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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5
    들어가기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주일이 맞는 것인지, 안식일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교회의 주일 예배가 중지되고 있어서 특별히 주일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께서 기뻐 받으시는 주일 예배인지 배우면 좋겠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2:1-14이다.본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전통적인 안식일의 규정을 무시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비를 불러일으켜,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모의를 하게 되는 사건이다. 1-8절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길가다가 배가 고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꺾어먹은 사건이고, 9-14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긴 자로 고소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논쟁이었으나,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부르는 사건으로 비화하였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안식일이 왜 있는 것인가?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 활동을 마치시고 쉬셨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쉬셨을리는 없다.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2:2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안식일”(Sabbath)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그가 하셨던 그의 일을 마치셨다[]. 일곱째 날에 그가 하신 모든 일을 그치셨다 [“샤바트”): 중지하다, ceased]라고 기술하고 있다. “쉬다”는 개념의 “안식일”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에 사용하신 말이다. 여기서 “샤바트”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쳤다,” “그쳤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 후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 보면 이는 완성된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감이 내포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다. “거룩하다”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라는 말은 “성별하다” “바치다”(consecrate)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일곱째 날은 복되고 거룩한 날, 곧 하나님의 날이다. 둘째로 안식일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을 위한 날이다. 사람은 일만하고 살 수는 없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쉼이 필요한 존재아다. 사람은 일의 노예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점에 있어서 동역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따라서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일을 그치시면, 사람도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노동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개념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구체화 된다. 사람이 제7일에 일을 멈추고 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었다. 십계명 중 제 4명에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7일에 쉰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 (the sign of covenant)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의 언약의 표였던 것과 같이 제7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요, 언약의 표었다. 따라서 제7일에 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는 범죄였다. 여호와께서는 제7일에 일하는 자는 언약을 범하는 자는 법대로 죽이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쉬는 훈련을 광야에서 40년이나 시키셨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훈련이 필요했다. 먹는 훈련, 안 먹는 훈련, 쉬는 훈련, 일하는 훈련, 여호와의 언약백성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안식일은 바로 쉬면서 안약백성으로서 도를 훈련받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제 7일을 거룩하게 구별집행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다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새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신 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세상 만물을 살리신 날이다. 그리하여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 언약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날, 곧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뻐하고, 기념하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므로 바로 이 날이 새하늘과 새땅이 처음 열린 날이고, 새로운 세계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고, 나의 인생도 새롭게 시작된 날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되었다. 그래서 주간 첫 날이야 말로 예수님의 날, 주님의 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이다”이라고 선포하셨다. 한글 성경은 “주인”이라고 번역을 해놓으니까 “집 주인” “가방 주인” “자동차 주인”처럼 좀 왜소한 느낌이 든다. 헬라어 “큐리오스”라는 말은 “The Lord,” 곧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주일”이라는 말을 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제7일을 안식일로 칭하시지만 제7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는 율법은 아담과 함께 땅에 묻혔다. 더 이상 우리에게 안식일은 없다. 구약성경만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새창조의 날, 모든 역사의 새로운 시작의 날, 주간 첫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리며, 새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축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제7일에 땅 속에 묻혀있는 예수께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언약의 생명 축제를 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식일에 생겼던 사건을 살펴볼 차례이다. 본문의 두 사건 가운데 첫 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길가다가 배가 고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익어가는 밀 이삭을 꺾어 먹기 시작했다. 땀 흘려 농사지은 이삭을 잘라먹은 이들을 우리 눈으로볼 때는 분명 도적놈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여기서 문제 삼은 것은 이들이 남의 밀 이삭을 꺾어 먹은 것이 아니라 마침 이 날이 안식일이라서,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3:24-25; 24:19-22에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을 위하여 바구니나 낫을들고 밭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이를 허락하였다.문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은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해야 할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윗이 한 일을 상기시키신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하나님의 잡에 들어가 율법대로 오로지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 진설병이란 레 24:7절에 “여호와의 화제를 위한 기념 제물의 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화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이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을 모두 화제라고 한다. 속죄를 위한 제사는 짐승을 불로 태웠다. 그래서 화제는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을 상징하는 제사이다. 화제는 성소 밖 뜰의 제단에 양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이기 때문에 성소 안에서 드릴 수는 없다. 따라서 진설병의 역할은 성소 밖 뜰에서 드리는 화제를 상징하고, 생각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이 거룩한 빵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최후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떡은 특별히 구별된 것이어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 빵을 먹었다(삼상 21:1-5). 그들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것 같다. 제사장 아비멜렉은 이들에게 거룩한 빵을 내 주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나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는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를 불순종하는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분이시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불쌍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살아야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이 갑질하는 자들에게 “내가 안식일의 주, 곧 하나님이다”고 선언하신다.두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사건이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졸개들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이었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그것을 붙잡아 끌어 올리지 않겠느냐?고 되물으신다. 이 세상에 아무리 안식일에 일하지 마라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죽게 내버려두고 안식일이 지나도록 기다릴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럴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전제로 계속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안식일 법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다. 양을 치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법보다 중요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다.이 말씀은 안식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안식일이란 아무 일 안하고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리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 기본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빚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좋았다”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토브”()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good”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goodness”라는 말이 바로 “선”이란 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그 의미가 선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은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선한 것이다. 반대로 악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방해하고, 거역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것이 선이다.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향하여 “네 손을 펴라”하시니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다(13). 온전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사단이 망쳐놓은 일을 바로 잡고, 온전하게 하고, 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선한 일이다. 살리는 일에 골든 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 죽어버린 뒤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죽은 생명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살리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성전도 중요하고 율법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죽은 자들을 살리려 오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아무리 성전이 크다고 할 망정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보다 더 클 수 없다. 아무리 성전이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중요해도, 성전은 예수님의 모형에. 불과하다(요 2:18-22). 그래서 예수님의 사람들은 이제 돌로 만든 성전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성전을 없애버리셨다. 돌로 만든 성전이 재건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만든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대신 예수님을 우리의 성전으로 주셨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전 3:16-17).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고,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주일에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예배에는 말씀, 기도, 찬송, 교제, 그리고 전도가 있어야 한다(행 2:42). 함께 모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격파하셨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나라를 세우셨다. 우리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로운 백성 삼으셨다.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으셨다.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에게는 제7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창조의 날, 곧 새 역사의 시작의 날이 중요하다. 부활절 전 안식일에 예수님은 땅속에 계셨다.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새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부활절 날이 중요한 것이고, 부활절하신 첫째 날, 곧 안식후 첫째 날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해야 할 주의 날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4-24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4
