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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56
    구약성경에서 “복되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바룩”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같이 사용되고 있다. 이 어휘는 칼 수동 분사형(Qal. Pass. Pts)으로 “복되다” “혹은 ”복을 받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룩 아도나이”를 번역한다면 “여호와는 복되시다.” 혹은 “여호와께 복이 있으시길!”하는 기원의 의미이다. 영역본들은 “Blessed be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수동 분사형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마치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복을 받는 것 같아 우리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복되다고 말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것은 의미가 맞지 않다. 그래서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송축하다” (be praised. 창 24:27; 왕상 10:9; 시 72:18; 144:1; 145:1 등)라고 번역하고 있다. 시편 1편에“복이 있다”(how happy)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아쉬레”라는 항상 사람에게 사용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이 히브리어를 “마카리오스”로 번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행복한 상태(the state of happiness)를 기술하는 말이며, 영적인 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이 산상복음은 결코 그 해석이 쉽지 않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을 정의하시며 반복해서는 쓰시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3, 10),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8),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9),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12) 등이다. “호티”(왜냐하면) 로 시작하는 부사절에서 복이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 데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 팔복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은 없을지라도 복 있는 이유가 다 하나님과 하나님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됨과 연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세번째 복, “온유한 자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온유한 자가 왜 땅을 상속받게 될 지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형제간에 재산 싸움이 있을 때에 온유해야 유산을 많이 상속받는다는 의미인가? 그래서 형제간에 서로 우애를 다지고, 싸우지 말라는 말씀인가? 우리는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부터 정확한 의미 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헬라어 “프라우스”라는 말은 흔히 “온유하다”(meek)라고 이해하고 번역하고 있지만 “겸손하다”(humble)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기술하며, 왕으로 오시는 이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슥 9:9). 이때 겸손하다는 뜻으로 “프라우스”를 쓰고 있는 데 이는 히브리어로 “아나브”, 곧 “겸손하다”라는 의미이다(마 21:5). 왕으로 오시는 분이 온유하여 나귀를 탔다고 한다면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다. 왕이 보통 전쟁에 승리하고, 말을 타고 수 많은 그의 군대를 대동하고, 그의 왕도에 입성하는 그 위풍당당하고, 근엄하고, 오만하고, 거만한 왕과 달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도로 입성하시는 왕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조에 있어서 잘 어울리지 않은 말이다. 그 보다는 “겸손하다”고 해야 옳다 (ESV, RSV, 한글개역, 바른성경). 따라서 마 5:5의 경우도 “온유하다”는 말보다는 “겸손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우리는 여기서 땅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을 생각해볼 팔요가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여호와 네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 것이다.”(출 20:12).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와 땅을 연계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예수께서는 겸손한 자와 땅을 연계해서 말씀하신다. 모세의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왕과 백성이 되는 관계를 맺고, 이 관계가 쉽게 깨어지지 않는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서로 목숨을 담보하는 피를 뿌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시내산 언약을 성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부자 관계를 맺는 사건으로도 해석하는 것도 그 하나이다.(손석태 저, 「목회를 위한 구약신학」(서울 CLC, 2006), 289-335.참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며,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 내가너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을 보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였으나 네가 보내기를 거절하니, 보아라 내가 네 아들, 네 맏아들을 죽일 것이다.”(출 4:22-23)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을 아들로 입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내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들의 유업으로 주겠다. 나는 여호와이다.”(출 6:8)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유업”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소유”(possession)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소유는 자손 대대로 이어받아 소유할 땅이기 때문에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라샤”라는 말을 “유산”(heritage, KJV, ERV, JPS )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다. 레위기 20:24에서는 히브리어 “야라쉬”를 “상속받다”(inherit)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ESV, KJV, ERV, JPS, RSV, 바른성경). 개역성경은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신명기 4:38에서는 “너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그것을 유업으로 네게 주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느니라.”(신 4:38)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유업이란 말은 “유산”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는 “나할라”라고 하는 보다 분명한 유산의 의미를 가진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어 아들로 삼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이스라엘에게 주신 유산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모를 잘 공경하면 그 유산의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여기서 부모는 그들에게 땅을 주신 하나님도 되겠지만,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이다.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당시 고대 근동의 관습을 따라 입양 관계를 파기하고 그 아들을 그의 집에서 내쫓아 다시 노예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 겸손치 못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복종하지 않고, 육신의 아비의 말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아들과 땅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의 다른 설명이고 해석이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산상수훈을 생각해보면 겸손한 자가 땅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에 대한 해석의 열쇠가 풀릴 것 같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5에서 겸손한 자(온유한 자)는 땅을 상속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데, 땅을 상속하고, 상속받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기서 “상속하다”는 말은 헬라어 “클레로노메오”를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히브리어 “나할”(상속하다)이라는 말을 LXX에서 번역한 말이며, 이를 마태복음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시내 산의 언약의 말씀과의 관계성을 간과할 수 없다. 