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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1
    요한 3장에서는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니고데모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요한복음 4장 본문의 이야기는 니고데모와는 아주 대조되는 인물과 예수님과의 긴 대화이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 종교, 정치, 학문에 있어서 지도자이며, 돈도 많은 이스라엘 상류 사회의 일원인 니고데모와는 달리 남편을 다섯을 가졌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소외된 듯한 무명의 여자, 밤에 스스로 예수님을 만나로 나온 니고데모와는 달리대낮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는데 예수께서 먼저 그에게 물을 청하며 대화를 하게 된 여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상당이 신학적이고 신앙적이며 현실적인 면이 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예배에 대한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말하고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는 것을 깨닫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요한 4장은 영혼에 대한 목마름-남편-예배의 대상으로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예수께서 이 낯선 여자에게 물을 청했을 때, 이 사마리아 여자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인에게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오히려 물을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물이란 말이 값없이 주는 물건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 예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생수는 값없는 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들의 대화는 야곱의 우물과 예수님의 우물로 비화하여, 야곱이 주는 말과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물을 비교한다. 야곱의 우물 물은 마셔도 마셔도 계속 목마른 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 물은 사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뱃속에 영생수의 샘을 무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그 물을 예수께 청하는 데, 그물을 자기에게 주어서 목마르지도 않고, 이곳에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고 창한다. 목마른 여자, 물 길으러 다니기에 지친 여자의 말 같다.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이 여자는 물을 길으러 다니는 것이 싫지만, 목말라 살기 위해서라면 이 뜨거운 대낮이라도 이 우물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고대 근동의 광야에는 우물이 생명줄이나 다름없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야곱이 물려준 이 우물물은 이 여자에게 해갈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에 귀가 번쩍 열린 것 같다. 그래서 그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예상 밖에 이 여자에게 자기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도대체 목마른 여자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하신 예수께서는 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는가? 생수와 남편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남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구출해 내서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어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결혼은 계약이고 언약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것을 여호와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호와는 그들의 남편이고, 자기들은 여호와의 아내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이들을 보호하고, 의식주를 공급하는 것을 비롯하여 남편으로서의 대의를 지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 남편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믿고, 이웃 강대국을 의지하여 바람을 피운 것이다. 간음하고 행음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래 야곱의 후예였지만 솔로몬 이후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어 나라를 쪼개 북왕국을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며, 그의 백성이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여호와께 예배하는 것을 저지했다. 아합 왕 때는 바알 신을 섬기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아람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하다가 망하게 되었으며, 아시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리아 땅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라야 사람들을 북왕국의 땅에서 살게 하였다. 결국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잃고 혼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이후 그들은 아시리아에 이어 바빌로니아, 헬라,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그들과 그들의 신을 섬겼다. 나라가 망하고 통치자가 바뀌면 그들이 믿는 신도 바뀌었다. 지금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 금송아지, 바알, 바빌로니아, 헬라 등 다섯을 섬기고, 지금은 로마를 섬기고, 종노릇하고 있는 중이다. 남왕국 유대인들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로 동족이요 형제이었지만 혼혈족이 되어 이방신을 섬기는 북쪽의 사마마리아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고 상종하지 않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들이 섬겼던 신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그가 섬기고 예배하는 신이 누구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의 육신적인 남편을 통하여 그가 믿고 예배하는 신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 여자에게 자기의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현재의 남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여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아보고 즉시 예배의 장소(20-21), 때(21, 23), 대상(23), 방법(24) 등 예배에 관한 질문을 쏟아낸다. 이 대화 속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아주 핵심을 찔러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대하는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이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말씀하신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음을 외치고 다녔으며, 동네 사람들은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참으로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었다(4). 예수님의 말씀대로 야곱의 우물 물은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그 속에 영혼을 두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영적 교재를 하며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영적 교제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잃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는 본성적으로 본향에 대한 향수와 목마름이 있다(히 11:13-16).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넣어주고(창 2:7),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그들 속에 두셨기 때문이다(전 3:11).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어느 것도 채워질 수 없는 오로지 무(empty)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그들이 예배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자들이다(22). 자기 들이 만든 알지 못하는 신이 인생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수 없으며, 야곱의 우물 물이 인생들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사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뱃속에 샘을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 곧 예배를 통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야곱의 샘물을 마시고 사는 자들에게, 인간들의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는 영원한 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사마리아의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스도”이시오, “세상의 참 구주”이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0-26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㉔ 기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특성이고 기본이다. 한국교회의 특성 중 하나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새벽기도회가 한국교회의 특성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는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를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표어로 삼았다. 문제의 탐색한국교회의 기도생활은 세계교회가 부러워하는 일이지만 근래에 와서 기도의 열기기 식어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그 대표적 사례로 일부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를 폐지하고 이른바 ‘개인기도’라는 명목으로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반대로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운동으로 크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한국교회에 기도의 불꽃을 다시금 지펴야 하는데 우리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례의 탐구기도에 대한 문제라고 하면 초신자부터 목회자까지 모두들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에 대하여 서울 세광교회 권영만 목사에게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모두가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기도에 대해 대담하려고 한다. 먼저 기도의 의미부터 정리해 보자.권영만(이하 권):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며 영적 호흡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이것이 생활에 실천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김: 우리의 삶에서 기도가 왜 필요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현대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다 보니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풍토가 되었다. 우리에게 왜 기도가 필요한가?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즉,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인간은 자립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또 다른 이유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기본적 방안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길이 기도이기 때문이다.