    부활, 악에 대한 선의 승리(고전 15:21-22)2020년 부활절을 맞는다. 올해의 부활절은 다른 어느 때보다 부활의 의미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전염병이 하늘과 땅과 바다의 길을 막고, 사람들의 목을 죄고 있다. 가정집 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학교, 병원, 공공건물, 심지어 교회의 문도 닫혀있는 상태이다. 죽음의 권세 아래 갇혀있다. 이태리의 한 화장장 앞에 시신을 화장하기 위하여 즐비하게 늘어놓은 관들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마침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위로와 힘과 소망을 얻으면 좋겠다.부활의 전제는 죽음이다. 바울은 고전 15:22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게 된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말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그가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시 8:5-6). 이로써 하나님은 대왕이 되시고, 사람은 왕이 되고, 만물은 그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가 이루어지고, 사람과 만물은 이 틀 안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질서 있는 세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그러나 만물의 왕,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여 죽음을 초래함으로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고 아담과 함께 죽음의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고 벌이다. 값을 치러야 할 범죄이고, 죽어야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여기서 “좋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토브”()라는 “좋았다”(good)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즐겁다, 선하다는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선하다”는 의미로 쓰여진 경우가 많은 데, 이때는 악하다는 말과 대치되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이다. 악이란 생명을 죽이고 멸하는 것이나 선은 생명을 불어 넣고 살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물으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목숨을 구하는 것을 선으로, 목숨을 죽이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생명이 약동하는 세상을 바로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시기에 선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은 아름답고 선한 이 동산에 사탄이 들어와 뱀을 사주하여 죽이는 일을 한 것이다. 악의 씨를 뿌리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온 세상과 그 세상을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빠져들어 가버린 것이다. 악의 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던 이 세상을 계속 사단의 세력에 방치해 놓을 수는 없어 이들을 구원하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문제는 아담이었다. 모든 만물의 왕으로 세움 받은 왕, 아담의 대왕에 대한 불복종의 범죄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다. 그 새로운 왕이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고, 그 새로운 왕을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세상을 해방시키고, 새 아담, 새로운 왕의 통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대하여 바울은 롬 5:14에서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언약적 연대성의 우두머리,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게 되는 이 원리가 모형(type)이고, 새언약의 우두머리 새 아담,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원리가 실형(antitype)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왕을 창 3:15에 언급하신다. “여자의 후손”이다. 여자의 후손은 누가 될 것인가? 그는 뱀을 사주한 사단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영적 존재이자, 여자에게서 낳은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신성과 인성을 겸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죽고, 부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활이 바로 그가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부활을 해야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그와의 새로운 연대성 가운데 새 생명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천지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지, 사탄과 악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악은 망하고,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새 아담으로서의 모든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왕으로, 새 언약의 우두머리로, 새 생명의 창조주로, 새 역사의 창시자로 오신 것이다.이제 우리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새로운 왕이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만 하면,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그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그와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 생명을 가진 자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새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이 생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100세 인생을 설계해서는 안 되고, 영원을 향한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둘째는 부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생명을 살리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그러나 사단 마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단을 반드시 벌하시고 멸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으셨다거나 살리시지 못하셨다면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퍼부으셨다(창 3:14). 그리고 그의 아들을 살리시고, 이 세상은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비록 오늘 선한 일을 하다가 멸시 당하고 환난과 핍박을 받으며, 심지어 억울한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인생을 비루하게 살지 않는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오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내가 승리할 것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이다. 이 세상은 불의와 부정과 불공평한 악이 절대로 승리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자로서, 역사를 주관하시며(control), 선하신 분(good) 이시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4-10
  • 연합운동의 회복은 세상 앞에 선 교회의 사명
    연합하지 못하는 교회, 분열 조장에 앞장서는 교회제21대 총선이 치러지는 올해 우리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더욱 극심해 졌다. 이미 지난해부터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뉘어 치열한 총선 전초전을 벌인 보수와 진보는 총선을 목전에 두고, 막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사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당장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 더구나 주요 선거를 앞둔 상황에 이념, 지역 간의 대립은 늘상 있어왔던 일이었다. 허나 어느 순간 달라진 것은, 이러한 대립의 선봉에 바로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단연 전광훈 목사다. 3·1절 반정부 집회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극보수 세력을 한 자리에 모은 전 목사는 교계를 넘어 사회적인 영향력을 두 손에 쥐게 됐다. 그런 전 목사의 돌풍 배경에는 바로 한기총 대표회장이라는 직함이 자리한다. 지난 20년 넘게 한국 기독교 보수의 선두에 섰던 한기총이라는 이름은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여전히 1000만 한국교회의 대표였다. 비단 한기총만 정치 이념의 선두에 선 것은 아니다. 교계 진보세력을 주도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이홍정 목사/ 이하 교회협) 역시 자신과 구미에 맞는 정권에 동조하고, 반대편 정부는 철저히 배척하는 행보를 해 왔다. 교회협은 지난해 전광훈 목사와 한기총의 반 정부 행보에 대해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났다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으나, 교회협 역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 정부 비판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한국교회 내부에서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한기총의 탄생이 진보 중심의 교회협을 견제키 위한 것이라는게 이를 증명한다. 문제는 이러한 대립이 도를 넘어서며, 연합기관의 본질인 하나됨을 거스른다는데 있다. 그간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는 일반사회의 정치 대립과 달리 다름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상호 발전해 왔다. 특히 국가와 사회의 대립 앞에서는 국민의 보호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라는 종교적 신념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우리 사회의 대립을 주도하고 있다. 치유와 회복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교회가 대립의 아이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모습이다. 교회가 대립의 중심에 있다면, 그 교회는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다. 사랑하고 서로를 용서하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해야 할 교회가 서로를 배격하고, 정죄하는 앞장선다면, 더 이상 국민들은 교회 속에서 사랑과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우리사회가 극단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 앞에 한국교회의 보수든 진보든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과거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옳고 그름을 분별키 위한 발전적 대립이었다고 한다면, 현재의 모습은 그저 이기고, 쓰러뜨리기 위한 전쟁 그 자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무너졌다. 어쩌면 지금의 사회적 혼란은 한국교회의 퇴보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감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각한 것은 무너진 균형을 잡아줄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간 한국교회는 우리나라의 발전 과정에서 정부와 국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왔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양측으로부터 얻은 절대적 신뢰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한국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사회의 중재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회복은 교회 안으로는 무너진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겠지만, 밖으로는 중재자의 역할을 다시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자 희망이다.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을 세상에 전해야 할 우리 교회에 있어 이는 변하지 않는 사명이자 진리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그간 희망을 싹틔워 온 중심에는 바로 연합운동이 있었다.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회복은 수년 전부터 주창된 주제지만,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오히려 거듭된 분열이 고착화 되며, 이제는 차라리 분열 속 안정을 추구하는 중이라고 봐야 맞을 듯 싶다. 하지만 연합하지 못하는 교회에는 희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교회에게 세상은 어떠한 역할도 기대하지 못한다.