산상 수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9).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땅을 상속받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땅을 상속 받을 자는 겸손해야 한다. 그의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공경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반드시 생명을 걸어놓고 지켜야 할 계약이다. 하나님의 언약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가 바로 아담이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심이 그를 망하게 한 것이다. 모세가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 불평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때문이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께서 바위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하셨는데, 백성들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바위를 친 사건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20:1-13). 이것은 온유한 자세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엇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겸손의 극치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었다.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땅을 상속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5-1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5
    우리 한글 성경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음역해놓은 곳이 많다. 그러나 히브리어 음이 정확하지 않는 곳도 있고, 또한 음역을 해야 할 곳을 한글로 번역해 놓아 오히려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곳도 있다. 그 예를 몇가지 소개해 본다.a.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가는 하갈을 만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시고, 나아가 그가 낳을 아들, 이스마엘에게 두신 뜻을 말씀해주신다. 그러자 하갈은 자기 나타나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고 하였다. 한글 개역성경은 하갈이 지은 여호와의 이름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감찰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역자는 앞의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쓰거나 음역을 썼어야 옳다. 즉 “엘 로이”라고 했어야 한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로이”는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자대로 번역하면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하갈은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엘 로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라고 번역해야 한다. “감찰”이라는 말은 너무 무거운 말이다. 사실 “엘 로이”에 본문의 설명은 “내가 여기서 어떻게 나의 뒤를 보고 계시는 분을 내가 보았는가?”라고 직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뒤를 보다”는 말은 그 의미가 금방 알 수 없다. 영역본은 “look afrer”라고 번역하였다. “돌보다” 혹은 “보살피다”고 번역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다”는 말이 “돌보다, 보살피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갈이 명명한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히브리어의 음역대로 “엘 로이”라고 해야 하며, 그 의미에 대해셔는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혹은 “나를 보살피는 하나님”라고 번역하고 이해해야 옳다.b. “내 남편” “내 바알”(호세아 2: 16-17)호세아 2:16-17 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배역하여 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백성으로 회복하시려는 구원의 사역을 음행하여 버린 아내를 다시 데려오며 하시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 하리니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히브리어로 “내 남편”이라는 말은 “이쉬”와 “바알리”이라는 말이 쓰인다. 끝에 “이 ” 발음은 “나의”라는 소유대명사 어미이다. 따라서 “남편”은 “이쉬”와“바알’이다. 이 “바알”이라는 말은 “남편” 혹은 “주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 대신 섬기는 바알 신을 가리키는 말과 동음이어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알리” 라고 불렀다면 이 말이 “내 남편이시여!” 하고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내 바알신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아내인 이스라엘이 “바알”이라고 지껄이는 것 자체도 원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 남편이시여!”, 혹은 우리 말 식으로 말하면 “여보”라고 부를 때, “바알리”라는 말하지 않고, “이쉬”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 2:16은 “그 날에 네가 나를 ‘이쉬’라 일컫고 다시는 ‘바알리’라 일컫지 아니 하리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c. “버리운 자” “황무지” “헵시바” “뿔라” (사 62:4-5)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열국 중에서 선택한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김으로 여호와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인애하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고 그의 백성을 삼으시고자 한다. 바로 그때에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칭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뿔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시며, 네 땅이 결혼한자가 될 것임이니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리라.”(사 62:4-5)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버리운 자” “황무지”라는 말도 한글로 번역할 일이 아니고 위의 경우와 같은 원리로 “버리운 자”는 “아주바”로, “황무지”는 “쉬마마”라고 음역하고 그 뜻을 각주에 기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5-0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4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라고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고 믿고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독생자”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독생자”의 사전적 의미는 “형제나 누이가 없이 아들 하나 뿐인 것을 말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독생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라고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현대 한국어에서 성경 이외에서는 거의 쓰여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과 차이가 있어서 현대인들에게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관하여 새롭게 고찰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독생자”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요한 문서에서만 사용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는 말이다. 요한복음 1:14에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헬라어는 여기서 “독산 호스 모노게노스 파라 파트로스”라고 했는데 여기서 “모노게내스”라는 말을 가끔 아버지를 주어로 하여 아이를 “낳다” 혹은 “(아이를) 보다” (beget)는 의미로 쓰여지기 때문에 아버지가 낳은 외아들의 개념으로 독생자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 말은 단순하게 “오직”(only), 혹은 “유일의”(unique)라는 뜻이다. 눅 7:12, 9:38의 “유일한” 아들에서와 같이 “하나 뿐인” 혹은 “유일한”의 의미이고, 눅 8:42에서와 같이 외동딸 의 의미에서와 같이 “하나,” 혹은 “오직 하나”의 의미이다. “낳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아버지로부터의 (혹은 아버지로부터 온) 유일한 자(로서)의 영광”, 혹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한 분의 영광”(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from the father)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독생자”라는 말, 즉 “낳다”거나 “아들”이라는 말이 본문에는 없다. 