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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9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살면서 받은 상처가 많은 존재라서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슬픔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한도 많아서 세상의 어느 나라 백성들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백성이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한국 동포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는 축복에 관한 메시지 보다는 위로의 메시지여야 한다. 마음에 상처받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갖다 주며 먹으라고 해도 마음에 한이 맺혀있고, 심령이 상해있으면, 그것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사 40: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로부터 시작된다.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였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 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라고 말한다. 얼마나 심한 환난과 고난을 당하였으면 힘에 겨워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을까 상상하기가 힘들다. 9절에는“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10절에는“이같이 큰 사망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아마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살아난 사람들 같다. 사도 바울과 그의 형제들이 아시아의 어디에서 이처럼 처절한 환난을 당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바울은 항상 고난과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 사람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말씀을 전하느라고 이러한 환난을 당한 것이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매맞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카, 에베소 (행 19:23-41; 고전 15:32) 등에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매를 맞고, 심지어 원형극장에서 맹수와 더불어 격투를 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아 법정에 끌려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은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고난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내 인생에 고난이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고난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만 그 값이 다를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물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고난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답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인생이 다 고난이기에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런데 바울 사도는 4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하고 비방을 받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죄를 대속하여 매 맞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바울에게 넘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고난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 지셨던 예수님의 그 거룩한 고난을 바울 자신도 당하고 있으며, 아주 넘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고난당하시고, 바울도 고난당하고, 우리도 고난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첫째는 아담과의 언역적 연대성 때문이요, 둘째는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5:14에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라고 했다. 이 말은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수님이 아담의 실형이라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죄의 벌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고난당하고, 죽는 것과 같이,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과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원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원리를 바울은 모형과 실형의 원리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 되었다. 이 연대성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언약적 연대성”이라고 한다. Covenantal Bond 혹은 Covenantal Union이라고 말한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은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죄인의 명패를 우리의 이마에 붙였고, 사형수의 가죽 옷을 우리에게 입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저주하며 살다가 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다. 우리는 이제 죄인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언약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상처 받으며, 억울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과 한 숨은 예수님과 함께한 상처이고 고난이다. 마치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잠간 고난당하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우리의 상처는 예수님과 함께 한 영광스러운 상처이고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한 고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고난도 없고, 상차도 없고, 눈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분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자녀이면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다.”(롬8:17). 따라서 우리 신자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은 영광의 상처요, 은혜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다 자기 죄와 자기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당하고 환난 당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난당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상처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이고 상처이기에, 영광의 상처이고 은혜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고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죄값을 치르기 위한 고난이 아니다.우리 신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바울은 “찬송하자,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인애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며 우리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케 하시는 분이시다.”(1:3-4)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애”로 번역하고 있는 “오이크틸모스” 라는 말을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4절에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이 특히 의미 있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그에게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던 그의 자녀들과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위로의 힘”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는 위로 받아야 할 형제에게 무슨 말로 위로해 주어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해서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위선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이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의 힘”을 가지신 분이시다. 따라서 환난 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할 때에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많은 고난 가운데 그를 위로하시고, 더 나아가 그를 위로의 사도로 세워 고린도 성도들이 그를 통해 위로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의 고난과 환난과 위로를 하나님의 복음 빛 가운데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로서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환난당하고 고난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을 살 힘을 준다. 하나님은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이 자녀이고 백성인 우리들의 고난과 환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계시록 21:4에서는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당한 자들을 하늘에서 맞으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모든 눈물을 그의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 나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로 이 땅에서 살면서 상처 받고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할 수 있는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 힘과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의 샘터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인생들이 교회에 오면 위로 받고,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오면 평안을 얻고, 인생을 살아야 할 희망과 의미를 찾고, 연약한 다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7-07
  • 학술/ 이덕주 교수의 ‘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
    본고는 한복협 6월 월례회 중 이덕주 교수가 발제한 ‘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철원 기독교 유적지 답사를 통하여’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덕주 교수(전 감신대 교수)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부탁받은 강연제목은 ‘6·25전쟁의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 가운데 ‘전망’ 부분이었다. 과거를 공부하는 역사학도에 ‘전망’은 수용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내가 예언자라면 모를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 미국 워싱턴 웨슬리신학대학에서 예언서를 강의했던 구약학자 부르스 버치(Bruce Birch)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과 전망 사이가 예언자의 자리다.” 이사야도 그렇게 예레미야도 그러했다. 망국의 위기시대를 살았던 구약의 예언자들은 과거의 기억, 특히 오늘 당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의 원인이 된 과거의 잘못된 행실을 들춰내 고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내용의 반 이상을 채운 후 “다가올 하나님의 날을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끝맺었다. 긴 회고와 짧은 예언, 그것이 예언자 메시지의 특징이었다. ‘기억(memory)과 전망(vision) 사이’. 그것은 예언자의 자리만 아니었다. 역사학자의 자리이기도 했다.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탐구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과거에서 지혜를 얻어 오늘을 창조적으로 살고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함이다. “바른 기억이 바른 미래를 연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학에서 기억과 전망은 떼어놓을 수 없는 가치이며 목적이다. 전망하기 위해 기억하고 기억을 바탕으로 전망한다. 그런 맥락에서 ‘6·25전쟁과 관련한 기억과 전망’을 구하기 위해 70년이 지났어도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 폐허와 상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철원을 찾았다.철원은 정말 볼 것이 많다. 