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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선(dead line)을 지키라’
    “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2:36-37). 며칠 전 길을 가다가 유리조각들이 길에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앙선 넘어 90도로 뒤집혀 있는 차를 보았습니다. 대형 사고였습니다. 이처럼 차는 생활 속에서 편리한 것이지만, 중앙선을 넘어서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신앙인들 사이에도 멈추어야 할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그들의 사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선을 넘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말씀대로 영적 죽음과 에덴 낙원에서 쫓겨나는 일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창3:23-24).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에게 솔로몬은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2:37-38) 라고 말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아도니아가 죽었고, 요압도 죽고, 아비아달은 고향으로 추방당하던 때에 시므이는 떨면서 솔로몬에게 갔을 것입니다. 죽을 줄만 알았던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징벌은 뜻밖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종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과도 같았습니다. 시므이는 둘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하여 재산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죽음을 무릅쓰고 재산을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후자를 택하였습니다. 사선을 넘은 결과 종은 찾아왔지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또 “여호와께서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잠15:25)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자의 지경 역시 하나님께서 넘지 말라고 하시는 사선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이 어려워지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안 할 텐데......’ 하며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이나 하와보다 나을까요? 만일 우리가 아담이었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하와가 권하는데도 먹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말합니다. 반드시는 정녕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라는 사선 앞에 서 있는 우리의 형편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앞에 서 있는 아담과 하와의 형편과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한 번이라도 육신대로 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것처럼 우리는 수 없이 육신대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선은 육신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것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기록한 말씀처럼 흑암과 사망의 그늘, 곤고와 쇠사슬과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시107:10).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그런 일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사선이 육신인 줄을 깨닫고 신앙인들은 정신을 차려서 육신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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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통회’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통회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프게 뉘우친다는 뜻이며, 히브리말로는 ‘다카’로써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잘게 쪼개어진 어떤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 말이 ‘통회하는 자’ 로 쓰일 때는 ‘상한 자’ ‘겸비한 자’란 뜻으로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신앙인들이 돌이키고 반성을 해도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돌이키고 반성하는 정도가 아프게 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식적이거나, 여전히 죄를 좋아하면서 단지 징계가 무서워서 하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반성하지만, 그 반성은 그 일이 잘 못 된 것이고, 옳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꾸지람이나 채찍이 무서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출5:1).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끝나면 “언제 약속했냐?”는 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에 더 큰 재앙을 내리셨고, 이때도 바로는 회개하는 척하였지만, 한숨 돌릴만하면 이전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애굽은 점점 더 황폐해갔고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냈습니다(출12:30-31). 바로에게 어려운 일들이 반복된 것은, 그 마음이 강퍅하여 거짓 회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아픔 때문에, 징계가 무서워서 하는 회개가 아니라, 했던 일들이 옳지 않고 선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런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비록 왕이 되었지만, 육신은 여느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밧세바가 벌거벗고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음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보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온 후 동침 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잉태하자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맹렬한 전투 앞에서 싸우게 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감쪽같이 해치운 줄 알았지만,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를 강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는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12:10-12). 다윗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하며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시 51편은 그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그는 비록 자신의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보고 용서하였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보고 탄식하며, 통회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사57:15).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통회하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난처하고 힘든 환경에서 풀리면 이전 죄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진심으로 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잠5:22). 다윗을 무시하고 사울의 군장 아브넬과, 이모의 아들 아마사와,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그 때마다 무사한 듯 하였지만 최후 아도니아의 반란에 가입하여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왕상2:34). 성경에 요압이 자기의 잘못을 돌이켰다는 내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자기 악에 자기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던 아도니아는 솔로몬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왕상1:52)라고 하며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통회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버지의 후궁과 다름없는 아비삭을 솔로몬에게 구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죄악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처럼 아프게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꼬리가 결국 밟히고 맙니다. 자신의 죄가 자기를 적발하고 맙니다(창44: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 자신의 악이 자기를 징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회개하되 진실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통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죄를 이기고 버리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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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벽을 만나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지난 2월 7일 한국 쇼트트랙 대표 황대헌 선수, 이준서 선수가 1000미터 경기에서 무난히 결승에 진출한 듯싶었으나 비디오 판독 결과 이해하기 어려운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준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로 개최국인 중국 선수가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에 한국 선수단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CAS에 제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판정의 부당함을 공식화해 다시는 국제 빙상계와 스포츠계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억울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황대헌 선수는 이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인스타 스토리에 글을 올렸습니다. “장애물이 반드시 너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벽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포기하지 마라. 