현대의 서양의 역본들 가운데 NIV 나 NET 등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the glory as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라고 번역하고 있다.또한 요한복음 1:18에 예수님에 대하여“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언급이 있는 데 헬라어구 “모노게내스 후이오스, 호 온 에이스 톤 콜폰 투 파트로스”에서 하나님을 “독생하신”이라고 칭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어디서 낳고 어떤 다른 존재로부터 유출된 분이 아니다. 따라서 “독생하신”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에게나 아들에게나 다 적절치 않다. 또한 여기에 사본상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는 데, “유일하신 하나님”(NAS, ESV, NIV)과 “유일하신 아들”(KJV)이 그것이다. KJV 는 A C3 Q Y f1,13 을 따라 “독생하신 아들”로 번역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본이나 역본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1:18은 대다수의 사본을 따라 “아버지 품속에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 혹은 “아버지 곁에 계신 유일하신 분,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옳다.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여기서도 헬라어 “호스테 톤 후이온 톤 모노게네 에도켄”은 “독생자를 주셨으니”보다는 “유일한 아들을 주셨으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요한복음 3:18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라는 구절이 있는 데 여기서도 “토 오노마 투 모노게누스 후이우 투 데우”도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의 이름”(the name of the God’s one and only Son[NIV], 혹은 in the name of the only Son of God[ESV]) 으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요한1서 4:9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에서도 독생자 대신에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1:17에서도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에 그의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서는 안 되고 “유일한 아들”을 바쳤다고 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그의 몸으로 난자 이스마엘도 있었고, 또 다른 아들들도 있었다. 이 경우 “유일한 아들”이란 문맥에서와 같이 약속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4-2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3
    2017 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맞는다. 부활절이 아니라도 성경은 우리가 과연 부활 신앙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가하는 질문을 시시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던지며, 우리를 부활 신앙을 선택하고, 부활 정신으로 도전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조상이라고 가르치며(롬 4:12),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이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죽인 것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살리는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은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그래서 우리 신앙의 출발과 중심은 항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번제 준비를 하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으로 향하여 갔다. 그리고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그는 그의 하인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창 22:5)고 말한다. 히브리어 사본은 “우리가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하는 “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혼자 돌아오지 않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것을 하인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지라도 그는 분명 살아있는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과연 무슨 뱃장이 있었기에 이런 대담한 말을 그의 종들에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그의 아내 사라가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했을 때, 그는 근심이 가득하였고, 괴로워 했다고 했다(창 11,12). 살아있는 아들, 이스마엘의 손을 놓지 못해 근심하고 괴로워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니 전혀 고민하거나 주저하는 내색이 없이 이튿날 아침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번제로 드리라고 지시하신 산으로 향한다. 마치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민첩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번제란 재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하인들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따라 갔다. 사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그는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때문이다. 하갈과 그의 자식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이삭을 통해서 태어나야 네 자손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창 21:12).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꼭 믿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그를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 민족은 바로 이삭을 통하여이루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삭은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믿은 것이다. 그는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살려 도로 자기에게 주실 것을 믿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삭에게서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대범하고 주저 없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서 그의 하인들에게 번제를 드리고 “우리가” 돌아온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아브라함과 같은 용기와 결단과 결단에 따르는 대범한 행동을 할 수 없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비굴하게 인간적인 꾀를 짜내고 그리고 주저 앉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 100 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의 이름까지 이삭으로 지으라고 일러 주셨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는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그의 아내도 90 세가 되어 생리가 그친지 오래 된 상황이어서 “내가 늙었는데 참으로 아이를 낳겠느냐?”고 속으로 말하여 웃었다고 했다 (창 18:13). 이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와께 불가능한 것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그의 전지전능 하심을 믿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100 세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았다. 도저히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목에서 꽃이 피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아브라함은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고목과 같은 자기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들 이삭을 그분께 번제로 드린다 한들 분명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를 담대하고 용감하게 한 것이다 (롬 4:17).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 믿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고 노경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말씀과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신앙을 본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이 결국 그를 우리 모두 죽은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게 한 것이다.2017년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부활 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의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천지창조의 권능을 믿었기에 그의 아들을 주저함 없이 번제로 바칠 수 있었다.