든 억울함이 풀려 감옥에서 나간들 요셉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보디발을 섬기며 변함없이 전과 같은 종의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요셉의 형통은 아닙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형통은 이 요셉을 어느 날 때가 되었을 때 왕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왕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왕에게로 인도할 사람을 요셉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주님의 나라, 주님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번성케 하고,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이 형통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오늘 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도 여전히 다른 형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여기저기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구하던 형통이 멈추어질까요 인정해주고 마음을 채워주고 나를 세워 줄 세상을 여전히 구하고 다니기에 오늘도 분주한 우리들입니다. 이미 함께하고 계신 그에게 무릎 꿇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여전한 하나님의 형통을 보게 되길 기도합니다. <항상기쁜교회는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항상기쁜교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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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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