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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는 왜 목사만 양성해야 하나
- ◇제20대 국회에 기독의원수는 19대 109명보다 약간 줄어든 총 104명이다. 전체 국회의원의 35%에 해당한다. 천주교는 60명, 불교는 49명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이들 기독의원들이 과연 국회활동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는 딱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모든 삶을 국민의 대표기구인 의회(議會)가 좌지우지 하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다. 따라서 국민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이 의회이다. 그런데 목민(牧民)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기독교는 왜 지자체나 국회를 외면하고, 도무지 그 사상적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들에게 정치를 맡긴 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하고 있는가. 지자체에서부터 국회에 이르기까지 각급 의회에 기독교 지도자들의 적극 참여가 필요하다. 특히 신학훈련을 받은 정치지도자들이 많이 나서야 한다.◇우리사회에서 전문지식인 그룹 가운데 가장 학력이 높은 계층이 대학 교수그룹이고, 그 다음이 기독교 목회자그룹이다. 그런데 신학교는 모두가 목사만 양성한다. 현재 전국에 대학 졸업생을 받아 3년 과정의 신학교육울 하는 신학대학이 60여 개에 이른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또 다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신학교가 목회(牧會)를 좁게 생각하여 개교회를 담임하는 목양(牧羊)에만 한할 것이 아니라, 목민적(牧民적) 관점에서 목회를 좀 더 넓게 생각하고, 신학적 정체성이 확립된 지성인을 양성하여 지자체나 국회 등 정치권에도 진출시켜야 우리사회에 진정한 기독교 정치 문화가 확립될 수 있다. 건국 초기에는 우리도 그런 인물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하였다. 유럽 각국에는 신학교육을 받은 정치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다. 어떤 이는 대학 교수나 목회를 하다가 총리도 되고, 대통령도 된다.◇우리나라와 같이 다종교사회에서 반드시 기독교 정당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적 신뢰만 쌓을 수 있다면,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존정당에서도 기독의원들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기독교만큼 많은 인재를 안고 있는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 정부의 장차관이나 군장성, 대학총장, 각급학교장, 지자체장을 비롯한 각 분야에 기독교인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신학훈련을 받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확립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드물다. 그런데 이미 한물간 마르크스 레닌 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소위 좌파들은 감방을 들락거리면서도 국회의원도 되고, 시장도 되고, 장관도 되는데, 기독교신학을 바로 배워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건전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왜 꺼려야 하는가.◇이젠 전국의 각급 신학교들이 개 교회를 목양하는 목회뿐 아니라, 우리사회의 기본체제와 질서를 담당하는 목민자들도 양육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거세게 불어 닥쳐오는 세속주의와 좌파들의 반기독교 책동에 맞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매일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앞당겨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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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는 왜 목사만 양성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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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발자국 소리
- ◇역대상 14장에는 다윗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된 직후 블레셋 군이 르바임 골짜기를 침범해왔다. 그때 다윗이 나가서 싸워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었다. 다윗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게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주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 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리라”(14,15)라고 했다. 그런데 이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란 과연 어떤 것인가. 히브리어 ‘체어다’(걸음, 행진, 행군, step)를 한국어로 번역한 이 말은 성경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적군의 행군하는 소리’라고 한다. ◇한글개역과 바른성경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표준새번역은 “뽕나무 밭 위쪽에서 행군하는 소리가 들리거든”, 쉬운성경은 “뽕나무 밭 위쪽에서 행군하는 소리가 나거든”, KJV 한글판은 “그 뽕나무들 꼭대기에서 이동하는 소리를 듣거든”, 천주교성경은 “발삼 향나무 꼭대기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거든”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어성경은 거의 다 “in the tops of the balsam trees”(ESV, NIV, NET, KJV 등)라고 번역하고 있다. 특히 뉴킹제임스는 “a sound of marching in the tops of the mulberry trees”(뽕나무 꼭대기에서 행군하는 소리)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모두 나무 꼭대기에서 나는 소리라는 뜻이다.◇과연 이 소리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난 걸음 걷는 소리인가, 아니면 뽕나무 밭 위쪽에서 적군의 행군하는 소리인가.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라면 이는 다윗만 들을 수 있는 하나님께서 보내는 비밀 신호이고, 뽕나무 밭 위쪽에서 행군하는 소리라면 이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적군의 이동을 알리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로 들렸다면, 이 소리를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인간이 어떻게 나무 꼭대기에서 걸음을 걸을 수 있겠는가. 이 소리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보낸 공격신호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 1:17). 더우기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가 있을리 없다. 그러나 다윗과 블레셋 군이 대치한 이 현장에서 ‘뽕나무 곡대기에서 들렸다는 걸음 걷는 소리’는 분명히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군대가 접근한다는 의미있는 신호이다. 아마도 저벅저벅 걷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 소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 또는 하나님의 신비적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역사를 인정한다면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든, 행군하는 소리든 간에, 무슨 소리든 들을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 역사를 제한하려는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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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발자국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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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트 공의회