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용기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헌신도, 다 부활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살리신 이에게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왜 두려운가? 왜 우리는 “아니요”라는 말을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피붙이와 우리의 소유에 대하여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집착하는가?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과 부활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 속으로 부활을 믿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부활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훈련을 받지 못하고, 연습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우리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빌 3:10-1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그는 분명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대한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고난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은 무리들에게 돌을 맞고 실신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내다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만일에 그가 죽음이 두려웠더라면 그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안에 들어온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여야 할 것입니다.”(행 14:22)라고 권면했다. 그는 사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도 바울과 똑같이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고, 세례를 받음으로 복음의 종으로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죽음을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롬 6: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은 믿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요, 고난에 대한 생활 철학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꼐 고난도 받아야 한다. 십자가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 진리를 수호하고, 정의를 실행하며, 자유를 지키며 부활절을 맞는 우리도 이러한 아브라함이나 바울과 같은 인생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부활 신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정의를 세우고, 자유를 쟁취해야 할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류를 따라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면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4-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52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 형제로 그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간발의 차로 형의 자리를 에서에게 내주고 그는 장자의 자리에 대한 유별한 관심을 가지고 자랐다. 그래서 허기진 모습으로 사냥에서 돌아온 형 에서에게 붉은 죽을 주고 장자권을 바꾸는가 하면, 그의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털로 분장하여 눈이 어두운 아비 이삭을 속이고 여호와의 복을 가로채는 짓을 했다. 이삭은 야곱을 다음과 같이 축복했다.“보아라, 내 아들의 향기는 여호와의 복주신 들판의 향기 같구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이슬과 기름진 땅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 백성들이 너를 섬기고 나라들이 네게 엎드릴 것이니 너는 네 형제들의 주가 되어라.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엎드릴 것이니, 너를 저주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창 27:27-29)이 축복의 말씀은 이삭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풍성한 식량을 주시고,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통치권을 주시며, 나아가서 야곱이 세상만민이 축복과 저주를 받는 표로 세워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 사건 후 형의 분노를 사서 그를 피하여 그의 외삼촌이 사는 밧단아람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야곱은 곧 집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을 외삼촌의 머슴살이겸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4명의 아내로부터 11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으며, 재물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고 했던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은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뭉치의 선물을 준비하여 형이 오는 길에 그의 종을 통하여 차례대로 보냈다. 그는 “내가 내 앞서 가는 선물로 그의 감정을 풀고 그의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아마도 나를 받아 줄 것이다.”(창 32:20)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형제는 20년 만에 만났다. 야곱은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형 에서에게 절하였고, 서로 껴안고 목을 끌어안고 입맞추며 울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소개하자, 에서는 그가 오는 길에 만난 짐승 떼가 무슨 뜻인지 야곱에게 물었다. 야곱은 이것이 형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말한다(10). 그러자 에서는 자기에게는 충분히 있다면서 그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에 야곱은 “아닙니다. 제가 형님께 은총을 받았다면 부디 제가 형님께 가져온 저의 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셔서 제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11)라고 말한다. 여기서 야곱이 한 대답 가운데 10절의 “나의 선물”이라는 말을 개역 성경에서는 “ 나의 예물,” 또한 11절의 “나의 복”이라는 말도 “ 나의 예물”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10절의 “선물”은 히브리어로 “민하티”그리고 11절의 “나의 북”은 “비르카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민하”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희생이나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창 4:3 이하). 따라서 이 경우에는 예물이나 제물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 어휘를 단순히 “선물”(gift, present)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야곱이 형 에서에게 주는 가축들은 “선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바락”()라는 말은 동사로 “축복하다”(bless)라는 의미이고, 파생 명사 “브라카”는 “복”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11절은 “예물”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고, “복”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야곱은 에서에게 “내 복을 받으라”고 말한다. 이것은 의미있는 말이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려고 작정하신 복을 그의 형 에서에게 주려고 하자, 그의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그의 아버지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뻔 했던 하나님의 복을 자기에게로 돌려놓았다. 그리하여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축복을 받는다.“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셔서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며, 네가 여러 백성의 무리를 이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복을 너와 나와 함께한 너의 후손에게 주셔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고 있는 땅을 네가 소유하게 하시기를 바란다.”