철원과 한탄강 주변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우리 조상들의 살림터와 고인돌 유적이 널려 있고 비록 전쟁으로 인해 많이 파괴되고 자유롭게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후삼국시대 이 곳에 태봉국 수도를 건설한 궁예의 흔적과 고려와 조선시대 유적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 특히 해방 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 갈등과 고난의 역사를 그 어느 곳보다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철원이다. 그런 민족 수난과 전쟁으로 인한 현장에서 이루어진 복음 선교의 역사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철원 여행의 목적이다. 더욱이 철원 여행에서 우리의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은 일제말기와 분단, 전쟁을 거치는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하던 목회자와 교인들 가운데 ‘순교자’ 12명이 나온 곳이기 때문이다.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그리고 무너진 예배당서울에서 철원 가는 길은 보통 의정부로 해서 포천과 운천을 통해 가는데 공휴일엔 교통체증으로 의정부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서울 서부에 사는 사람은 아예 자유로를 타고 문산까지 가서 적성과 전곡, 연천을 거쳐 가는 길이 편하다. 조금 돌지만 비교적 막히지 않고 또 3년 전부터 신탄역 북쪽으로 철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개방되어 지뢰밭 한가운데로 북한 땅을 지척으로 보면서 갈 수 있어 처음부터 철원 답사의 맛을 볼 수 있다. 이 길로 가다가 철원에 들어가기 직전, 6ㆍ25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하나였던 백마고지를 보고 갈 수 있는데 거기서 보면 전쟁으로 철원평야를 잃은 김일성이 너무 분해서 사흘간 먹지도 않고 그 평야를 내려다보며 울분을 토하고 갔다는 김일성고지가 멀리 보인다. 백마고지에서 나와 5분 정도 달리면 옛 철원읍 도심지에 도착한다. 거기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군인들의 통제하여 비무장지대에서 농사짓는 지역 사람들이나 사전에 출입 허락을 받은 관광객이나 성묘객들만 들어갈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부서진 기차가 서 있는 온정리역과 비무장지대 안 궁예 성터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해방 전 온정리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그 터는 철조망으로 바뀌었다. 검문소에서 신철원 동송으로 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바로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 보인다. 38선 이북이었던 철원은 해방 후 당연히 북한 영토로 들어갔고, 노동당에서 ‘한 동리에 쌀 2백 가마씩’ 공출하고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한 달 만에 지었다 한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많은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취조를 받기도 했는데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고 뼈대만 남았다. 철근을 쓰지 않고 벽돌과 시멘트로만 지었는데도 골격은 그대로 남아 있다. 노동당사에서 남쪽으로 바로 보이는 곳에 철원제일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본래 철원읍에는 1899년 경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와 교회를 세웠는데 1909년 감리교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을 맺으면서 이 지역을 남감리회 선교부에 이양하는 바람에 철원은 감리교회 선교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예배당 주변으로 남감리회 선교부 사택과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병원과 학교, 여자관 건물이 있어 이곳이 김화 평강 포천 연천을 포함하는 철원 선교의 중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1937년 지은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설계는 일본의 유명한 건축 선교사 보리스(W.M. Voris)가 맡았는데 그의 작품으로 아직 남아 있는 서울의 이화여대 대강당과 석조 교사 및 신세계백화점 등에서 볼 수 있듯 고전적인 낭만파 성향의 웅장미가 물씬 풍겨나는 석조 고딕 건물이었다. 1,200평 대지에 3층 건물로 지었는데 벽재를 화강암과 화산석으로 처리하여 견고성과 건축미를 더했다. 그러나 이 예배당 건물 역시 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동쪽 벽면과 남서쪽 모서리 기둥만 남고 모두 무너졌다. 주차장으로 변한 교회 앞마당에서 예배당까지 돌계단이 남아 있는데 중간 쉼터를 경계로 양쪽에 12단씩, 모두 24단으로 되어 있다.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한 것이겠지요.” 철원 답사를 안내하는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의 설명이 그럴 듯 했다. 옛날 우리 선배들은 계단을 쌓을 때도 성서적 의미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비록 지붕은 없어졌지만 예배당 입구, 현관에 들어서니 바닥의 색타일이며 2층 대예배실로 오르던 계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제말기 경기 북부에서 제일 아름다웠다는 예배당 건물의 위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주일학교 교실로 사용했다는 1층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기초석만 남고 무너져 내린 벽면 흔적을 통해 2백 평에 달하는 예배당 규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폐허 한 가운데 서 있어 보라. 백 년 전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의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조금 더 숨을 죽이고 들으면 삼일운동 때 지역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인 후 ‘철원애국단’을 결성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체포된 이 교회 박연서 목사와 청년 교인들의 속삭임이 들리고, 일제말기 여기서 목회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교한 강종근 목사의 사자후(獅子吼),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하는 일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는 하지 말라!”는 외침도 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터지고 예배당이기에 안전하리라 싶어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미군 폭격으로 몰사한 철원 주민들의 아우성도 들린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철원제일교회 담벼락은 오늘 우리에게 예루살렘 ‘통곡의 벽’과도 같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은 기초를 쌓았던 벽만 남았고 오늘날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성스런 장소로 남았다. 이방민족에게 공격을 당하고 성전이 무너진 것이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인 것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장소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 무너진 담벼락도 마찬가지다. 일제말기 신앙 양심과 지조를 저버리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전쟁 폭력에 동참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훼절, 분단시대와 전쟁 시기에 군인들의 전쟁과 별개로 민간인들마저 이념과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편을 가르고,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고, 다시 피해가자 가해자가 되어 서로 죽이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 후손 대까지 증오와 불신의 유산을 남겨 준 ‘전쟁세대’의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할 일이다. 통곡의 벽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함으로 예루살렘이 이름 그대로 ‘평화의 도성’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순례자들처럼,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 휴전선 북방 한계선에 전쟁 폭격으로 무너진 채 남아 있는 철원제일교회 담벼락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이기적이고 당파적이며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 가르고 살았던 왜곡된 신앙을 회개하고 반성할 일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20-07-07
  • ■ 기획/300개 넘는 장로교단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1907년에 단 7명의 목사로 출범한 한국기독교는 불과 110여년 만에 15만 여명에 이르는 목사를 가진 거대한 종교집단이 되었다. 매년 발행되는 교회연합주소록의 통계에 의하면, 300여 개 교단 중 대표성 가진 주요교단 29개에 속한 목사 수만 12만명에 이른다. 따라서 한국교회 전체 목사 수는 어쩌면 15만명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 한국기독교에 목사 수가 얼마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근래 목회자의 전반적 수준이 너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수준 저하는 곧 한국교회의 불신으로 이어진다. 목회자의 수준은 학력이나 학벌 등 지적 신학적 수준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신학을 기본으로 하는 목회자의 지적 상식적 수준은 기본적인 것이고, 여기에 영적 인성적 수준과 소명감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는 단순히 영적 체험만을 앞세워 가장 기본이 되는 신학적 수준조차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목사안수를 받고 나면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군소교단 신학교들의 ‘무자격’ 목회자 배출이 문제 물론 목회자 자격은 교단에서 정한다. 한국기독교에서 정통을 지키는 교단에서는 대학 졸업생을 받아 3년제 신학대학원 과정을 거쳐 전도사나 목사가 된다. 보통 대학 졸업 후 7~8년이 걸린다. 또 다른 과정은 교단 사정에 따라 고졸생을 받아 4년제 신학과정과 2년제 대학원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된다. 이 또한 최소 6~7년이 걸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학훈련 과정을 생략한채 ‘무자격’ 목회자를 양산하는 교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수백 개의 간판이 내걸린 장로교 군소교단이 문제인데, 군소교단 총회신학교 가운데는 나이든 집사 권사 등을 모집해 한두 학기 등록금만 내면 졸업장을 주어 곧바로 목사안수를 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교단 신학교에 등록을 하고 한두 학기 다니다가 다른 교단 신학교로 옮겨가 더이상 신학공부는 하지 않은 채 목사안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주로 나이가 들어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 가운데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어 목사안수부터 받으려는 편법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는 불과 2~3년이면 목사가 된다. 이들 장로교 군소교단 신학교들은 소위 ‘ 무인가’ 상태이기 때문에 통제없이 이적이 가능하다. 교단 신학교는 반드시 대학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교단에서 필요한 목회자를 양육하는 것이지, 일반 사회에서 활동하는 인재를 양육하는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비록 신학교는 무인가 상태로 운영되더라도 학제는 정통 신학교육 과정을 충실히 거쳐야 한다. 보통 신학부 8학기, 대학원부 4학기 정도의 교육기간을 거쳐야 제대로 신학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만 안다고 제대로 된 목회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성경의 기본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교회사와 교리사, 역사적 보편적 기독교가 성경을 해석해온 성경주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는 설교학 등 목회자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교육과정이 많다.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장로교 통합의 필요성이 여기에도 있다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무자격’ 목회자 양산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장로교 통합의 중요한 이유가 목회자들을 향해 여기에 있다. 가능한 정통성을 갖춘 전통교단들이 군소교단을 흡수하여 목회자의 재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지켜가야 한다. 소위 대교단 목회자들은 군소교단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소위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대교단이든, 1백여 개의 개척교회로 이루어진 군소교단이든, 모두 ‘하나의 장로교’라는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건물의 한쪽 면이 부실하여 무너지면 건물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어 곧 모두가 무너지는 날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지도자들은 교단이기주의를 버리고 과감하게 장로교 통합운동에 나서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장로교 끼리 연합하자면서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를 논의하는 소위 장로교연합체만 10여 개에 이른다. 