- ◇로마 가톨릭교회는 1517년 마르틴 루터로부터 촉발한 종교개혁이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영국 그리고 네들란드 등을 휩쓸고, 주요 도시의 오래된 성당들이 루터파와 개혁파로 줄줄이 넘어가자, 그로부터 28년 후인 1545년 12월 이탈리아 북부 트랜트에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교리를 재천명하고 옹호하기 위해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는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으로 교황 바울 3세가 연 공의회로서 1563년 12월까지 무려 18년간 5명의 교황(바울 3세 재위 1534-1549, 율리오 3세 재위 1550-1555, 마르첼로 2세 재위 1555, 바울 4세 재위 1555-1559, 비오 4세 재위 1559-1565)이 재위하는 기간 지속되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황제 편에서는 먼저 교회의 폐단을 개혁하고 교리를 개정하여 프로테스탄트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제국 내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자는데 있었고, 교황 편의 희망은 로마교회의 교리를 명백히 하여 교회개혁파측과 혼동하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다. ◇교황은 “예루살렘아 기뻐하라”라는 칙서를 통해 1545년 3월 15일 공의회를 트랜트에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공의회가 논의할 주요 안건은 세 가지로 교회의 치유, 교회 개혁, 기독교 세계 평화 확보를 통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한 공동 대응을 제시했다. 교황은 공의회를 주재할 3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트랜트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개회는 연기되어 그해 12월 13일에 가서야 겨우 교황의 사절 3명과 31명의 대표들(25명의 대주교 및 주교, 6명의 수도회 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그곳 성 바질리오 주교좌 성당에서 개회되었다. ◇트랜트 공의회는 총3기로 나누어져 진행되었다. 제1기(1545-1547)에는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에 대해 답했다. 먼저 성경과 전승에 대해 프로테스탄트측이 구약의 외경을 제외한 정경 66권(신약 27권, 구약 39권)을 주장한데 대해 이를 배격하고, 정경 73권(신약 27권, 구약 46권)을 재확인했다. 사도 전승도 성경과 똑같은 애정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공경할 것을 선포했다. 이어 원죄에 관해 아담의 범죄가 후손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과 세례로 원죄가 사함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주장과 세례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단죄했다. 그리고 은총으로 의롭게 된 이들이 의로움에 더욱 증진하려면 선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루터의 ‘믿음만으로’의롭게 된다고 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었다. ◇제2기(1551-1552)에는 성체성사(성찬)에서 ‘실체변화’ 교리를 확정하고,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에 대해 발표했다. 제3기(1562-1563)에서는 미사 곧 성체성사에서 성만찬 의미만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측의 주장을 일축하고 미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성사임을 분명히 했다. 또 사제 서품과 혼인도 성례임을 확정했다. 그리고 수도자의 사유재산, 족벌주의, 교회 직무 겸직, 사회복지 활동 등을 금지하고, 대사(大赦)에 따른 금전 거래 행위를 완전히 폐지했다. 이로써 로마교회는 루터 이전의 교회와는 다른 교회로 변모하여 세계선교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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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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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으로 줄어들지 않는 양식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32-61). 이 하늘로서 내려온 이 생명의 떡은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다. 그래서 인류사의 ‘복음’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이다.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에덴에서는 이 먹는 문제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인간은 이 떡으로 인해 전쟁과 파괴를 일삼으며 타락해 간다. 그러나 또 다른 떡이 있다. 이 떡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도 이 떡 문제로 인해 마귀에게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떡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겼다.◇사람들은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빈들에서 5천명을 먹이신 표적을 보고도, 그 표적이 의미하는 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떡을 더 얻어 먹고 배부르기 위해 예수님을 쫓았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배부른 떡은 일곱 시간이 지나면 다 똥이 되어 뒤로 나가버리고 마는 썩을 양식이다. 그래서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아니하는 양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마치 자신도 이 떡을 줄 수 있는 양 하나님의 아들을 흉내내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생의 자랑과 기복신앙으로는 이 ‘생명의 양식’을 줄 수는 없다. 이 양식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다. ◇모세나 엘리야도 아니고, 율법도 예언도 아니다. 오로지 말씀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세상의 물질적 떡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경대로 한다며 율법주의자가 되어 모세의 제자가 되거나, 예언을 찾는 기복주의자가 되지 말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기복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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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으로 줄어들지 않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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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기독교의 교주인가