    • 해설/기획
    • 해설
    2020-04-10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3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에서는 이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려고 마스크를 사기 위해서 아우성이고, 각급 학교는 봄학기 개강을 미루고 있고, 회사원들은 재택근무가 늘고 있다. 거리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는 이미 바닥을 쳤고, 민심은 흉용해가도 있다. 두려움이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휘감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역대급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젠가 진압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식들의 안전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편한 인간관계로부터 생긴 두려움, 물질의 소유와 손실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정신적인 소외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이유도 없는 막연한 정체불명의 두려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우리 인간들은 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이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우리들의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억누르고 억압하여 마비시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생명체요 대단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사단과 비슷한 존재이다. 한번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온통 정신이 마비되고, 손발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한결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바닷속 같은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일까?현대 실존철학자들은 대부분 인간의 불안 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방식이 불안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죽는다는 유한성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키에케골은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방치되어 비연속적인 순간으로 떠밀려 움직여 나가는데, 이 가운데서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불안을 한계상황이라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의 불안은 모체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심리상태라고 말한다. 안전하고 영원할 것 같던 자궁이라는 환경에서 세상으로 떠밀려 나오는 순간, 태아는 최고도의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눈꺼플을 통해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은 아프고, 정지상태에 있던 폐의 움직임은 울음이라는 언어로 고통을 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 경험하게 된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인간은 그렇게 불안을 안고 세상과 만난다.”고 말한다 (‘불안은 다스릴 수 있는가?’ 『한국경제』 2015.06.10.).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한계성과 인간으로서의 그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그 불안의 시작이고, 인간의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에 떨면서 발버둥치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평안을 기대하고 잠시 그를 통하여 평안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든 우상일 뿐 자기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모든 것의 시조가 아담이지만 두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조도 아담이었다.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열리자 그들이 벌거벗을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와 징벌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이 대답하기를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창 3:10)라고 대답했다.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내가 숨었습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한글 개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은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거룩한 창조주이시오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런데 보잘 것 없은 한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고 선언하셨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아담이 아니다. 아담은 변했다. 아담은 죽을 죄인이 되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러한 자에게 두려움이 없겠는가? 인류 최초의 인간이 갖게 된 최초의 두려움은 온 세상의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갖는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인간이 겪는 최초의 두려움이고 불안이었다. 우리 인간은 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과 함께 죄인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죄인 아담이 경험했던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 함께 경험하고, 함께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면 다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두려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죄가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보통 가까운 친구나 친족이나 상담사를 찾아가거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잠시 마음이 시원하게 느끼고, 잠을 자고 나면 좀 평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시 찾아온다. 두려움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근원적인 해결은 없다. 설령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와 연결된 일이다. 우리의 불안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는 바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예수께서 체포되기 전 성만찬 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주니,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마라.” (요한 14:27)이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 20:19, 21, 26)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자기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셨음을 선언하신 복음의 메시지였다. 불안의 문제가 그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시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먼저 알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한글개역이나 바른성경,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본들의 요한 20:22의 번역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들에게 (그들을 향하여 「개역」)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어 성경 원문대로 번역하면 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을 내 쉬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고 되어있다. 결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숨을 내쉬며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오순절 이전에 받은 첫 번째 성령세례라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한번 있었던 일이다. 두 번, 세 번 계속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위임식이다.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누가의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반면, 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요한의 성령세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키며,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쉬지 않았다. 그냥 숨을 쉬셨다. 자신이 죽은 사람이나 유령이 아니라, 숨을 쉬는 살아있는 사람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 것이다. 그의 부활하신 몸이 살아있는 인간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몰아내고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바로 사흘 전 만찬석상에서 빵과 포도주로 예수님과 새언약을 맺은 자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배신한 것이다.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살기 위하여 도망갔을 것이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들 나름대로의 이상과 꿈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꿈과 이상은 산산이 부숴지고,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안해하고, 자신들에게 화도 나고, 앞날이 두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죄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진 자들이다. 아담처럼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차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인간의 두려움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이 평안하도록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속의 모든 불안을 몰아내시고,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평안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재하실 때, 비로소 참다운 평화, 원초적인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5-1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여라. 이 평화를 위해 너희가 한 몸 안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는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머물게 하여라.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여라.” (골 3:15-16)여기서 바른성경은 헬라어 “에이레네” 를 “평화”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은 “평강”으로 번역하고 있다. 평강, 혹은 평안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안이 너희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마음”보다는 헬라어 원문은 “카르디아”(καρδια) 곧 “심장”(heart)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평안이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는 평안을 약속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평안하도록, 평안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평안을 얻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고 말하면서,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머므르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머무르게 하다”라는 말과 “다스리다”는 말이 중요하다. 헬라어 “에노이케오” 라는 말은 “to dwell in,” 곧 “안에 머무르다,” “거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라는 말이다. 말씀이 항상 내 속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브라뷔오” 라는 말은 마치 재판관처럼 행한다는 의미이다. 통치한다(rule)는 의미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마음을 “불안”이 다스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치며,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깃들려면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머므르려면,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하게 머믈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과 더불어 감사와 찬송이 넘쳐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성령과 말씀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마음에 평안을 원하다면 말씀이 내 속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쳐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로 말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쳐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내 마음 안팎에서 말씀과 성령과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쳐야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우리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온갖 정체불명의 불안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충만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도망간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3-27