(창28:3-4) 야곱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의 복, 너 나아가 아담에게 주셨던 복을 축복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축복의 계승자가 되었다.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형 에서의 칼을 피하여 그의 외삼촌 라반에 집에 피신 와서 20년을 살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는 선물을 준비하여 형 에서에게 주면서 “내 복을 받으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얻는 데 있어서 정직하지 못하였고, 형과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형에게 복을 받으라고 말함으로 그가 언약과 축복의 계승자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는 형 앞에서 떨고는 있지만 자기의 정체성은 분명히 했다. 따라서 본문에서 “복”을 “예물”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3-3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2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라고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고 믿고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독생자”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독생자”의 사전적 의미는 “형제나 누이가 없이 아들 하나 뿐인 것을 말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독생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라고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현대 한국어에서 성경 이외에서는 거의 쓰여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과 차이가 있어서 현대인들에게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관하여 새롭게 고찰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독생자”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요한 문서에서만 사용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는 말이다. 요한복음 1:14에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헬라어는 여기서 “독산 호스 모노게노스 파라 파트로스“)라고 했는데 여기서 “모노게내스”라는 말을 가끔 아버지를 주어로 하여 아이를 “낳다” 혹은 “(아이를) 보다” (beget)는 의미로 쓰여지기 때문에 아버지가 낳은 외아들의 개념으로 독생자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 말은 단순하게 “오직”(only), 혹은 “유일의”(unique)라는 뜻이다. 눅 7:12, 9:38의 “유일한” 아들에서와 같이 “하나 뿐인” 혹은 “유일한”의 의미이고, 눅 8:42에서와 같이 외동딸 의 의미에서와 같이 “하나,” 혹은 “오직 하나”의 의미이다. “낳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아버지로부터의 (혹은 아버지로부터 온) 유일한 자(로서)의 영광”, 혹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한 분의 영광”(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from the father)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독생자”라는 말, 즉 “낳다”거나 “아들”이라는 말이 본문에는 없다. 현대의 서양의 역본들 가운데 NIV 나 NET 등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the glory as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라고 번역하고 있다.또한 요한복음 1:18에 예수님에 대하여“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언급이 있는 데 헬라어구 “모노게내스 후이오스, 호 온 에이스 톤 콜폰 투 파트로스”에서 하나님을 “독생하신”이라고 칭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어디서 낳고 어떤 다른 존재로부터 유출된 분이 아니다. 따라서 “독생하신”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에게나 아들에게나 다 적절치 않다. 또한 여기에 사본상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는 데, “유일하신 하나님”(NAS, ESV, NIV)과 “유일하신 아들”(KJV)이 그것이다. KJV 는 A C3 Q Y f1,13 을 따라 “독생하신 아들”로 번역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본이나 역본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1:18은 대다수의 사본을 따라 “아버지 품속에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 혹은 “아버지 곁에 계신 유일하신 분,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옳다.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여기서도 헬라어 “호스테 톤 후이온 톤 모노게네 에도켄”은 “독생자를 주셨으니”보다는 “유일한 아들을 주셨으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요한복음 3:18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라는 구절이 있는 데, 여기서도 “토 오노마 투 모노게누스 후이우 투 데우”도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의 이름”(the name of the God’s one and only Son[NIV], 혹은 in the name of the only Son of God[ESV]) 으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요한1서 4:9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에서도 독생자 대신에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1:17에서도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에 그의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서는 안 되고 “유일한 아들”을 바쳤다고 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그의 몸으로 난자 이스마엘도 있었고, 또 다른 아들들도 있었다. 이 경우 “유일한 아들”이란 문맥에서와 같이 약속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3-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1
    출애굽기 17:1-7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시내 산을 향하여 가다가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투며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이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이르렀을 때,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때를 추억하며, 비록 고기 가마 곁에 앉아 그것을 먹지는 못할 망정 고기 냄새라도 맡고,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차라리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이 광야에서 굶어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들의 양식으로 주셨다(출 16:1-36). 그리고 이들은 그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러 장막을 쳤는데, 마실 물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합니까?” 라고 원망하고, 이번에는 금방이라도 돌로 칠 것같이 덤벼들었다. 그들의 모세를 대항하고, 대항하는 정도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이때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대응할지 물었다. 여호와의 대답은 정면 돌파였다. 돌로 치려는 백성들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백성들 앞을 지나 호렙 산 반석 위에 서라는 것이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가고, 손에는 나일 강을 치던 그의 지팡이를 잡고 나아가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보아라. 내가 거기 호렙 산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서리니 그 반석을 쳐라. 그러면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들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여호와의 이 말씀대로 반석을 쳤고,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물을 마실 수 있었다.여기서 우리는 반석 위에 서있는 모세와 모세 앞에 서 계시는 여호와의 위치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여호와 앞에 모세가 서 있어야 한다(신 19:17; 25:1-3; 17:8-13).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치 선생님 앞에서 벌 받고 있는 어린 학생이나 재판정의 판사 앞에 서있는 죄인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가리키며 명령하여 물을 내도록 하지 않으시고 반석을 치라고 하셨을까?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민 20:8에는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네 형 아론이 회중을 소집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위에게 명령하면 그것이 물을 낼 것이다. 이와 같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고 지시하신다. 