김: 현대 교회들이 성장하고 발전하여 기도운동이 쇠퇴되어 가고 있는 것을 절감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권: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밤낮으로 엎드려 기도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자리잡게 되면 기도보다 다른 일에 시간을 소모하는 경험을 우리 모두가 하였을 것이다. 현대 교회의 기도의 쇠퇴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안락함’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부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폐지하고 각자 개인 기도를 하라고 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새벽기도회가 없다면 목회자부터 새벽 5시에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겠는가? 이것은 편의주의의 발상이요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김: 우리가 교회 공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를 하는 분들이 미사여구를 남발하고,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기도를 하는 경우들을 쉽게 본다. 기도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권: 대표 기도자의 기도 중에 문제들이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기도는 설교도 아니고 웅변도 아니며 규탄이나 고발도 아니다. 온 교인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에 설교 못지 않는 주의가 필요하다.많은 기도자들이 기도문을 써 와서 그대로 ‘낭독’하는데 말의 실수나 시간의 절약 등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나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듯이 기도자도 기도를 준비하여 낭독보다 진정성 있는 기도를 하였으면 한다.또 하나 경계하여야 할 것은 이른바 ‘폭로성 기도’이다. 교회의 문제나 직분자의 사생활 폭로 등이 기도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인해 교회가 분쟁을 겪는 일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들이 피해야 할 일이다.김: 내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자. ‘기도많이 하는’ 한국교회 소속자가 미국 유학을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기도많이 하고 미국 교인들은 기도많이 하지 않는다’는 선입관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 과목 가운데 ‘기도학’이 있었고 신약 전공 교수가 강의했다. 나도 이 과목을 수강했다. 한번은 어느 교수실을 방문하여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교수 두 분이 연구실 카펫트에 꿇어앉자 손잡고 기도하고 있었다. 나의 선입관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기도의 일상화 도는 생활 속의 기도를 생각한다.권: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는 생활 속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일상화를 해야 한다. 교회당이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의 일상화를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가 음식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기도하듯이 일상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런 훈련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하다.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삶을 주도해 나갈 때 성공적 신앙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기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옛날에는 부흥회도 많이 하고 산기도도 많이 갔는데 지금은 이런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기도운동의 시급성을 어떻게 보는가?권: 목회 경험에 의하면 기도많이 한 설교와 그렇지 못한 설교의 결과를 스스로 느길 수 있었다. 목회는 지식이나 자신의 카리스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하다.제일 먼저 목회자부터 기도해야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게 된다. 목회자들이 바깥일을 줄이고 기도에 집중하면 그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를 말하기 전에 목회자가 기도의 제단에 엎드리고 이것이 번져 나가면 하나의 물결이 되어 한국교회를 살리고 한국과 세계를 살릴 것이다.기본에의 회귀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현대 마귀는 목회자로 하여금 중요하지 않는 일에 바쁘게 한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기도와 전도이다. 사도들은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다.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기도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등잔에 기름을 붓자. 바른 기도를 통해 바른 교회를 세워나가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0-26
  • 학술/ 동성애자들의 진정한 인권 회복은 ‘탈동성애’
    본고는 지난 10월 7일 서울 독산로 동산교회에서 진행된 샬롬나비 제45회 월례포럼에서 김영한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편집자 주김영한교수머리말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젠더(사회적 성)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ie)는 후기현대 이데올로기(유사 종교)로서 지구촌의 사회와 가정에 광범위하게 파급되어 우리의 신성한 결혼제도와 가정, 남성 여성 각각의 사명과 역할까지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 젠더 이데올로기는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고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사회적 성(gender)만을 인정하며, 남자와 여자라는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제도, 가정, 생물학적으로 선천적으로 주어진 남녀 각각의 사명과 역할까지 해체하고 있다. I. 젠더주의의 역사적 배경 1. 네오-마르크시즘 비판이론의 근거지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이다. 이 학파는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융합하여 네오마르크시즘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사회구조를 마르크시즘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던 것을 고민하던 유럽 공산주의자들은 문화혁명을 통해서 기존의 사회체제를 전복해야 한다는 것을 각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네오-마르크시즘(neo-marxism)이다.네오-마르크시즘이란, 공산주의가 쇠퇴하고 와해되면서 시대를 이끄는 사상이 되지 못하자, 마르크시즘의 분파로서 등장한 사상이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표면적으로 내세운다. 이들이 주장하는 휴머니즘은 바로 인권, 평등, 평화, 나눔, 정의, 소수자 인권보호 등 그럴싸한 구호를 내세우기 때문에, 1960년대 중반부터 전세계를 강타하여 시대를 이끄는 주류사상이 되고 있다. 동성애 인권운동은 네오-마르크시즘의 ‘성 정치학’(sex-politics)에서 연유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동성애 운동은 소수자 인권운동이란 양의 탈을 쓰고 교묘히 자리를 잡았다. 네오-마르크시즘은 빌헬름 라이히의 성정치학 이론을 추종한다.2.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오스트리아 출신의 반기독교적 유대인이요, 급진적인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는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적 분석이 말하는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자 의 노동력 억압과 착취 그리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말하는 인간 리비도(libido, 성본능, 성충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억압과 통제라는 두 이론을 합성하여 “성정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전통적인 일부일처제와 성도덕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히는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에 프로이드의 성적 욕망 개념을 넣어 성 관념이나 도덕 윤리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개인의 성욕을 억누르는 사회적 제약을 해체하고, 성해방을 실천하는 성 정치학 이론이다. 3. 프랑스 68혁명: 네오-마르크시즘의 영향 아래 성 해방 문화혁명1968년 5월에 소로본느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프랑스 68혁명은 네오-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아 구세대의 관습과 문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 문화혁명이었다. 68혁명은 이전의 자본가와 노동자, 제국주의와 식민지 등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넘어서서 일부일체제 가족제도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 제도, 그리고 가정과 성별의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 문화혁명이었다.4. 쥬디트 버틀러: 퀴어이론 창시, 젠더학 도입쥬디트 버틀러(1956-)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선구자요 퀴어(Queer) 이론 창안가다. 생물학적인 성(sex) 구분은 잘못된 것이며, 후천적 학습에 의해 성이 결정 된다는 사회적 성(gender)을 주장. 섹스/젠더 이분법을 허물면서 기존 페미니즘의 성정치학에 도전. 섹스나 젠더 모두 철저하게 문화적인 사건 주장. 생물학적 성별에 기초한 모든 의무들은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했다는 전제 하에 성에 기초한 모든 구별을 근절시킨다. 여성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 제기. 5. 젠더 주류화 운동(성 평등운동)의 본부인 유엔(United Nation): 지구촌 성혁명 보급 센터오늘날 젠더 주류화 운동(성 평등운동)은 유엔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다. 1989년 이후 오늘의 유엔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젠더주의자로 장악되어 1948년 보편인권 선언을 한 창립시의 유엔과 다르다. 그러나 유엔 총회나 이사회가 이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허용한 적이 없다. 단지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이 세계인권상황 개선에 기여해온 유엔이라는 공식기구의 이름을 단지 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II. 신학적 입장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7가지 논거1. 선악과는 인간 자유의 보호자: 하나님이 선과 악의 최종 결정자성경의 하나님은 에덴에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각종 실과는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고 명하시는 인간 자유의 보호자이시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b-3).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주인이 되고자 할 때 인간은 자유를 상실하고 죄의 노예가 되고 죽음에 직면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의 존귀성이 아니라 흙에서 그를 취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인간의 숙명이란 하나님에 의존하는 존재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2. 동성애는 남자와 여자 사이 이성애(異性愛)로 이루어지는 가정이라는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결혼제도는 인간이 만든 문화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제정하신 창조의 질서이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하나 창조질서는 보편적이며 영구적이다. 