  • ■ 코로나19 사태와 교회의 공(주일)예배- 샬롬나비 논평서
    본고는 코로나19 사태에 있어 교회의 주일예배를 제재하고 나선 정부에 대해 샬롬을 꿈꾸는나비행동이 발표한 논평서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정부가 교회의 주일예배를 금지하거나 규제하려는 것은 헌법상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한국교회는 영상 예배 및 의료적 처방의 공적 예배드리고 코로나 종식 위해 기도운동 전개해야 한다.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 성 우한 시에서 처음 발생자가 나온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는 지금은 최대의 감염자를 낸 중국을 넘어 이탈리아와 이란 일본을 위시하여 미국과 유럽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불과 수개월 사이에 전 세계 186개국(2020.3.22.기준)에서 감염자가 나올 만큼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으며, 사실상 전 지구적 감염병 유행의 단계 곧 판데믹 상태로 치닫고 있다.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WHO)는 드디어 코로나19 대감염(Pandemic)을 선언했다. 코로나19가 지구촌을 커다란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이 감염병이 가지는 놀랍고도 무서운 전염력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3월 20일 현재 기준으로 코로나19 감염 누적 확진자 수가 8652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탈리아가 중국, 이란을 넘어섰고 스페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서 확진자가 1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2월 18일 대구신천지종교집단의 신자인 31번 확진자 이전과 이후가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 때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감염자는 대구 경북지역이 전체 확진자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천지 신자가 전체 확진자의 62.7%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이 감염병이 급속도로 확산하게 된 것은 신천지집단을 통한 집단감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대구 경북지역이나 신천지 내의 집단감염은 확연히 줄어들고 있으나 대구 경북 외의 다른 지역들에서 병원이나 요양원 스포츠센터 콜센터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전파되는 집단감염이 전체 감염자의 17.5%를 차지하고 있다. 신천지를 포함 이러한 집단감염을 모두 합하면 전체 감염자 가운데 82.5%가 집단감염의 경우에 해당한다. 대규모 집단감염을 촉발한 대구 신천지종교집단을 언론에서 신천지교회로 보도함으로 신천지 외에 또 다른 종교집회 특별히 개신교회의 주일예배가 다시 한 번 지역사회감염의 주요 집단감염원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 염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편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신교 내에서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주일예배를 잠정 중지하고 온라인이나 가정예배 등의 대체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중소형 교회는 전통적인 방식의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일각에서는 주일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들에 대해 교회가 마치 이 전염병 확산의 중심에 있거나 책임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며 적개심마저 부추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마침내 대한민국 국회마저도 3월7일 ‘코로나19 확산방지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가결하기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일부 도지사와 시장 및 공권력은 교회의 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겠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코로나19사태와 교회 주일예배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1. 교회의 주일예배는 집단감염의 통로가 아닌데, 마치 교회에 집단감염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리한 처사이다.코로나19 감염의 교회 관련 사례들을 보도하는 언론보도와 교회의 예배지속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조사 결과들을 근거로 교회의 예배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국회의 결의나 이재명 도지사의 언급들은 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을 일정부분 교회로 돌리고 코로나19로 야기된 사회적 분노의 감정을 교회를 향해 표출하도록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 교회의 주일예배를 집단감염의 중요 통로로 지목하면서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에 집단감염의 책임을 돌리려 하는 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교회관련 감염 사례들을 보면 종로구 M교회의 경우는 코로나19 발생 초기 사례로 마스크 착용 등 안전조치가 일반화 되지 않았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며, 강동구 M교회 부목사 및 교회 접촉자 등은 2회의 재검사에서 모두 음성이었을 뿐 아니라 M교회 교인 전원이 음성 판정을 받았다. 부산 Y교회는 주일예배 참석이 아닌 청년수련회였고 그마저도 신천지 이중등록자와 관련이 있다. 대구 S교회와 수원 S교회 확진자 역시 신천지 이중등록자 감염 사례이며, 거창 K교회는 기독교의 이단인 구원파의 분파이고, 광주 Y교회 예배 접촉자 역시 모두 음성이었다. 이상의 사례들로 볼 때 현재까지 직접적인 교회의 예배참석으로 인한 집단감염의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고, 현재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철저한 방역과 함께 마스크를 착용하고 밀집하지 않은 상태로 드리는 예배는 감염의 위험이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신천지를 통한 집단감염과 신천지 외의 병원이나 요양원 스포츠센터 콜센터 등에서 발생한 기타 집단감염을 합치면 전체 확진자의 82.5%가 집단감염의 경우로 집단감염이 전염병 확산의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중 개신교회와 관련한 것은 0.7% 정도로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직접적으로 교회의 예배참석을 통한 감염이 아니고 신천지 위장교인과 관련되었거나 수련회에서의 감염이다. 마스크 착용, 손소독제 사용, 거리두기 등 방역의 기본을 지키고 있는 한 교회의 예배는 오히려 청소년들의 PC방이나 학원을 통한 감염, 노래방 나이트클럽 같은 집단무도회장이나 유흥업소, 극장 마트 커피숍 등과 같은 다중이용시설, 직장인들의 집단적 사무실 환경이나 대중교통 등을 통한 집단감염의 가능성보다 더 낮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과 더 부합하다.2. 정부가 의료협회의 권고를 따랐더라면 대구지역 감염사태는 이만큼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2월 7일 중국 전역 입국금지를 내린 싱가포르, 대만, 홍콩은 방역에 성공했다.코로나19 전염병은 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의 외부 감염원 유입을 통한 개인전파 단계로부터 시작되어 지역사회전파 단계로 나아갔다. 특별히 2월 18일 신천지 31번 확진자 이후로는 집단감염이 주를 이루면서 급속한 지역사회 확산의 단계로 나아갔고, 이런 가운데 신천지는 국내 코로나19의 최대 감염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천지가 방역의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이 또한 원천적으로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가 질병관리본부나 의협 등 전문가 집단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전염병 방역의 기본인 “초기 감염원 외부유입의 차단”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구 신천지 코로나 집단감염은 2월 9일과 16일 예배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 신천지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그 이전까지 방역의 권한과 책임이 있는 정부는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안심하고 일상생활을 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 그즈음 대통령은 “조기 종식” 발언을 내어 놓았고, 복지부 차관은 “집단행사를 취소,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신천지 신자들은 이러한 정부의 권고를 따라 일상적인 신앙행위를 했을 뿐이다. 만일 정부가 사회적 확산과 집단감염의 가능성을 경고했더라면, 그리고 사회적 확산과 집단감염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종교적 집회에서의 기본적인 방역 수칙을 알려주거나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종교시설 등에 대한 예방적 방역을 했더라면 신천지 신자들이 자신들이 감염된 것을 알았더라면 현재와 같은 사태로 발전하지 않았을 수 있다. 대만은 3월 16일 현재 확진자가 67명(사망 1명), 싱가포르는 243명(사망없음)이다. 홍콩도 중국에 가장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국경 폐쇄로 바이러스 확진자 수치를 낮게 유지했다. 이 세 나라는 2월 7일 중국발 전역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하여 초기 봉쇄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3. 방역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정부에 있고, 예배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교회에 있다.기본적으로 교회는 방역에 관한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고, 마찬가지로 국가나 정부는 교회의 예배에 관한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 방역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있고, 예배와 관한 권한과 책임은 교회에 있다. 이것이 카이퍼가 말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ity) 사상이다. 그러므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교회의 예배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제적으로 집단감염의 위험에 대해 종교단체들에 적절한 방역대책을 수립하여 지원하여야 한다. 설령 부득이 하다고 판단될 경우라도 종교단체들에 이를 알리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여야 하지 이를 강제로 규제하거나 협박하거나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4. 일상생활(관공서 및 지하철, 대중교통, 커피숍, 시장, 영화관, 대형식당 등 사회 문화활동 등)이 지속되는 한 교회의 공예배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단 공예배는 질병관리본부의 의료적 지침을 따라 제한적으로 드려야 한다.신약성경에 ‘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 성경 원어는 ‘에클레시아’이고 이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의 용어는 ‘회중’으로 번역되고 있는 ‘카할’이다. 이러한 성경 원어에 입각한 교회의 정의는 “구원 얻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정한 날, 정한 장소에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적 부르심을 받아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지교회의 당회가 하나님의 이름의 권위를 가지고 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배하도록 부르는 공예배로서 주일예배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요 이유이다. 공예배가 교회이고 공예배로 모여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다. 비록 공예배로 모인 모임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지역 내의 신자들이나 또는 신자들의 가정을 교회라 부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예배로 모이는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교회로 불릴 수 있다. 