한국장로교연합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회, 한국장로회협의회 등등. 장로교단이 얼마나 많으면 장로교연합회라는 간판이 이처럼 많이 내걸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들 장로교단은 하나같이 신학은 정통개혁신학이요, 신앙노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간판을 다르게 내달고 딴 살림을 차려야 하나. 이는 성경도, 복음도, 기독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순전히 기독교라는 간판 아래서 먹고 살려는 인본주의적 세속적 욕심에 기인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목회자의 도덕적 해이로 한국교회 신뢰 잃어 모든 교회와 목회자는 한국기독교라는 ‘한 그물’에 싸인 물고기와 같다. 그 그물에는 질 좋은 고기와 질이 낮은 고기가 섞여있으나, 그 교회를 밖에서 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한 목사의 도덕적 일탈은 전체 목사들의 문제로 비화된다. 그래서 목사도 교회도 도매금으로 불신을 받게 된다. 근래 수년간의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에는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요즘 우리사회에는 ‘미투’니 ‘그로밍’이니 하는 말로 고위 공직자나 목회자들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기와 질투와 모함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목회자가 틈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직업인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노회나 총회가 감독적 입장에서 통제해야 한다. 교단이 지금처럼 갈갈이 찢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감독이 어렵다. 따라서 장로교 통합 논의 없이 한국교회의 미래 또한 논하기 어렵다. 장로교 통합을 진지하게 말하는 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
    • 해설/기획
    • 기획
    2020-06-1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8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리의 죽음과 부할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연대성 원리”이다. 칼빈은 이를 “본드”(Bond)라고 했고, 전통신학에서는 “언약” (Covenant)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인간은 아담과 연대성, 그리고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서 아담과 함께 죽고, 새 아담과 함께 살아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이 사실을 부인한다고 해도 죽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다시 살고 싶다는 희망은 버릴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이 죽음과 내세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믿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믿지 못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 우주적인 비전과 소망을 보여주시고, 사명을 주신다.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막달라의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들은 각각 예수님을 잃고 슬퍼 울고 있는 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0절에 나오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 나셨고, 그 여자에게 보이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했다. ESV에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They would not believe it)라고 번역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도 같은 심성으로 “이 말들이 사도들에게는 허탄한 듯이 들려서 그들은 그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눅 24:11). 두 무리들은 다같이 믿고 싶은 마음이 없고, 의도적으로 믿음을 회피하려는 부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다. 이 여자들의 말이 진정성이 없어 보여, 그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12-13절은 아마도 누가 복음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두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부르셨고, 그들도 처음에는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따른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의 마음은 변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그가 성공하는 날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에 앉는 꿈을 가지고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뒤부터 제자들에게 자신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메달려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일러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싸웠다. 예수님은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예고하셨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말씀대로 그가 부활하신 사실을 일러 주어도 이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꾸짖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사실을 다른 제자들로부터 들었지만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것이다. 여기서 완악하다는 말은 우리 사전에는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고 모질다”로 정의하고 있는데, 헬라어로 “스크래로카르디아”()라는 말은 그런 의미보다는 영역본에서처럼 “hardness of heart”라는 의미이다. 헬라어 “스크래로스”( 굳다, 딱딱하다)라는 말과 “카르디아”(καρδια, 심장)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사람의 심장이 굳고 딱딱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유연성이 없고 자기 생각이나 고집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받아들일 융통성이나 여유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라 굳은 빵이 돌처럼 딱딱하여 잇빨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믿음의 씨가 싹이 나거나 자랄수 있는 마음 밭이 안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는 데도 이들은 믿음이 없고, 마음이 굳어서 이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나 편견이나 주장과 지식이 자기 머리에 박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여백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책망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눈을 온 우주로 향하여 뜨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바라보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꾸짖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사명을 주셨다. “온 세상을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이 본문을 헬라어 본문대로 번역해보면 “모든 우주()에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이다. 한글 성경에는 “온 세상에 나아가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 온 세상과 온 우주라는 말은 의미가 다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우주, 그러니까 해와 달과 별 등 지구를 벗어난 모든 항성과 유성까지도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유의 세계에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달에도 가고, 화성에도 가는 문이 열리고 있다. 그곳에게 가서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인가? “모든 피조물”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물들,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에게 내린 저주는 아담은 물론 모든 피조물, 동식물 모두에게 내리는 저주였다. 사실 말 못하는 식물이나 동물들이 무슨 죄가 있으리요마는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서 아담과 함께 불순종의 죄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자연만물에 대하여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것”(롬 8:18-25)을 바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분봉왕, 인간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의미없이 사탄의 종들을 어쩔 수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처음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에 동참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썩어짐의 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이들의 간절한 소원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는 비록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함께 들어야 할 복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들이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었다.제자들은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는 이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아무리 보고 들은 사실을 말해주어도 믿지도 않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고 있다. 이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다. 이 지구를 넘어 우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눈앞에 있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나가서 “유앙겔리온”(), 곧 복음, 복된 소식, good news를 알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가 무너져 아담의 언약적 저주가 풀리고, 새 아담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자유와 생명과 평화의 세상이 열였다는 복된 소식을 온 우주에 나가,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온 우주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바라보게 하신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여 사망 권세를 다 깨뜨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셨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대단히 심각한 말씀을 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16).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만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 그래서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됨을 인증하는 인증식이다. 아울러 이들을 저 우주에까지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선지자임을 성령으로 인치시는 성령세례, 곧 선지자 위임식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죄 가운데 남아있고, 썩어 없어질 피조물들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또한 믿고 세례받는 자에게는 표적을 주겠고 약속하신다. 악령을 몰아내는 권세, 모든 사람과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방언, 심지어 뱀과 같은 피조물과도 어울리는 평화,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 이 모든 선물을 표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마지막 날의 비전을 연상케 하시는 말씀 같다(사 11장).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전이 높이 들린 산 위에 서고, 그곳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그곳을 향하여 말씀을 받으러 나간다, 이때에는 온 세상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쳐, 마치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암소와 곰, 어린 아이와 뱀들이 함께 어울려 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으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것과 같은 세상, 곧 평화의 세상, 평화의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다. 마가는 바로 제자들이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이루어질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종말의 비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6-12