어떻게 그 벽을 오를지 해결책을 찾고 그 벽을 이겨내라.” 이 글은 미국 농구 황제라 불리는 마이클 조던의 책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합니다. 정작 자신은 편파 판정의 벽에 흔들리지 않고 뛰어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는 이틀 뒤 1,500m에서 극적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판정시비의 실마리를 없애고 세 번째 바퀴부터 선두를 유지하였습니다. 그가 1,000m 경기에서 상처를 받고 낙심했더라면 더 나아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전 것은 잃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소원이었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편파 판정이라는 벽을 보고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벽을 넘었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벽을 만날 것입니다. 그 벽은 이기고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돌아서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탐을 다녀왔던 12명의 족장 중 10명은 가나안 땅의 벽을 보았습니다. 장대한 아낙의 후손을 보았습니다(민13:32).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벽을 본 것이 아니라, 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결과, 아낙 자손은 벽이 아니라 밥이었습니다(민14:6-10).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벽으로 느꼈던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들을 무시하여도 싸울 생각도, 한 마디 대꾸할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인 골리앗이 벽이 아니라, 오히려 물매를 정조준할 범위가 넓은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답답한 일을 만나도, 벽과 같은 일을 만나도, 쌓이지 않는 이유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 죽인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지면 답답한 일을 이길 수 있고 넘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죽이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땅에 곡식을 사러 갔습니다. 그곳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형님들에게 자신을 숨긴 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므온만 옥에 남겨둔 채 형님들의 각각의 자루에 곡식과 돈을 넣고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생각에는 요셉은 죽었고, 시므온은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베냐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을 보내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 하며 보냈습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하는 자세, 그것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자세입니다. 그가 잃고자 하였을 때 그는 베냐민은 물론, 죽은 줄 알았던 요셉도 베냐민도 시므온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 역시 하만이 페르시아 지방의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할 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아하수에르 왕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유대인 모두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에4:16). 이처럼 십자가는 벽을 넘고, 벽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부르심의 상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푯대가 있습니다. 달려갈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시는 존귀와 영광과 칭찬입니다(벧전1:7).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때, 벽이 있을지라도 십자가를 몸에 진다면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그 벽을 이기고 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 대신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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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진심으로 용서하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3). 마18:15-35는 용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용서했다고 하지만 그 형제를 보면 다시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다면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했을까요? 오늘은 중심으로 용서하는 법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용서’하면 우리는 자신이 용서해야 할 사람은 많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나 형제들에게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나 타인에게 지은 죄들이 많다고 하십니다.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들이 많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예입니다(마18:21-35). 일만 달란트를 오늘날 환산하면 최소 10조가량 됩니다. 임금에게 10조 빚진 종이 빚을 독촉하는 임금에게 싹싹 빌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그 종에게도 천만 원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0조에 비하면 천만 원은 지극히 적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에게 천만 원 빚진 동관을 탕감하기는커녕, 다 갚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하며 그 악한 종에게 이전 탕감해주었던 것을 모두 갚도록 하였습니다. 악한 종은 오늘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소탐대실이라고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 못 한다면,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탕감받은 우리의 죄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제가 이십 대 때의 일입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가끔 인사하는 정도의 형제에게 “살 좀 빼시죠.”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비싼 밥 먹고 찐 살인데 당신이 뭔데 빼라 마라 해?” 저는 그런 말이 그렇게 실례되는 말인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이런 말은 제 사촌 누이에게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버럭 화내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제가 동생에게도 실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례는 단지 드러난 일일 뿐입니다. 그 형제처럼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 말이나 무례함으로 인하여 속으로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흔히 “아직도 장가(시집) 안 갔어? 총각(처녀)으로 늙을 거야?” 등도 실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하는 말이지만 예민한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친 관심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허물 많은 우리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들이 훨씬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심정으로 형제를 너그럽게 대하여 줄 것입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휼을 조금만 심었는데, 거두는 열매는 100배 많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용서를 심어서 용서를 거두어야 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백번 천번 잘 대해주다가도 한번 잘 못 하면 토라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섭섭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섭섭한 면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과거에 우리에게 한 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 섭섭한 일들에 대한 상처를 지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탕감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형제에게 무례가 많이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형제로부터 받은 은혜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등이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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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합심기도 왜 드려야하는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합심 기도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힘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악한 영들과 죄는 꽁꽁 묶도록 기도하며, 성도들은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고 바른길로 들어서도록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며, 넓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범사에 합심 기도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두세 사람의 의미는 교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힘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합심 기도와 그 능력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생활 중 제일 먼저 마주한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섰고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지만,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출17:8~16).