십계명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하고 있으며 주일에 가장 중요하게 행해져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십계명은 시대를 따라 불변하는 도덕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인 안식일 규례는 오늘날 주일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주일성수를 온전하게 지킬 것과 주일 공예배 참석은 신자의 의무로 말하고 있으며 이를 잠정적으로라도 중지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성경은 말세의 징조로 여러 가지 재난들을 언급하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모임을 폐하지 말고 도리어 모임을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히 10:23-25). 대 재난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기 때문에 공교회는 공적 의료기관의 의료적 지침을 최대한 수용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관공서, 대형백화점, 마트, 지하철, 대중 교통, 커피 숍, 식당 등 공공생활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도 이에 준해서 집단 감염 방지의 의료적 지침을 준수하면서 모임을 제한적으로 가져야 한다. 그 방식은 정부가 명령할 일이 아니라 각 교회에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경기도와 시·군 공무원 3,095명이 지난 3월 15일 도내 교회 예배방식을 전수 조사한 결과, 6,578개 교회 가운데 60%인 3,943개 교회가 영상예배로 전환했고, 집회예배를 실시한 2,635개 교회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감염예방조치를 준수하는 등 감염병 확산방지를 위해 협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5. 정부나 지자체가 교회의 주일예배를 금지하거나 규제하려 하는 것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에 대통령까지 나서 이를 지지하는 것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다.지역사회감염의 단계로 발전한 코로나19 사태가 더 확산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가 권장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가운데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들에 대해 일부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들이 주일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에 대해 이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거나 법적 제제를 가하고 있다. 경기도 행정1부지사는 3월 17일 브리핑을 갖고 ‘코로나19 감염예방수칙 미준수 종교시설 밀접집회 제한명령’(기독교계에 영상예배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부득이 영상예배 전환이 어려운 소규모 교회에 대해서는 규칙을 제시했다. ①교회 입장 전 발열 기침인후염 등 증상 유무 체크 ②교회 입장 시 마스크 착용 ③교회 내 손소독제 비치 활용 ④예배 시 신도 간 2m 거리 유지 ⑤예배 전후 교회 소독 실시 ⑥예배 시 식사 제공 금지 ⑦예배 참석자의 명단 및 연락처 작성의 7가지 집회제한 조치를 발표하고, 만일 7가지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제한명령을 위반해 종교집회를 개최했을 때 확진자가 발생하는 경우, 감염원에 대한 방역비와 감염자 치료비 등 제반 비용에 대한 구상권이 청구될 수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이는 헌법 제10조에 명백히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정부의 권한과 책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강행”이라는 말을 통해 이들은 마치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가 무슨 범법행위를 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주일예배는 강행이 아니라 교회의 마땅한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는 것으로 이는 범법행위가 아니다. 이들은 교회의 주일예배를 규제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말하는 것임으로 주일예배를 제재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만약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말하면서 그 직업에 관한 필수적인 행위를 제재한다면 직업선택의 자유란 명목상의 허울 좋은 말일 뿐인 것이 될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그 종교가 마땅히 규정하고 있는 종교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교회의 종교활동으로서의 예배는 교회의 필수적인 종교행위이며 이에 대한 관장은 전적으로 교회가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시행한다. 정치인이나 관료가 이를 관장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만한 발상이며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헌법적 행위이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3월 20일 “여전히 예배를 열겠다는 교회들이 적지 않아 걱정”이라며 “종교집회에 대해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취하고 있는 조치를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이는 교회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주일예배를 유지하는 교회와 신자들은 누구보다 선한 시민들이며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코로나19 사태가 지금의 형편에 이르게 한 근본 원인인 국가방역의 초기 실패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공적사과는 기피하고 주일예배를 유지하는 교회들에 대한 비난이나 위협을 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하며 주일예배를 유지하려는 교회들을 코로나19 사태의 속죄양으로 삼으려는 듯한 여론몰이를 중지해야 한다. 정교분리 원리는 이럴 때 적용되어야 한다. 국가는 예배에 관련하여 교회의 자율적 조치와 결정을 존중하고 일임해야 한다. 간섭해서는 안 된다.<이하 생략>
    • 해설/기획
    • 학술
    2020-03-27
  • 교계 대표성 잃은 한장총, 장로교단의 연합체로서의 역할 전무
    기존 연합단체와 구분되는 한장총만의 정체성 회복해야 한때 한국교회의 높은 위상과 광대한 영향력을 사회와 국민들에 드러냈던 연합운동이 어느 순간 바닥으로 추락했다. 교단 분열의 대안으로 나온 연합운동이지만 그 스스로가 정치, 세력화 되며,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이 중 그나마 분열의 포화를 피한 곳이 있다면,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이다. 한장총은 처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며, 아직 별다른 분열 없이 단체를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한장총도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이상 과거의 한장총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한장총은 말 그대로 장로교회의 모임체다. 한기총이나 한교연, 한교총 등이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단체를 표방하기에 그에 비해, 대표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딴지가 있을 수도 있으나, 사실 한국교회의 70% 이상이 장로교회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장로교회의 연합만으로도 충분한 대표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런 만큼 초창기 한장총의 모습은 그 위상이 대단했다. 한때 진보의 교회협(NCCK), 보수의 한기총과 더불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3대 연합기관으로 분류되기도 했으며, 특히 뿔뿔이 갈라진 장로교회를 한 지붕 아래 엮겠다는 ‘장로교의 날’은 한국교회 분열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연합운동 변방으로 밀려난 한장총 문제는 딱 거기까지였다는 점이다. 압도적 위용을 자랑하던 한기총의 분열이 한장총의 때아닌 몰락을 야기했다. 한기총이 본격적으로 분열을 시작하며, 그 대표성과 정체성을 놓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자, 그에 소속된 주요 교단들은 연합운동의 본질보다는 정치적 권력 투쟁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 자연스레 한장총은 교단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연합운동에서의 기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각 교단들은 매순간 총력을 기울였고, 그 다툼과 별개였던 한장총 사회와 교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물론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이 한장총에게는 교계 연합운동을 독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녹록치 않았던 것은 당시 분열을 틈타 이영훈 목사를 대표로 한 순복음 교단이 교계 연합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더 이상 장로교단 중심의 연합운동 체제가 유지되기 어려웠다. 사실 교계는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 한교총의 등장이라는 최근 수년 간의 굵직한 연합운동 분열사를 마주하며, 한장총의 존재를 잊었다. 교단들 역시 딱히 탈퇴는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한장총에 과거와 같은 힘을 보태지 않는 모습이 여력했다. 인물의 부재 현상 역력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물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그간 한장총의 대표회장은 통합, 합동, 고신, 대신, 백석 등 소위 메이저라 불리는 주요교단들에서 총회장을 갓 역임한 자들이 맡아왔다. 이는 한장총 뿐 아니라 한기총 등에서도 통용되던 일반적 사례였다. 뛰어난 인물들이 교단 총회장의 경험을 발판 삼아 교계 정치로 나아가는 방식은 연합운동의 관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장총에 이러한 인물들이 없어졌다. 주요교단들에서 대표회장을 내더라도 교단 내부에서의 영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이는 애초 교단들이 한장총에 그리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소홀할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직전총회장이었던 송태섭 목사의 소속은 군소교단이었다. 물론 연합운동이 기본 전제가 평등이라는 것은 감안할 때 군소교단이라는 것 자체가 이론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보이는는 단체의 위상에 아무래도 영향이 있을 수 밖에 없으며, 현실적으로 대교단들의 참여가 현저히 줄어든 것 또한 사실이다. 올해 대표회장에 오른 김수읍 목사는 예장통합이라는 대교단에 소속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김 목사는 교단의 지도자를 지낸 적이 없다. 연합단체에서 굳이 대표회장을 대교단 내에서 찾는 이유는 그 인물 자체보다는 대교단이라는 배경을 선호해서다. 큰 교단이 적극 참여할 때, 대내외적인 영향력이 커짐은 물론이고, 재정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인물이 자신이 소속한 교단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교단 총회장도 지내지 않은 김수읍 목사가 과연 통합측의 지원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를 교계에서 우려하는 것이다. 여기에 교계에서도 극보수적인 인물로 분류되는 김수읍 목사가 보수와 진보가 나란히 공존하는 통합이라는 교단 내에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것으로 보이는 점은 올해 한장총의 사업에 통합측의 참여를 망설케 할 수도 있다. 그나마 나은 점은 상임회장을 합동의 현 총회장인 김종준 목사가 맡았다는 점이다. 합동이라는 엄청난 배경에, 현직 총회장이라는 최고 지도자가 내년에 자동으로 대표회장에 오르게 될 것이기에 이에 대한 한장총의 기대는 벌써부터 상당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특히 최근 단체 사무실 내 상임회장실을 마련키 위해 상근직인 총무실을 없앤 것으로까지 알려졌다. 이에 대한 여러 추측도 있지만, 현직 합동 총회장이라는 위치에 대한 예우라는게 김수읍 대표회장의 설명이다. 한장총이 오랜만에 영입한 그야말로 거물(?)에 엄청난 기대를 보이며, 역사상 초유의 상임회장실까지 만들어 이를 배려하고 있지만, 사실 합동측 내부에서는 총회장인 김종준 목사보다 부총회장인 소강석 목사에 훨씬 더 큰 관심과 기대를 보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부총회장이 총회장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이러한 추측이 중요한 것은 합동 뿐 아니라 교계 전체가 올해 소강석 목사가 합동 총회장에 오르는 순간을 매우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계는 신진 지도자 중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하며, 엄청난 인맥과 지도력을 갖고 있는 소 목사를 침체되고 분열된 연합운동을 다시 하나로 엮을 가장 적합한 지도자로 꼽고 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바로 소 목사의 올 총회장 취임이다. 딱히 김종준 목사가 부족하거나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 목사가 연합운동에 있어 압도적인 지지와 기대를 받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김종준 목사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교계와 교단은 과연 소 목사가 연합운동의 중심점을 한교총과 한기총 중 어디로 가져갈지를 매우 유심있게 지켜보고 있으며, 그 와중에 한장총은 다시 한번 관심 밖으로 밀려 났다.