  • 학술/ 기독교학술원 83회 월례포럼 ‘진화적 창조론은 왜 잘못되었나?’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명예교수)본고는 지난 5월 25일 기독교학술원 제83회 월례포럼에서 나온 김영한 박사의 원고를 발췌 편집한 글이다. <편집자 주>머리말세계관은 신념으로서 오늘날 현대인과 학자들이 갖는 기본적 세계 이해의 관점이다. 개혁신앙을 가진 신자는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을 믿는다. 그러면서 오늘날 과학적 이론과 대화하고자 한다.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세계에 대한 입증되지 않은 세계관이다.점진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 내지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은 창조론을 오늘날 진화론과 타협하는 이론으로 생겨난 것이다. 오늘 학술원 세미나는 이에 관해 학자들의 견해를 듣고 진지하게 토론하고자 한다. 1. 생명의 자연발생론은 진화론 기본 가정으로서 과학적이지 않다.진화론자들은 ‘생명의 자연발생’을 주장한다. 즉, 생명이 없는 무기원소에서부터 화학적 진화를 통해서 원시세포가 우연하게 만들어졌고, 원시세포 생명체가 수십억 년 동안 자연적 진화과정을 거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파스퇴르에 의해 실험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어떤 생명체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과학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하는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틀릴 수밖에 없다. 우주에 ‘최고 수준의 정밀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최고 수준의 정밀도’가 유지되도록 장치(자연의 법칙)를 해놓았음을 뜻하며, 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결과’임을 뜻한다. 자연에 나타나는 질서와 아름다움이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하나님이 자연계에 적용되도록 만드신 과학법칙들이다. 2. ‘지질시대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실제 지구 역사’가 아니다. 지구 나이 46억년과 우주 나이 138억 년은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진화론자들의 추정치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지질시대표」(1872년, 찰스 라이엘)는 지구지층을 진화된 순서대로 총 12개로 구분하고 각 지층에 나오는 표준화석을 정해놓은 것이다. 이는 실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믿음’에 따라 지층과 화석들을 껴 맞춰 넣은 것이다. 오늘날 발견되는 화석들은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진화순서대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뒤죽박죽 뒤섞여서 발견된다.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없다’는 사실은 화석기록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진화론 주장에 어긋나는 증거다. “사람들은 화석 기록에서 아주 많은 간격이 있다는 것과 이런 모든 간격들이 연결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석 기록은 어떤 종류의 동식물에서 아주 다른 형태로 전이되는 어떤 연속적인 기록도 보여주지 않는다.” 빈틈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빈틈의 진화론'이 더 타당한 표현이다.3.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은 성경적 창조론에 배치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혼합한 다양한 타협이론들이 있다.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지만, 생물들을 종류대로 직접 창조하시지 않고 진화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생물 진화론은 ‘변이의 축적과 자연선택’에 의하여 원숭이와 공통 조상에서부터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지만, 생물들을 종류대로 직접 창조하시지 않고 자연적인 진화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다는 이론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진화론과 배치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자연적 과정을 통해 일하시는 것처럼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으로서 다음같이 주장한다: “창조주가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생물을 창조했다고 본다.” “신이 자연선택이나 유전자 변이 등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진화의 방식을 사용해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읽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유신진화론은 창세기 내용을 ‘과학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진화론’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껴 맞추고, 조화시켜려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4. 진화론을 수용하는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은 성경적 창조론에 배치된다.유신진화론은 컴퓨터 및 유전학 등 인접 학문의 진보 덕분에 눈부시게 진화된 정교한 진화론으로서 “장기간에 걸친 변화”와 “모든 생물의 공통조상” 등을 기본 원칙으로 수용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약 5만 내지 10만 년 이전에 약 만 개체 정도의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되었다 한다. 이 경우 모든 인류가 아담 부부의 후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을 일으킨다.유신진화론자인 롱맨은 제임스 던이나 피터 엔즈를 인용하면서 아담이 실존 인물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문학적 인물과 역사적 인물을 관련짓는 유비는 이미 바울 시대에도 익숙한 것이었다”고 본다. 이에 반해서 개혁신학의 일관된 입장은 창세기 1-3장은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와 개혁주의자는 아담이 반드시 실존 인물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유일한 조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본문이 강조하는 핵심은 아담의 대표성과 그 대표성과 통하는 그리스도의 대표성이다. 유신진화론과 맞서는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로마서 5:12-21 본문에 대해 아담의 역사성과 온 인류의 조상이라는 대표성을 성경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5. 유신진화론은 타협이론으로 개혁신학의 창조론과 조화되지 않는다. 1) “방법론적 자연주의”로서 진화론 자체와의 조화를 꾀하는 유신진화론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로 이어진다.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물리적 원리로만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다. 진화론의 기본 역학이 “우연적이고 인도받지 않은” 과정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 과정을 인도하셨다 한다면 유신진화론은 “인도받지 않고 지도되지 않은 과정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지도하셨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유신진화론은 이러한 지적 설계이론을 ‘간격의 하나님’으로 비판하나, 오히려 유신진화론이야 말로 ‘간격의 자연주의’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2) 유신진화론은 창세기 1-3장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도하는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담의 역사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인 원죄교리가 무너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해에 흠이 있다. 그루뎀이 제시하고 있는 유신진화론을 거부하게 되는 11가지 기독교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진실성. 2.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에 의한 직접적인 창조. 3. 자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 4. 자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책임성에 대한 증거. 5. 하나님의 지혜. 6. 하나님의 선하심. 7. 하나님의 도덕적 공의. 8. 인류의 평등성. 9. 속죄. 10. 부활. 11 자연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가치. 창세기 1-3장에 있는 이 사건들 가운데 몇 개의 역사성이 부인된다면, 이 사건에 근거하는 많은 결정적인 기독교 교리들이 침해당하거나 상실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특별한 창조는 유신진화론을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6.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은 타협의 선상에 있다.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 1932- )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랜 기간을 거치는 일련의 행동 속에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각 “종류”의 최초 일원을 창조하셨다. 그런 다음 그 집단의 첫 번째 일원으로부터, 진화에 의하여 다른 것들이 발전한다. 다양한 종류들 사이에는 진화론적인 발전에 의하여 메워지지 않는 틈이 있다. 소(小)진화 (혹은 “종류내의” 발전)는 있었지만, 대(大)진화(혹은 “종류 간의” 발전)는 없었다라고 에릭슨은 결론짓고 있다.하지만 그루뎀은 『유신진화론 비판』(2017)이라는 책에서 오래된 지구론이 제시하고 있는 창 1장에 대한 해석은 “본문을 볼 때 가능하기는 하지만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루뎀이 보기에 홍수지질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지질학자들까지 포함해서 전문적인 지질학자들을 거의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젊은 지구 창조론의 선봉에 서 있는 켄 햄은 자신의 글에서 데릭 에이저 (Derek Ager)의 글을 하나 인용한다. 지질학계에서 찰스 라이엘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인용문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듯 지질학자들도 지구의 역사를 다시 쓴다. 지난 150년 어간에 지질학계는 찰스 라이엘의 점진적 균일론에 의해 압도되었다. 세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격변적’ 사건들에 대한 제안은 전부 구시대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심지어 우스갯거리로 거부되었다.” 7. 죽음은 아담 이전에도 이미 있었는가?아담의 타락 이전에도 육체의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신학적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유신진화론은 물론 점진적 창조론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아담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보고 구절 하나를 확대 해석하여 특정한 과학 이론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타락 이전에 동산에서 동물들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식물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이 전제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29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아담에게 육식은 노아 홍수 이후에야 주어진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타락 이전에 인간과 동물들은 채식을 하고 있었다. 식물은 죽지 않고서도 자기증식과 무진장 열매를 맺음으로 얼마든지 양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식물의 용도이다. 다시 낙원이 회복되면 호랑이나 사자도 인간도 채식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 11:7). 맺음말창조자 하나님의 계시는 불변하나 과학적 지식은 단편이다. 과학은 탐구하면서 단편적 맥락성이 점차 드러날 것이다. 현재 나오는 과학지식을 가지고 성경의 계시 지식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성경적 계시 신앙에 더 깊은 근거를 줄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타협할 필요 없다. 그렇다고 독선적인 신앙의 태도에 머무를 필요 없다.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개혁신학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대화할 자세를 지니고 성경적 창조론을 심화시키면서 이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로서 아는 신앙적 지식을 천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은 보다 성경적 창조론에 대한 학문적으로 설득력있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새로운 연구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20-06-12