이처럼 명령 한마디면 할 수 있는 일을 여호와께서는 반석을 치라고 명하신다. 따라서 여기서 모세가 반석을 치는 행위는 이 사건과 관련된 깊은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성경 곳곳에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신 32: 4, 15, 18, 31 등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시 78:35에서는 반석을 여호와로 언급하고 있으며, 시 95:1 에서도 여호와를 구원의 반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반석은 여호와를 상징한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들었던 그 지팡이는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라 모세에게 의미있는 지팡이었다.. 이집트에 재앙을 퍼부을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들어 올리라고 명하셨다(출 4:3-4, 20; 7:12; 7:19; 8:5 [히 8:1]; 8:16; 10:13; 14:16). 따라서 모세가 든 지팡이는 심판의 지팡이요, 능력의 지팡이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제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하신다. 모세는 심판자요 반석이신 여호와는 심판을 받는 죄인으로 서 있는 것이다.그러나 여호와는 죄가 없으시다. 오히려 모세의 심판의 지팡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돌로 치려하는 백성들을 향해야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대신하여 매를 맞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에 대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 10:4에 성경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고 있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다.” 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 반석은 마땅히 매 맞아야 할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매를 맞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임을 가르치고 있다.따라서 반석에서 나온 물도 “신령한 물”, 곧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 샘물에 대한 모형이다. 에스겔서에는 말일에 성전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와 온 세상을 소생케 하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겔 47:1-12). 스가랴서에서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어줄 샘이 다윗 집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을 위하여 열릴 것이며(슥 13:1), 또한 그날에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 항상 사방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슥 14:8).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예수께서 바로 이 생수를 자기가 주시겠다고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외치신다(요 7:37-38). 그 말씀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요 19:34). 물론 이 물은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반석이신 예수님, 특히 신령한 생명수를 약속하신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가시적인 성취라고 볼 수 있다.결론적으로 반석 위에서 서서 모세의 매를 맞으신 여호와는 예수님이시고, 반석에서 나온 물은 예수께서 앞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부어주실 신령한 물, 생명수 샘물에 대한 모형이다.모세에게 돌을 던져 치려하는 이스라엘의 태도는 결국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땅히 돌을 던저 맞아야 할 자는 이스라엘 자신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돌팔매를 자기에게 향하게 하셨다. 모세에게 백성들을 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을 치라고 하신 것이다. 원망하며, 죽음을 자초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 자신이 매를 맞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으신 것이다(사 53:5-8). 그리고 우리에게 신령을 물을 마시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3-1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0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자기를 속여 동침하고 자식을 잉태한 후 끌려온 그의 과부 며느리 다말에게 한 말이다. 이 세상 어디에 며느리와 시아비가 동침한 경우가 있으며, 그것도 시아비를 속여 자식을 임신하였는데 이 불륜의 며느리에게 “그는 나보다 더 의롭다”고 말하는 윤리와 도덕이 있겠는가? 더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여자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니, 성경의 윤리는 우리의 인습과 이성을 초월한 신비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 제도와 혈통의 개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시형제 결혼에 대한 규정은 고대 근동의 주전 14-13세기의 힛타이트나 주전 15세기 경의 누지 등에서 발견된 문헌에서 발견된다. 이들 문헌에 보면 과부 며느리는 결혼 때에 시아버지가 돈을 지불하고 샀기 때문에 죽은 남편의 재산이며,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그 여자는 계속 가족의 재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며, 그 여자도 계속 남편의 집에 남아 있으므로 여생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개념으로 시행되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아내는 결혼으로 남편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것이 의무이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남편의 형제들은 한 골육이기 때문에 남편의 대를 잇는데 있어서 형제는 남편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리하여 아들이 없는 과부는 그의 시부가 정해준 시형제와 결혼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시형제결혼(levirate marriage)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 25:5-10에 있으며, 여자는 결혼함으로 남편에게 자식을 낳아주어야 하는 계약적 의무를 더 강조한다.다말의 남편 엘이 자식이 없이 죽자, 그의 시아버지 유다는 그의 둘째 아들 오난에게 명하여 그의 형수와 동침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그의 형수에게 들어갈 때마다 자기 형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에 사정하였다”(창 38:9)고 했다. 오난의 형에게 상속자가 없는 경우에는 자기가 당연히 장자로서의 명분과 유산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지만 형에게 상속자가 생길 경우 자기는 여전히 아버지 유다의 둘째 아들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맏아들은 가문의 대표자가 되고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상속받으나 남은 형제들은 아버지 재산의 남은 절반을 함께 나누어 받았다. 따라서 형에게 자기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생길 경우 자기는 결과적으로 손해만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난은 형수가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의도적인 피임 방법을 쓴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일을 악하게 보시고 그를 죽이셨다. 이제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는 셋쩨 아들 셀라를 그의 큰 며느리와 동침시켜 그의 상속자를 얻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이미 다말과 동침한 두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마저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유다는 셀라를 다말과 동침시키지 않고 오히려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어 셀라가 자라기까지 과부로 살라고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아내를 잃은 유다는 친구를 찾아가는 도중 길가에서 창기를 만나 동침하게 되었는데 그 여자는 창기로 변장한 그의 며느리 다말이었다. 다말은 그의 시아버지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계획적으로 일을 꾸민 것이다. 그의 시아버지가 막내 시동생 셀라가 장성하였음에도 자기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말은 임신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져 다말은 시아버지 앞에 끌려 나와 불에 태워질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 다말은 자기를 임신하게 한 사람이 자기 시 아버지인 것을 증명하는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내보였다. 