가정이란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 성립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동성애 지지자들은 동성애 논의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생략하고 있다. 동성애는 창조의 원리에 역행한다.3. 성경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야기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본보기다. 창세기 19장 1-8절은 동성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서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타락의 전형인 동성애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금기하시는 행위임을 드러내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베드로후서 2:6). 사도 유다도 소돔과 고모라 주민의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다음같이 해석한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4. 동성애 행위란 신성한 가정과 인간 영성의 파괴다.레위기의 두 구절은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금령이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을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영성(靈性)에 있다. 인간에 있어서 영과 몸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요, 하나님이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생기(하나님의 호흡)를 불어 넣으셔서 인간이 산 존재(a living being)가 되었다. 이 영성은 성적 신성함으로도 표현된다. 성적 신성함이란 독신이든지, 이성(異性)인 짝인 반려자와의 한 몸을 통하여 가정을 통하여 표현된다. 동성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가정의 신성함이 무너지는 것이요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5. 사도 바울은 동성애 행위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역리, 逆理)고 정죄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시대에 있었던 동성애에 관하여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정죄하고 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 1:26-27). 바울이 이 구절에서 성(性)질서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순리(順理)란 이성간의 관계를 말하며 역리란 동성간의 성관계를 말한다. 6. 동성애 문제는 결혼과 같이 근본적인 문제이지 문화적 문제가 아니다.여성안수 문제는 문화적 문제이지만 동성애 문제는 결혼제도에 관한 것이므로 교리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다. 동성애 문제는 사회를 존속케 하는 가정의 질서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이다. 기독교인의 아디아포라(adiaphora, 비본질적인 것들)로서 개인의 자유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판넨베르크도 동성애에 관하여 아주 보수적 입장을 취했다: 동성애 결합을 결혼과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 7. 동성애자들에게 진정한 인권 회복이란 탈동성애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진정한 인권은 동성애로부터의 탈출이다.”“동성애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침묵하며 시대적 조류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선한 사마리인의 심정을 가지고 동성애 행위는 죄라고 지적하되 동성애자의 인격에 대해서는 깊은 동정과 긍휼의 마음을 지니고 저들이 탐닉된 관습에서 치유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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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6
  • 특별기고/시진핑 정부의 중국기독교 탄압에 대한 ‘샬롬나비’ 논평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의 예배와 신앙자유를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하겠다지난 1월 중국 산동성 조장시, 곡부시 등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가정(지하)교회에 수천,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서 찾아온 청소년, 청년들을 보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밀 주택에서 거주하면서 언제든 들이닥칠 당국의 경찰에 의해 붙잡힐 것을 알면서도 장차 주님의 때가 오면 자국민을 복음화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중국은 기독교를 크게 삼자(三自)교회와 가정(家庭)교회로 구분한다. 먼저 삼자교회란 중국당국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회이다. 삼자(三自)란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인데, 예를 들어 말하면 외국인이 운영하는 교회나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과 중국인들의 접촉을 금지하여 중국인들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삼자교회는 중국국가의 통제에 따라 중국 사회주의 건설에 부합하는 예배를 완전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관제 종교를 확실히 거부하고 성경의 순수 신앙을 추구하고자 지하로, 가정(家庭)으로 숨어든 교회이다. 최근에 공산당에 의해 강제적으로 폐쇄당한 베이징 시온교회도 가정교회에 속한 신앙공동체이며, 중국 당국의 주된 탄압 대상이었다.현재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 건설을 통해 국가 전략목표를 달성하려는 이른바 ‘강군몽’(强軍夢)으로 동북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동안 북핵 위기 이면에 가려졌던 중국 변수가 서서히 가시화되면서 군사 충돌의 전운(戰雲)마저 감도는 위협적인 분위기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진핑은 집권 이래 최악의 기독교 박해를 감행하고 있다. 심지어 허난성에 있는 교회를 폐쇄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성경과 십자가를 불태우는 비상식적인 작태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상 중국 장기집권을 획득하려는 ‘국가 주석 임기 제한’을 철폐하면서 헌법까지 개정하여 영구집권은 코앞에 다가와 있다.중국 기독교인들에게 가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은 참으로 처참하다. 위와 같은 심각한 중국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박해와 인권 해를 중단하라는 샬롬나비 논평을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1.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의 영구집권은 중국과 주변국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시진핑 국가 주석 10년 임기제한 삭제를 위한 개헌을 추진하여 이미 지난 3월 11일에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83%의 찬성으로 가결하였다. 기존의 법에서는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임기를 2번 이상 연임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석 임지 제한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최대 2023까지 국가주석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심각한 경지에 놓여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의 방송들은 황금시간대를 이용하여 시진핀의 사상을 방송하여 그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고, 반대 여론을 봉쇄하기 위해 인터넷 매채들을 통제하는 독재화의 길을 걷고 있어 주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2. 국제기독교 감시단체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강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종신집권을 노리는 법안이 통과된 후에 시진핑 주석은 영구집권을 위해 그의 통치 세력에 가장 방해가 되는 기독교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강력한 박해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018년 에는 ‘종교사무 조례’의 시행으로 인해 종교인과 종교단체의 감시를 강화하는 등 박해가 진행되고 있다. 조례에 따르면 불법성 종교활동으로 인해 중국당국에 발각이 되면 최대 한화로 환산하여 300만원에서 3000만원 이상의 벌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현재 중국 인민정부는 민족종교판공실 명의의 통고문을 임의로 붙여 교회 폐쇄를 강행하고 있다. 그 예로 ‘시온 교회가 등록을 하지 않고 사회단체 명의로 활동을 전개해’ 종교사무조례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최근 중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건들이다. 이제는 한국선교사들에게 죄목을 뒤집어 씌어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허난성에서는 수백 수천의 교회와 십자가와 예배 성구들을 불태우고, 밤새 강제로 철거하며 교회 폭파를 저지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기독교 박해와 인권 유린을 자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우리의 가슴이 대단히 아프고 고통스럽다. 조속히 비정상적인 종교정책을 개정하여 중국기독교인들의 예배보장을 촉구한다. 3. 중국내 기독교지도자와 인권운동가들의 체포를 중단하고 목회자의 종교활동을 보장하라.호주의 매콰리 대학교(Macquarie University)의 케빈 캐리코 교수는 “중국이 기독교인 인권을 대하는 관점은 매우 무섭다”면서 이것이 시주석의 철통 통제가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기 연장이 공식화 되고 있는 이때에 중국의 정부당국이 중국민의 생활과 종교인들의 삶을 손바닥 보듯이 철두철미 감시하고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하루빨리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해방시켜 거대한 중국의 중원의 세계관과 철학에 맞는 처신을 강력히 촉구한다.4. 중국 당국은 기독교인들의 성경과 예배 성구를 불태운 잘못을 사과하라.중국에서는 가정교회가 활성화 되고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2018년 2월 종교법안을 개정하여 새 종교 조례를 시행하면서 가정교회의 단속은 더욱더 강력해 지고 있다. 북경 최대 가정교회인 시온교회는 지난 10년간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했으나 중국 정부의 타깃이 되어 최근 폐쇄됐다. 게다가 개정된 종교 문제 규정의 일부가 신앙을 포기하라는 서명이나 압박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동, 청소년 성인들이 교회생활을 금지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진술들을 강요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활동을 제한하는 위험한 발상을 꾀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는 공산당과 기독교인들이 충돌하는 돌발적인 사태가 우려되고 있는 시점에 현명한 판단하기를 기대한다.5. 중국 공산당은 기독교를 체제의 경쟁자로 보기 시작했다.심각한 중국 공산당의 탄압에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가정교회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까지 불리는 중국 저장성 윈저우시는 인민의 15%가량이 기독교인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 당국은 기독교 단체와 교회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공산당원 수자를 앞지르는 기독교인들의 성장에 매우 불편한 생각이 든다는 평가이다.6. 중국당국은 수감자들을 조속히 석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세계기독교인들은 중국의 기독교 박해와 인권유린 사태를 심각하게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긴 세월동안 교회를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한 교회와 지역들에게 교회의 폐쇄와 탄압을 자행하는 것은 큰문제이다. 심지어 당국이 허락한 교회마저 철거하는 사태가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에서는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강제 해산과 투옥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 당국은 인권을 보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중국은 헌법 제33조 3항에 의해 국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해야 하며, 제36조에서 공민의 종교적 신념의 자유와 "정부에 의한 종교인들의 합법적인 권리와 이익을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 박해와 인권 침해사태는 헌법에 대한 중국정부의 위반이다. 북한이 저지르고 있는 종교탄압을 답습하고 있는 중국을 주변국들은 안타깝게 인식하고 있다. 이제 중국당국은 종교인들을 무참히 압박하는 재교육 수용소를 폐지하고 그들을 조건 없이 석방하라. 종교적인 자유의 신념들을 파괴하지 말고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인정하라. 그러므로 중국은 자국 내 교회들을 강제 폐쇄하는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중단하고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보장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7. 한국교회는 이제 중국교회를 위해 깨어서 기도하며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중국교회가 정부당국에 의해 탄압하는 이 박해의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는 안일함에서 깨어나 중국교회와 아픔을 함께 하며 중국교회의 예배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하겠다. 한국교회가 어려울 때 많은 외국교회들이 함께 기도하며 도왔던 것을 기억하며 이제 한국교회가 깨어나 중국교회를 위하여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겠다.2018년 10월 22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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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0