  • 장로교단 통합 없이는 효율적 이단 방지대책도 어렵다
    ‘이단감별사’라는 직업까지 생겨난 한국교회한 국기독교에는 유달리 이단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아예 직업이 이단을 감별하고 먹고 사는 부류도 생겨났다. 소위 이단연구가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이처럼 이단이 창궐하는 근본적 배경은 교회의 무질서에 원인이 있다. 한국기독교는 헌법상 종교자유를 빙자해 교단이나 총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마치 ‘무당 절간’처럼 운영되는 교회가 많다.또 거기에 한국인의 정신의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비결신앙(秘訣信仰)이 성경을 방자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 섹트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비결이란 세싱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어떤 구원의 방법을 뜻한다. 즉 어떤 특별한 구원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특정인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이를 교주우상주의라고 한다. 기독교의 성경을 인용하며 나타난 통일교나 천부교나 영생교 등이 그런 것이다.기독교 계통 이전의 신종교(新宗敎)는 대체로 정감록 같은 한국적 비결신앙을 그 모태로 한다. 증산교 계열의 수많은 유파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런데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역시 이 비결신앙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경을 이 비결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교회 주변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시한부 예수 재림운동도 장소와 날짜를 중요시 하는 비결에서 비롯되고 있다.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증거장막성전 신천지 신도가 2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도 그 숫자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 주변에 이단세력은 약 일백만명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100만명은 전체 기독교 인구의 약 10%에 이르는 숫자이다. 그러니 그들을 상대해서 싸우는 이단감별사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도 무리는 아니다.이단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일 뿐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이단 혹은 사이비 집단으로 비판받는 신천지 등의 문제가 생기자, 교계주변에서 ‘이단사이비종교특별법’ 제정 운운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법은 이단을 모른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법이 종교적으로 이단이나 사이비를 알게 되는 순간에 그 사회는 중세 기독교시대와 같이 종교재판이나 마녀재판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어떤 경우에도 종교집단 내부의 문제이지 법이 개입할 문제는 아니다. 종교가 그 근본 원리를 일탈해 반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교’(詐敎)의 문제는 특별법 없이도 현행 형사법으로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기성종교로부터 이단(理端)이라는 비판을 받는 신종교(新宗敎)로부터 시작된다. 인류사에서 신종교가 처음에 이단 아닌 종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불교는 힌두교로부터 이단이었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이었으며, 이슬람은 기독교로부터 이단이었다. 문제는 그 종교가 가진 역사관과 세계관이 인류 보편적 상식에 바탕하는 건강한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 상식을 초월한 비이성적인 것인가 여부로 그 종교의 보편성이 판단될 뿐이다. 그런데 모든 신앙은 그 종교가 갖는 교리내용에 대한 각 개인의 심리적인 확신을 가질 때 가능하다. 어떤 세계적 종교일지라도 그 교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그 종교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에는 그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라는 인간의 심리현상과 그 공동체에서 역사적으로 고백되어온 교리가 합해져 하나의 온전한 종교현상으로 나타난다. 세계적 클래식 종교들도 모두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따라서 어느 한 종교의 교리가 불합리하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그 종교의 신앙을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한다면 이는 매우 중대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죄의 태도는 기성종교에서 파생되는 이단이나 신종교에 대하여 갖기 쉬운 현상이다. 그러나 상기해야 할 것은 어느 한 종교에 대해 불건전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곧 자신의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거부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무한정 보장되어야 한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도가 곧 그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단의 문제는 분명한 비판과 변증이 따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이단대책 활동에도 이단은 계속 늘어한국교회가 이단대책을 위해 각급 교단 차원과 연합단체 차원에서 이단대책 조직을 만들고 '이단방지대책'을 내어놓고 있다. 그래도 이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성교단에서 이탈한 교인들이 줄지어 이단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는 효율적인 이단대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없이 교계의 분열에 있다. 300여 개가 넘는 장로교단의 간판아래 사이비 신앙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궐하는 이단방지를 위해서라도 교단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로마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 또는 성공회나 루터교 등은 미사나 예배를 교단이 제공하는 예배의식문에 따라 집전하면 된다. 모든 주일예배는 교회력에 따라 예배의식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 중심의 개혁교회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만 강해하고 맏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속적 이야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비성경적 비교리적 망발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이단감별사가 그것을 비판하고 나서면 꼼짝없이 이단으로 몰려갈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시비는 그만큼 가볍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단 아닌 이단도 많이 남발된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감시가 중요하다. 그 교단 내부에서 엉뚱한 주장이 생겨나지 않게끔 노회나 총회로부터 감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단이기주의가 작동하게 되면 교단 내부의 이단은 숨긴채 그 교단 밖의 사람에 대한 이단시비가 빈번히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교계의 분열책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단이 통합되면 이런 문제가 해소되고 효율적 이단대책이 이루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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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2020-05-29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7
    에스겔서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관심을 갖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예언일 것이다. 골짜기에 쌓여있는 마른 뼈들을 보며 생각나는 것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는 코로나 전염병에 희생되어 넘쳐나는 시신들의 모습이다. 화장장이 넘치고, 매장지가 모자라 심지어 무인도에 땅을 파고, 시신을 장작더미 쌓듯이 쌓아서 묻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의 비참한 모습이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우리에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망하여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세워 바빌로니아에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그의 말씀을 대언하게 했던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고 골짜기로 가셨다. 거기에는 온통 뼈로 가득하였고, 그 뼈들은 다 말라 있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공동 묘지였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가매장을 하여 살이 썩기를 기다린다. 살이 다 썩은 후 뼈만 남았을 때 그들은 대대로 그들의 조상들의 뼈들 쌓아둔 무덤으로 가져온다. 그래서 지금도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가족의 뼈를 안치하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성경에 아무개가 죽어서 그의 백성에게 합류했다는 표현들이 있는데 (창 25:8), 이는 물론 그의 영이 그의 백성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지상에서 그의 뼈가 조상들의 뼈가 있는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의미도 된다.에스겔이 본 뼈들은 우선 그 수가 심히 많았고, “아주 말랐더라”(2)고 했다. 생명이 다시 소생할 여지가 없는 그야말로 깡마른 뼈다귀였다. 생명이 움틀 틈이 없는 뼈들이었다. 뼈는 사람의 몸을 떠받치는 받침대이다. 하나님께서는 뼈를 먼저 만드시고 그 뼈에 살을 붙이시고, 핏줄과 신경을 연결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뼈는 사람의 몸을 이루는 틀이고, 기본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뼈를 부수는 것은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부서진 뼈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뼈를 불태우거나 뼈를 파헤치는 일은 모독이며, 특별한 수치를 주기 위한 벌이었다. 죽은 자의 뼈는 항상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취급해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관습이었다.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왜 에스겔에게 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뼈를 보여주신 것일까? 11절에 보면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 마른 뼈에 비유하고, 이들이 말라서 이제 소망이 없고, 멸절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이제 이들에게는 다시 회복될 소망이 없다. 이들에게는 나라도 없고,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도와 줄 자도 없다. 자유도 없고, 기쁨도 없고,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이들은 마른 뼈가 쌓여 있는 공동묘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있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죽은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신다. 에스겔은 여호와에게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자기는 모르고 주님은 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고 믿는 선지자라면 그 대답을 몰랐을 리가 없다. 에스겔의 대답은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나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의 문제입니다라는 의미로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이제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를 살리시는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영(생기가 아님)이 들어가게 할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이 올라오게 하며, 피부로 덮고, 너희 안에 영( 생기가 아님)을 줄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것을 알 것이다”(5-6)고 명하시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그대로 이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선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지자 에스겔이 말씀을 마른 뼈들에게 선포하고, 하나님께서는 영을 불러 그 속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러면 살게 된다는 것이다.