이것을 본 유다가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의롭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38:26)라고 말했다. 유다는 다말이 자기보다 의롭다고 말한다. 유다가 시아비를 속이고 임신까지 한 이 며느리의 패륜적인 행위를 가리켜 자기보다 의롭다고 칭찬을 하고 있다. “그 여자는 나보다 의롭다”(26)고 번역하고 있는 데 좀 더 문자적인 번역은 “그 여자의 의는 나보다 낫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 여자의 “의”란 무엇인가? 우선 다말의 행위를 비난하기 전에 유다가 먼저 다말을 속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며 그의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 까지 과부로 지내라고 명하고 있는 데, 유다는 처음부터 다말을 셀라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38:11). 유다가 장성할 때까지라고 시간을 정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셀라가 장성하면 줄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셀라가 장성한 후에도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다. 다말이 유다를 유혹할 계획을 세운 것은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는데도 그(유다)가 자기(다말)를 그(셀랴)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4)라고 적고 있다.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 유다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여기서 “보았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라아”()라는 말은 단순히 본다 (to see)는 말이 아니라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유다는 처음부터 다말을 속인 것이다. 따라서 다말이 창기로 변장하여 그의 시아비 유다에게 접근한 것은 유다의 속임수에 대한 보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는 다말이 내놓은 유다의 범죄에 대한 모든 증거물 앞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가 그의 며느리를 향하여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하는 말은 보다 깊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말은 아내로서 자식을 낳아야 하는 남편에 대한 계약적 의무를 이행하려고 했다. 당대에 결혼은 계약이었다. 유다와 그의 아들 오난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복을 고의적으로 거역하는 행동을 하는 반면, 다말은 보다 적극적으로 아내로서의 언약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이를 믿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점에서 유다도 다말을 의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창조시에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다와 그의 아들, 오난은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거역하고,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한다. 불의한 것이다. 유다는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창조의 원리로나 불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다말의 몸에서 베레스에 이어 보아스, 이새, 그리고 다윗을 낳게 하신다(룻 4:18-22). 결국 다말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3-0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49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 왕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왕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내신 후 시내 산에 도착하여 이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으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내산 언약을 “왕의 언약”(The Covenant of Kingship)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통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고, 이스라엘에게 항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적 전사가 되어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수행하며 그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부터 이미 그의 심중에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왕을 세워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왕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창 17:6; 26:4; 35:11). 그리고 야곱의 아들, 유다에게는 그의 자손이 형제들 가운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적 약속을 주신다. (창 49:10)그러나 이스라엘은 만족하지 못했다. 사사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은 인간 왕을 구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제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삼상 8:6)라고 청한다. 사무엘이 왕의 제도가 자기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설명해 주어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든 민족처럼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릴 것이며, 그가 우리 싸움을 싸우기 위해 우리보다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삼상 819, 20)라고 주장한다. 결국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강청을 들어주시어 사울을 왕으로 주신다.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주심에 있어서 먼저 사무엘과 대면하게 하여 그를 왕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사무엘은 사울을 숩 땅의 산당에서 만나 여호와께서 그를 세워 왕 삼으실 것을 예고해 주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준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셨음을 확신하게 하는 징조로 그날 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해 준다(삼상10:1-8). 그리고 그들이 서로 헤어질 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다른 마음을 주셨다(10: 9). 우리 한글 개역 성경은 “새 마음”을 주셨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렙 아헬”( )이라고 적고 있다. “렙”()이라는 말은 “심장”(heart)이라는 의미이고, “아헬”()이라는 말은 “다르다”(different, another)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다른 심장” 혹은 “다른 마음”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영역본들도 히브리어의 뜻을 충실하게 살려서 “새 마음”이 아니라 “다른 심장”(another heart, ESV, KJV)라고 번역하든지 아니면 이를 동사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바꿔주셨다.”(God changed his heart, NAS)라고 하든지 “하나님께서 그의 내면적 인격을 바꿔주셨다.”(God changed his inmost person, NET)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자 사울은 딴 사람이 되었고(삼상 10:6), 또한 예언도 하게 되었다 (삼상 10:10). 개역성경처럼 “새마음”이라고 번역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된 새로운 사람으로 혼돈할 가능성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왕이 될 사울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말하자면 중생하고 거듭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중생한 사람은 아니다. 만일에 사울이 중생한 사람이라면 왕이 되어 번번히 하나님을 뜻을 거역하며(삼상 15장),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대적하고 죽이려하고(삼상 19:10; 20:33), 심지어는 놉의 제사장 85명과 그들의 가족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삼상 22:17-18). 그에게는 성령은 커녕 악한 영이 들어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친다(삼상 28: 8-14).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신 “다른 마음”이란 중생한 마음이 아니라 앞으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는 은사나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 온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왕을 달라고 들끓고 있는 때였다. 그러나 사울은 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만 그의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헤메는 자, 말하자면 가족적인 사람이었고, 종교적인 관심도 별로 없어서 당시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삼상 9: 5-6). 