-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교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12사도를 선택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시고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것이 ‘교회’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예수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은 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불러모아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약속을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이다. 이 교회는 천국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예배하는 공동체이다.◇그런데 교회는 세상에 나타난 이후 얼마 안가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그리스도교(기독교)가 생겨나 세상의 여타 종교집단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도 세상의 여러 성현들처럼 한 종교의 교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러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 4:12)고 한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예수 외에는 세상의 어떤 성현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은 그 길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 ‘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종교의 여러 교주들과 다르다는 것은, 그들은 모두 세상에 시체를 남겼으나, 예수는 시체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예수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집단의 교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다. 그래서 그는 인류의 ‘메시야’이고, ‘그리스도’이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안다”(요 4:25)고 하던 바로 그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고 그 신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 메시야가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며, 그가 또 만물을 창조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무리이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이요(딤전 3:15), 그리스도의 몸이며(엡 1:23), 성령의 전이다(고전 3:16).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한 피로 값주고 사신 백성들의 총수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선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따라서 예수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그 이름에 무릎을 꿇어여 할 주(主)이시지(빌 2:10), 한 종교의 교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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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기독교의 교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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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종교
- ◇성경은 ‘도’(道)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도(道)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삼하 22:31).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잠 8:32). ‘주의 도’(렘 32:23), ‘의의 도’(마 21:32), ‘생명의 도’(행 7:38), ‘십자가의 도’(고전 1:18), ‘진리의 도’(벧후 2:2) 등등. 하나님이 세우시는 ‘동방의 한나라’를 역설한 나운몽은 석가도, 공자도, 노자도, 장자도 동방의 선지자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참 도(道)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내하는 성현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현들은 다 사람들에게 그 길(그리스도)을 가르쳐주는 안내자였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나는 길(道)을 가르쳐주는 선자자라고 했고,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듣기만 해도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다. 그런데 이들 성현들은 다 나는 그 길을 가르치는 안내자라고 했을 뿐, 내가 곧 길이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오직 예수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했다.◇이것은 예수가 곧 만물의 창조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그를 ‘말씀’이라고 부른다. 말씀이 곧 모든 성인들이 가르쳐주던 도(道)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라고 한다. ◇도(道)는 곧 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길은 사람이 마땅히 따르고 행해야 하는 말씀의 진리(眞理)이다. 옛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했다. 사람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우준하게 되어 그들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길을 가지 않았다.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하여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렘 18:15,1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기독교의 구원은 고행(苦行)이나 도(道)를 닦아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고 ‘도(道)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으로 완전한데 나아가는’(히 6:1,2)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성인들이 이룬 종교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성령이 내주(內主)함으로 그 어떤 세상의 종교인들보다 높은 수준의 영적 혜안(慧眼)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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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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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가, 개신교인가