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했다. 그러자 그가 대언할 때에 뼈들 가운데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와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맞추어졌다. 그리고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었다. 선지자의 대언하는 말씀을 받은 뼈들이 살아나서 사람의 형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마른 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심으로 뼈들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생기가 아니라)이 없었다(8)고 했다. 말씀이 이들의 육체를 살아나게 했지만 아직 이들에게는 영이 없었다. 여기서 한글 역본이 “생기”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는 “영” 혹은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진 “루아흐”()이다. 이 루아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할 때에 사용하고 있는 “영”이다(창 1:2). 개역성경의 하나님의 “신”을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고쳐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아담에게 불어넣은 것은 루아흐”()가 아니라 “니쉬마트 하임”()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창 2:7). “생명의 호흡”(a breath of life)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그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을 때, “내패쉬 하야”( living being, 생명체)가 된 것이다. 한글 성경에 “생명체”( living being)를 “생령”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잘 못된 것이다. 생령이 아니라 생명체이다. “내패쉬 하야”라는 말은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함께 쓰여졌다(창1:21, 24, 30; 2:19). 9절에 영()을 마치 (바람을) “불어넣다”()는 말과 연계하여 “생기”로 번역하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는 “니쉬마트 하임”()을 “생기”로 번역하고, 여기 에스겔에서는 “루아흐”()를 “생기”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마치 “루아흐”(영)와 “니쉬마트 하임”( 생명의 호흡)이 같은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혼란스럽다. 루아흐와 니쉬마트 하임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영”이라고 번역해야 히브리어 본문과 맞다.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영을 향하여 예언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9절을 다시 번역해보면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영에게 예언하라, 인자야 예언하라. 너는 영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영()아, 사방으로부터 영들()을 데려오라. 그리하여 이 죽임을 당한 자들 안에 불어라(). 그러면 살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영에게 사방으로부터 영들(복수)을 데려오라고 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에스겔이 그가 명하신대로 예언을 했더니 10절에 그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들이라는 복수는 한번 사용되고 있고, 죽인자들에게 들어간 영은 단수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방의 영들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이 영들에게 대언하자 영이 그 사람들에게 들어가 사람들이 살아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수가 매우 매우 큰 군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10).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받아야 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재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씀과 영이 진흙과 같은 인생들, 마른 뼈와 같은 인생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이 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 하신다. 이 둘이 함께 마른 뼈 속에 들어갈 때 비로소 진흙이나 뼈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라가 망하여 바빌로니아에 죄수로 끌려와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에 비유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과 영을 불어넣어 다시 살리실 것을 약속하고 예언한 말씀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회복하여 그들의 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살게 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특히 12절에 보면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는 바빌로니아를 이스라엘이 묻혀있는 무덤에 비유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마른 뼈가 쌓여 있는 이 골짜기가 다름 아닌 바빌로니아인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무덤을 열고 이스라엘을 그곳으로부터 구출해내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포로로 갇혀있는 상태, 그래서 자유를 잃고, 주권을 잃고, 종이 되어 있는 상태를 무덤에 갇혀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다만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들, 곧 심령이 메마르고 그의 영혼이 곤비한 가운데 무기력하게 주저 앉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의 종이 된 우리는 비록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혼은 하나님을 떠나 모두가 마른 뼈가 되어 무덤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살아날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반드시 재생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 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듣는 자는 살아 날 것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안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요한 5:24-26).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5-29
  • 한국교회, 장로교 분열 극복 없이는 신뢰 회복 어렵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불리우는 장로교는 노회(老會)를 중심하는 교파이다. 노회가 중심이 되어 목사를 양육하고 양육한 목사를 파송해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한다. 그리고 다시 노회의 회원인 목사와 지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를 노회의 대표로 뽑아 총회(總會)에 총대로 파송하는 대의제(代議制) 정치체제를 가진 교회이다. 따라서 장로교는 지교회, 노회, 총회가 하나의 교회로 구성된 조직이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원리적으로는 노회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된 ‘개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한국기독교는 장로교가 약 70%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에 하나로 시작한 장로교가 1백여년 만에 300개가 넘는 교단으로 갈라져 있다. 장로교가 이토록 많은 교단 분열을 기록한 예는 세계교회사에서 한국교회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하나의 한국장로교가 갈라지게 된 것은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에 패배한 결과이다. 한국장로교는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이라며 받아들이고, 동방의 현인신 소화천황(現人神 昭和天皇)을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경배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다. 그로인해 해방 후 교회는 분열했다. 그 분열이 결국 오늘의 장로교 분열상황을 가져온 것이다. 명분 없는 교단분열은 범죄이다일제 식민지 통치하의 총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신앙절개가 겪였다 하더라도 해방 후에 회개하고, 그 같은 잘못된 신앙적 역사적 오류를 청산했어야 했는데, 한국교회는 이를 외면하여 결국 교단 분열이라는 치욕의 길을 걸었다. 장로교 분열의 시초가 해방 후 신사참배 논쟁에서 비롯되었음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한번 바람난 배우자는 두 번 세 번 바람을 피우듯이, 한번 분열하기 시작한 장로교는 습관처럼 분열하면서 국민과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 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같은 교단 안에서 교권을 두고 갈등이 생기면 학연과 지연에 따라 파벌을 이루고, 감투를 노리는 사람들이 같은 신학교 출신끼리 또는 지역 색을 업고 ‘우리가 남이가’라며 교단을 만들어 나간다. 교단분열은 범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교단분열을 예사로 여긴다. 보편적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이단에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는 범죄이다. 이는 한줌도 안 되는 종교적, 세속적 이익을 따르는 타락한 행위이기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분열한 교단 이름을 달고 교계 연합단체에 다시 가입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양 행세한다. 사실상 교계의 교단연합단체들이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데 힘쓰기는커녕 오히려 교단을 분열시키는 촉매가 되고 있는 셈이다.“너희는 하나 되라”는 성경의 말씀과 ‘교회는 하나’라는 원리가 있음에도 명분 없이 교단을 분열시켜 교권욕과 명예욕에 찌들어 살아가는 군상들을 교계의 지도자들이라고 인정을 해야 하는가? 300개가 넘는 장로교단들은 하나같이 신앙, 교리, 신조가 똑 같다. 그러면서도 하나가 되지 않고 있다. 이런 기독교는 한국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새로워지려면 장로교 하나 되는 운동부터 해야 한다. 장로교 하나 되는 운동 없이 한국교회 도덕성 회복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한국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장로교 하나 되는 운동부터 해야 한다첫째, 한국장로교회에 진보와 보수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장로교 안에서 진보와 보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열주의자들의 상투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형제를 정죄하는 사탄의 혀를 가진 자들이다.한국장로교가 세계교회에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일어난 6.25전쟁 이후 장로교 안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논쟁으로 단절이 있었다. 소위 WCC 문제가 그것이다. 강단교류가 금지되고 서로를 이단시 하는 우(愚)를 범한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그런 험악한 오해는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침체기에 들었다. 이제 한국교회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로의 불신을 거두고 장로교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한국교회는 먼저 분열로 인해 교인들이 상처를 입었고, 그 다음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인들끼리 만나면 서로를 이단시하고 정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형제 간에, 집안 간에도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며 교회가 나뉘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신뢰에 불신을 가져왔다. 이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단통합으로 사회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둘째, 한국교회 도덕성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교단분열이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70-80년대 교회의 급성장 이후 목회자의 영적 지적 인격적 수준이 너무 낮은 지도자들이 많이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단분열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단신학교가 우후죽순 간판을 내건데 원인이 있다. 여기에서 제대로 인성교육이나 신학교육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않고 졸업하고 목사가 되거나, 아예 신학교육 과정 자체를 무시하고 교단이 필요로 하는 몇 푼의 돈을 내고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작금 장로교 군소교단은 대부분 여성목사들에 의해 유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여성목사 중에는 성경의 기본 언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습득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신학이나 교리사 또는 교회사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일 없이, 겨우 성경만 좀 읽고 몇 절 외울 줄 알며, 기도하여 은사체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자들도 많다.셋째, 최근 ‘미투’니, ‘그루밍’이니 하는 성범죄 사건이 빈번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의 성범죄는 그 목사가 속한 개교회나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 목회자는 그 소속 노회나 총회의 감시를 받는다. 그러나 그 감시가 느슨한 교단에서 목회자의 일탈이 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장로교단의 통합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능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대교단이 군소교단을 흡수하여 목회자 재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도덕적 건강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대교단 지도자들이 교단이기주의를 버리고 과감한 교단통합운동에 나서야 한다.한국기독교가 장로교의 분열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모두가 망하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장로교 지도자들 스스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해설/기획