    요한복음은 그 구성이 독특하다. 예수님의 행적 (Narrative)과 그 행적에 대한 해석 및 설교 (Discourse)가 이어지는 곳들이 많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대개의 경우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한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설교자의 자유이겠지만 자칫 저자가 다루고자하는 핵심을 비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요한복음 3장의 경우도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Narrative에 이은 Discourse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두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따라서 Discourse를 충분히 이해하고 Narrative를 그에 병행하는 예화로 다루는 것도 본장을 이해하는 데 좋은 방법일 수있다.요한 3:18은 보통 사람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분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했다(19). 어둠에 싸여 있는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고(16), 영원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움에 싸여 있다.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둠을 사랑한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어둠의 땅, 바로 그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족해 하시고 기뻐하셨는데 왜 이렇게 어둠과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인가?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그에게 왕관을 씌우시고, 그가 창조하신 온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하는 언약을 맺으셨다. 아담은 그의 언약의 종주이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함으로 창조의 질서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선약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하나님을 떠났다. 스스로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세계에는 어둠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그러나 이어둠의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을 비추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적 저주를 받고 죄와 죽음에 갇혀 있는 어둠의 자식들을 구출하기 위한 그의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 것이다. 아담을 대신할 새아담을 보내신 것이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제 새아담의 “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살려 빛과 생명 가운데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담은 새 아담의 모형이라고 했다(롬 5:14). 창조 언약의 대표자 아담 한사람의 불순종이 온 세상 만물에게 어둠과 죽음을 초래했듯이, 구속 언약, 곧 새언약의 대표자 새아담 한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새아담은 여자의 몸에서 낳지만,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만큼 권위와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여야 했으며, 그는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만이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고, 그는 아담의 죄값을 치렀다는 분명한 증거로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즉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과 마찬가지로 새 아담은 새언약의 대표자로 왕관을 쓴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권세아래 있던 옛아담의 백성들은 이제 새롭게 등극한 이 새 왕을 환영함으로 새로운 왕의 새나라의 새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빛과 생명이 역사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새아담으로 은근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16)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전제한 말씀이다. 새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옛아담의 연대성 안에 머물러 있고 죄와 죽음의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훨씬 본문의 의미를 쉽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니고데모는 당대 아스라엘의 유수한 학자요, 정치가요, 종교지도자요,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사람이다.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께 찾아 나온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본 후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자마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물과 성령, 곧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3), 처음 남과 거듭남, 아래로부터 남과 위로부터 남(3), 육으로 남과 영으로 남(6), 하늘의 일과 땅의 일(12), 빛에 대한 사랑과 어둠에 대한 사랑(19), 사랑과 미움(19),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하늘로 올라간 자(13), 세상에 대한 심판과 세상에 대한 구원(16, 17),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18) 등의 말을 서로 대조하여 사용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나라와 새 아담의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선을 그어 서로 왕래할 수도 없고, 서로 융합될 수도 없는 서로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그 소속과 본질이 다르다.죄와 죽음으로 뒤덮힌 아담의 어둠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빛과 생명과 사랑과 영의 나라이다. 어둠과 죽음과 미움과 육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로지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난 사람만 그가 세우신 새아담의 나라, 곧 새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그때 그는 새아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우신 새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살지만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씨가 싹트고 자라는 새로운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와 도리에 밝은 니고데모는 이러한 언약적 구원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그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위로 메달아 놓고 그것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살리신 사건을 예로 들며, 예수님 자신도 메달려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새아담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언하신 것이다. 하나님 날의 새생명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그 싹이 트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0-19
  • 특별기획 / 신사참배 80년 회개 ‘한국교회일천만 기도대성회’의 의미
    공교단 아닌 개인들의 모임… 한국교회 대표성 가질 수 없어 아쉬움태양신 숭배자들의 ‘성지순례’한국교회일천만기도운동본부라는 교계 한 단체가 ‘한국교회 신사참배 80주년 회개기도대성회’를 광화문 사거리에서 대대적으로 연다고 한다. 일본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미가미)을 섬기는 신사참배(神社參拜)는 당시 다른 교파들이 다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행한 후에도, 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만은 남아 반대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총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감옥으로 끌려가고, 끝까지 반대하던 교회는 문을 닫았다.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가 ‘정통’이 되고, 반대하던 교회는 ‘이단’이 된 것이다.그리고 신사참배를 이끈 지도자들은 ‘성지순례’(聖地巡禮)에 나섰다. 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땅, 이스라엘이 아니라,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있는 일본이었다.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등 조선의 대표적 장로교 목사들은 1938년 오문환의 인솔로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먼저 교도의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어어서 도교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후 그들 이외에도 소위 지도급 목사들이 일본신사에 수없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결코 천조대신의 신사에 대한 단순한 참배가 아니었다. 한국기독교를 철저히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요상한 우상숭배 집단으로 바꾸려는 일제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후 그들은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고자 했다. 한국기독교는 철저한 일제의 어용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1945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사라지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탈바꿈 하고 말았다. . 독일교회와는 너무도 다른 한국교회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교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독일교회의 약 80%에 이르는 ‘독일기독교도’(DC)는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나치를 반대하던 일명 ‘고백교회’는 불과 10%도 채되지 않았다. 고백교회는 1934년 5월 발표된 ‘바르멘선언’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였다. 