-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얼떨결에 성령체험을 하고 모두가 예수의 증인으로 나섰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다락방의 성령체험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다만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도’(道; σδο′V)라고만 불렀다(행 11:19).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道)에 복종하니라”(행 6:7). 이후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는 칭호를 얻고(행 11:26) 그리스도교(Christianity)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 후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지닌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로 전승되어 왔다. 이 ‘거룩한 가톨릭교회’는 1054년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교회’와 ‘희랍 정교회’로 나누인다.◇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를 개혁한 종교개혁 시대에는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각기 루터란, 쯔빙글리안, 칼빈니안 등으로 불리다가, 개혁파 선교사들이 동아시아권으로 들어오면서 자기들 스스로를 ‘예수교’(耶蘇敎)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기독교’(基督敎)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되었는데, 기독교는 중국에서 ‘그리스도교’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어에서 그리스도를 ‘기리사독’(基利斯督)으로 번역한 데서 나왔다. 기리사독을 줄여 ‘기독’(基督)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교파들이 교단 명칭에 ‘기독교’니, ‘예수교’니 하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진 ‘개신교’(改新敎)란 말은 없었다. 개신교는 해방 후에 생긴 이름이다.◇그러면 해방 후에 개신교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한국의 예수교측에서는 가톨릭교회를 ‘로마교’(羅馬敎)라고 부르고, 정부는 기독교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분하는 용어로 ‘구교’(舊敎)와 ‘신교’(新敎)로 불렀다. 그러자 가톨릭교회는 마치 자신들이 ‘구교’로 취급되어 구식인 것 같고, 신교는 새로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정통 기독교인데 마치 자신들에게서 떨어져(분열) 나간 ‘열교’(裂敎)가 정통인양 기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천주교측이 장면(張勉)이 총리가 되자 정부에서 사용하던 구교와 신교라는 용어를 없애고, 천주교와 개신교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런데 지금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을 ‘천주교’라고 하지 ‘기독교’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는 중국어 번역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 부를 것인가를 놓고 ‘상제’(上帝)냐, ‘천주’(天主)냐 하는 논쟁 끝에, 교황청이 라틴어 ‘Deus’(하나님)를 ‘천주’로 번역하는 것을 채택한데서 나온 칭호이다. 그런데 개신교라는 말은 ‘믿는 바를 새롭게 고쳤다’는 뜻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왜 개신교 신자여야 하나? 그리고 구태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개신교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러다보면 한국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만 있을 뿐 기독교가 사라질 날도 오지 않을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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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가, 개신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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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황제를 낳은 여인
- ◇몽골의 역사에서 징기스 칸으로 불린 테무친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에 의해 독살되자, 기독교 부족인 케레이트의 족장 토그릴 칸에게 몸을 의탁해 살았다. 테무친은 토그릴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토그릴은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토그릴 칸에게는 자아 감부라는 동생이 있었다. 징기스 칸은 토그릴이 죽은 후 자아 감부의 세 딸을 모두 자신의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다. 맏딸 이바카 베키는 자신의 아내로 삼고, 그 동생 베추미시 베키는 큰 아들 주치에게 주어 맏며느리로 삼았으며, 또 다른 동생 소르각타니 베키는 막내 아들 톨루이와 결혼시켰다. 자아 감부의 이 세 딸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징기스 칸은 셋째 아들 오고타이도 메르키트 부족의 기독교인 토레케네와 결혼시켜 며느리로 삼았다. 토레케네가 낳은 아들 구유크는 제3대 대칸이 되었다.◇그녀들 가운데 소르각타니 베키는 기독교 신앙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머무는 곳 어디에나 예배당을 세우고,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전속 사제가 곁에 있어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했다. 소르각타니 베키는 톨루이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낳았다. 징기스 칸의 손자인 뭉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가 그들이다. 큰 아들 뭉케는 제3대 구유크 대칸을 이어 몽골제국의 제4대 대칸(황제)이 되었고, 둘째 아들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 되고, 중국을 통일하고 원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셋째 훌레구는 이란에 몽골제국인 일칸국을 세우고 대칸(황제)이 되었으며, 넷째 아릭 부케는 큰형 뭉케가 죽자 한때 자신이 제5대 대칸으로 등극했다가 쿠빌라이의 공격으로 대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소르각타니 베키의 네 아들은 모두 ‘황제’가 되었다.◇인류역사에서 네 명의 아들을 황제로 둔 여인은 소르각타니 베키 외에는 없다. 이 위대한 여인은 비록 자신의 부족은 망해 몽골족에 편입되고 말았지만, 그 신앙은 확고하여 12세기 몽골과 중국 그리고 중앙아시아 전역에 기독교신앙을 전파하고, 기독교를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독교 신앙은 대를 이어 전해지지는 못했다. 그녀의 아들 쿠빌라이나 훌레구는 어머니를 존경하며 정성을 다해 모셨고, 기독교 신앙에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 태어난 손녀 중 하나인 제국대장공주는 고려 왕조 충렬왕의 부인이 되었으나 그녀의 신앙은 할머니의 신앙과 달리 불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 않았으면 기독교가 이미 고려 시대에 한반도에 널리 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왕에게는 뭉케, 쿠빌라이, 훌레구, 그리고 아릭 부케라는 네 아들이 있었으며, 아들들을 잘 훈육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의 교육 능력에 놀라워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처럼 신실하고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녀를 찬송하는 시는 이렇게 노래한다. ‘여왕의 부족 중에 그녀와 같은 다른 여인을 보게 되더라도, 그 부족은 어떤 남자의 부족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하리라.’”(Samuel Hugh Moff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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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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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황제를 낳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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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근본주의와 광신