    • 기획
    2020-05-15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6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5), 어버이날(8), 부부의 날(21) 등이 5월에 있고, 교회에서는 첫째 주(3일)를 어린이 주일, 둘째 주(10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가정 창조가 그 창조의 크라이막스이고 가정창조로 창조 사역이 끝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마치 가정 창조를 향하여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가정의 꽃,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자녀들은 대부분의 경우 낳기는 쉽지만 기르기가 힘들다. 첫째는 건강하게 길러야 하고, 둘째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와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의 경우 자식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식들에게 끌려다니고, 학교 선생들에게 끌려다니고, 사회 분위기에 끌려 다니기 십상이다. 어떻게 자식을 길러야 잘 기르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이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도 자식들 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가 그렇지 않는가 싶다.이삭은 나이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위하여 기도했다. 그의 부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가정에 온갖 풍파를 일으켰는데, 그의 아들, “이삭은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의 아내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창 25:21). 기도라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이시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 부부에게 쌍둥이 아들을 주셨다. 그러나 이 쌍둥이들이 배 속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리브가는 “이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 물었다”라고 했다(25:22). 이삭과 리브가는 자식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아이가 태속에 있을 때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그의 자식들에 관한 장래의 일을 말씀해주셨다. 그의 태속에 두 민족이 들어있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큰 자는 에서이고, 작은 자는 야곱이다. 먼저 나온 에서는 그의 몸이 온통 털로 덮여 있어서 털외투라는 뜻에서 에서라고 그 이름을 지었고, 나중에 나온 야곱은 그의 형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다. 여기서 볼 때 이삭과 리브가는 자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식을 주셨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의 것이 아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마치 자기의 소유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식을 자기 뜻대로 기르려고 하고, 자기의 연장선 상에서 자식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자식을 다루려고 한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부작용을 초래하고, 자식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자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느니라”(렘 1: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사람을 그 어미 뱃속에서 지었다고 말씀하시며,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계획과 뜻이 있어서 구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이다.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두시고 지으신 거룩한 존재, 구별된 존재이다.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귀여워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자식이기에 귀하에 여겨야 한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이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이삭이 그의 장자 에서를 축복하기 위하여 에서에게 들에 나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명한 것이다. 이삭은 이 문제를 리브가에게 말하거나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자의 대화를 뒤에서 들은 리브가는 그의 남편 이삭이 두 아들을 잉태하였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 한 것이라서 놀라고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급히 둘째 야곱을 불러 가축 떼가 있는 곳에 가서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잡아 오라고 지시하며 “내가 그것들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 것이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갖다드리면, 그가 잡수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할 것이다.”(9,10)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은 “보십시오 우리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저는 매끈매끈한 사람입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저를 만지시면, 저는 그의 눈에 속이는 자가 될 것이며, 제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가 받겠다. 오직 너는 내 말을 듣고 가서 나에게 가져오너라”고 했다(13). 그래서 야곱은 염소새끼를 잡아 그의 어머니에게 가져갔고, 리브가는 그것으로 별미를 만들고, 야곱의 매끈매끈한 곳에 염소들의 가죽을 입히고, 그의 형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혔다. 야곱은 별미를 들고, 아버지 이삭에게 가지고 가서 자기를 마음껏 축복해달라고 말한다. 뜻밖에 빨리 별미를 만들어 온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삭은 그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야곱은 “여호와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제게 쉽게 만나게 하셨습니다.”(20)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삭은 야곱을 가까이 불러 그를 만져보고,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22)라고 말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고, 그의 옷의 향내를 맡고, 그에게 장자의 복을 빌었다(27).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게 에서는 자기를 속이고 자기의 축복을 가로챈 그의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칼을 갈았다. 리브가는 형제간의 칼부림을 피하도록, 야곱을 그의 친정으로 피신시켰고, 야곱은 이로 인하여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는 이후 20년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리브가는 참으로 믿음 있는 현모양처임에 틀림없다. 남편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을 꾸며, 바로 잡았다. 아들을 위하여 별미도 만들고, 야곱을 에서로 바꾸기 위하여 야곱에게 염소의 털을 붙이고, 심지어 이 사실이 탄로가 나서 복이 아니라 저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야곱을 달래며, 야곱이 받을 저주를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말하며 설득한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온갖 지혜와 능력을 동원하고 심지어 저주를 감수하는 이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운 모성애이고,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내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정의 평화가 산산 조각 나버렸다. 분명 잘 못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기도하며 잉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식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들 부부는 자식을 축복하는 이 문제를 두고는 함께 기도했다는 말이 없다. 이삭은 이삭대로 가장으로서 할 일을 하고, 리브가는 아내로서 남편을 돕고, 자식을 돌본다. 그러나 쌍둥이를 하나씩 나누어 편애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 아닌가 싶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리브가이다. 리브가는 다음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자녀 교육에 실패하고 있다.첫째는 리브가의 열심이다. 리브가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발 앞서 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하신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하는 뜻을 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리브가는 남편 이삭의 잘못을 고쳐서 자기가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혜를 짜고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리브가는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지켜보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식들의 문제를 두고 한 발자국 뒤로 물어 서 있어야 한다.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다. 하나님께서 뜻하신바가 있어서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둘째는 리브가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야 한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악하고 거짓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악을 낳는 것이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거짓을 꾸미고, 야곱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거짓을 행하게 도와준다. 어미로서 자식에게 선행을 보이고,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도록 가르쳐야 할 자가 오히려 거짓을 장려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도록 독려한다. 심지어 자식의 저주를 자기가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이 일을 조종하고 진행한다. 자식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기르고 훈련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려고 하면서 대신 스팩을 만들어주고, 이력서나 추천장을 거짓으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자기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게 하는 짓이다. 자식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도록 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을 중심한 자녀 양육, 하나님을 앞서 가지 않는 자녀 교육을 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5-15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회 ‘해체되어가는 가정체계, 한국교회의 대책은?