바르멘선언은 “우리는 마치 교회가 인간을 스스로 높이면서,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인간들이 임의로 선택한 어떤 욕망, 목적 및 계획에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한다”며, 나치의 협력 요구를 거부했다. 당연히 그 지도자들은 감옥에 갇치거나 사형당했다. 여기에는 이르베르츠 야코비, 니젤, 이반트, 아스므센, 힐데브란트, 헬트, 칼 바르트, 니뮐러, 본훼퍼 목사 등이 참가했다.그러나 독일교회는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당시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나치의 어용교회인 독일기독교도를 해산하고, 그 앞잡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좇아냈으며, 소수의 저항집단이었던 고백교회가 그 정통성을 이어갔다. 나치의 어용교회를 거부한 그들이 주축이 되어 EKD를 창립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독일복음주의교회’(EKD)이다.오늘의 한국장로교가 300여 개에 이르는 교단으로 분열하는 등 이처럼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비의 죄를 삼사대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1945년 8월 15일 느닷없는 해방이 되자, 한국교회 신사참배 지도자들은 입을 싹딱고 ‘회개’를 요구하는 반대파를 향해 “우리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며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교단총회는 제27회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을뿐, 회개는 없었다.한국교회도 해방 이후 신사참배 주도자들을 모두 교회에서 좇아내고 신앙적 양심이 있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혀 새롭게 출발했어야 했다. 그러나 노회든, 총회든 신사참배를 주도한 자들끼리 똘똘 뭉쳐 감쌌다. 결국은 분열이었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살이를 한 목사들이 중심된 ‘고신’의 분열 이후, 마치 봇물 터지듯이 300여 개의 교단으로 나뉘었다. 이젠 교단분열을 아무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양심이 화인(火印)을 맞아 마비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독교는 한국 외에 어디에도 없다.신사참배 지도자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산다한국기독교를 일제의 어용교회로 전락시키고, 태양신을 숭배하는데 앞장섰던 신사참배 지도자들은 본인들 뿐 아니라, 그 자녀들 또한 일본과 영국, 미국 등지로 나가 유학하고 돌아와 대학이나 교회에서 자리를 잡았다. 해방후 한국교회는 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80년이 지난 이젠 그들의 손자와 증손들이 그 덕을 보고 산다. 부산의 한 목사는 신사참배에 앞장선 댓가로 일본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10여 개의 학교를 인가받아 학원재벌이 되었다. 지금은 그의 후손들이 그것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60년이 되던 2008년 9월에 이르러서야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모인 제93회 총회에서 합동, 통합, 합신, 기장의 지도자들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회개 기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지금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유 또한 태양신에 굴복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죄에 대한 죄벌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가 그 덩치에 비해 허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 한번도 신사참배죄에 대해 진정성을 담은 죄책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교계의 일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80주년 회개 기도성회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쉬움도 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교단이라는 공교회의 범죄이다.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공교단이 아니라 개인들이 모여 회개하는 것이 과연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강춘오 목사>
    • 해설/기획
    • 기획
    2018-10-19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㉓ 주일학교 교육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교회가 설립되면 의례히 주일학교가 개교된다. 주일학교 어린이 교육의 바탕이 되고 교회성장의 지표가 된다.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는 교육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어린이 교육은 천국 일군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문제의 탐색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일학교는 고사 상태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어린이의 감소, 사교육의 발달에서 오는 교회교육의 쇠퇴 등이 심각한 요인이 되고 있다.이런 주일학교를 되살릴 수 없을까? 1970년대의 ‘부산서부교회의 주일학교 부흥’을 시대에 재현할 수 없을까? 어린이 교육을 생각하는 이들의 소망이고 목표이다.사례의 탐구경남 거창지방의 한 교회가 주일학교 어린이가 1,000명이 되었다고 연일 보도되었다.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 사역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헌신했던 이가 목사가 되었다. 그가 거창 우리교회 박태안 목사<큰사진>이다. 그에게서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사역하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소개하라.박태안(이하 박): 130여 년 전 조선을 선교한 서양의 선교사들의 눈에는 조선이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로 보였다면, 거창을 선교한 미 북장로회 선교사와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의 눈에는 “복음의 오지”로 불릴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이다. 경남 합천과 경계를 같이 하는 지역이라 합천 해인사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지역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조건들은 거창을 잘 설명하듯 기독교가 뿌리내리기에 아주 불리한 조건들이다. 거창에 복음이 전해지고 올해로 115년이 되어 간다. 10%도 되지 않던 복음화율이 20%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김: 주일학교에 헌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박: 농촌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다. 현재 농촌지역의 학교들이 인구 감소로 인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제가 사역을 할 당시는 그래도 현재보다 나은 실정이었다. 면단위의 학교에 어린이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제법 어린이들이 있었다. 어느 여름! 성경학교가 열려 많은 친구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학교 앞 전도에서 만난 두 명의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두 명의 어린이는 조그만 암자(절)에 산다는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 친구들은 고아인데 절에서 데려다가 키운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어찌나 아픈지 그 친구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하나님은 이때 저에게 한 마음을 주셨는데 이 친구들이 절에 살지 않았으면 교회로 인도하고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그 후 다음 성경학교에는 출석을 하게하고 구원론을 통해서 이 친구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도와주었다. 이러한 일로 인해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어진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김: 주일학교 발전의 과정을 소개하라.박: 거창의 아주 조그마한 면단위의 마을로 삶을 옮겨가게 하시고 교회를 출석하게 하셨다. 그리고 바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며 어린이전도협회의 교사대학을 수료하고 전도에 열심을 내며 섬겼다. 섬기는 교회의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 전체의 수는 82명, 유치부까지 합하면 102명이었다. 교사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요일 오후에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탈 인형을 쓰기도 하고, 축구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 주고, 같이 놀아 주기도 하고, 마을로 산길을 돌아가며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그해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교회의 목사님 아들들까지 성경학교에 참여를 한 것이다. 그래서 참여한 학생이 100명을 넘어간 것이다. 교사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며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쁨의 단계를 넘어 더욱 한 단계 높은 일들을 준비케 하셨다.하나님은 거창읍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게 하셨다. 첫 주일 예배는 어린이 12명, 교사 5명, 저까지 모두 18명이 드렸다. 너무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예배였다.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까 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는데 거창읍에 어린이가 몇 명일까? 교회 바로 근처에 있는 초등학생의 숫자를 알아보니 약 3,000명 그리고 다른 4개 초등학교를 모두 합치면 약 3,000명 그래서 거창에 모든 어린이 숫자가 약 6,000명이었다. 그중에 일천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닌가 하고 일년 전을 되돌아보며 믿음을 갖게 하셨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쉽게 될 것 같은 일들이 쉽지 않았다. 교사들과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였지만 80명!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삼일클럽 장소를 섭외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연락하여 우리 교회에서, 열 수 있게 되어 훈련된 교사들은 ‘교사들의 자신감과 나 자신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전도하는 방식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8월 말쯤 120명을 넘어 가고 있을 때 ‘10월말까지 1,000명 전도하자’ 하면서 열심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교사들은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갔지만 육체적으로는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월 마지막 주일을 두 주일 앞두고, 17일 주일에 186명이 모자라는 1,000명을 이룰 수 있게 하셨다. 교사들의 열심히 또 나타나는 것을 바라보게 하셨는데 교사들이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어린 목자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교사들의 후원을 받은 목자들은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면서 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어갔다. 1,500명을 넘어가고 계속 주일마다 새로운 친구가 20~30명씩 등록되곤 하였는데, 주님은 저희들을 통하여 교회의 부흥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평도 넓혀주셨다. 김: 한국교회 주일학교 교육이 무너져 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박: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기독교 교육 또한 미래의 기독교를 짊어질 일꾼을 만드는 일이 된다. 그러나 지금 흔들리는 주일학교의 부재는 심각한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을 줄로 믿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면 먼저는 교역자의 사역 부분과 둘째는 성도의 역할 부분으로 나눈다.