    • 해설/기획
    • 해설
    2020-03-27
  • 해설 / 한국교회 연합운동 희망은 있는가? ④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각 교단 정체성에 따른 정리 필요… ‘교회협-한교총’ 중심 한기총과 한교연에 이어 제3의 보수단체로 출범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의 등장은 교계 구성원들 사이에 극명히 호불호가 갈렸다. 가뜩이나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로 보수세력이 약화된 상황에 한교총을 창립하는 것은 보수의 자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판적 입장과 더 이상 한기총과 한교연에 교계를 맡길 수 없기에 새로운 단체의 출현은 필연적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먼저 당시에는 한교총의 창립 과정이 분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보수의 자멸을 우려하는 반대측의 입장이 힘을 얻었다. 사실 한교총은 결코 등장해서도, 등장할 필요도 없는 조직이었다. 한교총의 모태는 어디까지나 교단장들의 친목모임인 교단장회의로, 단순 친목체인 교단장회의가 교계 연합운동에 목소리를 낸 것은 어디까지나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촉구하면서다. 교단장회의는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로, 교계 연합운동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대외적인 신뢰도 역시 추락했다며, 한기총과 한교연의 재통합을 촉구했었다. 허나 일정시간이 지나 교단장회의는 자신들의 통합 요구에도, 양 단체가 응하지 않는다며 돌연 ‘제3단체’의 창립으로 방향을 바꿨고, 한국교회에 제3단체를 통한 사실상의 ‘헤쳐모여’를 선언했다. 이러한 분열을 주도한 것은 자칭 주요교단들이었다. 이들은 과거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분열할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한국교회임을 자처하며, 한교총의 창립을 분열이 아닌 교계 통합으로 포장했다. 합동, 통합, 기감 등의 3대 교단부터, 고신, 합신, 백석, 여의도순복음 등 중대형 교단들이 합세한 한교총의 모습은 과거 한기총의 모습에 매우 근접한 모습이었다. 허나 문제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한기총과 한교연이었다. 사실 한교총의 등장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한교총이 여타 단체를 자연스레 흡수함으로, 다시 하나의 보수 단체로 거듭나야할 것인데, 예상대로 한기총과 한교연의 존재는 건재했다. 물론 한교총으로 인해 주요교단들을 잃게된 한교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한기총은 특별히 받을 영향이 없었다. 이미 중소교단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한기총의 이름이 가진 교계 대표성은 여전했기에, 한교총의 등장에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한교총이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통합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역할에 전혀 부합하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한교총이 대내외적인 대표성을 점차 확보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은 한교총 자체의 공이라기보다는 전광훈 목사로 인해 극심하게 정치화된 한기총과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한교연으로 인한 반사적 결과라 볼 수 있다. 이제 교계는 더 이상 이들 단체의 통합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단연 압도적인 세력을 갖춘 한교총을 통해 교계가 재편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는 반정부집회를 통해 교계 내부의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는 한기총이 더 이상 교계 대표 연합단체로 호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과 짙게 갈려 있다. 특히 막말과 폭언을 일삼으며, 정치집회를 주 목적으로 하는 한기총과 같은 변종 단체의 등장이 보수 교계의 분열로 인한 참담한 결과임을 인식하며, 다시 보편적 교회로의 회복을 위해 한교총으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과거 교회협과 한기총으로 대표되던 교계 연합구도가 이제 교회협과 한교총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재편을 위해서는 내부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진보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교단과 보수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교단들이 자기 입장을 확실히 찾아 단체를 택할 필요가 있다. 현재 통합측과 감리교 등은 진보와 보수의 소통을 이유로, 교회협과 한교총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소통이라는 애초의 목표와 달리, 양 단체 모두의 정체성을 흐리는 최악의 결과를 낳고 있다. 무엇보다 동성애, 종교인 과세, 역사 문제 등 진보와 보수의 입장 차이가 분명한 사안에 있어, 이들 교단들은 교회협에서는 찬성 목소리를 내고, 한교총에서는 반대 목소리를 내야 하는 모순적인 입장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교회협과 한교총의 최종 통합은 불가하다. 차라리 보수와 진보가 건전한 교제와 견제를 통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는 교회협과 한교총은 연합운동을 이끌 두 바퀴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양 단체가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는게 제일 중요하다. 이런 전제에서 통합측과 감리교는 한교총을 정리하고, 교회협에 매진해야 함이 옳다. 굳이 한교총을 교계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의 장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사실 한교총을 정리하는게 이들 교단 입장에서 그리 어려울 것도,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다. 올 한해는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이 반드시 새로 정비되어야 한다. 한기총이 여전히 한국교회의 대표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폭주하고 있음에도 이를 제재하지 못하는 것은 현 교계 연합운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한교총이 보수교계의 대표성을 완전히 획득해야 함은 필연적 사명이다.