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놓고 그 위에 모세를 앉게 한 후 둘이 양편에 서서 모세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의 손은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전쟁터에 있는 여호수아와 군인들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든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 혼자서 할 수 없는 기도를 아론과 훌이 도왔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말렉을 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전방에 있는 사람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한 엘리제사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을 때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고 합심하여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 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시 침입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삼상7:11).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왕이 꾸었던 꿈을 알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단2:17~18). 그 결과 왕이 놓쳐버렸던 꿈이 다니엘에게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단2:29-35). 예수님 승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행1:12-14). 그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습니다(행2:4). 또 헤롯이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옥에 가두었을 때 형제들은 마가의 집에 모여 그를 위하여 일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천사가 베드로 곁에 와서 쇠사슬을 풀어주고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마가의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행12:5,7). 점하는 귀신 들린 여인의 귀신을 쫓아주고도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예수님께서는 왜 합심 기도를 강조하셨을까요?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기름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부어 주시는데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연합하여 몸이 된 형제들에게까지 성령의 기름이 흘러 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연합한 곳에서 강하게 임합니다. 곧 교회의 최소 단위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합심하여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복을 명하십니다. 성령은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하지만 가장 강하게 임할 때는 신앙인들이 교회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11, 17, 3:29, 6, 13, 22)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성령이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면 정성을 다하여 예배에 참석할 뿐 아니라 몸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합심 기도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뜻을 합하여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합심기도는 사욕을 제어합니다. 합심 기도하면 사욕을 좇는 기도보다는 서로의 목표를 위하고 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합심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중보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심정을 갖게 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라고 말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닙니다. 셋이 될 수도 있고 넷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은 혼자서는 탈 수 없습니다. 모여야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산술적으로 둘이지만 실제는 셋도 되고 열도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할 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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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죽은 행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6:1~2). 작년 봄 옥상에 고추와 가지, 맨드라미, 백일홍 등 채소와 화초를 심었습니다. 대부분은 한해살이 식물이기 때문에 지난가을 이미 시들어버린 몸을 거둬들여야 했지만 게으른 탓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은 흙마저 꽁꽁 얼어 그들의 주검을 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바래버린 면류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시들고 말라버린 꽃들이 아무리 자신의 모습을 과시한들 볼품없는 형체입니다. 본문의 죽은 행실에서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죽음, 곧 거듭나지 못했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했어도 육신이 있으므로 행동을 합니다. 그 행동을 신앙 차원에서 죽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신앙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행동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듭났어도 여전히 육신을 따라 죽은 행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믿는 사람들의 육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육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듭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말도 하고, 죽은 자가 사랑도 하고, 죽은 자가 왕래하기도 하며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행실입니다. 좋은 열매가 없는 행동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 사라지는 행동입니다. 시체를 오래 두면 썩어 악취가 납니다. 그 악취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역겨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 냄새를 모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죽은 행실에 대한 냄새를 압니다. 죽은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딤전5:5 이하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죽은 행실을 하는 사람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재림 때까지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긴 과부들입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이 바울 당시 과부들에 대한 말씀일지라도,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일락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눅15:24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관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은 행실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생활이 허랑방탕한 생활이며 세상과 벗하는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엡2:1이하에는 죽은 행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죽은 행실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풍속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마귀의 영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셋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행위입니다. 세상 풍속은 세시 풍속과 유행 등을 말합니다. 또한 시대마다 흐르는 사상 풍조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따라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신자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행동하는 것 역시 세상풍속을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은 유행을 따르거나 세상 풍속을 따를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요14:6). 신앙인들이 은사가 있다면, 하나님께 전심전력하기 위하여 홀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마19:12, 고전7:34,38).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면 남녀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사이 신혼부부들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는 살아보고 하겠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재산상에 있어서 부부가 갖는 불이익을 갖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지 않는 것 역시 요사이 흐르는 세상 풍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이해되지만,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길러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기독교인들이 자녀를 갖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죽은 행실의 또 하나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행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합니다. 