먼저 교역자의 사역 부분으로는 담임 목사 중심의 주일학교 사역이 되어야 한다. 많은 목사님들은 유년주일학교를 생산성이 없는 소모 기관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주일학교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주일학교에만 집중해도 그 부모님들이 있고 주위에 많은 새로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그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들은 교회의 새로운 전도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도의 역할에서 볼 때 성도들이 직접 교사가 되어 성도의 자녀들로 하여금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하는 것이 주일학교를 살리는 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주일에 공부한다고 하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학교에 출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정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도의 자녀들이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됨으로 관계되는 친구들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주인공들이라는 생각에 교회 주일학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교사화’ 하는 것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가 잘하는 부분에서 봉사하면 된다. 즉 차량 교사, 간식교사, 교통질서 교사, 아이들 돌봄 교사 등 보조로 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런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교사로서 ‘같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부터 되어야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교사화는 부족한 자원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본에의 회귀한 시골교회의 사례를 보았다. 아무리 세속 교육이 발전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교육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가르치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0-19
  • 학술/ 교회 성장시대 이후를 맞이한 한국교회를 향한 성서신학적 제언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2일 서울 마포 신촌성결교회에서 개최한 10월 월례회 ‘개혁을 넘어 이제는 변혁이다’ 중 왕대일 교수가 발제한 ‘교회성장시대 이후를 맞이한 한국교회를 향한 성서신학적 제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편집자 주 △개혁에서 변혁으로이사야서 66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현실에 기반을 둔 성전이 아닌, “그 날에” 하나님이 세우실 성전에 대한 조감도에 기초한다. 현실에 매여 있는 성전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성전을 조망한다. 하나님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을 적당히(!) 얼버무린 혼합주의의 탈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낳으실 순결한 새 시온을 바라본다. 그 내일의 시온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오늘의 시온을 과감히 내려놓는다. 그 종말의 성전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오늘의 성전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이사야 66장이 그리는 조감도는 기존 성전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변혁을 밑그림으로 삼는다. 폐쇄적이던 회중이 드리는 제사중심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였다. 혈통을 따지던 공동체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사 56:3-7). 종교법칙을 따지던 공동체 유형을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교 중심으로 변혁시켰다(사 61:1-2). 그러면서 부성적인 성전종교를 모성적인 성전신앙으로, 어머니 시온으로, 바꾸어놓았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사야가 품었던 그 종말론적 성전의 위상을 나사렛 예수가 구현하신다고 증언한다.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성막이 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오셔서 거하시는 하나님이다(요 1:14). 교회는 성막정신으로, 성육신 신앙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리스도 찬가처럼 교회는 낮아져야 하고, 비워야 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하고, 복종해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빌 2:5-8). 그럴 때 하나님은 교회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빌 2:9) 이름을 얻게 하신다. 여기에서 사도행전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서 66:1의 탈(脫)성전적인 신앙을 아예 반(反)성전적인 가르침으로 적극 제시하였다. 신약에 인용된 구약구절은 여러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도행전 7장도 사도행전 본문이 자기 신학을 입증하려는 증빙문서(proof text)로 이사야 66:1-2를 제시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왜 그런가?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7장 본문이 예루살렘 성전종교의 변혁을 부르짖고자 붙든 구약의 말씀이 출애굽기 25-31장의 성막공동체와 이사야 66장의 종말론적 성전이라는 사실이다. 이사야 66장이나 사도행전 7장은 모두 기존종교에 대한 변혁을 주창한다. 기존종교를 변혁시켜야 하나님의 백성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주창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두 기존‘유대성전종교를 넘어서는’(beyond Jewish temple piety) 신앙유형을 적극 모색한 결과가 담겨 있다. 이사야의 경우는 그 유형이 예루살렘 성전을 종말론적으로 조망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스데반의 경우는 그 유형이 성전을 대체하는 광야 교회의 회복으로 나타났다. 사도행전 7장에서 들었던 스데반의 설교나 이사야 66장의 예언은 각각 자기 시대의 신앙공동체에게 쏟아낸, 그 신앙공동체의 존재양식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일갈(一喝)이었다. 일갈, 한 일(一), 꾸짖을 갈(喝)! 큰 소리로 꾸짖었다. 목이 메도록 소리 높여 외쳤다. 무엇을 외쳤는가? 현실주의에 붙들린 성전보다는 “그 날에” 완성될 성전을 외쳤다. 그 내일의 성전이 있기에 오늘의 성전에 매여 있는 자들을 향해서 그것은 혼합주의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무엇을 외쳤는가? 사람이 만든 집보다도 하나님이 지으실 “처소”를 외쳤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광야 교회의 유산을, 하나님을 위한 처소라는 유산을 이어가지 않는다면, 그런 공동체가 이 땅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다고 꾸짖었다. 그랬기에 이사야는 성전의 진정한 실체를 종말론적으로 조망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성전종교가 거듭나기를 소망했고, 그랬기에 스데반은 그 종말론적 비전에 기대어 아예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설파(說破)하였다. 이사야나 스데반의 말은 단순한 설명(說)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성전종교를 깨뜨리는(破) 외침이었다. 신앙공동체는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였다던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유대성전종교를 깨뜨리는 변혁공동체이었다. 그 변혁공동체의 완성을 현실이 아닌 종말론의 지평에서 소망하였다. 그 날에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지평에서 오늘의 교회를 보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늘 ‘도상의 교회’(Church on the Way)가 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길” 따라 “흩어진 사람들”(행 8:4)이 무더기로 쏟아지지 않았던가! △ 한국교회, 어떻게 변혁되어야 할까?오늘의 한국교회가 스데반이 외친 광야 교회에서, 이사야가 외쳤던 종말론적 성전에서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변혁을 향한 “타는 목마름”은 우리 모두에게 다 절실하다. 그 절실함을 한 두 마디로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사도행전 7장과 이사야 66장에 근거해서 한국교회의 변혁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해볼 뿐이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교회를 유대성전종교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규모가 대형교회든 개척교회든, 탈(脫)성전화, 탈(脫)성전종교화해야 한다. 교회의 존재양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소리다. 교회가 성전을 짓지만, 그 성전은 성전종교의 성전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흩어져야 하고, 각 지역사회나 분산된 각 계층에 세워지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요즈음 우리 교회에서 성전은 교회의 하부구조(집회장소)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교회 안에 성전(예배당)이 있어야지 성전(성전종교) 속에 교회가 흡수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시작은 유대성전종교로부터 뛰쳐나온 프로테스탄트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다시 유대교식 성전종교로 되돌아가버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규모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마 25:14-30). 크게 자라는 나무도 있고 작게 자라는 나무도 있다. 다 주님이 키우시는 나무다. 단, 교회마다 자라서 교회끼리 더불어 숲을 이루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신약의 말씀에서 교회는 서로 더불어 숲을 이루는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고린도, 로마 교회 식으로 당시 지구촌에 교회라는 숲을 이루어나갔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숲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개체 교회들이 각각 약진하고 경쟁하는 방식으로 생존했지만, 이제부터는 나무와 나무가 함께 하는,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공생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조림(造林) 방식으로 교회변혁을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있어야 한다. 아니, 있게 된다.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단, 지금 모습으로는 아니다. 담임목사의 생계형 교회로서는 교회역할을 할 수 없다. 큰 교회가 교회 안에 여러 공동체들을 연합체 형태로 두듯이, 작은 교회도 작은 교회들끼리 연대하여 디아코니아를 공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서 맞섰던 자들은 유대교의 바리새파 학자와 사두개파의 종교인들이었다. 레너드 스윗의 표현을 빌리면, 현상유지(maintenance) 타입의 종교인들이었다. 스데반은, 그리고 스데반 이후에 등장하게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역시 레너드 스윗의 표현으로 설명하면, 전도(mission) 형의 종교인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앙공동체의 지도자가 달라져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담임목사(당회장) 중심의 교회다. 이 체제를 존중하면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면, 교회 안에 여러 명의 목사들이 공동으로 목회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전도사, 강도사, 목사, 선교사만이 아닌 수도사 등도 같은 교회를 더불어 섬기는 목회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고시(강도사고시)를 패스했다고 해서 꼭 담임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해서도 안 된다. 평생을 한 공동체에서 목사로 사역하다가 은퇴하는 트랙도 마련되어야 한다. 회사에 들어간 사원들이 모두 다 나중에 그 회사의 CEO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교회끼리도 통폐합해야 한다. 