    • 해설/기획
    • 해설
    2020-03-1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2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레 19:1)고 요구하신다. 성도들의 거룩함, 곧 성결은 신구약성경 윤리의 핵심이다. 성도들의 금식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의 성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 58:6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하는 말씀이다. 일부의 설교자나 성경 선생들은 경건 생활이나 병 고침을 위하여 금식을 권하며,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길을 찾고, 알기를 기뻐하며, 의로운 법도를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다. 아주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행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버리지 않는 자처럼 살았다. 그리고 이들은 변함없이 주기적으로 금식하였다.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주 일상적으로 하는 종교 활동의 일부였다. 금식을 함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보다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경건의 방법으로 금식을 한 것이다. 히브리어 “촘” 혹은 “춤” 이라는 말은 사람이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람이 금식할 때는 보통 삼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얹고, 울거나 애곡을 했다(더 4:16). 금식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이었다. 금식이야 말로 이스라앨 사람들이 자기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무랄 데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고, 이들을 알아주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그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다. “우리가 금식하나 어찌하여 주께서 보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나 어 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시지 않으십니까?이것을 8절과 연계해서 보면 아마도 병든 자가 금식하며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자 토해내는 불평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이들은 금식하면서도 자기의 쾌락을 구하며, 자기 일꾼들은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3). 금식을 한답시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앉아 있으면서 다투고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행위는 위선이며, 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여호와께서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4). 이들은 신앙적이고, 경건한 체 하지만 그들은 무자비한 위선자요, 자기중심적인 형식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의 쾌락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금식을 통하여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식을 통하여 자기의 쾌락을 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경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증스러운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금식이냐?”그런데 이 성경 구절이 우리 한글 역본에서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냐?”(5)로 번역하고 있다. 6절에도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기뻐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모든 영역본은 "the fast that I choose"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 ESV. NIV. NASB. RSV. JPS 등 거의 모든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역한 TNK 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금식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개역 성경 오역의 한 구절이 한국 성도들의 신학과 신앙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 성경 번역자들에게까지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금식을 장려하는 자들의 주장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시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금식 기도원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인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한국처럼 금식 기도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왜 금식을 선택사항으로 말씀하셨을까? 금식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성별된 경건생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란 금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4절에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금식이냐?”고 물으시는 질문은 “아닙니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고, 5절에는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와 같다”라고 참다운 금식이 어떤 것인 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금식은...”이라고 말문을 여신다. “불의의 사슬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스는 것이 아니겠느냐?” (6) 고 말씀하신다. “또 굶주린 자와 네 음식을 나누며,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을 집에 데려오고, 네가 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를 입혀주며, 네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7)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는 참다운 경건 생활, 즉 진정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만족해하시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경건 생활은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먹는 것이다. 굶주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압제받고 핍박 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자기는 금식한답시고 일꾼들은 부려먹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함께 먹고, 헐벗은 자와 함께 나누고,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여 화평을 도모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이다. 안 먹고, 안 하고, 슬퍼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위선을 부리는 형식적인 생할과 행동이 경건이 아니다. 자기의 비뚤어진 의, 자기 과시성 위선과 형식적인 봉사 활동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본문 후반부 8-14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선택하신 참 금식, 곧 참 경건이 어떤 것인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급이 어떤 것인가를 열거하고 있다. 8절에는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다”고 했다. 참 금식, 곧 사랑과 희생과 공의와 생명을 살리는 헌신의 빛이 마치 어둠 가운데 찬란하게 비추는 새벽별처럼 비칠 것이라는 것이다. 10절에는 이들의 “네 빛이 흑암 속에 나타나 네 어둠이 대낮같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뒤에서 호위해주신다고 했다.9절에는 이러한 희생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네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때에 그분께서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금식기도를 해도 안 들어 준다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금식기도보다는 구체적인 의롭고 선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성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네 치료가 신속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위선적인 금식을 배제하시는 말씀이다. 11절에는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마치 물댄 동산같이 되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피패하고 메마른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는 행동하는 성도들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황폐한 곳을 재건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무너진 곳을 다시 쌓는자” 혹은 “길을 복구하는 자”라고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무지, 광야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되살리고 재건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13-14절은 특히 안식일에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여호와의 거룩한 날을 존귀하게 여기고 여호와를 즐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히 대하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금식이라는 자기를 들어내기 위한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경건 생활보다는 오히려 먹으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며,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살리며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금식, 경건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하기 위하여 경건생활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금식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랑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3-02
  • 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②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월 10일 종교교회에서 개최한 1월 월례회 중 박종화 박사가 발표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사회통합은 사회의 심포니 내지 오케스트라 연주이다 다양한 악기가 자기만의 독특한 음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려면 모든 악기의 음은 화음을 이루게 내야한다. 화음이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소음은 다름 아닌 바로 갈등이다. 사회의 현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보면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오케스트라는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이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다양성 속에 하나로 통합된 사회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을 추구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는 불안하고 시끄러운 갈등을 딛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사회적 심포니 내지 사회적 오케스트라의 원형은 그리스도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몸통”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통에 붙어 사는 “지체”인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공동체 만큼 다양한 인간집단이 어울려 사는 사회공동체는 없다. 출신성분도, 고향출신도, 학력이나 지위나 역할도, 성별 세대별 차이도, 타고난 은사도, 실로 다양한 구성원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동의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앙의 화음 공동체이다. 이런 화음을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또는 반대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의 심포니요 신앙의 오케스트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반 사회가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사회의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심포니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의 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시 화음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다시 붙어 있어야 할 몸통으로 돌아와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각 지체의 기능을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앙의 심포니를 연주하면 된다. 사회통합의 틀도 바로 이러한 일치와 다양성의 조화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아니다. 다양성을 배제한 전제적 획일주의 사회도 아니다. 몸통인 헌법에 보장된 “자유, 인권, 정의, 복지, 평화”라는 기본 가치가 우리 사회 심포니의 대본이다. 그것은 다행이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샬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먼저 갈등하는 당사자나 집단이 이런 헌법적 가치를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명실 공히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예언자적” 비판적 통찰과 비판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다양성은 기본 내지 기본을 공유한 전제하에서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집단이 정당한 바탕위에서 나름의 심포니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판단되면, 연주의 질과 뉴앙스와 표출방식 등에 다양성이 있는 것은 한국사회를 보다 넓고 높고 깊은 민주적 선진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화해와 상생을 이루는 “제사장적” 사명인 것이다. 통합의 방식은 사랑이고 최고치는 원수 사랑이다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8,16).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사랑 때문이고(요 3:16),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의 계명(마 22:34-40)이다. 더 심도 있는 사랑의 계명은 “원수사랑”의 계명(마 5:43-48)이다. 어쨌든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개인도 사회도 그렇다.