- ◇종교적 근본주의는 처음 선포된 진리를 보수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전통적 교리를 고수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종교전통에는 근본주의 운동이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Christian fundamentalism)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 주창한 기독교의 한 신학사조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주요 교리는 기독교의 전통교리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나사렛 ‘예수의 신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에서도 강조되는 내용이지만, 근본주의는 이 다섯 가지 교리를 가장 중요시 한다는 점이 다르다.◇신학이나 종교에서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이 근본주의는 흔히 오늘날 세계를 피로 물들이는 이슬람 테러분자들처럼 자칫 종교적 광신(狂信)을 불러와 그 종교의 근본을 오히려 해치는 결과를 오기도 한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상대로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대체로 그 종교를 보수(保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 관계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인해 세계는 지금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이슬람이 전쟁과 파괴를 일삼는 종교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정치적 테러뿐만 아니라, 타종교에 대한 박해도 서슴치 않는다. 마치 중세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와 같이 이슬람 외에는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당연히 인권도 없다.◇우리나라는 대표적 다종교 사회이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비슷한 신도수를 가지고 있고, 유교는 종교로서는 그 기능을 다했지만 전통문화로서 아직도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간 갈등이나 충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일탈적 행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려할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종교계도 어떤 종파이든, 종교적 근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경전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광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도 코란에 대한 이슬람 신학의 재해석 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일부 경전의 구절이 무차별 테러에 악용되고 있는 광신적 행위이다.◇건강한 종교행위와 병적인 종교행위는 곧 ‘신앙과 광신’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 종교인이 광신에 빠지면 그 종교가 추구하고자 하는 근본이념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영적 세속적 유익을 위해 종교가 악용된다. 우리가 종교적 열광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종교문제는 사교(詐敎)의 문제가 아니라 광신(狂信)의 문제이다. 광신은 같은 교리라 할지라도 어떤 태도로 믿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신행(信行)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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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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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근본주의와 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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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
- ◇한 무리의 등산객이 산 계곡을 오르다가 쉼터에서 숨을 돌린다. 그들의 대화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요즘 한국의 종교계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졌다. 한 남성이 대뜸 "하늘 파는 놈들 치고 사기꾼 아닌 놈이 없다. 공자도, 석가도, 예수도, 모하멧도 ... 사기꾼이다"라고 호기있게 소리쳤다. 그가 그들 인류의 스승들에게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도 대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무지한 대화에 괜히 끼어들어 봐야 논쟁만 깊어질 것 같아서이다. 오늘날 인류사회의 지배종교와 사회철학은 주전 7세기경부터 주후 1세기경까지 약 1천 여년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이 시대를 인류사의 차축(車軸)시대라고 부른다. 그 시대 사상가들에 의해 인류사가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다.◇이사야, 엘리야, 엘리사 같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활동했으며, 주전 6세기경엔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했고, 페르시아에서는 짜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교를 설파하고,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가 탄생했으며, 중국에서는 공자가 유교를 집대성했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사회를 이어 예수가 탄생하고 기독교가 나타났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자들과 맹자, 노자, 장자, 묵자 등 중국의 철학자들도 모두 이 시기 사람들이다. 힌두교의 ‘베다’, 불교의 ‘불경’,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 유대교의 ‘구약성경’과 ‘탈무드’, 유교의 ‘사서삼경’,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모두 이 시기에 나타난 사상들이다.◇이들의 사상이 나타나기 이전의 인류사회는 샤마니즘 사회였다. 윤리적 신관이 없는 사회였으므로 당연히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권개념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말하는 이런 고전 종교 사상들이 일어남으로써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신(神)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인류사회는 사회적 규범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히 그 종교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이런 종교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문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암흑시대에 살고 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그들 인류의 스승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 인류의 스승들을 무식한 세 치 혀로 싸잡아 사기꾼으로 몰려가니 그 일단의 책임이 그들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있는 듯하다.◇‘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무지하여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니 그냥 지껄이면 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시 14:1).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에게 말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어다”(욥 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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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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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