    ’ 고명진 목사(수원중앙침례교회)본고는 지난 5월 8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충무성결교회에서 개최한 5월 월례회 중 고명진 목사가 발제한 ‘건강한 가정 회복 방안’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가정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가정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전국 미혼 남녀(22~44세) 2,464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 결과에 의하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2015년에는 남성의 경우 65%였는데, 2017년에는 50%까지 감소했다. 여성의 경우에는 2015년 40%에서 2018년에는 29%까지 감소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결혼 필요성/의향이 비교적 큰 폭으로 하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현재 우리나라 미혼 남녀들은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그다지 높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2018년에 있었던 보건사회연구원의 통계 조사에 의하면(50~69세, 2022명) 일명 신중년이라 불리는 50~60대에서 황혼이혼에 대해 41%가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5명 중 2명이 황혼 이혼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결혼을 유지하면서 별거 생활을 하는 이른바 ‘졸혼’에 대한 입장도 42%가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가정의 문제와 해결방안위에서 이야기한 내용 외에도 현대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은 너무도 많다. 가정의 문제는 반드시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가족학의 권위자인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 박사는 그의 저서 <사람 만들기>에서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자동차는 자동차 공장에서 만들고, TV는 TV 공장에서 만든다. 자동차 공장에서 불량 자동차를 만들면 불량 자동차가 시가지를 달리게 되고, TV공장에서 불량 TV를 만들면 가정으로 불량 TV가 배달된다. 그렇다면 불량 청소년, 불량 남편, 불량 아내는 어디서 만들어 지는가? 바로 가정이다. 사람은 가정에서 만들어지기에 가정이 건강하면 그 가정의 가족들이 건강케 되고, 가정이 건전치 못하면 그 가정에 속한 가족들의 정신세계가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일이다.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사람을 만들어 사회에 배출하게 되면 이 사회와 겨레는 건강하게 될 것이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UN에서도 변화하는 현 세계에서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와 민간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5월 15일 세계가정의 날’을 제정 했다. 가정이 기초이며,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절대 불변의 기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가정을 만드신 하나님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정하신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목적은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기 위함이고(창 1:28), 둘째는 독처하지 않고 서로 돕게 하시기 위함이며(창 2:18), 셋째는 희생적 사랑으로 상호 헌신하게 하시기 위함이다(창 2:24). 그런데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는 말은 단순하게 자녀를 생산해 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태도 등을 배우고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것은 그 안에서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교제하고 돕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유혹과 시험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가정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격려와 위안을 얻게 하셨다.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희생적 사랑과 헌신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가정을 만드셨다.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가족구성원들은 서로를 향한 희생적 사랑과 헌신을 배움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역기능 가정과 역기능 세대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절실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잘 계승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의 가문처럼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에 실패하게 되면, 그 가정은 신앙적 역기능 가정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역기능 가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 세대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사사기의 말씀이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온다. ‘그 세대와 다른 세대’이다. ‘그 세대’는 하나님을 섬겼던 세대이다. 그 세대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애굽에 임한 10가지 재앙, 출애굽, 홍해 도하, 마라와 엘림, 르비딤, 만나와 메추라기, 아말렉 전투, 시내산의 십계명 사건 등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가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했기 때문이다.반면에 ‘다른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세대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 없이 살아온 세대를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교육, 신앙교육에 실패하였다. 신앙교육의 실패는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를 만들어 냈다.건강한 가정 회복 방안건강한 세대는 건강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오늘 날 사회문제의 대부분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무너진 사회는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3가지로 건강한 가정 회복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성경을 통한 가정의 중요성 교육서론의 통계를 통해 오늘 날 젊은 세대의 대부분이 가정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대학생들에게서도 보여 진다. 2017년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대학생의 결혼 의향에 대한 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대학생의 결혼 의향이 2012년 56%에서 2017년에는 37%로 19% 가량 감소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의향은 4%에서 14%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개신교 학생과 비 개신교 학생 간에 결혼 의향에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설문에 응답한 학생들 중 개신교 종교를 가진 학생들은 결혼 의향률이 54%에 이르렀고, 비 개신교 학생들의 결혼 의향률은 34%에 불과했다. 이는 개신교가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가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십계명 중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내용이다. 그 중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이 바로 가정에 관한 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시편 기자는 자식이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말하며(시 127:3),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시 128:3). 바울도 에베소서 5, 6장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를 이야기하며 가정에 대해 강조한다.건강한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가정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을 세워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수 있을 것이다.성경을 통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 교육가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부분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바른 역할과 모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발생한다. 건강한 가정이 되려면 무엇보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각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남편은 남편다움을, 아내는 아내다움을, 자녀는 자녀다움을, 부모는 부모다움을 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마더와이즈’라는 사역이 있다. 이 사역의 가장 큰 유익은 엄마(아내)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엄마(아내)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말씀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마더와이즈’ 사역을 통해, 가족의 구성원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바로 알고 행할 때 가정이 바로 서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말씀교육의 장소로서의 가정 이해 건강한 가정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가정을 말씀교육의 장소로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자녀의 신앙교육을 교회에 의존한다. 물론 교회는 다음세대에 신앙을 전수해줘야 하는 중요한 책임이 있지만, 필자는 자녀의 신앙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다고 주장한다.신명기 6:4-9은 ‘쉐마’의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쉐마’는 ‘너희는 들으라’라는 뜻으로써, 히브리인들의 신앙고백이요 교육지침이 된 말이다. 모세는 신명기 6:4-5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근거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그것을 대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한다. 이 때 가르침의 주체는 부모가 된다. 신앙교육의 장소는 우선적으로 가정이 되어야 하며, 주체는 부모가 되어야 하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방법은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교육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부모는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말씀을 들려주며, 말씀으로 교감을 나눠야 한다. 어린 시절 가장 좋은 성경교육은 암송이다. 어렸을 때 외운 말씀은 평생 잊혀 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기 때문이다. 필자의 교회는 성경 500구절을 암송하는 ‘바이블 러버스’라는 사역이 있다. 500구절을 암송한 아이들에게는 대학 입학 시 장학금(500만원)이 수여되는데, 벌써 4명의 아이들이 성공했고 30여명의 아이들이 도전을 진행 중에 있다. 놀라운 사실은 아직 말도 서툰 3살짜리 아이가 수십 구절의 말씀을 암송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암송을 도전함에 따라 부모도 자연스럽게 말씀과 가까이 할 수밖에 없고,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신앙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가정들로부터 아름다운 간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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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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