앞서서 헌법의 기본가치 또는 샬롬의 기본가치를 설명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가 이웃사랑에 있고 이웃 사랑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산이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들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웃 사랑이 없는 자유는노예사회의 경우처럼 주인의 독재적 자유와 부림 받는 노예의 무자비한 속박을 낳는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인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내었다.사실 우리시대의 사회적 갈등 현상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갈등이 상호 표용할 수 있는 생산적 내지 상호 교정의 상태가 아니라 적대화되고 진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 갈등 및 남북 갈등의 정상이 마로 이것이다. 속칭 “예수 믿고 천당!”의 구호대로 한다면 “원수 사랑해야 천당!!”이라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원수 사랑을 형식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사랑처럼 베풀 수 있나? 여기서 두 가지 처방을 살펴보겠다.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나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지성적 원수사랑”(intelligente Feindesliebe)이 필요하다는 서구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제안이 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하다. 원수관계의 핵심은 증오인데 원수관계의 현실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수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듯이 원수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서, 두려움과 증오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면밀히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간의 두려움과 증오가 증폭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기승하기 때문에, 우리 편이 먼저 두려움과 증오의 강도를 줄이면서 전쟁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선제적 조치 곧 단계적인 원수 사랑의 발걸음을 떼자는 전략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남남 갈등의 현장에서 적용됨으로 폭력과 파멸을 단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남북 갈등에 있어서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 전쟁발발로 인한 참혹한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평화적 선제조치일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갈등의 당사자 가운데서 앞서 말한 삶의 기본가치에 내공이 상대적으로 크게 쌓인 측이 우선권을 쥐고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과는 가치관 경쟁에서 비교도 못할 정도로 성공한 남한이 선제적 평화공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북 간에 평화공존이 이루어 질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본가치관을 중심으로 남북 간에 선의의 경쟁과 생산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일의 길이 수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또 한 가지 원수 사랑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러하다. 상대방을 원수로 설정하고 사는 한 자기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에 항상 원수가 꼿꼿이 서있으며,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 자신이 종이고, 원수가 원치 않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자유가 아닌 속박의 틀이다.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원수관계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원수에게 지지 말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로마서의 해법을 인용해본다(롬 12:17-21). 요지는 이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적대관계라는 갈등은 처참하다. 파멸의 블랙홀이다. 적대관계에 편승하면 적대관계의 노예가 된다. 이념적 적대관계는 이념의 노예를 만든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대관계는 증오의 노예를 만든다. 신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이면 스스로 우상이 되어 파멸로 간다. 교리적으로 적대관계를 만들면 이단사설로 파멸의 길로 간다. 자기 스스로와의 적대관계는 자살을 낳는다. 이웃과 적대관계를 맺고 살면 살인과 사형으로 치달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20-03-02
  • ◈ 바바바 144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131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때에 만날 큰 도움이시리라”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떨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병균이 전 세계 수많은 생명을 사냥질 하고 다닌다. 모든 생명 활동이 다 정지 상태이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 안전지대로 피난을 가서 걱정없이 활동하며 살고 싶은 생각을 안 해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디 안전지대가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과연 피난처가 있는 것는 것인가?다행히 성경에 보니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다. 본문 1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때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7절과 11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신다.”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시작과 끝을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중간에 또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는 “셀라”라는 말이 3,6,11절에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높이다”(to lift up)는 의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음을 이곳에서 높이 올려라 (to higher pitch), 혹은 음성의 변화 (change of voice), 혹은 기악곡의 삽입을 위하여 성악은 멈추라. 혹은 “영원히”(forever)라는 의미라고 다양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주제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하여 문단을 나눌 때 사용하기도 한다. 본 시에서는 분명 자연적인 재해와 전쟁의 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오로지 여호와만이 그 백성들의 피난처이시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찬양하는 시이다. 때라서 이 시의 전반부는 자연의 재앙을 다스리는 하나님(2-7)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절에 “환난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은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그래서 땅과 산이 바다에 깊이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소리치고, 거품을 내고, 거센 파도에 산이 요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의 말로 하자면 밤중에 지진으로 말미암은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민족들이 소란하고, 왕국들이 요동한다. 그러나 바닷물이 밀려와 산을 덮치고, 땅이 흔들리는 이 상황 속에서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는 요동하지 않는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읍으로 흐르는 강은 오히려 거룩한 성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강들이 요동치지 못하고 오히려 졸졸 흐르는 개울물처럼 흘러 하나님의 처소를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지진이나 바닷물도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알고 그 앞에서는 잠잠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성읍이 어디인가?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거처를 산에 두신다. 성경에 시내 산, 호렙산, 시온 산 등을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시편 48편에 보면 “북방의 시온 산은 높고 아름다우며 온 세상의 기쁨이 되니 위대한 왕의 성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의 궁전에 계시니 자신을 피난처로 알리셨다.” (48:2-3)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발하시는 소리는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크시고, 자연의 힘보다 더 세고 강하시다. 감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처를 어떤 피조물이라도 넘볼 수 없다. 자연 재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우리가 직접 체함을 해보지 않아 적나라하게 그 파괴력을 실감할 수 없지만 사진이나 뉴스 기자들의 보도를 보는 광경은 참으로 무섭고 참담하다. 일본의 쓰나미 현상이나, 미국의 칼리포니아와 호주의 산불, 그리고 알프스 산에서 트렉킹하던 사람을 삼킨 눈사태 등은 공포 그 자체이다. 요사이 중국 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마비시켜 가고 있다. 나라들이 문을 닫고, 모든 집, 학교, 공공건물, 상점, 백화점, 심지어 병원까지 문을 닫고 있다. 중국에서는 전염병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자들이 한 달여 만에 4만명, 사망자가 1,000명을 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당하는 대재앙인 것 같다. 일본에서 발이 묶인 크루스 여행자들 3,700명이 하선을 못하고 배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피난가고, 도망가야 하는 것일까? 마치 닭장에 갇힌 닭처럼 결국 잡아먹히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므로 성이 요동치 않을 것이다.”(5)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만이 견고하게 서 계신다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재양의 날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 산이 진동하고, 바닷물이 요동칠 때, 그리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때, 우리는 여호와께 피난을 가서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왜 하필 나인가? 이러한 재앙이 왜 우리를 삼키려하는가? 하나님은 왜 하필 나만 구원하셨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고 계속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다음 이 시의 후반부는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자연 재해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전쟁이다. 전쟁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조리게 하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는 생각만 해도 무섭다. . 유다 왕 아하스 때에 북 이스라엘과 아람 군대가 유다를 치러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과 백성들이 마치 바람에 사시나무가 흔들리듯이 그들의 두 무릎이 부딪쳐 떨었다고 했다. 이스라앨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산으로 도망을 가든지, 절벽에 구멍을 파서 그곳에 피난했다. 갈릴리 바다 곁에 있는 알베르 산 절벽에는 예전에 피난민들이 구명을 파고 피난살이를 했던 흔적이 지금도 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데리고 아둘람 굴로 도망갔는데, 지금도 그 바위 동굴이 있다. 엔게디에는 사울을 피하여 도망가던 굴이 있다. 마사다는 유명한 피난처이다.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함락되고 망할 때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 로 도망가서 3년 동안 항거하며 항거했지만 결국에는 자살로 막을 내렸다.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이며, 망하느냐 흥하느냐하는 문제라서 그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가 전투에 임할 때,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받는다. 신 20:3-4에는 제사장이 다음과 같이 축복하고 격려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오늘 너희는 너희 적들과 싸우러 나간다. 너희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며, 당황하지 말고,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여호와 네 하나님 께서 너희화 함께 가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과 싸우고 너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신 20:3-4)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언급하는 말씀이 두려워하거나 떨지 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를 피난처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피난처이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그치게 하는 분이라고 말한다(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아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신다.”(11) 라고 말한다.여호와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전쟁을 막고 그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만이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갈 생각 말고 하나님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해야 한다. 오늘날의 전쟁은 도망간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 피난 갈 생각을 해야 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이라고 부른다. 만군이란 큰 군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늘에 천군이 있고, 지상에는 지상군이 있다. 지상군은 상비군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이든지 누구든지 그의 군대로 불러 쓰실 수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은 상비군을 두어 상비군을 지휘할 수 있는 왕을 달라고 했다. 하나님은 왕을 주셨다. 그러나 왕과 그의 상비군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아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기자는 91:9-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네가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희 거처로 삼았으므로, 불행이 너를 덮치지 못하고, 재앙이 네 장막에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너의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또한 48:14절에는 “참으로 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라는 말로 자연 재앙과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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