시장의 용어로 말한다면, 구조조정이나 MOU를 해야 한다. 교회 수가 너무 많다. 목사후보생을 배출하는 신학교가 너무 난립되어 있다. 한 교회가 한 교회건물을 세우고 짓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가 연대하여 함께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건물을 짓고 공유하며 유지하는 형태로 존재방식을 변혁시켜야 한다. 그런 변혁을 위해 목회구조 마저도 공동목회 형태로 변환되어야 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8-10-1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9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자신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예배했던 여호와 하나님이자 신랑이심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셨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셔서 성전 청소를 하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는 역사적으로 솔로몬 왕이 건축한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돌아와서 새로 지은 제2성전 그리고 로마시대에는 헤롯 대왕이 새로 중축한 헤롯 성전이 있었다. 이것을 건축하는 데 46년이 걸렸다. 물론 이 성전도 주후 70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다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그 성전 터에 무슬림 교도들이 자기들의 성지라고 주장하며 그 지붕을 돔 양식으로 짓고 황금을 입힌 “Dome of Rock”라고 하는 성전이 서 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셨고, 후에 이 성전이 무너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마태 24:1-2),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 사람들이 그렇게 파괴 해버렸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치 이후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셔서, 왜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까?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때,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인간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세속주의와 편의주의가 성전을 가축시장으로 바꾸어 놓고, 환전상들로 가득차 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는 너무나 부정하고 불결한 곳이 되어 있었다. 제사장들이 묵인하지 않는 한 이러한 일이 성전에서 일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보시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청소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외치셨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시편 69:9, “주님의 집을 위한 열심히 나를 삼킬 것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하였다고 했다. 여호와의 집을 모욕하고, 멸시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불같이 타올라 자신을 다 삼켜버릴 것 같다고 쓴 다윗의 시 구절을 기억하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사랑하는 자가 멸시 당하고 무시당하기 때문에 이를 보고 있는 자의 분노가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치솟아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급박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사람들도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예수께 대들며 그가 무슨 권세로 자기들의 영업을 방해하는지 되물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사흘 만에 이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하셨다. 이들은 46년 동안 지었던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무명의 젊은이가 당돌하게 나타나 자기들의 하는 일을 방해하는 이 짓을 참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단순한 성전 청소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깊은 신학적이며 예언적인 의미가 있었다. 가나 혼인집에서 하나님이시오 신랑으로 자기의 정체를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주님께서 이제 채찍을 들고 휘두르시기 때문에 그 의미가 깊은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첫째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새로운 성전의 약속이다. 에스겔서에는 하나님께서 우상과 우상 숭배가 넘쳐나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신다 (겔 8-10장). 그리고 실제로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성전은 완전히 진멸되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하나님의 거처는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성전은 바벨론으로부터 유대인들이 돌아 왔을 때 재건되었다. 그 후 헤롯이 확장하여 재건한 것이 현재의 성전이다. 이 성전은 에스겔 때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는 시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 성전의 기능이 끝난 것이다. 이러한 성전은 파괴해버려야 할 것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결코 남아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 그리고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둘째로 예수께서 성전 파괴를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성전을 약속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흘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선포하신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것이 성전인 자기 몸에 관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 말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죽음을 성전의 파괴로 비유하시고, 새로운 성전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전은 성막의 전신이다. 성막은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함께 거하기 위하여 짓도록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하는 가운데는 성막에 거하셨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임하셔서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때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떠올라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을 때솔로몬은 웅장하고 견고한 성전을 건축했다.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사, 말씀, 기도, 찬송, 교제 등 모든 것이 성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했다.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라는 것이다. 21절에 그가 성전을 허물으라고 말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성전인 자신의 몸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돌로 세운 성전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몸으로 세울 성전이었다. 그래서 메시야는 성전의 실형이요, 예루살렘의 성전 산에 세워진 성전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었다. 성막과 성전의 첫 번쩨 기능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셨다. 따라서 성전뿐만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제사, 제사장, 제단, 제물, 그리고 성전에 부수되는 모든 물건과 사람, 제도 등, 곧 예수님의 모형은 이제는 사라져야 할 것들이었다. 예수님의 오심, 죽음과 부활이 새로운 성전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돌로 지은 성전은 사라졌다. 그래서 성전제사, 제사장, 제물 등이 없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성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에게 예배하고, 그에게 예물을 바치고, 그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제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심으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신랑이요 하나님의 아들, 메사야이심을 암시적으로 나타내셨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후, 시내 산에 데려와 이스라엘을 그의 신부로 삼는 언약을 맺으시고, 이들과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마찬가지로 가나 혼인집에서 자신이 신랑임을 보여주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가 그의 신부와 거할 성전으로 가셨다. 그러나 그곳은 강도의 소굴이요 가축시장이 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신부들과 거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신 것이다. 이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성전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는 생활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의 신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성전으로 믿지 않고 있다. 구약성경의 제사제도를 따라 모형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마치 뜬 구름이나 그림자를 붙들고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성전과 제사장과 제물이 아직도 유효하다. 구약의 유대인들을 흉내 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성전에서 제사드리지 않는다. 회당에서 성경 말씀 읽고 기도한다. 유대인들도 안하는 짓을 기독교인들이 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성전임을 믿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는 그 성전이다”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성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성전이라는 것이다. 성전은 예수께서 신랑으로 거하는 곳이다. 예수께서 신랑으로 그의 거처를 우리 가운데 정하시고 만드셨다. 우리 몸이 예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거처를 우리 안에 건축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성령으로 거하신다. 그래서 로마서 8:11에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없는 부정하고, 불결한 죄인들이다. 우리의 내면은 마치 고대의 이스라엘의 성전과 같이 시장 바닥이 되어 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거룩하지 못하다. 온갖 편의주의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의 이 부정한 육체를 그의 성령으로 씻으시고, 그의 성전으로 택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깨끗케 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 신랑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시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한때 예수님의 모형으로 쓰여졌던, 성전, 제물, 제사장 등이 더 이상 이제 유효하지 않다. 이것들을 붙들고 있는 한 그는 예수님을 중심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제 성전은 예수님이시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과 예수님을 예배하는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들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0-05
  • 성경은 어떤 책인가?