거역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들어갑니다. 부모님께 거역하면 마귀가 들어가고, 웃어른께 거역하면 마귀가 들어갑니다. 물론 주 안에서 순종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엡6:1). 순종은 십자가입니다(빌2:8). 십자가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눅9:23), 자기 의견을 접는 것은 혼적인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행실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감입니다. 육체의 특징은 정과 욕심입니다. 자신의 기분대로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거기에서 일락이 나오고 허랑방탕함이 나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하지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롬8:13). 영적인 삶은 거듭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행위를 말하며 선한 양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히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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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35:3). 이 말은 야곱이 그 가족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 전의 사건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 의하여 강간을 당하고, 이에 격분한 오라버니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과 그 아버지 하몰을 비롯하여 그 성의 모든 남자를 비겁하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한 말입니다. 야곱이 즉흥적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어나......” 말씀처럼 그때까지 엎드리거나 앉아서 기도드렸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면 이런 말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드려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드려야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도드리지 않으면 좋은 일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악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곳은 원래 루스라고 불리던 곳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 벧엘이라고 칭한 것입니다(창28:19). 이때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형님의 원한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도망 나온 것입니다. 하룻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돌을 베게 삼아 노숙을 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사람이 있다거나 나귀가 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저녁이 오고 밤이 깊어졌습니다. 어둠이 임하면 동물이나 새들도 무서워합니다. 야곱인들 어찌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언제 강도들이 습격할지 모르고 늑대와 이리가 덤벼들지 모르는 곳입니다. 간혹 사막의 독사들에게 물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졸음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있고 거기에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야곱을 시중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당시 야곱은 자신의 죄 때문에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야곱을 꾸짖으시며 야단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꾸짖기는커녕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2~15). 책망을 들어야 마땅한 야곱인데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 책망을 안 하시고 복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불안하고 무서워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야곱을 책망한들 야곱이 감당할 그릇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야곱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허물이 크고 야곱처럼 간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허물을 그냥 놔두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영의 성장에 따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책망하시며 만들어 가십니다. 마치 야곱에게 그보다 더 간사한 라반을 붙여 주신 것처럼 평생을 환경을 통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과,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며 서원을 합니다(창28:20~22).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야곱이 기도하면, 벧엘로 올라가서 그가 약속했던 서원을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창31:13, 35:1). 본문은 그러한 말씀을 상기하며 야곱이 자손들에게 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건물로서의 성전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들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기도 합니다(고전3:16,6:19). 코로나로 인하여 모이기가 힘들어진 요즈음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그곳에서 기도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안에서 기도드리다가 졸리면 누워 자기 일쑤입니다. 환난이 닥칠 때마다 신앙인들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배당에 가서 기도드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몸과 마음과 정성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힘을 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어떤 환난도 하나님의 집에서 해결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환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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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님의 이름 “예수”는 ‘여호와가 구원하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구원받을 대상은 ‘자기 백성’이며, 구원받을 위치는 ‘그들의 죄’입니다. 죄란 히브리 원음으로 ‘핫타스’인데 이것은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녁은 ‘하나님의 뜻’ ‘진리’ ‘의’ 등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통틀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 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6:12) 라고 말합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함이 죄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죄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사람들 마음에 있는 생각과 계획은 어려서부터 악했습니다(창6:5). 또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렘17:9). 이러한 악과 거짓과 부패 덩어리인 자기 마음을 믿고, 그 마음대로 살아감이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가책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를 왕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노예입니다. 따라서 폭군의 통치를 받는 주민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듯,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죄의 주관자인 마귀의 압제를 받아 흑암과 사망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됩니다(시107:10,11).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이러한 죄의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BC723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고, 137년이 지난 후 BC586년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단9:2).’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페르시아 제국 때 예루살렘 성전이 70년 만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계속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헬라에 의하여 멸망하자 예루살렘도 헬라 제국의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헬라 제국이 로마와 싸우며 약해진 틈을 타 이스라엘은 잠시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때가 바로 유대의 마카비 혁명 시대와 하스몬 왕조 때입니다. 그러나 하스몬 왕조의 내분이 결국 내전으로 소용돌이치자 하스몬 왕조의 총리를 맡고 있던 이두매(에돔) 가문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나라를 로마에 넘기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이스라엘은 속국이 되고 맙니다(조병호, 성경과 고대 전쟁, 통독원) p218. 이처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독립국이 되어 그동안 받았던 이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그들을 로마에서 해방해줄 생각도, 그들과 싸울 생각도 없어 보였습니다. 로마 정치인들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대인 기득권층만 강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시기심과 실망한 마음이 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로마에서부터 해방해줄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백성을 죄로부터 해방할 영적인 메시아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환경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민족의 압제도 풀리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사시대 이스라엘 역사의 패턴 곧 “1. 