그러나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붓자 그는 변하여 민족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과 지도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암몬 사람 나하스를 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삼상 11장).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속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왕이 됨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내면에 잠재한 반역성이 더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 족속을 모조리 진멸하라고 명하셨지만 그는 아말렉 왕 아각과 각 종 질 좋은 전리품을 남겼다. 마땅히 진멸해야 할 물건 “헤렘”을 진멸하지 않았다. 이 일로 사울은 여호와께 버림받았고(15:22-23), 결국은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그의 군대는 물론 그의 아들, 요나단과 더불어“헤렘”의 법대로 (수 6:18: 삼상 28:18-19)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삼상 31:1-2). 사울은 결코 중생하고 변화된 사람이 아니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2-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48
    출애굽기 6:7에는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알리시며,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출 6:7; 출 19:5 참조)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라는 공식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계약공식 혹은 선택공식이라고 한다. 선택과 계약은 항상 같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이를 분리하여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선택이 없이는 계약이 있을 수 없고, 선택은 계약이 있어야만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 때문에 선택 공식이나 계약 공식이 같이 사용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어느 것이 선택 공식이고 어느 것이 계약공식인지 구별하는 것은 문맥을 따른 수밖에 없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많은 민족 중에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시내 산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계약을 맺으신다. 이때에 모세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계약 중재자가 되어 짐승을 잡아 그 피를 하나님을 상징하는 돌 판과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렸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처럼 짐승을 잡아 쪼개서 그 고기를 벌려 놓고 그 가운데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언약을 맺었다는 점은 같다. 왜냐하면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길 경우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의 언약이나 계약이란 이처럼 생명을 담보로 맺은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담보하여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으셨다. 이스라엘도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예배하고 섬기겠다는 맹세를 한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이 계약 공식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결혼 선언 공식을 차용한 것이다. 아마도 시내 산에서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계약관계가 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결혼 관계와 흡사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남녀의 결혼이란 일종의 계약이었으며, 결혼에는 계약서를 써야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은유로 차용했을 것이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신부에게 반드시 결혼 계약서를 써주고, 결혼 잔치를 베푼 후 사람들 앞에서 “너는 나의 아내이고, 나는 너의 남편이다”라는 결혼 선언을 해야 했다. 그래야 이들의 결혼이 법적인 효력을 발생하고 법적인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이 결혼 선언 공식은 사실상 계약 공식과 일치한다. (Seock-Tae Sohn, The Divine Election of Israel (Grand Rapids: Eerdmans, 1991). YHWH, The Husband of Israel (Eugene: Wipf & Stock, 2002). 한글 본으로는 손석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서울: 성광문화사, 1991), 『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7) 등을 참조 바람). 따라서 성경의 계약(혹은 언약)개념이나 계약공식은 그 기원이 결혼공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cott W. Hahn, “Covenant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Some Current Research (1994-2000) CBR 3(2005):263-92..” Kinship by Covenant : Canonical Approach to the Fulfillment of God’s Saving Promises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9), 9)]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시내 산 언약을 결혼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렘 31:31-33).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신랑이 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부부가 지켜야할 법도가 있고, 규칙이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이혼하게 된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집에서 내쫓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이혼 공식이 “나는 네 남편이 아니고 너는 내 아내가 아니다.”이다. 여호와께서도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혼장을 써주었다고 하시며(렘 3:8), “너는 내 백성이 아니고, 나는 네 하나님이 아니다.”(호 1:9)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이들을 가나안 땅에서 내쫓아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하신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신적 권능을 가진 신랑으로 오셔서 결혼 잔치를 베풀고 (요2장), 그를 믿는 성도들을 그의 신부로 맞으신다. 요한 계시록은 어린 양 그리스도와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 사이의 장엄한 결혼 예식으로 끝나고 있다(계 19:7-9).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은 다만 남녀의 결혼 은유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왕과 백성의 관계나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부자 관계로 이해하는 그 출발점은 모두 시내산 언약이다. 따라서 시내산 언약은 신정언약(Theocratic Covenant), 왕정언약 (Covenant of Kingship) 이나 부자언약(Father-Son Covenant)의 성격을 가진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손석태 『목회를 위한 구약 신학』이나 개신대학원대학교의 교수논문집 『개신논집』5, 6, 8 호 참조하기 바람.) 여호와께서는 이 시내 산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신 것이며, 또한 시내 산 언약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며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이 되고,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받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는 공식은 여러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그의 백성 삼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신 7:1-11). 그 이유는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 그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피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셨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신부요 자녀로 삼으시고, 백성 삼으셨다. 우리는 털끝만큼도 그의 백성, 그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도 공적도 없지만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부요,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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