    ‘정경화’ 과정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것으로 믿고 인정해야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성경은 쓰여진 연대와 시대적 폭이 넓어 그 기간이 주전(B.C) 1300년경부터 주후(A.D) 100년경까지 약 1400년에 걸쳐 기록되었다.이 책들은 만물의 기원에 대한 고대의 시가, 율법, 사사(지도자)들의 영웅적 활동, 이스라엘 열왕에 대한 역사, 선지자들의 예언, 현인들의 지혜, 제사장들의 예배의식, 종교적 시가 등으로 구성된 구약성경과, 예수의 탄생과 그의 가르침, 사도들의 전도활동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편지 및 묵시록 등으로 구성된 신약성경으로 나누인다.1. 구약성경(총24권) <39권)구약성경은 크게 세 종류로 구성된다.① 율법(Torah):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전5권). ② 예언서(Nebiim): 전기 예언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전4권). 후기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예언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전4권). ③ 성문서(Kethubim): 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 에스더, 룻기, 아가,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서(전11권)이다. 기원전 250년경 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70인역)하는 과정에서 예언서의 사무엘과 열왕기를 각기 상·하로 나누고, 또 한 권으로 묶여있던 호세아로부터 말라기까지 12소예언서를 각각의 책으로 나누었으며, 성문서에 한 권으로 편집되어 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각각 나누고, 역대기를 상·하로 나누어 총39권이 되었다. 기독교는 이 헬라어 번역의 편집을 따르고 있다.2. 신약성경(총27권)예수의 가르침과 초대 사도들의 전도활동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은 기독교만이 가진 독특한 정경으로 네 종류로 구성된다.①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전4권). ② 행전: 사도행전(전1권). ③ 서신: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전 21권). ④ 묵시: 요한계시록(전1권)이다. 3. 성경의 기록과 목적① 모세오경(Torah): 처음부터 ‘토라’라고 부르는 오경은 계시의 책으로서 구약의 다른 책들보다 더 높은 권위와 신용을 얻고 있었다. 이 책은 율법서로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것이다.2) 예언서(Nebiim): 예언서는 ‘네비임’이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역사서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전기 예언서’이다. 이는 그 저자가 예언자적 시각에서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은 12소선지서와 함께 ‘후기 예언서’이다.③ 성문서(Kethuim): 성문서라고 불리우는 ‘케튜빔’은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가 이스라엘의 사실상 역사이지만 성문서에 편집되었고, 다니엘서는 ‘예언서’임에도 성문서에 편집되어 있다.④ 신약성경 :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달리, 처음부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그 내용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정경상(正經上) 예수의 가르침인 4복음서가 먼저 쓰여진 것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가 먼저 쓰였고, 그 후에 누가복음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 마태, 마가가 기록되고, 요한복음은 맨 나중에 기록되었다.신약성경은 ‘하나’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형식으로 이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저자마다 강조되는 기록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했다. 이는 구약 성경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원본 책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이 원본에서 베껴 쓴 사본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경 사본은 그것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시내산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등등 여러 종류의 사본들로 불린다.주후 2세기 말경부터 이들 신구약 성경은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라틴어 역본 중에는 주후 4세기 말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제롬 Jerome이라고도 함)에 의해 번역된 불가타(Vulgata)역이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현재 성경은 전 세계에서 1천 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또 다른 언어들과 방언들로 번역되어 가고 있다.4. 성경의 영감“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성경은 다른 책과 달리 하나님의 영감(靈感)에 의해 쓰여진 글이라는 점이다. 영감(Inspiration)은 성령의 초자연적 영향력(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졌다는 뜻이다. 모세나 다윗이나 예언자들은 영감된 사람들일 뿐아니라, 자신이 영감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또는 “주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셔서 말씀하시기를”과 같은 표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예수님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요 10:33 이하). 성경의 책들을 쓴 저자들은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살전 2:13).영감은 진리의 축자적 전달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꼭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구술(口述)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보다 저자의 지식, 개성, 환경, 경험 등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 그 배후에 성령의 감동이 작용하여서 그 계시를 나타내게 하신 것이다.성경은 기독교에 의해 주후 393년 힙포레기우스 회의와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이 ‘정경’(正經)으로 공식 인정됨으로써 이 세상 모든 다른 문서들과 구분되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인되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교회의 이 정경화(正經化) 과정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것으로 믿고 그대로 고백하며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인정되고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 성경의 독특성과 양면성성경은 이 세상 모든 책들과 구분된 책으로서 독특성과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성과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문헌이다. ② 성경의 저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동시에 인간 저자가 있다. ③ 성경 66권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각 성경은 각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그 중심에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④ 성경은 아주 쉬운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또 매우 어려운 책이다. 따라서 해석이 필요하다.6. 성경의 장절의 구분본래 성경에는 장절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외울 때 찾기 쉽게 만들어진 장절의 구분의 역사도 꽤 깊다. 제일 처음 장(章)을 구분한 성경은 주후 4세기 경의 신약성경으로 바티칸 사본이고, 구약성경은 13세기 초 라틴역에서 사용되었다. 또 절(節)의 구분은 10세기부터이다. 그 후 신구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진 것은 1555년 스테파누스의 라틴 불가타역이다. 라틴 불가타역은 가톨릭교회의 공인성경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장절의 구분은 1560년대 출판된 제네바 성경의 것을 따른다. 구약은 929장 23,214절이고, 신약은 260장 7,959절이다. 총 1,189장 31,173절로 나누어져 있다. <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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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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