백성들의 범죄 2. 그로 인한 이민족의 압제 3. 회개 4. 구원자 사사를 보냄 5. 해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죄악을 회개하였다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2,000여 년 전에 벌써 독립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죄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을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주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많은 신앙인이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죄의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인데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함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능히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건지실 능력을 갖추고 계시지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신앙인 자신이 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해야 한다는 사실과(요5:6) 주님은 능히 우리를 건지실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마9:28,29). 믿음과 소망은 차의 앞뒤 바퀴처럼 함께 움직입니다. 크고 강한 믿음은 절실한 소망을 낳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의 소원을 주님은 들어 주십니다(마15:28). 미세먼지로 사방이 뿌연 하늘입니다. 2019년 말에 시작되었던 코로나19가 여러 종류의 백신이 개발되었음에도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설마 우리에게까지….’ 라고 생각했던 그들이었지만 주변에 들려오는 소식들이 우리와 멀지 않음을 느낍니다. 코로나19를 백신으로만 해결하려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코로나19 역시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까지도 아기 예수님이 오신 목적, 죄 가운데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인 줄 깨닫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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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과 베들레헴 우물 2’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23:15~17). 성경에는 우물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물은 그만큼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는 우리처럼 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우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였고, 그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부와 권력까지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양보만 하는 이삭을 그 마음까지 르호봇(장소가 넓음)이 되도록 한 것은 우물이었습니다(창26:12~22).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가서 첫사랑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창29:10~12). 모세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범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우물이 촉매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출2:11~22). 신약으로 들어와,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기피하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십니다(요4:5~42).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앉아 계셨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이 물은 예수님과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다섯 번의 혼인과 이혼을 반복했던 여인은 세상과 남편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영원한 생명수인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생수를 주시기 전, 먼저 여인에게 있는 것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4:7). 이처럼 주님이 신앙인들에게 먼저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고 더 많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침내 여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그동안 베들레헴 물이 블레셋 진영에 의하여 차단 된 것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문에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2~24). 그뿐만 아니라 생명의 책 역시 봉인 되었습니다(계5:4). 그야말로 온 인류는 저주 가운데 탄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기근과 질병과 전쟁과 온갖 잡신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 예수님이 한 줄기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만물이 탄식하고 고통 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다윗의 세 명의 특공요원은 왕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우물을 길어 왔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신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시고 죽으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생명수가 터졌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원수들의 머리가 깨졌습니다. 또 봉인 된 생명책을 활짝 펴시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을 마실 때마다, 주님께서 성령을 상징하는 생수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창에 허리를 찔리어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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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달자의 사명’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로 여기는 제자였습니다(딤후1:2, 2:1). 이런 디모데가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바울은 디모데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기 쉬운데 바울은 여과 없이 디모데에게 그의 형편,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 글을 보는 순간 ‘아이고, 들통 났구나.’ 하며 스승 바울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부끄러움이 교차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디모데의 그런 태도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것이지만 여전히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 디모데야!” 하고 부릅니다. 디모데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해주는 바울,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입장에서는 순간은 아프지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믿음의 대 선배인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언젠가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보냄을 받은 유대인 형제들이 오자 베드로는 갑자가 태도를 바꾸더니 이방인 형제들과 식사를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따라 하였고 심지어 바나바조차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원래 유대인인데도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아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는 겁니까?”(갈2:14, 쉬운말 성경 역). 바울의 사랑 방법은 좋은 점은 칭찬하고 격려하며, 잘 못한 점이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가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이로 인하여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20:26~27). 바울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바탕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파수꾼의 자세, 곧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인을 깨우치면 악인이 돌이키든지 안돌이키든지 에스겔은 책임을 면하지만 만일 에스겔이 깨우치지 아니하면 악인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고, 그의 피 값은 에스겔이 내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겔3:16~21). 바울이 그런 피 값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파수꾼의 자세를 마음에 새기고 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행24:16).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행20:35). 한 편으로는 당시 베드로와 디모데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대선배 베드로는 바울의 그러한 지적에 불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에 대하여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 라고 하면서 “사랑하는 형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베드로 모두 책망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만한 사람이라면 책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잠9:7~9). 이처럼 책망하는 말은 아픈 것이지만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장식입니다(잠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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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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